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 - 인상파의 정원에서 라파엘전파의 숲속으로, 그림으로 읽는 세상 '근대편'
이택광 지음 / 아트북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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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옛 서양 사람들은 이미지가 원본을 본뜬 것이라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원본, 즉 사실에 가까운 그림을 훌륭한 그림으로 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 움직이자, 사람도 움직이고 예술도 움직였다. 특히 서양은 근대 사회에 들어서면서 격변을 겪게 되고 이에 따라 예술도,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예술관도 변했다. 이택광의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는 근대라는 격변기를 살았던 당시의 화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근대성의 문제와 대면했는가를 살펴보는 책이다. 인상파와 라파엘전파를 통해 근대를 읽고, 산업혁명이 낳은 근대를 통해 역으로 당시의 화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읽는 책이다. 저자는 말한다. "그림은 조용히 벽에 걸려 있지만, 그 그림 속에서 우리는 소용돌이치는 세상을 본다."

 

 

도상학이나 구도, 인물이나 사물 배치, 화법, 나아가 미술사나 思潮 따위에 기대어 그림 읽기를 시도하는 책은 많다. 그러나 이 책은 그림을 그림으로서만 읽지 않는다. 그림을 읽되 당시의 정치와 사회상을 통해 그림을 읽고, 그림을 통해 그 사회 또한 읽고 있다. 앞서 말한 일반적인 그림 읽어주는 책들에서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의 결혼]은 정교하고 치밀한 묘사나 거울을 활용한 구도, 종교적 상징 등에 주목한다. 좀 더 나아가면 일반적인 초상화와 다른 시민적 초상화라는 점 등을 언급한다.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에서는 당시 딸이 집안의 재산 일부로 여겨졌던 점을 언급하며 이 그림이 결혼 서약식의 기념이라기보다는 상환할 물품 목록에 재산의 일부인 딸도 포함된다는 의미를 약정하기 위함이라고 읽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명확한 증거가 없으므로 이 가설(?)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 부분이 이 책의 그림 읽기가 가지는 특징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근대 예술은 기술의 발달이 낳은 가치의 세속화에 타격을 입는다. 근대성은 예술의 가치를 세속화시켰다. 예술가들은 여기에 각자의 방법으로 저항했다. 러스킨의 이론에 바탕한 라파엘전파는 신화나 신비주의의 세계관으로써 과학에 기반을 둔 당시의 사회 모습이나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을 제어하고자 했다. 마네를 필두로 한 인상파 화가들은 과학에 기반을 둔 세계관-경험을 바탕으로 한 실증주의와 같은 선상에 있는-을 채택했다. 그들은 자기의 세계관에 맞추어 근대와 대면했다. 그래서 같은 라파엘전파라 해도, 인상파라 해도 모두 같지는 않다. 마네와 모네, 피사로와 드가가 제각각이다. 카유보트와 모네의 생라자르 역의 풍경이 다르고, 모네와 피사로의 풍경을 그리는 방식이 다르다.

 

 

마네와 인상파가 예술을 '가상'으로 인정하고 들어갔다면, 러스킨과 라파엘전파는 예술을 '현실' 내지는 더 나아가서 그 현실 너머의 '진리'로 받아들였다.(193쪽) 인상파는 어두운 현실을 그대로 직시했고, 라파엘전파는 옛 영광을 끌어다 어두운 현실-그들의 눈에 그렇게 보였을-을 교화하려했다는 인상이다. 쿨한 인상파와 순진한 라파엘전파라고나 할까. 결국 인상파는 추상주의를, 라파엘전파는 상징주의를 낳았다.

 

 

앞서 몇 번이나 언급했듯 그림을 통해 시대를 읽는 이야기이므로 다루는 범위가 폭 넓다. 좁게는 화가들의 출신이나 교우관계에서부터 넓게는 역사, 예술론, 철학에까지 이야기가 마구 달린다. 그러나 저자는 매우 친절하게 그 길을 안내하고 있어 특별한 배경지식이나 준비 없이도 즐거운 책읽기가 가능하다. 이렇게 친절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러스킨의 예술론이나 막바지에 종종 등장하는 몇몇 철학자들의 이론에 대한 공부가 워낙 없었던 탓에 가는 걸음이 좀 더뎌지기도 했다. 그러나 시종일관 저자가 독자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음은 분명하다. 또한 이 책은 저자서문에서 비치는 저작의도를 제대로 살린 책이다. 어떻게 생각해봐도 이 책은 제목이 말하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림을 통해 근대를 읽는다는 그 목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절묘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단순히 그림의 감상법이나 그림에 얽힌 뒷얘기나 화가의 신변잡기를 통해 그림을 읽는 것이 아니다. 근대라는 시대적 특수성을 통해 그림을 읽고, 그림을 통해 그 시대를 읽고 있는 것이다. 그림을 이렇게까지 읽어낼 수 있다니 역시 공부는 좋은 것이다.

 

 

나는 그저 인상에 의지한 감상밖에 못하는 사람이라선지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의 의미와 매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렇게 그림을 밀어붙이면 그림도 나도 너무 지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니까 그림 공부에 욕심이 생기기도 한다. 폴란드 화가 벡신스키는 자신의 그림을 자신도 모른다며 굳이 이해하려하지 말라고 했단다. 이미지에 명백한 해답은 없다면서... 명백한 해답이 없는 만큼 우리는 그림을 원하는 대로 마구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럴수록 공부가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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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나다 - 첨단 패션과 유행의 탄생
조안 드잔 지음, 최은정 옮김 / 지안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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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 프랑스라는 나라에 루이 14세라는 왕이 살았어요. 루이 14세는 번쩍거리는 것, 반짝거리는 것, 휘황찬란한 것들을 너무도 사랑했던 것이지요. 썩은 물에 백조를 풀고, 온 거리에 불빛을 밝히고, 다이아몬드 단추를 몇 백 개씩 옷에 치렁치렁 달고 뽐을 냈답니다. 방의 온 벽을 거울로 장식하기도 했고 말이지요. 루이 14세의 이런 취향은 돈이 매우매우 많이 들었어요. 그러나 루이 14세는 앞서가는 센스 덕분에 사치를 하면 할수록 국가 경제에 도움을 줬답니다. 루이 14세가 살던 그 시대에 이미 메이이 백작부인이라는 슈퍼모델이, 스타마케팅이, 패션잡지와 기자가, 스타일과 브랜드가 꿈틀거리기 시작했어요. 누구 때문에? 루이 14세 덕분이지요. 그의 사치 덕분에 지금의 프랑스가 누리는 멋지고 세련된 이미지가 가능했다는군요. 뭐... 이런 동화같기도 하고 옛날 이야기같기도 한... 그런 이야기.

 

처음 몇 章을 읽었을 땐 "오호~ 그랬어? 그랬군!" 하며 눈을 번쩍였다. 프랑스의 명품 산업, 나아가서 현대의 패션과 명품의 역사를 루이 14세에게서 풀어내는 이야기가 새롭고 흥미로웠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같은 이야기의 반복에 지친다고 해야 할까. 옷과 헤어스타일, 구두, 요리, 카페, 샴페인, 다이아몬드, 화려한 도시의 야경, 접이 우산, 고급 가구, 향수와 화장품, 파티까지. 다양한 이야깃거리처럼 보이지만 사실 한번만 말해도 통할 비슷한 것들이고, 책에서 풀어놓은 이들의 성장과정 역시 비슷하니 솔직히 지겨웠다. 장마리우스의 접이 우산은 몇백 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걸 믿을 수 없을 만큼 오늘날의 그것과 차이가 없었다는 점이나, 옛 시대 영광의 얼굴들 가운데 다이아몬드처럼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는 물건이 있는가 하면 거울이나 우산처럼 그 처지가 하늘과 땅만큼 달라진 물건들이 있다는 것 등은 재미있었지만 말이다.

 

루이 14세 이전의 프랑스는 그저 유럽의 많은 나라 가운데 하나인, 별 특색도 자랑거리도 없는 그냥 프랑스였다. 그러나 루이 14세가 등극하고부터 프랑스는 더이상 그냥 프랑스가 아니게 되었다. 온 유럽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들의 삶을 주시하고 흠모하고 모방하는, 유럽에서 가장 세련되고 앞서가고 아름다운 나라가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일찌기 남다른 미적감각과 그것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던지고 뒤로 미룰 수 있는 배포(?)가 있었던 루이 14세 덕이다.

 

루이 14세 이전에는 의식주가 그저 의식주로서의 기능만을 담당했다. 옷은 입는 것, 음식은 먹는 것, 집은 사는 곳으로. 그러나 루이 14세가 등극하고는 달라졌다. 그저 생활일 뿐이었던 것들이 그의 화려한 미적 감각을 통해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잡게 되었다. 유행이 되고 동경의 대상이 되고 이를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는 새로운 것이 되어 버렸다. 온 유럽이 쇼핑 거리와 카페 지도가 담긴 파리 여행 안내서를 들고 파리로 파리로 몰려들었다. 올 수 없다면 물건을 수입했고, 물건을 살 수 없다면 그들의 생활 스타일을 담은 판화나 프랑스풍 옷을 입은 인형만이라도 구경하려고 몰려들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열광하는 아니 열병을 앓게 만드는 명품과 이것들을 소유함으로써 같이 따라온다고 믿고 있는 '멋진 삶'이라는 것의 모태가 루이 14세였고, 우리가 지금 프랑스에 대해 가진 생각들-막연하게 느끼고 있는 선입견이든 제대로 된 판단이든-역시도 태양왕 루이 14세로 인해 시작되고 완성되었다는 이야기다. 그것을 말하고 있다.

 

접이 우산의 발명이 여성들로하여금 자연을 마주하고 자아를 성찰하게 하여 일단의 여성 작가를 등장시켰다는 이야기처럼 17세기 파리의 변화를 오로지 루이 14세에게 맞추는 것은-책의 저작 의도가 그러니 강조하려는 바가 있었겠지만-좀 지나친 감이 있지만 새롭고 흥미있는 '패션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허나 가로등 유지와 관리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것 뿐만 아니라 루이 14세의 사치처럼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들까지 결국은 그 부담이 시민들의 몫이라는 걸 생각하면 씁쓸함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의 사치가 오늘의 파리를 만들었고 다양한 효용 가치를 낳았다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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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프로젝트 - 얼렁뚱땅 오공식의 만화 북한기행
오영진 지음 / 창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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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에서 오지 탐험 프로그램을 본다. 제대로 된 길도, 집도, 물도 없다. 기후조차 인간이 제대로 연명해가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그곳의 삶을 보면 막막하고 두렵고 생경하지만 막상 그곳 주민들을 보면 우리와 크게 다를 것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웃고, 울고, 욕심내고, 미래를 준비하고... 말이다. 북한에 대한 우리의 어떤 생각도 이런 오지의 삶에 대한 막연한 편견과 닿아있지 않을까? 이 작은 땅에서 걸어간들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까. 그런 거리에 있는 북한 주민과 우리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삶을 아프리카 오지의 삶보다 더 모르고 더 이해하지 못한다.

 

[평양프로젝트]는 작가 오영진이 경수로 건설 사업과 관련하여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에 1년 반 동안 머물렀던 북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평양 주민들의 일상을 보여주고 있다. 초기 설정 자체가 만들어진 것이므로 어디까지가 사실이며 어디부터가 허구인지를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이 책에서 보여주는 남녀노소 평양 시민들의 생각과 말, 생활 모습은 대부분 그의 경험을 근거로 하여 쓴 것일 테니 실제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평양 사람들의 실제 모습이라면 그들은 참으로 평범하게 살고 있다. 물론 평양이라는 지역적 특성이 있겠지만 우리가 막연하게 느끼던 폐쇄적이고 기계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마찬가지로 더 많이 갖고 싶어하고, 더 놀고 싶어하고, 더 행복해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었다. 학교를 휘어잡는 짱도 있고, 왕따도 있었다. 시부모와의 갈등도 있었으며 더 나은 학교와 더 나은 직장, 더 마음에 드는 아내, 더 능력있는 남편을 만나겠다는 욕망, 노인과 젊은이의 세대차이와 갈등도 있었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사람사이의 갈등과 감정과 문제들이 거의 다 있었다. 물론 정도와 농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통일은 점점 그 당위성이 희박해지고 있다. 아이들, 젊은이들...통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통일을 하면 독일처럼 경제적 부담을 떠안게 될까 걱정을 먼저 한다. 이런 생각의 한 켠에는 북한에 사는 사람들이 같은 민족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의 부족이 있지 않을까. 어떤 외국보다 더 먼, 갈 수 없는 나라이자 알 수 없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이 책의 미덕은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며 그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 나아가서 같은 조상에서 나온 한민족이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갖게 한다. 굳이 웅변하지 않고도 그들의 일상을 소소하게 풀어 그것을 알게 만들어 준다.

 

물론 이것은 과장된 북한의 모습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탈북하는 사람들이 이제는 더이상 우리의 관심을 끌 수 없을 만큼 흔한 것이 북한의 극악한 상황을 설명하고 있으니까. 작가의 북한 경험이란 것도 어차피 북쪽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본 것일 테고, 작가 자신이 북한 주민의 모습을 실제보다 더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삶을 위협받는 많은 북한 주민들이 아닌, 특혜를 받으며 그나마 사람답게 살고 있는 실제 평양 주민들도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보다 더 우리를 경계하고 거부할지도 모르고, 이처럼 자연스럽게 자신의 속내를 보여주거나 들킬만큼 여유로운 모습이 아닐지도 모르고,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할 겨를이 없을만큼 생존을 위협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산가족 상봉단, 국제경기 응원단, 국제경기에서의 북측 선수 등의 모습을 보면 우리의 생각이 그저 편견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 삶의 근본적인 모습이 책에서 보여주는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어찌하진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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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그가 나를 떠났다 - 2005 페미나상 상 수상작
레지스 조프레 지음, 백선희 옮김 / 푸른숲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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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지끈거린다. 방금 눈 앞에서 머리채를 쥐고 목청을 찢어대는 싸움판이 있었던가. 그렇게 [스물 아홉, 그가 나를 떠났다]는 시끄럽고 어지럽고 위압적이다. 여기에는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 자기를 토해내지 못해 안달인 인물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바통터치에 여념이 없다. 누군가의 애인이자 아들이며 딸이고, 아버지이며 어머니인 이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이야기에 급급하다.
 
스물 아홉에 실연을 한 그녀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실연의 상처 때문인가 그녀는 으르렁 거리며 주변에 걸리는 누구라도 좋으니 물어뜯을 준비를 하고 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무섭다.

 

잠시 후, 그녀를 무참하게 차준 남자의 아버지가 수도꼭지를 들고 들이닥치더니 아들 대신 이별을 통보한다. 그리고는 자기 세계에 빠져 푸념을 늘어놓고 아들의 짐을 함께 옮기자며 신경질을 부린다. 그리고는 그녀를 위로하는 척 다시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다미앙은 네게 어울리지 않아. 내가 그 애의 늙어빠진 아버지가 아니라 형이었더라면 너를 선택했을 거다. 이제 자리가 났으니 그 무엇도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걸, 그러니까 사랑을 나누는 걸 막지 못할 거야. 그 애를 잃은 널 위로하기 위해 당장 섹스를 하는 걸 말이다."

 

어느새 예고도, 그 어떤 조짐도 없이 무대 위의 주인공은 남자의 어머니로 바뀌어 있다. 그녀는 자신 혹은 자신의 집안에 어울리는 품위있는 방식의 결별을 위해 이 모든 과정을 되풀이하고자 한다. 스물 아홉의 그녀가 다시 다미앙을 향한 희망의 불을 지필 때,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그럴싸하게 그녀에게 다시 결별을 선언해야만 한다.

 

유통기한이 기입된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슬라이스 햄 같은 아버지와 유리병에 담긴 채 요구르트와 함께 냉장식품 곁에 놓인 내장 같은 어머니 사이에서 무심하고 무기력하게 마치, 접시 가장자리에 따로 놓였다가 쓰레기통에 버려져 생리대와 과일 씨, 계란껍질과 뒤섞인 채 불결한 휴가를 보내는 비계 같은 아들인 나, 다미앙까지. 

 

이들은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처럼 질서 정연한 뭔가도 없어 무시로 등장해 금방이라도 나를 물어뜯을 듯 지껄여댄다. 장터에서 벌어졌을 법한 이 시끄러운 혀의 활극은 사실 단순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 사랑이란 감정으로 엮인 당신과 나, 그러니까 우리가 실은 이런 잔혹한 관계다. 나는 나를 위한, 나만을 보는 나일 뿐이다. 부모도 연인도 언제든 서로를 할퀼 수 있는, 쥐어뜯어 상처를 줄 수 있는 관계다. 사랑은 위선이다. 사상누각이다. 한 번의 파도에 그 흔적을 쉬이 내려놓을 뿐이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

[사랑 이야기만큼 이상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모든 가정은 정신병동이다. ...환자들이 모여서 재잘거리며 휴식을 취하고, 특히나 터무니없는 말들을 고래고래 외치며 나누고, 부어오른 고통스런 기억을 대면함으로써 자신들의 광기를 유지하는 커다란 거실을 갖춘 그 집... 그들은 긴장이 풀어진 정신질환자들의 엄청난 힘으로 서로 치고받으면서 자신들의 상처를 다시 개봉한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달아났다. 나의 부모를 찾아갈 때면 그들과 뒤섞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들이 불안을 함께 나누는, 현실의 네거티브 필름으로 여기는 환각을 교환하면서 정성껏 자신들의 정신이상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그 수용소에 나는 손가락 끝도 담그지 않는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뒤틀리고 야유하고 때때로 어두컴컴한 슬픔을 보여주는 이야기를 만나면, '그렇지, 이게 현실이지.'하며 긍정하게 되었다. 여기 부모와 연인의 사랑을 발가벗기고 손가락질하며 슬퍼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렇지, 결국 사랑도 이런 거야.'하며 긍정하게 된다, 당장은. 그러나 힘겨운 한 걸음을 내딛어 좀더 깊은 곳을 마주하게 되면 저 신경질적인 감정들은 그저 단상일 뿐이며 사랑이나 우리 현실의 본질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래야만 한다,라는 생각이 더 강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지독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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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궁의 묘성 - 전4권 세트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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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수 능란한 이야기꾼이 엄연한 역사의 한 가닥을 뽑아 자신이 가진 비장의 銀絲와 함께 빛나는 천을 짜냈다고 하면 이 소설에 대한 설명이 되려나. 작가는 작품 안에서 중국에 대한 경애를 감추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라면 당연히 중국의, 그것도 마지막 왕조가 무너져 가는 넘쳐나는 드라마 속으로 뛰어들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늘의 기운을 읽는 무녀이면서도 누구보다 인간의 힘을 믿고 있던 백태태의 예언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똥을 주워 매일을 연명하는 이춘운. 가난과 절망이 그의 수호신임을 믿어 의심치 않게 만드는 이 소년에게 백태태는 부와 권위의 별, 세상을 다스리는 별 묘성이 너의 수호성이며 머지않아 中華의 재물을 모두 차지할 것이라는 예언을 준다. 대지주의 서자로 태어나 누구의 기대도 받지 못한 채 허허실실 자신을 가장하고 살아야했던 양문수도 하늘의 해와 달을 움직이는 진사가 되어 황제를 보필하는 재상이 되리라는 예언에서 자신의 길을 찾는다. 이 허구의 주인공들과 서태후, 이홍장, 영록, 강유위, 담사동 등 청조 말기에 실재했던 인물들이 한 치의 틈도 없이 아귀를 딱딱 맞추며 만들어가는 이야기는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곁다리인지 알 수 없는, 모두가 주인공인 이야기가 된다.

이야기의 시작은 물론이고 중요한 고비에는 언제나 백태태의 황금열쇠 같은 예언이 등장한다. 그러나 [창궁의 묘성]은 거대한 운명 안에서 장기의 말처럼 어쩔 줄 모르는 나약한 인간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운명을 개척하는 강인한 인간의 이야기다. 춘아의 삶은 운명의 하수인인 무녀의 예언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는 눈이 오면 얼어 죽고, 홍수가 나면 떠내려가고, 가뭄이 들면 목말라 죽는, 어쩔 수 없다며 눈물 흘리는 벌레일 뿐인 자신의 삶을 운명에 맡기지 않았다. ‘희망’이라는 낯선 단어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운명에 묻혀버리기 전에 스스로 운명을 걷어차고 창궁의 묘성을 찾아 떠난다.
또 다른 주인공 양문수도 지난하나 긍지 높은 황제의 신하로서 살아가리라는 운명을 거슬러 쉬운 길이 아닌 어려운 길에 들어서서 앞으로 올 세상에서 해야 할, 자신의 의지로 만든 숙명을 기다리게 된다.

작가는 서태후를 가녀린 여자의 몸으로 애신각라(愛新覺羅)의 어리석은 남자들 탓에 스러지는 중국을 떠받치고, 결국 제 손으로 그 왕조를 무너뜨려야 할 모진 운명의 희생자로 그리고 있다. 우리는 역사적 사실을 알 뿐이지, 그 역사적 사실을 만들어낸 動因까지도 제대로 알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때문에 역사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며 이런 소설에서야 말해 무엇할까마는 좀 뜬금없이 느껴진 것이 사실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여기 그려진 서태후가 진실에 더 가깝다 하더라도.
섬나라 사람이라 그런지 어쩐지 작가가 유난히 대륙의 거대함에 경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과거시험의 과정을 세세히 말하던 부분에서는 나 역시 그 거대함에 숨 막힐 정도였다. 어쨌든 이렇게 중국에 대해서 애정과 선망을 감추지 않지만 자국에 대해서도 고운 시선을 잊지 않았다. 이토히로부미는 잠시 등장하지만 매우 중요한 인물로서 변볍파와 광서제가 우러러 마지않는 개혁의 화신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다지 과장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래도 나는 왠지…….

신의 규칙에는 끝이 있지만 인간의 재주에는 끝이 없다. 인간이 만들어낸 창궁의 묘성,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나도 천장에 있는 그림이 설마 사람이 그린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지요. 그건 신들이 만들어낸 하늘보다 더 푸르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고통과 번민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푸른 창궁이었으니까 말이우."
"그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아름다운 창궁 한가운데에 반짝이는 별 하나가 있었지."
"그건 묘성이었지요. 그런 묘성을 왜 푸른 하늘 한가운데에 그렸을꼬?"
"화가는 단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신이 만들지 않은 것을 어전 한가운데에 그렸을 뿐일 거야. ‘蒼穹의 昴星’,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인간의 재주에는 끝이 없구려."
"그래. 신의 규칙에는 끝이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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