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다. 난 눈에 불을 켠 채 야근 중이고, 무려 몰래 컴이란 걸 하는 중이다. 선배님은 저쪽에서 열심히. 역시 몰래컴 하시면서 가끔씩 나를 확인한다. 한 눈을 팔아도 두 명이 팔아야 한다. 그래야 면죄부를 얻는다. 선배님이 날 보며 웃는다. 나도 웃는다. 걱정하지 마세요. 라는 얼굴로.

보통 한 근무에 두 명이 근무를 한다. 그 중 윗 사람은 서류작업을 아래사람 몸으로 움직이는 일은 하는데 난 직장 들어온 지 올해로 십년째인 나름 중견급이다. 하지만 십년 일하는 동안 내 밑으로 남은 후배가 무려 세.명! 그것도 셋 다 다른 곳에서 근무한다. 다시 말해 난 십년 전에도 막내였고, 지금도 역시 막내인 아주 아주 불행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상황이다. 그러다 신이 도우셨는지 한달 전 근무지가 바뀐 후배 한명이 지금의 내가 일하는 곳으로 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이상하다. 분명히 후배가 왔는데 일은 줄지가 않는다. 새로운 사람이 왔음에도 여전히 힘쓰는 일엔 내 이름이 불리고, 귀찮은 일은 항상 내 이름이 먼저 나온다. 거기에 감히 후배님에게 이거해라, 저거해라 시키지도 못하는 소심 선배여서 이 녀석이 이쯤이면 자기가 해보겠다는 말이 나와야 하는데, 도와드릴까요? 라는 말이 나와야 하는데. 라는 희망사항만 간직할 뿐이다. 정말 간직만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참다 못한 내가 어렵사리 희망사항을 입에 담는다 하더라도 그 전에 주먹이 먼저 나갈 것 같다. 이 눈치 없는 것아!!!!!!


굴욕 1. 

출근과 동시에 내내 서 있어서인지 종아리는 터질 것 같다. 덥기는 또 얼마나 더운지. 밖은 눈이 펑펑 쏟아지는 추운. 그것도 아~주 추운 날씨임에도 난 덧 가운을 벗어버리고 반팔 유니폼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젋네요~ 주치의가 말을 걸었다. 난 여전히 서 있는 상태로 쌓여진 챠트에 한숨을 내쉬는 중이었는데 머리는 멍하고, 팔을 저리고, 어깨는 뻐근해서 카페인과 함께 잠깐의 수다가 그리운 참이였다. 젊지. 아직은. 그냥 그렇다고 해둬. 내가 대답하자 주치의가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는다. 이 주치의는 나보다 무려 6살이 어리다. 게다가 여자인데 키는 나보다 딱 15센티가 더 작다. 난 나보다 6살이나 어리고, 15센티나 여자에게 머리를 맡겨두고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이상하게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 어린 사람 취급 받는 것이 기분 나쁘지가 않다. 정면에 앉아 있던 다른 주치의가 그 모습에 웃는다. 그런건 남자에게 받아야죠. 그랬으면 더 좋았겠지 하지만 이것도 나름 괜찮아. 아쉬운 감이 있긴하지만. 한바탕 웃음이 터지고 주제가 각자의 이상형으로 넘어갔다. 

내가 말했다. 키 큰 남자. 또요? 여자 주치의 말에 키가 커야 해. 그리구요~ 이번에는 남자 주치의다. 역시나 키가 커야해. 키 큰게 좋긴 하죠. 여자 주치의가 웃는다. 저도 키가 큰 게 좋아요. 나보다 딱 15센티가 작은 여자 주치의를 야무지게 훝어봐 주고 남자 주치의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게임 좋아하니 게임 좋아하는 여자가 좋겠네? 보통 그렇다던데. 남자 주치의가 웃었다. 이왕이면 게임 좋아하는 여자가 좋겠죠. 눈을 빛내며 손을 잡았다. 나보다 다섯살이 어려서 다섯살만큼 어린 손이었다. 알고 있지? 나 게임 엄청 좋아해. 남자 주치의는 손을 치우지 않았다. 웃음도 그대로였다. 선생님. 응? 손을 꽉 쥐었다. 나보다 다섯살이 어린 그 손을.  전 게임하는 예쁜 여자가 좋아요.

분명히 장난으로 한 대화인데 기분이 왜 이러냐.


굴욕 2.   

혈압을 재는데 환자 분이 묻는다. 오늘은 혈압 담당이요? 혈압을 재는 일은 몸을 움직이는 일이고, 몸을 움직이는 일은 두 명의 근무자 중 더 어린 사람이 한다. 십년째지만 같이 일하는 후배는 달랑 하나인 난 늘 어린 사람의 입장이었고, 이날도 역시 어린 사람 이었다.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쫄짜라서 그래요. 그러자 그분이 말한다. 쫄짜라고? 네. 참내 쫄짜가 분명히 아닌데 왜 쫄짜라고 그래. 엥???? 표정 관리가 안된다. 분명히 아닌 건 맞다. 뒤에서 두번째니까. 그래도 정확하게 쫄짜는 아니어도 쫄짜 비스무리하지 않나? 어정쩡한 몸짓으로 혈압기를 풀며 말했다. 정확히는 쫄짜가 아니긴 한데.... 딱 봐도 쫄짜가 아닌데 무얼. 내가 사람을 얼마나 잘 본디. 쫄짜아냐~ 아니죠. 당연히 아니긴 한데.... 듣는 어감이 좀 이상하다.

스테이션에 와서 처음 보이는 주치의에게 방금 전의 상황을 말했다. 그리고 힘을 주어 말한다. 나 쫄짜가 아닌데 왜 쫄짜라고 그러냐는 말을 들었어. 나 아닌건 맞는데 그래도 막내급이잖아. 아니야? 나 그렇게 나이들어보여? 아니 내가 나이 먹은 건 맞아. 하지만 여기 선배님들은 나보다 더. 훨씬 더 나이를 먹었잖아. 그러니까요. 주치의가 말한다. 나를 달랜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동안이에요. 쫄짜처럼 보여요. 뭐 그딴 말을 기대하며 내 팔을 쥐고 가볍게 흔들고 있는 주치의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일단 사이즈를 줄여야 한다니까요.  

분명히 장난으로 한 말일텐데 기분이 왜 이러냐. 


굴욕 3
 

한바탕 폭풍이 지나고 스테이션에 고요함이 찾아왔다. 선배님이 라운딩 간 사이 난 의자에 앉아 다리를 쭉 뻗었다. 알차게 박힌 알이 비명을 질렀다. 주치의들이 모여 한참 어떤 연예인이 예쁜지 이야기 중이었다. 난 스테이션을 지키면서 지나가는 환자들에겐 눈인사를 귀로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역시~ 가수 L양이 최고지! 몸매도 예쁘고, 쿨한게 좋잖아. 아냐아냐 요즘엔 모델 B가 예쁘던데. 그래도 배우인 L양이 정말 예쁘지 않아? 진짜 예쁜거 같애~  배우 L양? 내가 묻는다. 주치의들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갑작스런 관심에 당황했다. 그래서 당황함을 한껏 담은 얼굴로 말했다. 아니 예쁘다고. 배우 L양은 나라에서 상 줘야해. 그렇게 예쁜건 국가적으로 관리도 해줘야 한다고. 그렇죠 그렇죠? 배우 L양이 예쁘다고 한 주치의가 박수를 친다. 덧 붙여 말했다. 가수 L은 별로던데. 가수가 일단 노래를 잘해야지. 춤도 잘 추는 것 같지도 않고, 섹시는 무슨. 가수 L양이 좋다던 주치의가 목소리를 높였다. 왜요? 그 나이에 그 정도로 예쁘고, 몸매도 예쁘고, 동안이잖아요. 그래? 잠깐 뜸을 들였다. 식어버린 커피를 원샷하고 말했다. 나 L양이랑 동갑인데 나도 그렇게 동안으로...... 보이지? 라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주치의가 말을 끊는다. 그리고 어이없는 냉담한 표정으로 말한다. 저 모욕하시는 건가요? 모.. 모욕?

절대 장난으로 한 말이 아니다. 그러니까 기분이 이런건 절대적으로 당연한 일이다.

기집애. 그냥 그렇다고 이야기 해 주면 이미 빠진 덧니가 다시 생기길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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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1-04-05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긴데 완죤 슬픈것이 딱 제 이야기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버벌 2011-04-05 10:58   좋아요 0 | URL
몰래컴 하며서 예전에 있었던 일을 적었어요. 적으면서 전 얼마나 불행했을까요. ㅡㅡ;; 완죤 슬펐어요. ㅋㅋ 그런데 같은 이야기?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우리 힘내보아요~~

웽스북스 2011-04-05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배가 들어오면 후배일가르쳐주기와 후배일봐주기, 라는 새로운 일이 생기지요 ㅋ
(안녕하세요 버벌님 :))

버벌 2011-04-06 02:4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 방금 전에 그 후배와 일을 교대 했습니다. 여기저기 해 놓은 일이 눈에 안 차요. 이것저것 다 지적하면 엄청나게 못 된 선배가 결혼도 못 해 놓구선 히스테리 부린다... 라고 생각할까봐. 그냥 말기로 했습니다. 뭐.............. 어떻게든 되겠죠. ㅠㅠ

에디 2011-04-07 0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글 맘에 들어요.

버벌 2011-04-07 11:56   좋아요 0 | URL
엇. 저 지금 엄청 감동 받았습니다. ^^ 감사해요. 기분좋게 하루를 지낼 것 같아요. 저도 에디님 글 참 좋아합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심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