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구상 없이, 시간도 많이 들이지 않고, 전철에서 첫 문단을 완성하고 며칠이 지난 오늘, 동네 카페에 앉아 햇살을 듬뿍 받으며 밀어내듯 썼다. 음악을 들으며, 밖을 내다보기도 하며, 그렇게 일요일 오전의 어느 카페에 앉아 나는 이 글을 썼다. 그냥 밀어냈을 뿐,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옆 테이블의 엎어져 자고 있는 사람. 시간의 교차. 미묘함. 

언젠가, 인도에서의 아해들을 만나기 위해 계동에 모여 들었는데 미리 도착한 나와 친구 한둘이 카페 공드리에서 속속 도착할 몇몇의 친구들을 위한 자릴 마련하기 위해 주위를 살피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옆 테이블에서는 여성 혼자 4인 테이블을 차지한 채 엎어져 잠을 자고 있었고, 숏버스 사운드트랙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카페 공드리 화장실 가는 모퉁이엔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큼지막한 포스터가 붙어 있다. 그 모든 계동의 풍경. 

그리고 


눈을 감으면 들려오는 나를 부르던 나의 너

손을 내밀어 너를 잡고 미소짓는 널 안아 

너의 모습이 너의 모습이 

눈물 젖은 너의 눈가 나의 손으로 닦아줘  

너의 모습이 너의 모습이 너의 모습이 너의 모습이 

바래져만 가는 너의 모습을 보며 아무렇지 않을까 난 그게 두려워 

너의 모습이 너의 모습이 너의 모습이 너의 모습이 


_<나의 너> Blue in Green, 영화 <후아유> 사운드트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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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K는 어딘가로 사라졌던 게 아니다. 단지 자신의, 자신만의 방,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렀을 뿐 단 한순간도 시간과 공간을 거스른 적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시간의 겹에 기대어 이른 아침이면 동이 트는 모습을 바라보고 오전에는 조금씩 글을 썼으며 낮엔 약간의 잠을 자고 늦은 오후엔 산책을 했다. 조금도 동네를 벗어나지 않고 산책의 끝에 늘 오르는 얕은 언덕에서 석양을 바라보곤 했다. 아주 오래 같은 동네에 살고 있지만 알고 지내는 이웃은 한 명도 없다. 


오랜만에 외출 준비를 하는 K의 마음이 조금은 가볍다. ‘대체 얼마 만의 계동인가.’ 한동안 입지 않던 외투를 꺼내 베란다에 걸어두며 K는 짧게 중얼거린다. ‘그때, 그날 이후 나는 그곳에 가지 않았지. 많이 변했을까. 중앙고등학교로 이어지는, 길쭉하게 구획지어진 계동을 닮은 그 길은 여전히 그대로일까?’ 봄이 전하는 생생한 생에의 기운을 듬뿍 받으며 K는 며칠 전, 그에게 전화가 걸려왔던 날을 떠올린다. 밤이 깊었고 K는 아무도 없는 성곽에 앉아 서울을, 그가 오랫동안 살아온 동네를 굽어보고 있었다. 


“잘 지내는 거야?”

“어, 오랜만이네.” 


사뿐사뿐 봄길을 걷는 듯한 <멋진 하루> 사운드트랙을 들으며 집을 나선 K의 머리 위로 한창인 봄날의 햇살이 풍요롭고 따뜻하게 쏟아진다.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며 K는 다시 그날을 떠올린다. 그는 말했었다. 


“있잖아, 우리가 늘 가던 그 카페, 거기서 보자. 목요일, 봄볕이 가장 가득한 2시쯤, 어때?” 


카페 G. 그가 진작에 알려준, 그들이 가장 자주 갔던 그 카페. 계동길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그곳은 영화를 좋아했던 그들에겐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다. 특별한 장소를 정하지 않고 만나기로 한 날은 여지없이 계동에 가는 날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먼저 카페에 도착하는 사람이 구석진 자릴 잡고 책을 읽거나 잡지를 뒤적이거나 카페 주인장과 담소를 나누거나 하고 있으면 어느새 다른 한 명이 도착해 ‘카페’에 합류한다. 늘 그런 식이었다. 그러면 그곳에서 영화 사운드트랙을 들으며 영화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취향을 논하고, 인생을 펼쳐놓기도 하며, 귀퉁이를 접어놓은 책을 꺼내 감정을 공유하곤 했었다. 카페 G에서는. 


오랜만의 외출이기도 하지만 계동을 비롯한 북촌 일대는 K가 무척 좋아하는 산책길이기도 해서 조금 서둘러 나선 K는 부러 좀 걸을 생각으로 두 정거장 정도를 지나쳐 버스에서 내렸다. ‘진짜 서울은 여기지.’ 늘 그렇게 생각해오던 K는 과거에 잠겨 북촌 일대를 가만히 선 채 둘러본다. 부쩍 사람이 늘었고, 못 보던 상점들이 새 얼굴을 하고 새침데기처럼 문을 열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아주 아주 커다란 미술관이 들어선 게 인상적이었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겉모습이 전부가 아니다. 중요한 건 안에 무엇이 들었는가, 이다.’ 미술관을 둘러보기에 시간은 부족했기에 서슴없이 발길을 북촌방향으로 내딛는다. 

 

역시나 봄 햇살이 그윽했던 평일의 오후, K는 <숏버스 Short Bus>에 이은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 Buena Vista Social Club> 사운드트랙을 들으며 <보바리 부인>을 읽고 있었다. K는 일종의 습관처럼 약속시간에 늦는 법이 없었다. 늦기는커녕 짧게는 삼십 분에서 보통은 한 시간 정도 일찍 약속한 장소에 먼저 가 그곳에 미리 익숙해지곤 했다.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낯선 곳, 처음 가는 곳에서야 충분히 그럴 법도 하지만 낯설기만 했던 장소가 단골이 되어도 변함없이 약속시간보다 일찍 그곳에 가 있곤 했다. 이 과정은 K에게도 굉장히 무의식적으로 진행되곤 하는 것이어서 이제는 매우 당연한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그날따라 책이 어찌나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생맥주를 마시며 멍하니 곳곳이 비어 있는 카페 내부를 둘러보았다. 많은 대화를 하고 있진 않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신뢰가 느껴지는 연인, 카페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노란 연필로 소박하게 스케치하고 있는 연약해 보이는 여성, 가장 구석진 4인 테이블에 혼자 앉아 이미 비운 라떼 잔을 옆으로 밀어두고 엎어져 잠을 자고 있는 사람, 혼자 와서 맥주를 두 병째 마시고 있는 남성, 봄날의 밤 영화 상영회(상영될 영화는 미셸 공드리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이었다)를 준비하는 카페 직원들, 창밖으로 보이는 계동길을 그다지 분주하지 않은 속도로 걷고 있는 관광객들, 그 모든 계동의 풍경을 머릿속에 이리저리 배치하며 K는 서서히 밀려오는 졸음에 눈을 끔뻑이며 벽에 걸린 시계와 카페에 머무르고 있는 볕의 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사실 자연이 말해주는 대로 시간을 짐작하곤 했던 K에게 숫자가 말하는 시간은 크게 의미가 없었다. 그저 이제는 그가 올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을 뿐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다 마신 채 옆으로 밀어둔 라떼 잔에 남은 거품은 차갑게 굳어 있었고, <보바리 부인>은 뒤집어져 있었으며, 오랜만에 햇볕을 쬐어 생기 있는 색깔을 뽐내던 외투가 아무렇게나 걸쳐 있는 의자에 앉은 K는 테이블에 그대로 엎드려 잠을 자고 있었다. 팔이 저린 만큼의 무게를 지닌 꿈에서 북촌에서의 똑같은 하루하루가 반복되는 영화를 한 편 본 듯도 했다. 한참을 그렇게 엎어져 자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보았지만 여전히 그는 오지 않은 채였다. 오후의 해는 이미 더 갈 곳 없는 서쪽 하늘에 겨우 걸려있었다. 



2014/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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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 네가 

어색한 거 같아 왠지 

뭐랄까 숨기고 싶은 게 있어 

말하기가 그렇네 

어깰 부딪치고 돌아설 때 

아마 그때였을 거야 

널 처음 본 게 

갑자기 이방인이 된 것처럼 

아무 말도 못했지 

나는 나를 잃고 네 안에 

너는 너를 잃고 내 속에 

그렇게 마주보며 잃어가다 

남는 것은 무엇일까 



"뭐하냐 혼자? 커피 마시다 말고."

"김창완밴드 노래가 좋아서. 이래서 여기가 맘에 든다니까." 

"맘에 안 드는 데 가긴 가니?"

"흐흐, 그렇지. 그건 그렇고. 너,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라고 알지?" 

"그럼, 전에 같이 갔었잖아. 마침 법회가 있어서 법정 스님도 뵀었고."

"참, 그랬었지. 여튼, 거기서 매년 초파일 무렵이면 산사음악회를 하거든. 나도 몰랐다가 몇 년 전 5월에 성북동 다녀오는 길에 우연히 알게 됐는데 그때 초대된 뮤지션이 김창완밴드였어. 그런데 그날 비가 억수같이 내렸거든. 비는 억수같이 내리지, 무대는 설치됐는데 당장 공연이 어려우니 부랴부랴 천막을 동원하기 시작했지. 그런데 초파일이라고 설치해둔 오색등이 곳곳에 고인 물웅덩이에 수없이 비치면서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거야. 그렇게 비가 내리는데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공연을 기다렸어."

"말도 안 돼. 나 같으면 당장 집에 갔다. 물론 비 오면 그런 데 가지도 않겠지만." 

"알았어. 그건 너니까 그런 거고. 들어봐. 초파일이라 그런지 거기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 표정은 온화해 보였어. 다들 옹기종기 사찰 측에서 설치한 천막에 모여 공연을 기다렸지. 그러다가 기타를 멘 김창완 아저씨가 무대에 나왔는데, 왜 있잖아, 그 분 특유의 선한 표정과 미소. 알지?"

"근데 드라마에선 악역도 좀 하던데."

"맞아. 선한 사람이 악역하니까 좀 섬뜩하더라. 그건 그렇고. 아까 흘렀던 노래가 그날 처음으로 연주한 곡이야. 노랫말 시적이지 않니?"

"연주는 좋은데 노랫말은 너무 웅얼거려서 잘 안 들리던데?"

"그런가. 그럼 들어봐, 이 부분." 


나는 나를 잃고 네 안에 

너는 너를 잃고 내 속에 

그렇게 마주보며 잃어가다 

남는 것은 무엇일까 


"음, 그렇게 또박또박 들으니 시적이긴 하네." 

"그렇지? 근데 그때 공연을 하면서 중간에 얘기를 하는데, 뜬금없이 자기가 젊었을 때는 술자리 같은 데서 시를 낭송하곤 했다는 거야. 그것도 T.S. 엘리엇의 시를 원문으로 외우고 다니며 줄줄 읊었대. 특히 여자들 많은 모임에서 그렇게 하면 아주 인기가 좋았다나." 

"T.S. 엘리엇은 또 누구냐? 나 참. 근데 요즘 누가 시를 읽냐, 내 주변만 해도 시집 읽는 여자 한 명도 없는데, 넌 있니?"

"나도 없지. 그런데 시를 읽는 것과 누가 낭송하는 걸 듣는 건 완전히 다르지. 근데 여튼 그 얘길 하면서 이제는 그런 것들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머릴 긁적이면서 우스개 소리하듯 말하더라고. 그때 그 미소하며 순박한 표정이 참 좋더라고. 그제서야 나는 그가 쓴 노랫말들이 서정적이고 시적인 이유를 알게 됐지. 근데 아까 그 노래 제목이 뭔 줄 알아?" 

"나야 당연히 모르지요."


"아이쿠!"


"그럴 듯하네." 

"그치? 어쩌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순간은 마치 비 오는 날 별 생각 없이 길을 걷다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물웅덩이에 빠지는 것과 비슷한 거 같아.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말을 뱉게 되지. 아이쿠!" 

"어이구, 시인 납셨네." 

"시 얘기가 나왔으나까 말인데, 아이쿠하니까 생각도 나고. 너 하이쿠, 라고 알아?" 

"신났네, 아주. 뭔데 그건 또?" 

"이런 거야, 들어봐." 


겨우내 

뜨거웠던 나무에게도 

봄은 오네 


"이런 게 하이쿠야, 어때?" 

"뭐야, 그게, 뭐 하긴 했니?"

"뭐긴 뭐야, 시지!" 

"뭐, 그게 시라고?" 

"하이쿠는 일본에서 인기 있는 문학 장르의 하나라고. 대학엔 강의도 개설되어 있을 정도지. 그런데 너 소설은 읽잖아?" 

"가끔 읽긴 하지. 머리가 너무 굳었다고 생각될 때. 물론 그것도 베스트셀러 위주지만." 

"그럼 시는, 시집 사본 적 있어?" 

"글쎼, 선물 주려고 검색해 보고 산 적은 있는 거 같은데. 그래봤자 잠언 시집이었지. 음악으로 치면 베스트앨범 같은." 

"법정 스님께서 쓴 글에 이런 말이 있어. 스님께서 평생 단 한 번 주례를 보셨는데, 그때 이런 말을 했대. 한 달에 산문집 2권과 시집 1권을 빌리지 않고 사서 꼭 같이 보라는 거야. 산문집은 신랑 신부가 한 권씩 고르고, 시집은 함께 골라 매일 번갈아 가며 낭송하라고 하셨대. 정말 멋지지 않니?" 

"듣기에 멋지긴 한데, 그건 너 같은 문학 청년에게나 어울릴 법한 일 아냐?" 

"나 같은 놈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할 건데, 문제는 같이 할 사람이 없다는 거지. 왜 얘기가 삼천포로 가냐. 그건 그렇고. 책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나는 원래 소설은 잘 안 읽었어. 그런데 단편소설을 읽고 완전히 매료가 됐지. 물론 모든 단편을 좋아하는 건 아냐. 내가 좋아하는 단편은 굉장히 소소한 것들이야.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아침에 비몽사몽, 해가 채 뜨기도 전에 출근을 하려고 집을 나섰는데 동네에 있는 작은 빵집이 아직 문은 열지 않았지만 주방에 불이 켜진 채 은근한 빵 냄새를 흘리고 있는 거야. 그 냄새를 맡은 사람은 출근을 서두르던 발걸음의 속도를 늦춰 빵 냄새의 은근함에 취하는 거야. 그러면서 생각을 해. 아직 집에서 잠에 빠져 있는 아이의 얼굴, 빵을 유독 좋아했던 옛 연인, 제빵사가 누군가 먹을 빵을 정성스레 만들 듯 자기 자신만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한 삶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는 자각. 이런 것들이 늘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그날 하루만은 특별하게 해 주는 거야. 그 사람은 괜히 기분이 따스해져 하루 종일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하게 되는 거지. 집으로 돌아갈 때 맛있는 빵을 사서 갈 생각을 하며. 사실 이런 일상적인 단편을 좋아하는 건 평소 내가 거창하고 화려하면서 들쑥날쑥한 걸 좋아하지 않는 거랑 비슷하기도 해. 별것 아닌 것들, 아주 사소하지만 그렇게도 일상적이어서 손만 내밀면 금세 잡힐 것 같은 것들이 늘 곁에 있었지만 무슨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낯설고 친숙하게 다가오는 거야. 단편이란 옷을 입고 등장하는 순간, 말이야. 그 뒤에 남는 여운도 좋아. 일종의 허전함이라고 해야 할까." 

"뭐 대충 무슨 말 하는 줄은 알겠다만 그래도 나는 치고 박고 달리고 날고 하는, 숨 쉴 틈 없는 소설이 좋더라. 실제로 그런 것들이 열광적 인기를 끌기도 하고." 

"맞아. 대중적 인기를 얻으려면 밋밋해서는 곤란하지. 하지만 우리들 각자가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다른 생각을 하며 살아가듯, 사회에 펼쳐지는 면면들이 다양했으면 좋겠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보려고 하잖아. 살기 바빠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분명 자기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영역이 있을 텐데. 그리고 그런 것들에서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야. 너도 마찬가지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고유한 방 하나쯤은 있었으면 해." 

"그래서 넌 그렇게 방을 많이 만들려고 하냐? 영화도 이상한 것만 보고." 

"야, 이상한 게 아냐. 작은 영화들이 어렵다고 하는 것도 다 편견이라니까. 그냥 자기한테 익숙하지 않을 뿐인데 그걸 다 어렵다고 규정해 버려. 그리고 너무 쉽게 외면하지. 근데.." 

"그만! 알았어, 알았다고. 오늘은 그만하자. 이러다 끝도 없겠다." 



2014/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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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는 생각보다 일찍 사무실을 빠져나오며 커피 생각이 간절했지만 참고 전화를 걸었다. 연우가 커피를 같이 마시고 싶은 단 한 사람, 바쁘다는 핑계 아닌 현실 때문에 벌써 이 주일 동안이나 만나지 못한 연인, 은효에게. 연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통화연결음은 한 번의 시도만으로 은효의 목소릴 들려주지 않았다. 조급한 마음을 따라 급히 움직였던 걸음의 속도를 조금 늦추며 연우는 - 왜 전화를 안 받지, 오늘은 꼭 보고 싶은데 - 잠시 혼잣말을 웅얼거리며 다시 통화 버튼을 가볍게 누른다.


오늘은 만날 수 있을까. 기다리는 게 연우보다는 늘 익숙했던 은효는 도서관에서 혹시나 연우가 일찍 마치게 되진 않을까, 내심 기대를 품고 휴대전화를 한 번 또 한 번 들여다보며 - 벌써 이 주나 됐는데, 오늘은 꼭 보고 싶은데 - 좀처럼 책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어둑해진 풍경은 굳이 시계를 보지 않아도 퇴근 시간은 훌쩍 지났음을 말해주고 있었고, 그럴수록 은효의 기대는 서서히 미련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진동이 울린다.

"어, 지용아."

"어디야?"

"도서관."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 할 얘기도 있고."

"그럴까, 그럼 30분 뒤에 도서관 앞에서 보자."

책을 주섬주섬 가방에 집어넣는 은효의 마음은 어쩐지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지용이를 어떻게 위로해 줘야 하지.’


횡단보도 앞. 이곳에서 버스를 타면 은효에게로 곧장 갈 수 있고 길을 건너면 연우의 집으로 가는 방향이다. 세 번째, 통화를 시도하는 연우의 표정은 여전히 밝지만 또 연결이 되지 않을까 봐 조금은 조바심에 그을린 듯하다. 하지만 다행히 통화연결음은 은효의 목소리로 바뀌고 연우의 표정도 맑게 개며 입에서는 아주 밝은 목소리가 던져진다.

"어디야?"

"어, 연우아. 나 지금 지용이랑 같이 있어. 미안한데 내가 조금 있다 전화하면 안 될까?"

은효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연우는 아주 가벼운 바람에도 몸살이 걸린 아이처럼 그동안의 조바심과 원했던 커피와 간절했던 만남에 대한 욕망이 으스러짐을 느끼고는 힘이 빠진 걸음으로 녹색 신호로 바뀐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차도로 들어섰다.


지용이를 뿌리치기에 이미 대화의 강은 깊디깊어졌고 이를 확인할 때마다 술잔은 부딪쳐지고 술병은 늘어만 갔다. 그렇지만 아까 연우의 전화를 받고도 제대로 통화하지 못한 게 계속 마음에 걸렸던지 화장실을 다녀온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빠져나온 은효는 연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길게, 통화연결음이 이어지고 연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코와 눈 주위가 심하게 부어오른 연우는, S병원 응급실에서 좀 더 정밀한 검사를 받기 위해 누워있다. 연우가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할 때, 급하게 배달을 하던 오토바이가 신호를 무시하고 미처 보지 못한 연우를 들이받았던 것이다. 앰뷸런스 안에서 은효에게 전화가 왔지만 부러 받지 않은 연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터져나온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은효를 생각한다. 뜻하지 않게 병원 신세를 지게 된 연우는 지금의 상황이 왠지 서럽기만 하다.


지용과 헤어져 집으로 걸어가며, 은효는 거듭 연우에게 전화를 걸어 보지만 여전히 연결이 되지 않는다. '왜 이렇게 전화를 받지 않지..' 집에 도착해 다시 한 번 시도한 통화가 가까스로 연우의 목소리로 이어지고 전화를 받은 연우는 뜬금없이 얘길 한다.

"넌, 나보다 지용이가 더 중요하잖아."

"..."

그 말은 들은 은효가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주저하고 있는 사이 전화는 끊겨 버리고, 다시 전화를 걸어 보지만 연우는 답하지 않는다. 연우와의 통화가 실패를 거듭하자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은효는 연우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고 그제서야 연우의 상황을 알게 된다.


"좀 조심하지.. 뭐야, 이게."

응급실에 누워있는 연우를 보자 은효는 치밀어오르는 눈물을 겨우 참으며 말을 잇는다. 하지만 연우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 은효를 외면하고, 그런 연우의 모습에 은효는 가슴이 찢어질 듯하다.


다행히 뼈에 살짝 금이 갔을 뿐 큰 이상은 없다는 의사의 말에 우선 집에 돌아가 안정을 취하기로 한 연우는 어느새 병원에 죄다 모인 가족과 함께 응급실을 나서며 끝까지 은효를 외면하고, 그런 연우의 모습에 힘없이 돌아서 택시를 잡는 은효의 얼굴은 그동안 참았던 눈물로 범벅이 된 채 말할 수 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2014/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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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가 떨어진 지 한참이다.'


오후 내내 머릿속을 지배했던 문장을 퇴근을 하며 글자 하나 하나 - 초성, 중성, 종성까지 완전히 분해하여 주머니에 넣고 버스에 올라 좌석에 앉으며 K는 생각한다. 


'성북동에 반드시 들르자.'


K가 커피를 좋아하게 된 역사는 그가 성북동 카페를 알아온 역사와 거의 일치한다. 커피에 대한 생각을 다듬으며 그는 어릴 적 커피에 대한 기억에 슬며시 미소를 짓는다. 

K가 어릴 적, 동네 이장을 맡아 하시던 아버지 때문에 그의 집엔 동네 어르신들의 출입이 잦았다. 어르신들이 오시면 K의 엄마는 프리마를 탄 인스턴트 커피를 내오면서 설탕은 각자 원하는 만큼 넣을 수 있도록 따로 옆에 두곤 했다. 그러면 어르신들은 어린 그가 얼핏 보기에도 많은 양의 설탕을 듬뿍 수저에 담아 한 스푼 또 한 스푼 거듭 커피에 쏟아부었고 그것을 들이켰으며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그가 대체 커피는 무슨 맛일까 상상하며 냄새라도 맡을 요량으로 어르신들이 떠나고 남은 빈 커피 잔 가까이에 가서 보면 거듭 쏟아부운 설탕이 여전히 한가득 움츠린 채 커피 잔 바닥에 고여있곤 했다. 


'커피는 설탕 맛으로 먹는 거구나.'


된장찌개보다 비싼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을 된장이라 부르던 유행의 시대가 지나고 바야흐로 진정한 커피의 전성시대가 된 지금보다는 몇 년 전, K는 우연히 알게 된 성북동 카페에서 처음 커피를 마시게 된다. 스케치북에 빗금을 그리듯 눈이 나리고 몹시 추웠던 겨울의 늦은 오후였다. 그곳은 우선 크지 않은 공간에 나무로 된 인테리어와 손 닿는 곳에 꽂혀 있는 건축을 비롯한 각종 책들이 K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작은 공간에 은은하게 퍼지는 커피 향과 클래식 음악, 다양하게 진열된 우아한 커피 잔들. 잠시 그곳의 공기에 빠져 있으면 어느새 우아한 잔에 담긴 커피가 나오는데 그 맛에는 한치의 거부감도 들지 않았다. 깨끗하고 향기로웠으며 맛에도 우아하다는 표현을 붙이고 싶을 만큼 부드러웠다. 완벽하단 말을 언제 써야 할지 잘 모르는 K에게 그곳은 무엇보다 완전한 곳이었다. 부족한 것도 넘칠 것도 없었던 것이다. 


퇴근길은 언제나 피로로 가득한 통로를 힘겹게 지나는 과정이다. 출근길이 마냥 싫기만 하다면 퇴근길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힘이 빠지고 그렇기에 아무것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곤 하는 일종의 무기력함의 말 없는 시위와 같다. 


'아, 언제부턴가 광역버스에 설치된 광고용 디스플레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K는 이미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창밖으로 돌리며 중얼거린다. 매일 보는 평일 저녁의 풍경이 낯설지는 않지만 여전한 퇴근길의 무기력함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자신이 외계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에 밖으로 빠르게 스치며 보이는 풍경을 조금이라도 붙잡아 보기 위해 양손을 사용해 프레임을 만들고 그 안에 갖히는 동시에 빠져나가는 풍경들을 이제는 믿어보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금세 K는 손을 풀고 김광석의 음악을 랜덤으로 재생하고 눈을 감는다. 그제서야 습관적으로 부풀어올랐던 그의 마음은 안심이 된 듯 누그러든다. 


'라이브 음반들은 아무리 좋아도 오래 듣다 보면 스튜디오 앨범을 더 찾게 돼 쉬 멀어지게 마련인데, 김광석은 늘 라이브를 먼저 찾게 되니 참 이상하단 말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온다. 집이다. 


"어."

"어디로, 퇴근하나?"

익숙한 엄마의 목소리가 김광석의 목소리 못지않게 편안하다.

"어, 버스, 엄마는?"

"집이야. 아빠는 나가고 테레비 본다."

"티비 좀 그만 보고 그 책 읽어 보라니까?"

"안 돼. 눈 아파. 책 읽으믄 뭐하노. 니 아빠 봐라. 맨날 책 보니까 자세도 꾸부정해서 목 아프다, 허리 아프다를 입에 달고 산다. 나는 책 안 읽는다."


일상적인 대화가 끝나고 전화를 끊자 기다렸다는 듯 피로가 덮치며 스르륵, K는 잠에 빠진다. 자신이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는 사이, 소설이나 희망 따위를 떠올리기도 했던 것 같다. 


'소설을 쓴다는 건.... 그리고 희망이란 무엇일까?'


기계적으로 내릴 곳에서 잠이 깬 K의 귀에선 여전히 김광석이 울리고 있었고, 약간은 울렁거리는 기분으로 버스에서 내리자 바람이 찬물 끼얹듯 쏟아진다. 번뜩 정신을 차리며 전철역으로 들어서자 이번엔 스크린도어에 설치된 거대한 광고들이 그의 시선을 어지럽힌다. 출퇴근 무렵만 아니면 고즈넉함을 넘어 스산함마저 자아내기도 했던 전철역이 이제는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할 정도로 화려하고 어지러울 정도의 빛을 쏟아낸다. 


'만성 적자라는 지하철 운영이 이것들로 조금은 개선이 됐을까. 사고 방지에는 어느 정도나 기여하고 있는 걸까.'


스크린도어가 전철이 역에 들어설 때 쌩하고 몰아치던 바람을 막아주고 철로에 뛰어드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며 소음을 줄여준다는 장점은 있지만 무엇보다 이제는 시선을 물론 몸둘 바를 모르게 한다는 점에서 K는 매일 접하는 그 모습에 무덤덤해지기보다 절망에 빠지곤 한다. 그런 생각에 잠이 깨자마자 밀려온 불편한 마음으로 전철에 올라 문 쪽에 기대 선다. 두 정거장을 지나자 전철이 지하를 벗어나 한강을 건너기 위해 철교로 올라서고 창밖으로 드러나는 말 없는 해질 무렵 도시의 풍경이 시리게 아름답다. 멀리 원효대교와 아직 채 어둠에 휩싸이지 않은 여의도 그리고 가득한 구름 사이로 멀어져 가는 석양이 차창에 코를 박게 한다. 순간 K는 풍경을 붙잡고 싶어 손을 내밀어 보지만 전철이 어느새 다시 지하로 기어들어가 버리자 금세 내민 손을 걷는다. 하지만 그 풍경을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섣불리 전철에서 뛰쳐 내릴 의지가 지금의 K에겐 없었고 그런 주저를 이제는 오히려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이제 곧 풍경의 주인이 뒤바뀔 것이다. 


전철에서 내려 성북동으로 향하는 K의 발걸음은 그제서야 가볍다. 주말이면 K가 산책 삼아 나서곤 하는 그 길이, 어느샌가 상점이 하나둘 늘어가는 그곳의 변화가 그리 반갑진 않지만 아직은 좋다. 거대한 옹벽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동사무소, 성북동의 옛 모습을 그려놓은 벽화, 대사관저들이 많은 동네답게 가로등을 따라 걸린 수많은 국기들, 새로 생긴 초밥집, 재개발에 반대하는 플래카드... 성북천이 복개되어 만들어진 그 길을 걸으며 K는 자신이 살아보지도 않은 과거를 상상해 보려 애써 보지만 이내 길 건너편에 우뚝 선 성곽에 가로막히고 만다. 

어느새 눈앞에는 조명이 아련한 성북동 카페가 따스한 얼굴로 반기고, 그제서야 K는 퇴근 내내 우울했던 기분을 밀쳐내듯 '오늘의 커피, 탄자니아'라고 적힌 누런 종이가 붙은 카페의 유리문을 바라보며 자신을 쉽게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사실에 가볍게 안도의 숨을 한 번 내쉬고는 문을 밀어 카페로 들어선다. 



2014/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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