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된 장소에서 언더그라운드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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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미국의 작가 러셀 뱅크스는 소설 대륙 이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아보다 큰 힘을 가진 것, 이를테면 역사, , 무의식에 자신을 내맡겼을 때, 사람은 아주 간단하게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맥락을 잃어버린다. 한 편의 드라마여야 할 인생의 흐름이 끊겨버리는 것이다.

 

그렇다, 만일 당신이 자아를 잃는다면 그 순간 당신은 당신 자신의 일관된 이야기를 상실해버린다. 그러나 사람은 이야기 없이는 오랫동안 살아갈 수가 없다. 이야기라는 것은 당신이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한정된 논리적 제도(또는 제도적 논리)를 초월하고, 타자와의 공시 체험에 중요한 비밀 열쇠이며 안전핀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물론 그냥 이야기. ‘이야기는 논리도 윤리도 철학도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꾸는 꿈이다. 당신은 어쩌면 느끼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은 숨을 쉬는 것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그 이야기의 꿈을 꾸고 있다. 이야기안에서 당신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존재이다. 당신은 주체인 동시에 객체다. 당신은 종합인 동시에 부분이다. 당신은 실체인 동시에 그림자다. 당신은 이야기를 만드는 메이커인 동시에 그 이야기를 체험하는 플레이어. 우리는 많건 적건 이러한 중층적인 설화성을 지님으로써, 이 세계에서 개체로서 느끼는 고독을 치유해가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혹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유의 자아를 가지지 못하면 고유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없다. 엔진 없이 차를 만들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리적 실체가 없는 곳에 그림자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당신은 지금 다른 누군가에게 자아를 양도해버렸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하면 좋은가?

 

그럴 경우 당신은 타자로부터, 자아를 양도한 그 누군가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받아들이게 된다. 실체를 양도해버린 대가로 그림자를 받게 된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치일지 모른다. 당신의 자아가 타자에 동화되어버리면, 당신의 이야기도 타자의 자아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문맥에 동화되지 않을 수 없다.

 

대체 어떤 이야기일까?

 

그것은 딱히 복잡하고 세련되고 그럴듯한 이야기일 필요는 없다. 문학적 향기도 필요 없다. 아니, 오히려 조잡하고 단순한 게 낫다. 나아가 가능하다면 정크junk인 게 좋을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복잡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종합적이고 중층적인그리고 배반을 포함한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것에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기 때문이다. 그런 표현의 다층에 자신의 몸을 둘 장소를 발견할 수 없기에, 사람들은 자진해서 자아를 던져버리는 것이다.

 

때문에 주어진 이야기는 하나의 기호처럼 단순한 것이면 충분하다. 전쟁에서 병사들에게 수여하는 훈장이 순금이 아니어도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훈장은 그것이 훈장이다라는 공통 인식이 받쳐주는 한 충분히 존재 이유가 있으므로 값싼 동으로 만들어도 아무 상관 없다.

 

아사하라 쇼코는 그런 정크로서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다름아닌 그것을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화끈하게, 또한 설득력 있게 내어줄 수 있었다. 그 자신의 세계인식이 거의 정크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조잡하고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였다. 외부자가 보면 실로 실소를 금치 못할 이야기다. 그러나 공정하게 말하자면 거기에는 딱 한 가지 일관된 것이 있다. 그것은 무언가를 위해 피투성이가 되어 싸우는 공격적인 이야기였다라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아사하라는, 한정된 의미에서는, 현재라는 공기를 파악한 희대의 이야기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아이디어나 이미지라는 정크적 인식을의식적이었든 그렇지 않든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주위에 널려 있는 부품을 적극적으로 긁어모아(영화에서 ET가 주위에 널려 있는 잡동사니로 고향 행성과 교신할 장치를 조립하듯이), 거기서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흐름에는 아사하라 자신의 내적 고뇌가 짙게 반영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품고 있는 결손성은 아사하라 자신이 끌어 안고 있는 결손성이었다. 때문에 아사하라 자신의 결손성에 자진해서 동화한 사람들에게 그 결손성은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데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그 결손은 이윽고, 아마도 내재적 모멘트의 작용에 의하여 치명적인 팩터로 오염되어간다. 대의로서의 무언가는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망상과 가상으로 변해간다.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그것이 옴진리교=‘저쪽이 제시하는 이야기다. 바보같다고 당신은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확실히 바보 같다, 실제로 우리는 아사하라가 제시하는 황당무계한 정크 이야기를 비웃었다.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낸 아사하라를 비웃고, 그런 이야기에 이끌린 신자들을 비웃었다. 꺼림칙한 비웃음이긴 했지만 적어도 웃어넘길 수는 있었다. 그건 됐다고 치자.

 

그러나 그에 대해 이쪽의 우리는 대체 어떤 이야기를 제시할 수 있을까? 아사하라의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떨쳐버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진 이야기를, 서브 컬쳐 영역에서건 메인 컬쳐의 영역에서건 우리는 가지고 있을까?

 

이것은 꽤 커다란 명제다. 나는 소설가이고, 아시는 바처럼 소설가란 이야기를 직업적으로 말하는 사람이다. 때문에 그 명제는 나에게 크기 이상의 의미이다. 말 그대로 머리 위에 매달려 있는 날카로운 칼날 같은 것이다. 그에 관해 나는 앞으로도 계속 신중하고 절실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우주와의 교신장치를 만들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나 자신의 내적 정크와 결손성을 하나하나 절절하게 파악해야 한다고 본다. (이렇게 쓰고 보니, 놀랍게도 이것이야말로 바로 내가 오랫동안 소설가로서 하려 했던 일이 아닌가!)

 

 

그리고 당신(일단 이인칭을 사용하지만 물론 나도 거기에 포함된다)은 어떤가?

 

당신은 누군가(무언가)에게 자아의 일정한 부분을 제공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서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어떤 제도=시스템에 인격의 일부를 맡기고 있지는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그 제도는 언젠가 당신을 향해 어떤 광기를 요구하지 않을까? 당신의 자율적 파워 프로세스는 올바른 내적 합의점에 도달해 있는가? 당신이 지금 갖고 있는 이야기는 정말로 당신의 이야기일까? 당신이 꾸고 있는 꿈은 정말로 당신 자신의 꿈일까? 그것은 언제 어떤 악몽으로 변해버릴지 모르는 누군가의 꿈이 아닐까?

 

우리가 옴진리교와 지하철 사린사건에 대해 이상한 꺼림칙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러한 무의식적인 의문이 실제로 해소되지는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나는 이런 생각을 도저히 떨쳐버릴 수가 없다.

 

중략

 

그들 대부분은 지금까지 셀 수 없이 많이 그때의 체험담을 주위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사건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설령 외부를 향해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들은 많건 적건 각자의 방식으로 사건의 기억을 자신의 내부에서 확인하고 또한 객체해왔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말하는 사건의 경위는 대부분 지극히 리얼하고, 그중 많은 것은 비주얼(경정적)이었다.

 

,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억이다.

 

때로 우리가 자기 자신의 기억을 얼마나 기묘하고 이상한 방법으로 다루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독자 여러분도 적지 않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어느 정신과 의사가 말했듯이 인간의 기억이란 어디까지나 사건의 개인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기억이라는 장치를 통해 우리는 때로 하나의 체험을 알기 쉽게 개편한다. 불편한 부분은 생략하고 앞뒤를 거꾸로 뒤집는다. 선명하지 않은 부분은 보완한다. 자신의 기억과 타자의 기억을 혼동하고 필요에 따라 바꿔넣는다. 그런 작업을 우리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무의식적으로 행하고 만다.

 

극단적으로 말해 우리는 자신의 체험에 대한 기억을 많건 적건 이야기화한다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지만 이것은 인간 의식의 지극히 자연스런 기능이다(요컨대 우리 작가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직업적으로 행하는 셈이다). 그런 가능성은 어떤 형태의 이야기된 이야기속에는 내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본적인 인식을 가져주시기 바란다. ‘이야기된 이야기의 사실성은 어쩌면 진정한 의미의 사실성과는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과는 다르다. 그것은 다른 형태를 띈, 하나의 틀림없는 진실이다.

 

후략

 

무라카미 하루키, 언더 그라운드2: 약속된 장소에서, 문학동네. 지표없는 악몽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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