인간이란 무엇인가 - 칸트 3대 비판서 특강 인간 3부작 1
백종현 지음 / 아카넷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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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계와 당위의 세계는 나누어져 있다. 존재의 세계는 "~이다/~하다"와 같은 단정적인 평서문의 서술 형식을 가진다. 한편 당위의 세계는 "~하라"와 같은 명령문의 형식을 가진다. 아마도 전자의 세계를 다룬 비판서가 순수이성비판이라면 후자의 세계를 다룬 비판서가 실천이성비판이 아닐까 한다. 물론 나는 두 저작을 읽어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나는 평서문과 명령문 사이에 있는 다른 형식들의 말들에 주목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존재'의 세계와 '당위'의 세계가 무 자르듯이 깔끔히 나뉘는 세계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양자가 이것 아니면 저것에 해당하는 관계가 아니라 그 중간에 여러 밝기의 색깔이 존재하는 양 극이라고 생각한다.

무어라는 철학자가 말했다고 하는 자연주의의 오류는 진화심리학과 같은 서적들에서 보면 서문에 단골 메뉴로 등장하여 자신의 주장은 사실에서 당위를 이끌어내는 데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지시킨 이후에 시작한다. 이러한 주의를 주는 이유는 그러한 서적들이 충분히 주지한 혐의를 받기 쉬운 내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바가 당연하기 때문에 자신 또한 그렇게 살아야 마땅하다는 태도를 그들은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100%는 아니겠지만 어느정도는 그들의 비판 세력들에 대한 눈치보기이다. 사람들은 존재와 당위 사이의 어느 정도의 중간 지점에 자리를 잡은 채 자신의 인생철학을 확립해 살아간다.

몇 가지 문장을 제시해 보겠다. 그리고 각각의 문장의 함의가 무엇인지 간략한 아이디어를 제시해보겠다.
1. "선善은 행해야 하는 것이다."
2. "선을 행하는 것이 좋다."
3. "선을 행해야만 한다."
4. "선을 행하라."

1번의 진술은 어떤 성질의 진술인가? 그것은 존재의 세계를 말하는가 당위의 세계를 말하는가? 형식상으로는 "~이다"로 끝났으므로 존재의 세계에 속한 진술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 진술은 화자 자신의 철학을 담고 있다. 그렇지만 화자와 청자와의 관계는 긴밀하게 맺어져 있지 않다. 화자는 자신의 철학, 자신의 인생 경험에서 비롯되어 머리 속에서 정리된 어떤 철학을 사실로서 전달하고 있을 뿐이다. 이 말은 화자는 어떤 방식으로 살았고 따라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선'이란' 것은 행해야 하는 것이다."와 같이 '이란'이란 말이 붙으면 '선'이라는 개념을 더욱 메타적으로 바라보고 사유한 결과가 그러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런 표현은 순수지식에 더욱 가까워진다.

2번의 진술을 보자. "선을 행하는 것이 좋다."라는 문장에서 '선을 행한다는 것을 살짝 다른 문구로 바꿔 보자.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미국 유학을 가는 것이 좋다." 이런 말은 익숙하고 많이 들어보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 말로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 말에는 "한국 대학 교수가 되려면" 이라는 말이 붙는 것이 자연스럽다. 칸트는 가언명령과 정언명령을 구분했는데, 이러한 문장은 가언명령에 가깝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사실 가언명령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욕망'에 대한 길을 알려주는 '권유'가 있을 뿐이다.

여기서 '좋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 아주 가치없지는 않다. '좋다'라는 표현은 내가 앞서 '권유'라고 말했지만 다른 경우에는 '허가'이기도 하다. "~하는게 좋다."일 때에는 권유이고 "~해도 좋아."라고 표현할 때는 허가이다. 그런데 권유이든 허가이든 두 경우 다 청자가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것을 간절히 하고 싶은 경우 그에 대한 반응으로 "좋다"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때의 좋다는 좋을 호好의 좋다일까 좋을 선善의 좋다일까? 이 구분도 명확하게 나눈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각각의 상황에 따라서 그 표현은 양자 사이의 어딘가에 놓일 뿐이다. 그리고 꼭 양자가 아닐 수도 있다. '좋다'라는 표현은 satisfy나 like의 의미와 겹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이 때 화자와 청자의 관계는 1번의 경우처럼 데면데면한 관계는 아니고 어느 정도 친하고 얼굴을 알고 있으며 그렇지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책임질 수 없을 때 하는 말이다.

지금부터 간략히 아이디어만 서술하겠다.

3번의 진술을 보자. "~해야 한다."는 표현은 당위를 나타낸 표현이다. 이 때 이 말을 듣는 청자는 그 시점에서 어떤 욕망에 부풀어 있지 않다.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어떤 것이 있고 그것을 해야 하는 이유는 이미 설정된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이 말은 화자와 청자가 어느정도 밀접한 관계에서 하는데 관계가 어느정도 깊이 진행된 사람들 사이에서 아니면 기업 총수가 직원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금메달 따려면) 연습을 해야 한다." 혹은 "(프로젝트를 실행하려면) 여섯시에 출근해야 한다." 등.

4번은 정언명령으로 존재한다. 이런 명령을 하고 듣는 자들은 아주 가까운 관계이다. SM플레이를 할 때 돔과 섭은 사랑으로 맺어져 있고 돔은 섭에게 조건을 달지 않고 바로 명령을 한다. "뭐 해!"

따라서 칸트는 평상시 사람들에게는 친절한 아저씨였겠지만 철학 텍스트 상에서는 엄청난 새디스트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전 인류를 상대로 이러한 명령을 했기 때문이다.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섭은 돔의 명령을 따르거나 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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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 대명제국 중국의 역사
데라다 다카노부 지음, 서인범 옮김 / 혜안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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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샤에서 발행한 중국의 역사 시리즈 중 명조 부분만 번역하여 내놓은 책이다. 이 책 외에도 혜안에서는 중국의 역사 시리즈를 번역해서 출판하고 있다. 중국사라고 하면 진순신의 이야기 중국사,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동양문화사 등등의 책들이 집에 있다.


내가 명나라에 대해 알고 있던 지식이라고는 주원장이 창업하였고 북로남왜를 걱정하여야 했으며 마테오 리치가 선교활동을 하였고 임진왜란 때 출병하여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하고는 성장하는 여진족을 견제하지 못하여 멸망하게된 왕조라는 정도였다. 명나라 창업을 배경으로 하는 무협지인 의천도룡기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도 난다. 중학교 사회 시간에는 이갑제, 일조편법, 양명학 등등의 단어들도 외워야 했던 기억이 난다.


명나라 역사를 황제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태조 홍무제 - 원말은 궁정의 내분과 정치 부패에서 기인한 사회불안, 계속된 천재, 화폐의 남발로 인한 인플레이션 등으로 반란이 들끓었다. 백련교도의 난으로부터 시작된 홍건적 세력이 있었다. 이들 세력 중 하나인 주원장이 원조를 북방으로 몰아내고 다른 반란군 세력을 제압하여 명조를 창업하였다. 주원장의 반란군은 초기에는 농민반란군이었으나 갈수록 지주계급적 성격을 띠었다. 원명교체를 역성혁명이라고 바라보았다. 제국을 이룬 후 피폐해진 농촌을 부흥시키려 노력했다. 개간을 장려하고 지주를 탄압했다. 토지측량을 하고 인구조사를 하였다. 이갑제를 바탕으로 세금을 걷었다. 호유용의 옥, 남옥의 옥으로 건국공신들을 숙청하고 독재 권력을 강화했다. 


건문제 - 홍무제의 황태손으로 홍무제가 죽자 즉위하였으나 숙부였던 연왕 영락제에게 제위를 빼앗기고 자살한다. 조카와 숙부 사위의 전쟁을 정난의 변이라 한다.


성조 영락제 - 제위를 찬탈하고 황제가 되었지만 강남지방과 수도인 남경의 여론이 혹독하여, 원래 자신의 근거지였던 북경으로 천도한다. 이로써 경제와 정치의 중심지가 서로 분리되고, 물자의 보급을 위해 대운하를 정비한다. 다섯차례에 걸친 대몽고 출정을 감행한다. 이를 막북친정이라 한다. 정화의 남해 원정을 지시한다. 나침반과 항해도를 사용하는 진보된 항해술을 사용했다. 정화의 노력으로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국제무역이 빠른 속도로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에 화교의 진출이 활발해지게 되었다. 30여 국에 달하는 조공국을 거느렸다. 환관을 중용했다.


인종 홍희제 - 제위 8개월 만에 사망.


선종 선덕제 - 태평의 천자. 제 2의 정난의 변을 토벌한다. 명 제국은 창업의 시대를 넘어 수성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고 몽골방위선을 후퇴시키는 등 성조의 적극적인 대외정책은 자취를 감추었다. 정치체제를 중심으로 통상적인 한민족국가로의 변환이 시작되었다.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히 여기는 중국 전통 왕조의 본래 체제로 복귀하면서 문관 재상제를 부활시켰다. 


영종 정통제, 천순제 - 명군은 몽골기병의 공격을 받고 각지에서 패배를 계속했는데 정통제는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50만 대군을 이끌고 황제 친히 진군하였다가 토목보에서 몽골기병의 급습을 받아 전멸당하고 포로로 잡힌다. 황제가 포로로 잡히자 명에서는 경태제가 즉위하였는데, 영종이 석방되면서 그의 복벽을 꾀하는 세력과 함께 쿠테타를 일으켜 다시 제위를 차지한다. 도시에서는 화폐로 은이 널리 사용되었고, 생산의 향상에 따른 쌀값 하락으로 인해 현물로 녹을 받던 관리들이 봉급을 은으로 받기를 원하게 된다. 항조투쟁인 등무칠의 난이 일어난다. 


헌종 성화제 - 세금의 은납화로 인한 화폐경제가 농촌으로 침투하고 농민들은 이를 감당하기 위해 부업적 가내공업으로 상품작물을 생산하게 된다. 영종 말년, 헌종 효종 시대에 걸쳐 무거운 세금을 감당하지 못한 농민들은 수많은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대몽고 정책이 축소되어 100년에 걸쳐 만리장성 수축이 시작된다. 대외적으로는 평화로운 시기였다.


효종 홍치제 - 중흥의 영주. 각료를 일신하고 관료들과 협의하는 정치를 부활시켰다. 행정법규를 집대성하여 대명회전을 펴냈다.


무종 정덕제 - 정치는 하지 않고 문란하게 놀기만 했다. 반란이 일어났으나 왕양명이 평정한다. 무종 때에는 유근이라는 환관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왕양명은 그에 반대하다 귀주 용장으로 좌천되었다. 그곳에서 돈오각성하여 심즉리설을 만들었다. 유근이 실각하자 복귀하여 출세의 길을 걸었다. 그의 학설은 치양지설로 발전하였다.

세종 가정제 - 북로남왜가 기승을 부렸다.

목종 융경제 - 토지의 집중화가 진행되고 대지주가 출현하여 농민들은 소작인이 되어 심한 수탈을 받았다.

신종 만력제 - 재상 장거정이 내외의 현안을 처리하였다. 토지조사를 실시하여 일조편법을 실시하였다. 일조편법이란 부역의 할당과 징수를 한 조목으로 만들어 부역제도의 간소화 능률화를 목적으로 삼은 것이다. 이갑제는 폐기되었다. 만력 삼대정벌이 있었다. 보바이의 반란, 조선출병, 양응룡의 난이 그것이다. 쇠약해져 가고 있던 명의 국력이 한층 더 소모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명조 재정이 파국에 치달았다. 마테오 리치가 상륙하여 서양문물을 소개했다. 

광종 태창제 - 재위한지 1개월만에 붉은 환약을 먹고 사망.

희종 천계제 - 동림당과 반동림파의 싸움이 심했다.

의종 숭정제 - 도시와 농촌에서 반세 반조 반권력의 실력투쟁이 계속 일어났다. 제국의 말기적 증상이었다. 동시에 요동에서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명나라를 압박했다. 동시에 국내 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반란군 중 가장 유력한 자가 이자성이었다. 이자성은 북경에 입성하였고 명 왕조는 멸망했다. 그리고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가 청나라에 붙어 이자성을 치고, 청군이 북경에 입성하여 대청제국을 세웠다.


농민반란, 화폐경제의 활성화, 상품작물의 재배, 조공국과의 교류, 서양과의 무역, 서양문물, 양명학 등 수많은 사건들이 각종 정치적 사건들과 함께 어울려 생겼다. 한 왕조의 역사는 왕위계승문제, 대외관계와 전쟁, 세금걷는 문제, 그 속에서 자라나는 일반 서민들의 문화 등등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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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탄생 - 문자라는 기적
노마 히데키 지음, 김진아.김기연.박수진 옮김 / 돌베개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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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한자가 구축해놓은 시스템에서 벗어나 정음이 탄생하였다. 그것은 음이 문자로 되는 과정이었다. 새로 만들어진 문자는 문장과 텍스트로 비약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것은 정음 에크리튀르의 창출이었다. 정음 에크리튀르는 근대 한국에서 화려하게 꽃피었다.

지식인들의 모든 <지知=앎>이 한자한문에 의해 형성되던 시대, 세종을 비롯한 일군의 학자들은 정음을 만들었다. 한자의 형음의 시스템과 결별하고 자음문자로드의 끝에서 모음까지 문자로 형상화하였다. 음을 구분해 단위를 만들고, 각 단위에 형태를 부여하는 단음문자로 하였다. 자음과 모음을 추출해 자음자모뿐만 아니라 모음자모에도 형태를 부여했다. 음절문자 시스템을 창출하였고 성조까지 고려하여 문자를 만들었다. 이들은 20세기에 도달한 언어학의 수준에 버금가는 이해에 바탕해서 문자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문자 창제에 반대하는 세력도 있었다. 최만리를 비롯한 일군의 지식인들은 한자한문 원리주의에 입각하여 정음 창제에 반대하였다. 한자한문만이 참된 문자요, 다른 문자들을 만드는 것은 오랑캐의 습속이라는 것이다. 정음이 행해진다면 한자한문 에크리튀르가 붕괴되어 나중에는 한문을 익히려는 자가 없어질 거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실제로 현대에는 거의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한글 에크리튀르가 압도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정음은 창제된 이후 문장, 텍스트로 비약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훈민정음 언해본에서 드러나듯이 한문으로 된 문장을 조선어로 번역하는 ‘언해’ 형태의 정음 에크리튀르가 탄생했다. 용비어천가의 경우에는 언해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조선어를 전면에 내세우는 정음 에크리튀르가 탄생했다. 한문을 번역하는 형식이 아니라, 조선어가 주가 되고 그것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정음은 탄생했다. 정음 에크리튀르는 드디어 커다란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말이 쓰여지는 모든 국면에 정음이 사용되고, 문자는 에크리튀르로 비약하여, 정음에 의한 <지知=앎>이 창출되고 축적되어 갔다.” 동국정운,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 각종 불경 언해, 사서오경 언해, 언해상감행실도 등등이 발간되었다. 퇴계와 율곡은 정음 에크리튀르로 성리학을 논했다. 천자문의 훈과 음을 기록하는데 사용되기도 했고, 두시언해와 시조로 우리 가락을 노래했다. 그밖에도 홍길동전, 구운몽, 춘향전과 같은 문예작품들이 정음 에크리튀르로서 생명을 얻었다.

정음 에크리튀르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의 근대 한국에서 화려하게 꽃피었다. 사전이 있고, 문법서가 있고, 신문이 있고, 잡지가 있고, 교과서가 있었다. 사상이 있고, 소설이 있고, 시가 있었다. 정음 에크리튀르를 가로막는 것은 이제 한국어 안에는 없었다. 정음 에크리튀르는 일본어와 투쟁해야 했다. 그 시대 정음은 주시경에 의해 한글이라고 명칭을 바꾸었고, 오늘날에는 한글을 정음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후 한반도는 분단되었다. 현재 남북 양측의 단일 사전을 만들고자 하는 작업이 추진되고 있다. 컴퓨터 시대에 들어서면서 한글과 컴퓨터와 인터넷의 친화성은 더욱 풍요로운 가능성을 과시하게 되었다. “한글이라는 문자 시스템이 가진 가능성을 살릴 수 있을지 어떨지는, 물론 문자가 아닌 사람이 담당해야 할 문제이다. 그 사람이란 것은 물론 역사의 자손이다.”

정음 에크리튀르의 탄생과 확장은 한편의 드라마이다. 정음이 한자의 자장磁場 안에서 탄생할 때의 진통에서부터 정음 에크리튀르가 각종 문헌으로 출판되기까지, 그것이 보여준 한자와의 호환성 하에서 근대 들어서 지배적인 에크리튀르로 자리매김할때까지. 거기에는 <지知=앎>를 둘러싼 거대한 물음이 가로놓여 있다. 정음 에크리튀르의 확장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다른 지배적인 언어들과 비교해볼 때 정음 에크리튀르가 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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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
미야지마 히로시 지음 / 강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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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는 조선 전통 사회를 형성하고 이끌어나갔던 양반 계층에 대해서 분석한다. 양반은 법제적인 절차를 통해서 제정된 계층이 아니라 사회관습을 통해서 형성된 계층이었다. 양반계층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그들은 족보를 만들어 세를 과시하거나 향안을 만들어 지방의 지배권을 굳혔고, 그들의 지위는 노비와 토지 소유로 그 유지되었다. 17세기 중반 이후 진행된 양반계층의 경제력 하락으로 인해 보수화와 동족 결합의 강화가 진척되었다. 그리고 향리계층을 시작으로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양반을 지향하는 사회가 성립하게 된다.

양반은 생득적인 신분이 아니었고 법제적으로 정해진 계층이 아니었다. 양반은 사회 관습을 통해 형성된 상대적 주관적인 계층이었다. 양반이 되기 위해서는 한번은 과거 합격을 해서 중앙정부의 높은 위치에 올라가는 것이 필요했고, 세거지를 마련하여 동족집단을 이루어야 했으며, 양반의 생활관습을 잘 지키고, 같은 양반집단 내에서 결혼상대를 구해야 했다. 양반의 출신 모체는 고려시대의 토착 이족 세력이었고, 그들은 이족->중앙 관료->세거지 정착이라는 코스를 밟아 양반이 되었다.

양반 계층이 되기 위해서는 중앙 관계에 진출한 조상으로부터의 계보 관계가 확실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 양반 지향 세력들은 자신들의 족보를 만들었고 그것으로 자신들의 세를 과시했다. 또한 양반들은 농촌 지방에 눌러 살면서 각 지방마다 작성된 양반들의 명부인 향안을 민들었다. 향안에 등록된 양반들은 향소라는 조직을 만들어 수령을 보좌해서 지방 향리를 감독 지휘할 권한을 가졌다. 그들은 자신의 출신 모체이기도 한 향리와의 구분을 뚜렷하게 하였고 그들에 대해서 확고한 우위를 다졌다. 또한 그들은 향약을 만들어서 지방의 풍속과 질서를 안정시키며 지배 체계를 확고히 하였다.

양반 계층의 경제력은 그들의 상속 문서인 분재기를 통해 잘 드러난다. 양반은 많은 수의 노비와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그들의 재산은 자식에게 상속되었다. 17세기까지 농업의 발전과 개간의 활성화에 힘입어 양반들의 세력은 점차 강화되었고 재산도 불어났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양반의 경제력은 정지하고 하락하기 시작한다. 이로부터 상속제도에 변화가 초래된다. 남녀 균분 상속에서 남자 균분 상속으로, 남자 균분 상속에서 장남 우대 상속으로 변화해간다. 이에 따라 친족 제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남계의 혈연집단에 의해 구성된 동족 집단의 결합 강화가 그것이다.

18세기 이후 양반층의 지방 사회에 대한 지배력이 차츰 저하되면서 향리와 같은 중간 계층으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양반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조선 사회 전체를 휩쓸었다. 하위 계층에서 양반 계층으로 상승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향리계층 사이에서는 그들끼리 족보를 만들었고 향손 유업자가 증가했다. 양반의 지배 체제에 반대해서 그들의 지배권을 뒤집어 엎으려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양반으로 편입되고 싶어했던 것이다.

양반은 주관적으로 형성된 계층이었다. 그들은 노비와 농토를 소유했고, 농촌에 세거지를 마련하여 살았다. 과거 합격자로부터 계보가 확실한 족보를 만들어 다른 부류의 사람들과 차별화를 꾀했고, 그들끼리 향안을 만들어 계층으로서 조직화를 꾀했다. 양반 계층의 경제력 하락으로 인해 그들의 보수화가 촉진되었고, 남계 혈연집단에 의해 구성된 동족 집단의 결합 강화가 나타났다. 한편 조선 민중은 너나할 것 없이 양반 계층으로 편입하고 싶어했고, 그로인해 양반 지향 사회가 성립하게 되었다. 우리가 전통적인 생활양식이라 부르는 것은 과거 몇 세기 동안 양반 계층에 의해 형성되었고 사회 전체에 보급되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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