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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늘 가는 카페에 앉아 랩톱을 열고 쓰다 만 글을 쓰고 있었다. 라떼는 차갑게 식어 거품이 굳어 있었고 오후 해는 느릿느릿 서쪽 하늘을 향해 밀려가고 있었다. 이것저것, 몇 안 되는 조각들을 어떻게든 이어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뭐든 될 것 같은 성급한 예감은 그저 예감의 언저리만을 끝없이 맴도는 현실로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때였다.

<혹시, 저녁에 공연 보실 수 있으세요?> 외로운 듯 몸을 떤 휴대전화는 간단한 한 줄의 문장을 빛내고 있었다. ‘아니, 이건, 설마.’ 보고 싶었던 공연이 매진되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양도게시판에 간절한 마음의 글을 올려놓은 게 기억이 났다. 하지만 공연 당일이 되도록 게시판에 올려놓은 글에는 어떤 대답도 없었고 익숙한 카페에서 익숙한 듯 성급한 예감의 언저리에서 맴돌기만 하던 그도 그토록 바랐던 공연 당일이라는 사실조차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니 양도게시판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는데 이게 뭔가. 글이 되든 말든, 예감이고 말고 할 것 없이 그는 다시금 문장을 뜯어보며 천천히, 조심스레 답장을 보냈다. <그러니까, 오늘 저녁 그 공연 말입니까?> 보내기 버튼을 누른 그는 메시지가 자신의 휴대전화를 떠나가는 모습을 쳐다보며 질책하듯 중얼거렸다. ‘이런 멍청한, 이 따윌 왜 물어!’ 그래서 곧장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암요, 갈 수 있고 말고요!!!>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느낌표를 세 개씩이나 붙여서! 그때부터 그야말로 시간은 그에게 피부에 닿고 있는 에어컨 바람만큼이나 실질적으로 다가왔다. 거의 촉감적이었다. 그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네, 일행이 사정이 생겨 한 장이 남네요. 괜찮으시면 공연장 로비에서 표를 드리도록 하죠.>

급하게 집으로 돌아가 랩톱을 던져두고 행여 공연시간에 늦을까 발길을 재촉하던 그는 다소 돌아가는 전철 대신 버스를 택했다. 헌데 이게 뭔가. 아직 본격적인 퇴근 시간이 되기 전인데 길이 왜이리 막히는 것인가. ‘이런 지긋지긋한 도시의 삶이라니!’ 욕설을 내뱉듯 중얼거린 그의 시선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도시를 가까스로 붉게 물들인 고운 빛깔의 해는 어느새 도시의 불빛에 자리를 내주고는 내일을 기약했다. 석양의 흥취에 빠지는 것도 잠시, 이런, 시간이 촉박했다. 하지만 시간의 촉박함과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 남은 거리는 확연히 줄어들지 않고 있었는데 여차하면 공연 시간을 맞추지 못할 수도 있었다. 답답한 버스 안에서 이리저리 궁리를 한 끝에 그는 가까운 전철역이 있는 정류장에서 내리기로 하고는 거듭 시간을 확인했다.

M역에 전철이 서고, 도어가 열리자마자 그는 걸음을 서둘러 공연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 곳곳에는 오늘의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들이 정갈하게 붙어 있었다. ‘드디어, 이제서야, 그녀의 공연을 보게 되다니.’ 공연장으로 오는 버스에서의 안절부절은 이미 그의 것이 아니었고 이제는 공연에 대한 기대만이 그를 온전히 사로잡고 있었다.

공연장 로비에 들어가며,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메시지에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통화연결음이 흐르더니 이내 두툼한 입술을 연상케 하는 목소리의 여성이 전화를 받았다. 검은 원피스에 투명 비닐팩을 들고 있다고 말한 여성을 찾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는 듯한 반가움으로 그 여성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고는 표를 건네받았다. 환한 표정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양도 받은 표를 바라보며 돌아서는 그는 걸음이 쉬 앞으로 나아가지 않음을 느꼈다. ‘왜 이러지.’ 순간 그는 무언가로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가슴이 저려왔다.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공연을 보게 됐는데 그걸 가능케 해준 분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로 그친 게 마음에 걸린 거였다. ‘공연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 흥분해 고마움을 전할 방법을 미처 생각을 못했군. 아, 이를 어쩌지.’ 속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빠르게 고민하던 그는 신속하게 돌아서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여성에게 말을 건넸다.

“저기, 괜찮으시면 커피 한 잔 대접하고 싶은데요.”

“괜찮습니다. 낮에 커피를 마셨거든요.”

“그래도 너무 고마워서 그런데, 그럼 커피 아닌 다른 음료는 어떠세요?”

“아니요. 정말 괜찮습니다. 공연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걸요.”

여성은 웃으며 대답을 했지만 그는 자신의 보답이 이미 늦었고 너무 약소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괴로움마저 스미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공연 시간이 거의 다 됐기에 더는 얘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입장이 시작되고, 여성의 일행 자리에 앉게 된 바람에 여성과 나란히 앉게 된 그는 거듭 밀려드는, 이제는 미안해진 마음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지만 공연 도중에 말을 거는 건 실례라고 생각되어 그토록 보고 싶었던 공연을 보면서도 어떻게 사과(그는 이미 미안해진 마음은 우선 사과로 풀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기에)를 하고 보답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만 골몰히 생각했다. 귀로는 어떤 소리도 감지되지 않았다. 자신이 공연장에 앉아 있는 건지, 어두컴컴한 다락방에 처박혀 있는 건지 구분도 되지 않았다. 그저 단 한 가지. 이토록 불편한 마음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이런 마음 앞에 무의미하기만 한 이놈의 공연은 대체 언제 끝나는지에 대해서만 조급하게 신경을 썼다. ‘우선 공연이 끝나면 사과를 먼저 하자. 너무 무례했다고. 고마움에 대한 보답을 미처 생각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런 다음 어떻게 해 드리면 좋을지 물어보자.’

그의 안절부절못하는 이러한 모습을 옆자리에 앉은 여성이 흘끗흘끗 보는 것으로 보아 여성 또한 그 못지않게 공연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잠시 공연이 중단된 사이, 참지 못한 그는 소근대는 목소리로 여성에게 말을 했다.

“저기,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보답할 생각을 못해서요. 하마터면 공연에 늦을 뻔해서 미리 생각을 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해요.”

여성은 뜬금없는 그의 사과에 당황한 듯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고는 말했다.

“정말 괜찮다니까 왜 자꾸 그러세요. 공연에 집중이 안 되잖아요.”

한없이 어렵고 무뚝뚝한 직장 상사에게서나 볼 법한 그런 표정이었다. 여성의 그러한 표정을 보게 된 그는 여성보다 더 당황해 하며 이제는 보답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 여성이 사과를 받아들일까, 에 대해서만 궁리했다. ‘이런 내 실수가 분명하군. 여성이 기분이 상했을 게 분명해. 이를 어쩐담.’ 하지만 이내 시작된 공연 때문에 더 말을 걸지 못한 그는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오로지 ‘사과'에 대해서만 생각을 했다. 어찌나 ‘사과'에 대한 생각에 집중을 했던지 어느새 그의 이마엔 땀이 맺히고 얼굴은 창백해졌다.

공연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그는 어느새 이마에 줄줄 흐르는 땀을 훔치며 의자에 달린 팔걸이를 꽉 붙잡고 있었다. 드디어 공연이 끝나고, 그는 이제는 힘껏 용기를 내어 여성을 보며 말을 했다.

“저기, 불쾌하게 해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우선 제 사과를 받아주시면..”

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의자에서 일어서던 여성은 짜증스런 표정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아니, 정말 괜찮다는데 자꾸 그러시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그쪽 때문에 공연에 집중하지도 못했잖아요. 뭡니까 대체 이게.”  

그는 여성의 말을 듣자 어지러움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깨어나니 어느 병원 응급실이었고 그런 그를 보며 괜찮으냐고 묻는 간호사는 검은 원피스를 입은 여성이 전해주라고 했다며 하얀 메모지를 건넸다. 메모지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정말 이상한 분이시네요. 어차피 버리게 된 표를 드린 것뿐인데 그게 그렇게 고맙다면 그저 행운이라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누구도 행운에 보답을 할 순 없으니까요. 그럼.>

메모를 읽은 그는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눈을 감았고, 감은 눈 사이로는 기다렸다는 듯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2014. 6. 15. 계동, 더블컵커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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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계절에 비켜서 있을 수는 없어요. 봄이나 가을이라면 더욱 그렇죠.


K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모든 게 어긋나 버립니다. 길게 쓴다는 게 과연 쓸모 있는 일인지에 대해 며칠 고민을 했습니다. 짧게 쓰겠습니다.  


전철역으로 걸어가던 그는 바로 앞에 걷고 있는 남성의 털이 수북한 종아리를 보며 흠칫 놀랐다. 아직 아래위 모두 짧은 옷을 입기엔 이른 날씨지만 어느새 계절이 봄의 한가운데로 깊숙이 진입해 있다는 걸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무심코 그는 자신의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계절에 구애받지 않은 운동화에 색이 빠질 대로 빠진 진, 얇은 긴팔 두 겹. 그러고 보니 집을 나설 때 무의식적으로 되뇌기도 했다. ‘오늘은 조금 더운걸.’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계절을 실감하는 걸까. 그는 늘 궁금했지만 스치는 사람 어느 누구에게도 차마 물어보지 못한 채 입안에 계속 머무르고 있는 말을 혼자 중얼거렸다.


봄입니까?


주변을 수놓았던 꽃들이 모두 지고 녹음이 돋아나는 듯싶더니 어느새 늘 다니던 길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성하게 나무를 뒤덮었습니다. 생명은 태어났고 마음껏 제 색을 발휘하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봄이 새 생명이 활짝 피어오르는 계절이라 하더라도, 그래서 주변이 온갖 희망찬 신호들로 가득하더라도 이번 봄은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의 흐릿한 두 눈은 무엇을 보고 무엇에 분노하며 무엇을 찾아 헤매야 할까요? 이토록 계절을 실감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우린 깊디깊은 침묵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완연한 봄이라 믿고 말하고 쓰기엔 뭔가 마땅찮은 분위기가 있었다. 쓰러지듯 쏟아지는 햇살과 가벼이 불어대는 산들바람과는 대조적인 무언가 있었다. 그는 대체 그것의 근원이 무엇일까, 이토록 거부할 수 없는 봄인데도 봄이라고 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이것은 대체 무엇일까, 한참을 생각하고 두리번거린 끝에 가까스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계절과 옷차림과는 다르게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반쯤 숙이고 있었고 겨우 들여다볼 수 있는 그들의 표정은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그것이었다. 그것 때문이었다. 그는 이제는 꽃이 다 져버린 벚나무 사이를 지나며 거칠게 떠올랐던 생각들을 다듬어본다. 그러고는 다시금 되뇐다.  


봄입니까?


눈앞에 어른거리는 환영들을 하나둘 붙들고 나지막히 물어봅니다. 대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너는 대답을 알고 있지 않느냐고. 대답이 없습니다. 그렇게 아무것 하지 못하고 응어리진 시간들이 점점 커져 이제는 저 거대한 나무와 같아졌습니다. 생명으로만 보이던 그것 역시 응어리진, 한맺힌 시간들에 불과합니다.


어딘선가 희미하게 노래 선율이 들려온다. 차츰 스미는 듯하던 그 선율은 어느새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지더니 곧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신사모자를 쓴,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 한 분이 카세트데크가 매달린 손수레를 끌며 추억의 명곡이 담긴 팝시디 모음집을 팔기 위해 그가 타고 있는 칸으로 이동해 온 것이다.


starry, starry night

paint your palette blue and gray  

look out on a summer’s day

with eyes that know the darkness in my soul…

now i think i know

what you tried to say to me

and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and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they would not listen, they’re not listening still

perhaps they never will


노래가 끝이 나고, 한참이 지난 듯한 잠깐 동안 그는 가벼운 몽상에 빠졌다. 지금처럼 햇살이 좋았던 어느 날이었다. K가 물었다. 고흐의 그림 중 어느 것을 좋아하느냐고. 그때 그는 고흐의 수많은 그림들을 떠올렸었다. 그리고 그 중 단 한 장의 그림을 자신의 방에 걸어둘 수 있다면, 이라는 그물을 치고 거기에 최종적으로 걸리는 단 한 점의 그림을 건져올렸다. <Almond blossom>이라고. 고흐의 유명한 그림만 알고 있는 이라면 잘 모를 그런 그림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쩐지 그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그밖에 고흐의 다른 꽃 그림들도 좋았지만 유독 그 그림이 그는 좋았다. 눈을 떴다. 그런데 이상했다. 검은 신사모자를 쓴 할아버지는 시디를 팔 생각은 않고 노약자석에 바른 자세로 가만히 앉아 계셨다. 노래도 더는 흐르지 않았고, 고요한 가운데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전철 소리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정거장에서 전철이 멈춰서고, 문이 열리자 검은 신사모자를 쓴 할아버지는 조용히 일어서 손수레를 끌고는 세상 밖으로, 마치 그곳이 그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종착역이라도 되는 듯 유유히 사라졌다. 꿈이었을까.


어제는 거리에 나가 보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더군요. 시끄럽게 무언가 큰 소리로 한참을 외치더니 거리 행진을 시작하였습니다. 멀뚱히 쳐다만 보다 행렬을 좇아 걷기 시작했습니다. 대열에 합류해 걸으며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래도 저래도 결국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서 모든 게 변할 것만 같은 세상은 결코 그렇게 호락호락한 게 아니다, 그렇게 쉽게 바뀔 리 없다, 라는 생각이 먼저 들더군요. 그건 경험이었고 과거였습니다. 먼 과거로부터 이어온 역사의 반복인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상하다고, 사람들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걸으면서도 희한할 정도로 자신들이 가는 길을 제대로 찾아가는 듯보였다고, 그는 전철에 오르기 전의 사람들 모습을 떠올리며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이 미치자 순간 가볍게 몸이 떨림을 느낀다. 지긋지긋하고 꽉 막힌 듯보이는 일상이 끌고 가는 힘의 엄중함이 새삼스러운 건 아니었지만 그는 여전히 떨리는 몸을 추스르며 ‘그래도 현실, 현실이지..’ 라고 거듭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거리로 뛰쳐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거리에서 호흡을 해야 합니다. 한 불행했던 시인은 이렇게 말을 했지요.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라고. 그를 ‘불행했던' 시인이라고 말한 건 지금 이 시대가 시인에게 주는 사랑이 그가 살았던 때보다 더욱 크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행복하여야 합니다. 죽은 뒤 아무리 큰 사랑을 받은들 무엇합니까? 지금 이 순간 행복하여야 합니다.


그의 주머니 속엔 K의 편지가 들어있었다. K의 편지는 모호함으로 가득했지만 그는 그러한 모호함이 일종의 방향 표시라도 되는 듯 편지를 읽자마자 전철을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건 그대로였다. 외투를 벗어던지듯, 그렇게 계절이 바뀌고 바람이 스치듯 시간이 지나가면 금방이라도 세상이 바뀔 듯한 떠들썩함도 금세 수그러들고 말 것이다. 이제껏 그래왔듯. ‘이것 또한 지나가 버리고 말 거야, 그건 시간이 늘상 해 오던 말이지, 아주 오랫동안. 그리고 계절이 돌아오듯 다시 이맘때가 되면 잠시 모두에게 침묵이 강요되겠지, 그뿐이다,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다.’ 그렇게 그가 세상을 체념하는 사이 어느새 전철은 종착역을 향해 가고 있었다.


거리로 뛰쳐나와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다름 아닌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는 존엄성을 지닌, 서로 의지하며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인간의 존엄성을 배척하거나 외면한다면 그 칼날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로 되돌아올 것입니다. 더는 다른 이유가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로서 우리를 위해 우리답게 살기 위하여 거리로 뛰쳐나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그곳에서 K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2014. 5. 26. 당신의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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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구상 없이, 시간도 많이 들이지 않고, 전철에서 첫 문단을 완성하고 며칠이 지난 오늘, 동네 카페에 앉아 햇살을 듬뿍 받으며 밀어내듯 썼다. 음악을 들으며, 밖을 내다보기도 하며, 그렇게 일요일 오전의 어느 카페에 앉아 나는 이 글을 썼다. 그냥 밀어냈을 뿐,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옆 테이블의 엎어져 자고 있는 사람. 시간의 교차. 미묘함. 

언젠가, 인도에서의 아해들을 만나기 위해 계동에 모여 들었는데 미리 도착한 나와 친구 한둘이 카페 공드리에서 속속 도착할 몇몇의 친구들을 위한 자릴 마련하기 위해 주위를 살피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옆 테이블에서는 여성 혼자 4인 테이블을 차지한 채 엎어져 잠을 자고 있었고, 숏버스 사운드트랙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카페 공드리 화장실 가는 모퉁이엔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큼지막한 포스터가 붙어 있다. 그 모든 계동의 풍경. 

그리고 


눈을 감으면 들려오는 나를 부르던 나의 너

손을 내밀어 너를 잡고 미소짓는 널 안아 

너의 모습이 너의 모습이 

눈물 젖은 너의 눈가 나의 손으로 닦아줘  

너의 모습이 너의 모습이 너의 모습이 너의 모습이 

바래져만 가는 너의 모습을 보며 아무렇지 않을까 난 그게 두려워 

너의 모습이 너의 모습이 너의 모습이 너의 모습이 


_<나의 너> Blue in Green, 영화 <후아유> 사운드트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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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K는 어딘가로 사라졌던 게 아니다. 단지 자신의, 자신만의 방,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렀을 뿐 단 한순간도 시간과 공간을 거스른 적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시간의 겹에 기대어 이른 아침이면 동이 트는 모습을 바라보고 오전에는 조금씩 글을 썼으며 낮엔 약간의 잠을 자고 늦은 오후엔 산책을 했다. 조금도 동네를 벗어나지 않고 산책의 끝에 늘 오르는 얕은 언덕에서 석양을 바라보곤 했다. 아주 오래 같은 동네에 살고 있지만 알고 지내는 이웃은 한 명도 없다. 


오랜만에 외출 준비를 하는 K의 마음이 조금은 가볍다. ‘대체 얼마 만의 계동인가.’ 한동안 입지 않던 외투를 꺼내 베란다에 걸어두며 K는 짧게 중얼거린다. ‘그때, 그날 이후 나는 그곳에 가지 않았지. 많이 변했을까. 중앙고등학교로 이어지는, 길쭉하게 구획지어진 계동을 닮은 그 길은 여전히 그대로일까?’ 봄이 전하는 생생한 생에의 기운을 듬뿍 받으며 K는 며칠 전, 그에게 전화가 걸려왔던 날을 떠올린다. 밤이 깊었고 K는 아무도 없는 성곽에 앉아 서울을, 그가 오랫동안 살아온 동네를 굽어보고 있었다. 


“잘 지내는 거야?”

“어, 오랜만이네.” 


사뿐사뿐 봄길을 걷는 듯한 <멋진 하루> 사운드트랙을 들으며 집을 나선 K의 머리 위로 한창인 봄날의 햇살이 풍요롭고 따뜻하게 쏟아진다.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며 K는 다시 그날을 떠올린다. 그는 말했었다. 


“있잖아, 우리가 늘 가던 그 카페, 거기서 보자. 목요일, 봄볕이 가장 가득한 2시쯤, 어때?” 


카페 G. 그가 진작에 알려준, 그들이 가장 자주 갔던 그 카페. 계동길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그곳은 영화를 좋아했던 그들에겐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다. 특별한 장소를 정하지 않고 만나기로 한 날은 여지없이 계동에 가는 날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먼저 카페에 도착하는 사람이 구석진 자릴 잡고 책을 읽거나 잡지를 뒤적이거나 카페 주인장과 담소를 나누거나 하고 있으면 어느새 다른 한 명이 도착해 ‘카페’에 합류한다. 늘 그런 식이었다. 그러면 그곳에서 영화 사운드트랙을 들으며 영화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취향을 논하고, 인생을 펼쳐놓기도 하며, 귀퉁이를 접어놓은 책을 꺼내 감정을 공유하곤 했었다. 카페 G에서는. 


오랜만의 외출이기도 하지만 계동을 비롯한 북촌 일대는 K가 무척 좋아하는 산책길이기도 해서 조금 서둘러 나선 K는 부러 좀 걸을 생각으로 두 정거장 정도를 지나쳐 버스에서 내렸다. ‘진짜 서울은 여기지.’ 늘 그렇게 생각해오던 K는 과거에 잠겨 북촌 일대를 가만히 선 채 둘러본다. 부쩍 사람이 늘었고, 못 보던 상점들이 새 얼굴을 하고 새침데기처럼 문을 열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아주 아주 커다란 미술관이 들어선 게 인상적이었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겉모습이 전부가 아니다. 중요한 건 안에 무엇이 들었는가, 이다.’ 미술관을 둘러보기에 시간은 부족했기에 서슴없이 발길을 북촌방향으로 내딛는다. 

 

역시나 봄 햇살이 그윽했던 평일의 오후, K는 <숏버스 Short Bus>에 이은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 Buena Vista Social Club> 사운드트랙을 들으며 <보바리 부인>을 읽고 있었다. K는 일종의 습관처럼 약속시간에 늦는 법이 없었다. 늦기는커녕 짧게는 삼십 분에서 보통은 한 시간 정도 일찍 약속한 장소에 먼저 가 그곳에 미리 익숙해지곤 했다.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낯선 곳, 처음 가는 곳에서야 충분히 그럴 법도 하지만 낯설기만 했던 장소가 단골이 되어도 변함없이 약속시간보다 일찍 그곳에 가 있곤 했다. 이 과정은 K에게도 굉장히 무의식적으로 진행되곤 하는 것이어서 이제는 매우 당연한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그날따라 책이 어찌나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생맥주를 마시며 멍하니 곳곳이 비어 있는 카페 내부를 둘러보았다. 많은 대화를 하고 있진 않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신뢰가 느껴지는 연인, 카페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노란 연필로 소박하게 스케치하고 있는 연약해 보이는 여성, 가장 구석진 4인 테이블에 혼자 앉아 이미 비운 라떼 잔을 옆으로 밀어두고 엎어져 잠을 자고 있는 사람, 혼자 와서 맥주를 두 병째 마시고 있는 남성, 봄날의 밤 영화 상영회(상영될 영화는 미셸 공드리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이었다)를 준비하는 카페 직원들, 창밖으로 보이는 계동길을 그다지 분주하지 않은 속도로 걷고 있는 관광객들, 그 모든 계동의 풍경을 머릿속에 이리저리 배치하며 K는 서서히 밀려오는 졸음에 눈을 끔뻑이며 벽에 걸린 시계와 카페에 머무르고 있는 볕의 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사실 자연이 말해주는 대로 시간을 짐작하곤 했던 K에게 숫자가 말하는 시간은 크게 의미가 없었다. 그저 이제는 그가 올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을 뿐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다 마신 채 옆으로 밀어둔 라떼 잔에 남은 거품은 차갑게 굳어 있었고, <보바리 부인>은 뒤집어져 있었으며, 오랜만에 햇볕을 쬐어 생기 있는 색깔을 뽐내던 외투가 아무렇게나 걸쳐 있는 의자에 앉은 K는 테이블에 그대로 엎드려 잠을 자고 있었다. 팔이 저린 만큼의 무게를 지닌 꿈에서 북촌에서의 똑같은 하루하루가 반복되는 영화를 한 편 본 듯도 했다. 한참을 그렇게 엎어져 자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보았지만 여전히 그는 오지 않은 채였다. 오후의 해는 이미 더 갈 곳 없는 서쪽 하늘에 겨우 걸려있었다. 



2014/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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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 네가 

어색한 거 같아 왠지 

뭐랄까 숨기고 싶은 게 있어 

말하기가 그렇네 

어깰 부딪치고 돌아설 때 

아마 그때였을 거야 

널 처음 본 게 

갑자기 이방인이 된 것처럼 

아무 말도 못했지 

나는 나를 잃고 네 안에 

너는 너를 잃고 내 속에 

그렇게 마주보며 잃어가다 

남는 것은 무엇일까 



"뭐하냐 혼자? 커피 마시다 말고."

"김창완밴드 노래가 좋아서. 이래서 여기가 맘에 든다니까." 

"맘에 안 드는 데 가긴 가니?"

"흐흐, 그렇지. 그건 그렇고. 너,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라고 알지?" 

"그럼, 전에 같이 갔었잖아. 마침 법회가 있어서 법정 스님도 뵀었고."

"참, 그랬었지. 여튼, 거기서 매년 초파일 무렵이면 산사음악회를 하거든. 나도 몰랐다가 몇 년 전 5월에 성북동 다녀오는 길에 우연히 알게 됐는데 그때 초대된 뮤지션이 김창완밴드였어. 그런데 그날 비가 억수같이 내렸거든. 비는 억수같이 내리지, 무대는 설치됐는데 당장 공연이 어려우니 부랴부랴 천막을 동원하기 시작했지. 그런데 초파일이라고 설치해둔 오색등이 곳곳에 고인 물웅덩이에 수없이 비치면서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거야. 그렇게 비가 내리는데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공연을 기다렸어."

"말도 안 돼. 나 같으면 당장 집에 갔다. 물론 비 오면 그런 데 가지도 않겠지만." 

"알았어. 그건 너니까 그런 거고. 들어봐. 초파일이라 그런지 거기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 표정은 온화해 보였어. 다들 옹기종기 사찰 측에서 설치한 천막에 모여 공연을 기다렸지. 그러다가 기타를 멘 김창완 아저씨가 무대에 나왔는데, 왜 있잖아, 그 분 특유의 선한 표정과 미소. 알지?"

"근데 드라마에선 악역도 좀 하던데."

"맞아. 선한 사람이 악역하니까 좀 섬뜩하더라. 그건 그렇고. 아까 흘렀던 노래가 그날 처음으로 연주한 곡이야. 노랫말 시적이지 않니?"

"연주는 좋은데 노랫말은 너무 웅얼거려서 잘 안 들리던데?"

"그런가. 그럼 들어봐, 이 부분." 


나는 나를 잃고 네 안에 

너는 너를 잃고 내 속에 

그렇게 마주보며 잃어가다 

남는 것은 무엇일까 


"음, 그렇게 또박또박 들으니 시적이긴 하네." 

"그렇지? 근데 그때 공연을 하면서 중간에 얘기를 하는데, 뜬금없이 자기가 젊었을 때는 술자리 같은 데서 시를 낭송하곤 했다는 거야. 그것도 T.S. 엘리엇의 시를 원문으로 외우고 다니며 줄줄 읊었대. 특히 여자들 많은 모임에서 그렇게 하면 아주 인기가 좋았다나." 

"T.S. 엘리엇은 또 누구냐? 나 참. 근데 요즘 누가 시를 읽냐, 내 주변만 해도 시집 읽는 여자 한 명도 없는데, 넌 있니?"

"나도 없지. 그런데 시를 읽는 것과 누가 낭송하는 걸 듣는 건 완전히 다르지. 근데 여튼 그 얘길 하면서 이제는 그런 것들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머릴 긁적이면서 우스개 소리하듯 말하더라고. 그때 그 미소하며 순박한 표정이 참 좋더라고. 그제서야 나는 그가 쓴 노랫말들이 서정적이고 시적인 이유를 알게 됐지. 근데 아까 그 노래 제목이 뭔 줄 알아?" 

"나야 당연히 모르지요."


"아이쿠!"


"그럴 듯하네." 

"그치? 어쩌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순간은 마치 비 오는 날 별 생각 없이 길을 걷다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물웅덩이에 빠지는 것과 비슷한 거 같아.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말을 뱉게 되지. 아이쿠!" 

"어이구, 시인 납셨네." 

"시 얘기가 나왔으나까 말인데, 아이쿠하니까 생각도 나고. 너 하이쿠, 라고 알아?" 

"신났네, 아주. 뭔데 그건 또?" 

"이런 거야, 들어봐." 


겨우내 

뜨거웠던 나무에게도 

봄은 오네 


"이런 게 하이쿠야, 어때?" 

"뭐야, 그게, 뭐 하긴 했니?"

"뭐긴 뭐야, 시지!" 

"뭐, 그게 시라고?" 

"하이쿠는 일본에서 인기 있는 문학 장르의 하나라고. 대학엔 강의도 개설되어 있을 정도지. 그런데 너 소설은 읽잖아?" 

"가끔 읽긴 하지. 머리가 너무 굳었다고 생각될 때. 물론 그것도 베스트셀러 위주지만." 

"그럼 시는, 시집 사본 적 있어?" 

"글쎼, 선물 주려고 검색해 보고 산 적은 있는 거 같은데. 그래봤자 잠언 시집이었지. 음악으로 치면 베스트앨범 같은." 

"법정 스님께서 쓴 글에 이런 말이 있어. 스님께서 평생 단 한 번 주례를 보셨는데, 그때 이런 말을 했대. 한 달에 산문집 2권과 시집 1권을 빌리지 않고 사서 꼭 같이 보라는 거야. 산문집은 신랑 신부가 한 권씩 고르고, 시집은 함께 골라 매일 번갈아 가며 낭송하라고 하셨대. 정말 멋지지 않니?" 

"듣기에 멋지긴 한데, 그건 너 같은 문학 청년에게나 어울릴 법한 일 아냐?" 

"나 같은 놈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할 건데, 문제는 같이 할 사람이 없다는 거지. 왜 얘기가 삼천포로 가냐. 그건 그렇고. 책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나는 원래 소설은 잘 안 읽었어. 그런데 단편소설을 읽고 완전히 매료가 됐지. 물론 모든 단편을 좋아하는 건 아냐. 내가 좋아하는 단편은 굉장히 소소한 것들이야.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아침에 비몽사몽, 해가 채 뜨기도 전에 출근을 하려고 집을 나섰는데 동네에 있는 작은 빵집이 아직 문은 열지 않았지만 주방에 불이 켜진 채 은근한 빵 냄새를 흘리고 있는 거야. 그 냄새를 맡은 사람은 출근을 서두르던 발걸음의 속도를 늦춰 빵 냄새의 은근함에 취하는 거야. 그러면서 생각을 해. 아직 집에서 잠에 빠져 있는 아이의 얼굴, 빵을 유독 좋아했던 옛 연인, 제빵사가 누군가 먹을 빵을 정성스레 만들 듯 자기 자신만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한 삶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는 자각. 이런 것들이 늘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그날 하루만은 특별하게 해 주는 거야. 그 사람은 괜히 기분이 따스해져 하루 종일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하게 되는 거지. 집으로 돌아갈 때 맛있는 빵을 사서 갈 생각을 하며. 사실 이런 일상적인 단편을 좋아하는 건 평소 내가 거창하고 화려하면서 들쑥날쑥한 걸 좋아하지 않는 거랑 비슷하기도 해. 별것 아닌 것들, 아주 사소하지만 그렇게도 일상적이어서 손만 내밀면 금세 잡힐 것 같은 것들이 늘 곁에 있었지만 무슨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낯설고 친숙하게 다가오는 거야. 단편이란 옷을 입고 등장하는 순간, 말이야. 그 뒤에 남는 여운도 좋아. 일종의 허전함이라고 해야 할까." 

"뭐 대충 무슨 말 하는 줄은 알겠다만 그래도 나는 치고 박고 달리고 날고 하는, 숨 쉴 틈 없는 소설이 좋더라. 실제로 그런 것들이 열광적 인기를 끌기도 하고." 

"맞아. 대중적 인기를 얻으려면 밋밋해서는 곤란하지. 하지만 우리들 각자가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다른 생각을 하며 살아가듯, 사회에 펼쳐지는 면면들이 다양했으면 좋겠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보려고 하잖아. 살기 바빠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분명 자기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영역이 있을 텐데. 그리고 그런 것들에서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야. 너도 마찬가지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고유한 방 하나쯤은 있었으면 해." 

"그래서 넌 그렇게 방을 많이 만들려고 하냐? 영화도 이상한 것만 보고." 

"야, 이상한 게 아냐. 작은 영화들이 어렵다고 하는 것도 다 편견이라니까. 그냥 자기한테 익숙하지 않을 뿐인데 그걸 다 어렵다고 규정해 버려. 그리고 너무 쉽게 외면하지. 근데.." 

"그만! 알았어, 알았다고. 오늘은 그만하자. 이러다 끝도 없겠다." 



2014/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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