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K는 어딘가로 사라졌던 게 아니다. 단지 자신의, 자신만의 방,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렀을 뿐 단 한순간도 시간과 공간을 거스른 적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시간의 겹에 기대어 이른 아침이면 동이 트는 모습을 바라보고 오전에는 조금씩 글을 썼으며 낮엔 약간의 잠을 자고 늦은 오후엔 산책을 했다. 조금도 동네를 벗어나지 않고 산책의 끝에 늘 오르는 얕은 언덕에서 석양을 바라보곤 했다. 아주 오래 같은 동네에 살고 있지만 알고 지내는 이웃은 한 명도 없다. 


오랜만에 외출 준비를 하는 K의 마음이 조금은 가볍다. ‘대체 얼마 만의 계동인가.’ 한동안 입지 않던 외투를 꺼내 베란다에 걸어두며 K는 짧게 중얼거린다. ‘그때, 그날 이후 나는 그곳에 가지 않았지. 많이 변했을까. 중앙고등학교로 이어지는, 길쭉하게 구획지어진 계동을 닮은 그 길은 여전히 그대로일까?’ 봄이 전하는 생생한 생에의 기운을 듬뿍 받으며 K는 며칠 전, 그에게 전화가 걸려왔던 날을 떠올린다. 밤이 깊었고 K는 아무도 없는 성곽에 앉아 서울을, 그가 오랫동안 살아온 동네를 굽어보고 있었다. 


“잘 지내는 거야?”

“어, 오랜만이네.” 


사뿐사뿐 봄길을 걷는 듯한 <멋진 하루> 사운드트랙을 들으며 집을 나선 K의 머리 위로 한창인 봄날의 햇살이 풍요롭고 따뜻하게 쏟아진다.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며 K는 다시 그날을 떠올린다. 그는 말했었다. 


“있잖아, 우리가 늘 가던 그 카페, 거기서 보자. 목요일, 봄볕이 가장 가득한 2시쯤, 어때?” 


카페 G. 그가 진작에 알려준, 그들이 가장 자주 갔던 그 카페. 계동길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그곳은 영화를 좋아했던 그들에겐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다. 특별한 장소를 정하지 않고 만나기로 한 날은 여지없이 계동에 가는 날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먼저 카페에 도착하는 사람이 구석진 자릴 잡고 책을 읽거나 잡지를 뒤적이거나 카페 주인장과 담소를 나누거나 하고 있으면 어느새 다른 한 명이 도착해 ‘카페’에 합류한다. 늘 그런 식이었다. 그러면 그곳에서 영화 사운드트랙을 들으며 영화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취향을 논하고, 인생을 펼쳐놓기도 하며, 귀퉁이를 접어놓은 책을 꺼내 감정을 공유하곤 했었다. 카페 G에서는. 


오랜만의 외출이기도 하지만 계동을 비롯한 북촌 일대는 K가 무척 좋아하는 산책길이기도 해서 조금 서둘러 나선 K는 부러 좀 걸을 생각으로 두 정거장 정도를 지나쳐 버스에서 내렸다. ‘진짜 서울은 여기지.’ 늘 그렇게 생각해오던 K는 과거에 잠겨 북촌 일대를 가만히 선 채 둘러본다. 부쩍 사람이 늘었고, 못 보던 상점들이 새 얼굴을 하고 새침데기처럼 문을 열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아주 아주 커다란 미술관이 들어선 게 인상적이었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겉모습이 전부가 아니다. 중요한 건 안에 무엇이 들었는가, 이다.’ 미술관을 둘러보기에 시간은 부족했기에 서슴없이 발길을 북촌방향으로 내딛는다. 

 

역시나 봄 햇살이 그윽했던 평일의 오후, K는 <숏버스 Short Bus>에 이은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 Buena Vista Social Club> 사운드트랙을 들으며 <보바리 부인>을 읽고 있었다. K는 일종의 습관처럼 약속시간에 늦는 법이 없었다. 늦기는커녕 짧게는 삼십 분에서 보통은 한 시간 정도 일찍 약속한 장소에 먼저 가 그곳에 미리 익숙해지곤 했다.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낯선 곳, 처음 가는 곳에서야 충분히 그럴 법도 하지만 낯설기만 했던 장소가 단골이 되어도 변함없이 약속시간보다 일찍 그곳에 가 있곤 했다. 이 과정은 K에게도 굉장히 무의식적으로 진행되곤 하는 것이어서 이제는 매우 당연한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그날따라 책이 어찌나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생맥주를 마시며 멍하니 곳곳이 비어 있는 카페 내부를 둘러보았다. 많은 대화를 하고 있진 않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신뢰가 느껴지는 연인, 카페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노란 연필로 소박하게 스케치하고 있는 연약해 보이는 여성, 가장 구석진 4인 테이블에 혼자 앉아 이미 비운 라떼 잔을 옆으로 밀어두고 엎어져 잠을 자고 있는 사람, 혼자 와서 맥주를 두 병째 마시고 있는 남성, 봄날의 밤 영화 상영회(상영될 영화는 미셸 공드리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이었다)를 준비하는 카페 직원들, 창밖으로 보이는 계동길을 그다지 분주하지 않은 속도로 걷고 있는 관광객들, 그 모든 계동의 풍경을 머릿속에 이리저리 배치하며 K는 서서히 밀려오는 졸음에 눈을 끔뻑이며 벽에 걸린 시계와 카페에 머무르고 있는 볕의 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사실 자연이 말해주는 대로 시간을 짐작하곤 했던 K에게 숫자가 말하는 시간은 크게 의미가 없었다. 그저 이제는 그가 올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을 뿐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다 마신 채 옆으로 밀어둔 라떼 잔에 남은 거품은 차갑게 굳어 있었고, <보바리 부인>은 뒤집어져 있었으며, 오랜만에 햇볕을 쬐어 생기 있는 색깔을 뽐내던 외투가 아무렇게나 걸쳐 있는 의자에 앉은 K는 테이블에 그대로 엎드려 잠을 자고 있었다. 팔이 저린 만큼의 무게를 지닌 꿈에서 북촌에서의 똑같은 하루하루가 반복되는 영화를 한 편 본 듯도 했다. 한참을 그렇게 엎어져 자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보았지만 여전히 그는 오지 않은 채였다. 오후의 해는 이미 더 갈 곳 없는 서쪽 하늘에 겨우 걸려있었다. 



2014/04/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