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네가
어색한 거 같아 왠지
뭐랄까 숨기고 싶은 게 있어
말하기가 그렇네
어깰 부딪치고 돌아설 때
아마 그때였을 거야
널 처음 본 게
갑자기 이방인이 된 것처럼
아무 말도 못했지
나는 나를 잃고 네 안에
너는 너를 잃고 내 속에
그렇게 마주보며 잃어가다
남는 것은 무엇일까
"뭐하냐 혼자? 커피 마시다 말고."
"김창완밴드 노래가 좋아서. 이래서 여기가 맘에 든다니까."
"맘에 안 드는 데 가긴 가니?"
"흐흐, 그렇지. 그건 그렇고. 너,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라고 알지?"
"그럼, 전에 같이 갔었잖아. 마침 법회가 있어서 법정 스님도 뵀었고."
"참, 그랬었지. 여튼, 거기서 매년 초파일 무렵이면 산사음악회를 하거든. 나도 몰랐다가 몇 년 전 5월에 성북동 다녀오는 길에 우연히 알게 됐는데 그때 초대된 뮤지션이 김창완밴드였어. 그런데 그날 비가 억수같이 내렸거든. 비는 억수같이 내리지, 무대는 설치됐는데 당장 공연이 어려우니 부랴부랴 천막을 동원하기 시작했지. 그런데 초파일이라고 설치해둔 오색등이 곳곳에 고인 물웅덩이에 수없이 비치면서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거야. 그렇게 비가 내리는데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공연을 기다렸어."
"말도 안 돼. 나 같으면 당장 집에 갔다. 물론 비 오면 그런 데 가지도 않겠지만."
"알았어. 그건 너니까 그런 거고. 들어봐. 초파일이라 그런지 거기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 표정은 온화해 보였어. 다들 옹기종기 사찰 측에서 설치한 천막에 모여 공연을 기다렸지. 그러다가 기타를 멘 김창완 아저씨가 무대에 나왔는데, 왜 있잖아, 그 분 특유의 선한 표정과 미소. 알지?"
"근데 드라마에선 악역도 좀 하던데."
"맞아. 선한 사람이 악역하니까 좀 섬뜩하더라. 그건 그렇고. 아까 흘렀던 노래가 그날 처음으로 연주한 곡이야. 노랫말 시적이지 않니?"
"연주는 좋은데 노랫말은 너무 웅얼거려서 잘 안 들리던데?"
"그런가. 그럼 들어봐, 이 부분."
나는 나를 잃고 네 안에
너는 너를 잃고 내 속에
그렇게 마주보며 잃어가다
남는 것은 무엇일까
"음, 그렇게 또박또박 들으니 시적이긴 하네."
"그렇지? 근데 그때 공연을 하면서 중간에 얘기를 하는데, 뜬금없이 자기가 젊었을 때는 술자리 같은 데서 시를 낭송하곤 했다는 거야. 그것도 T.S. 엘리엇의 시를 원문으로 외우고 다니며 줄줄 읊었대. 특히 여자들 많은 모임에서 그렇게 하면 아주 인기가 좋았다나."
"T.S. 엘리엇은 또 누구냐? 나 참. 근데 요즘 누가 시를 읽냐, 내 주변만 해도 시집 읽는 여자 한 명도 없는데, 넌 있니?"
"나도 없지. 그런데 시를 읽는 것과 누가 낭송하는 걸 듣는 건 완전히 다르지. 근데 여튼 그 얘길 하면서 이제는 그런 것들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머릴 긁적이면서 우스개 소리하듯 말하더라고. 그때 그 미소하며 순박한 표정이 참 좋더라고. 그제서야 나는 그가 쓴 노랫말들이 서정적이고 시적인 이유를 알게 됐지. 근데 아까 그 노래 제목이 뭔 줄 알아?"
"나야 당연히 모르지요."
"아이쿠!"
"그럴 듯하네."
"그치? 어쩌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순간은 마치 비 오는 날 별 생각 없이 길을 걷다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물웅덩이에 빠지는 것과 비슷한 거 같아.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말을 뱉게 되지. 아이쿠!"
"어이구, 시인 납셨네."
"시 얘기가 나왔으나까 말인데, 아이쿠하니까 생각도 나고. 너 하이쿠, 라고 알아?"
"신났네, 아주. 뭔데 그건 또?"
"이런 거야, 들어봐."
겨우내
뜨거웠던 나무에게도
봄은 오네
"이런 게 하이쿠야, 어때?"
"뭐야, 그게, 뭐 하긴 했니?"
"뭐긴 뭐야, 시지!"
"뭐, 그게 시라고?"
"하이쿠는 일본에서 인기 있는 문학 장르의 하나라고. 대학엔 강의도 개설되어 있을 정도지. 그런데 너 소설은 읽잖아?"
"가끔 읽긴 하지. 머리가 너무 굳었다고 생각될 때. 물론 그것도 베스트셀러 위주지만."
"그럼 시는, 시집 사본 적 있어?"
"글쎼, 선물 주려고 검색해 보고 산 적은 있는 거 같은데. 그래봤자 잠언 시집이었지. 음악으로 치면 베스트앨범 같은."
"법정 스님께서 쓴 글에 이런 말이 있어. 스님께서 평생 단 한 번 주례를 보셨는데, 그때 이런 말을 했대. 한 달에 산문집 2권과 시집 1권을 빌리지 않고 사서 꼭 같이 보라는 거야. 산문집은 신랑 신부가 한 권씩 고르고, 시집은 함께 골라 매일 번갈아 가며 낭송하라고 하셨대. 정말 멋지지 않니?"
"듣기에 멋지긴 한데, 그건 너 같은 문학 청년에게나 어울릴 법한 일 아냐?"
"나 같은 놈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할 건데, 문제는 같이 할 사람이 없다는 거지. 왜 얘기가 삼천포로 가냐. 그건 그렇고. 책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나는 원래 소설은 잘 안 읽었어. 그런데 단편소설을 읽고 완전히 매료가 됐지. 물론 모든 단편을 좋아하는 건 아냐. 내가 좋아하는 단편은 굉장히 소소한 것들이야.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아침에 비몽사몽, 해가 채 뜨기도 전에 출근을 하려고 집을 나섰는데 동네에 있는 작은 빵집이 아직 문은 열지 않았지만 주방에 불이 켜진 채 은근한 빵 냄새를 흘리고 있는 거야. 그 냄새를 맡은 사람은 출근을 서두르던 발걸음의 속도를 늦춰 빵 냄새의 은근함에 취하는 거야. 그러면서 생각을 해. 아직 집에서 잠에 빠져 있는 아이의 얼굴, 빵을 유독 좋아했던 옛 연인, 제빵사가 누군가 먹을 빵을 정성스레 만들 듯 자기 자신만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한 삶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는 자각. 이런 것들이 늘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그날 하루만은 특별하게 해 주는 거야. 그 사람은 괜히 기분이 따스해져 하루 종일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하게 되는 거지. 집으로 돌아갈 때 맛있는 빵을 사서 갈 생각을 하며. 사실 이런 일상적인 단편을 좋아하는 건 평소 내가 거창하고 화려하면서 들쑥날쑥한 걸 좋아하지 않는 거랑 비슷하기도 해. 별것 아닌 것들, 아주 사소하지만 그렇게도 일상적이어서 손만 내밀면 금세 잡힐 것 같은 것들이 늘 곁에 있었지만 무슨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낯설고 친숙하게 다가오는 거야. 단편이란 옷을 입고 등장하는 순간, 말이야. 그 뒤에 남는 여운도 좋아. 일종의 허전함이라고 해야 할까."
"뭐 대충 무슨 말 하는 줄은 알겠다만 그래도 나는 치고 박고 달리고 날고 하는, 숨 쉴 틈 없는 소설이 좋더라. 실제로 그런 것들이 열광적 인기를 끌기도 하고."
"맞아. 대중적 인기를 얻으려면 밋밋해서는 곤란하지. 하지만 우리들 각자가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다른 생각을 하며 살아가듯, 사회에 펼쳐지는 면면들이 다양했으면 좋겠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보려고 하잖아. 살기 바빠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분명 자기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영역이 있을 텐데. 그리고 그런 것들에서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야. 너도 마찬가지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고유한 방 하나쯤은 있었으면 해."
"그래서 넌 그렇게 방을 많이 만들려고 하냐? 영화도 이상한 것만 보고."
"야, 이상한 게 아냐. 작은 영화들이 어렵다고 하는 것도 다 편견이라니까. 그냥 자기한테 익숙하지 않을 뿐인데 그걸 다 어렵다고 규정해 버려. 그리고 너무 쉽게 외면하지. 근데.."
"그만! 알았어, 알았다고. 오늘은 그만하자. 이러다 끝도 없겠다."
2014/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