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화원 1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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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김홍도는 당대에 이미 그의 진가를 인정받아 벼슬까지 한, 그야말로 조선 화단의 별이었다. 그에 반해 신윤복은 오늘날의 평가가 무색할 정도로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에 대한 기록이란 화원 출신 화가이며 부친인 신한평이 도화서의 유명한 화원이었다는 것이 전부다. 이 겨자씨보다 미미한 사실에 작가는 물을 주고 상상력이라는 거름을 덮어 『바람의 화원』이라는 화려하고 신비스런 꽃을 피워냈다.

 

 

『다빈치 코드』 이후로 '팩션'이라는 말을 더러 듣게 되었다. 역사적 사실이나 실존 인물의 이야기에 작가적 상상력을 더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결국 역사 소설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어쨌든 '팩션'이라고 불리는 이야기를 대할 때 어디까지가 팩트이며 어디까지가 픽션인가에 주목하는 경우가 있다. 허나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팩트가 담겼다 하나 그것은 이 픽션 안에서 모두 허구가 되어버린다. 고로 이 작품에서도 김홍도와 신윤복이 정말 사제지간이었을까 등과 같은 지엽적인 사실 여부에 머리를 갸웃하는 대신, 단 두 줄의 역사적 기록으로 이렇게 풍부한 두 권의 책을 엮어낸 작가의 상상력에 놀라고 즐거워하며 작가가 풀어놓는 이야기를 즐기는 것이 옳다고 본다.

 

 

김홍도는 도화서 내에서 벌어지는 권력 다툼에 몸을 섞기 싫어 생도청의 교수라는, 출세와는 거리가 먼 곳으로 물러나 있었다. 그리고 생도로 들어온 신윤복을 만났다. 그는 신윤복의 재능과 세상에 도도하게 맞서는 의기에 부러움과 질투를 느꼈다. 이들의 재능을 알아본 정조는 이들에게 각기 하나의 사건을 맡긴다. 김홍도는 10년 전에 있었던 그의 스승과 친구의 석연치 않은 죽음을 조사하게 되었고, 신윤복은 사라진 장헌세자의 어진을 찾는 임무를 명받았다. 살인 사건과 사라진 그림의 비밀을 밝히는 것이 이야기를 이끄는 줄기지만 이것은 그저 이야기를 끌어가는 역할을 할 뿐이다. 비밀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만나는 많은 인물과 허를 찌르는 이야기를 김홍도와 신윤복의 실제 작품과 연결시켜가는 작가의 상상력이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바람의 화원』에 등장하는 김홍도와 신윤복은 시대를 앞서가는 천재였지만 그 재능은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화인이 소비될 수밖에 없는, 천한 그들의 신세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작품의 주된 정서다. 김홍도의 작품 [무동]에 대한 이야기가 이를 가장 분명히 보여주는 부분이다. 작품에는 악공과 무동만이 존재한다. 윤복은 이에 의문을 느낀다.
"악공이란 본시 돈많은 양반들의 행차에 흥을 돋우는 자들이니 듣는 자가 있어야 비로소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어찌 악공들과 무동만 보일 뿐 연주를 듣는 자도 보는 자도 없습니까?"
그에 대한 김홍도의 대답에서 단순히 권력과 부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울분을 느낄 수 있다.
"저들이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흥에 겨워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자신들의 신명으로 춤추기 때문이다. 돈많은 장사꾼들과 권세높은 양반들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천한 광대가 아니라 스스로 흥을 풀어내는 예인들이지."

 

 

치밀하게 안배된 비밀들이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내는 흥미로운 이야기다. 김홍도와 신윤복이라는 대가의 작품과 함께 얽힌 이야기는 더욱 빛이 난다. 화인으로서 울분을 담고 살 수밖에 없었을 김홍도와 신윤복의 상황과 감정의 묘사도 훌륭했다. 다만 주막을 주제로 한 김홍도의 그림을 독화하는 부분에서 오류가 있었고 문장에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수식이 과하게 느껴졌던 부분들이 있어 아쉬웠다.

 

 

천재가 등장하는 이야기에는 당연하게도 凡人의 열패감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런 범인의 모습은 평범한 독자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천재를 앞에 둔 평범한 사람들이 어떤 절망과 패배와 질투와 선망을 맞보게 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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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성당 1
일데폰소 팔꼬네스 지음, 정창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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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하거늘, 이 순간까지 소작농들이 지켜야 했던, 정당하고 적법한 것이 아닌 그 밖의 의무사항 역시 폐기한다. 아울러 내 영지의 주민들에게 천명하거늘, 누구나 자신의 빵을 구울 수 있는, 누구나 자신의 가축에 낙인을 찍을 수 있는, 누구나 자신의 연장을 준비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한다. 모든 여자와 어머니들, 그대들에게 천명하거늘, 영주의 자식들에게 젖을 먹이는 행위를 거부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한다."

 

베르나뜨 에스따뇰의 결혼식 날이다. 아름다운 아내를 얻은 그는 큰 잔치를 마련했다. 이웃과 친지의 축하 속에서 흥겨운 잔치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영주가 나타났고 그는 말했다.  "에스따뇰, 난 영주로서, 영주의 권리로 네놈의 아내와 초야를 치르기로 결정했느니라."
이 날부터 그의 삶은 그의 인생에서 사라졌다. 당연하게도 아내와는 돌이킬 수 없는 어색하고 안타까운 사이가 되었다. 아이가 태어나자 그는 다시 희망을 가졌지만 영주는 그의 희망을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아내는 창녀로서 세상을 떠돌게 되고 그는 자식을 안고 도망자가 된다. 자식에게만은 자신과 같은 인생을 살게 할 수 없었던 그는 도시로 가서 도시의 자유시민이 되기로 결심한다. 바르셀로나에서 살고 있는 여동생을 찾아 몸을 의탁한 베르나뜨는 아들 아르나우의 자유만을 바라며 아무런 욕심없이 살았지만 운명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억울한 오해와 비뚤어진 욕심, 귀족들의 잔혹함이 더해져 그는 사형당하고 아르나우는 복수의 칼을 간다.

 

이렇게 시작되는 이야기는 베르나뜨의 아들 아르나우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흐름을 탄다. 아르나우는 아버지를 빼앗고 자존심을 짓밟고 사랑하는 여인을 빼앗은 귀족과 사제들에게 복수한다. 그리고 자유와 행복을 쟁취한다. 당연히 그 안에는 귀족과 종교인들의 끝을 알 수 없는 어두운 욕망과 악의로 가득한 편견이 만들어내는 암흑이 그려진다. 14세기 스페인의 농노들은 살고 있는 땅의 영주에게 속한 노예로서 그 어떤 권리도 가질 수 없는 위태로운 존재였다. 영주들은 하인의 재산 일부분을 승계했고, 간통한 여자의 재산 일부분 혹은 전체를 차지했고, 자식 없이 죽은 소작농의 재산 일부를 위임받았으며, 마음대로 소작농을 학대하거나 그들의 물건을 차지할 수 있었다. 영주들의 땅에서 화재가 일어나면 소작농들이 배상해야 했고, 베르나뜨의 일에서 알 수 있듯 영주는 소작농의 아내를 함부로 차지할 수 있었던 초야의 권리 또한 지니고 있었다. 힘없고 가난한 민중들이 의지할 유일한 안식처인 종교도 그들을 외면했다. 사제들은 귀족들과 함께 특권을 지키고 더 큰 힘을 가지기 위해 무지한 사람들을 선동하고 죄 없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아 공포정치에 한몫을 담당했다.

 

스페인에서 공전의 히트를 이루어낸 이 역사소설을 통해 학교에서 개략적으로 배우는 유럽 역사에서 알 수 없었던 민중들 삶의 비참함이나 따뜻함을 알 수 있었다. 소설이긴 하나 작가노트에서 알 수 있듯이 뻬드로 3세의 연대기를 바탕으로 당시의 관습법 등을 참고하여 만들어진 이야기라 작품 안에서 그려지는 민중들의 삶이 당시에 실재했던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다의 성당』은 분량이 상당한 장편 역사소설이다. 이런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강력한 서사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그것을 지니고 있다. 번역문이라는 걸 감안해도 묘사는 한결같고 문장은 투박하다. 그렇지만 탄탄하고 감정을 모두 이입할 수 있는 서사가 그런 단점을 압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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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와 함께한 그해
아르토 파실린나 지음, 박광자 옮김 / 솔출판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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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타넨은 도시를 떠났다. 아내를 떠났다. 직장을 팽개쳤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토끼와 함께 핀란드의 아름다운 산천을 떠돈다.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평범한 도시인 바타넨은 아무렇지 않은 '듯' 살고 있었지만 정말 괜찮았던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우연한 기회에 일상을 벗어버리고 과감히 숲으로 걸어 들어갔으니까. 그가 일상을 벗어났다고 해서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는 너무도 평범하다. 도시인이자 생활인인 누구나가 일탈을 꿈꾸지 않는가.

 

바타넨을 숨 막히게 하는 것은 그를 둘러싼 도시와 도시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생활 전반이었겠지만 당장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던 건 아내와 직장이었을까. 그는 아내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녀는 흉한 옷을 사는 습관이 있었다. 흉측하고 쓸모없는 옷들을 사서 얼마 입지도 않고 금방 싫증을 냈다. …집 안은 여성지가 추천하는 온갖 무취미한 상품으로 뒤죽박죽이 되었다. 대형 포스터와 불편한 소파가 공간을 차지해서 움직이려면 곳곳에 부딪칠 정도였다. 다양한 물건들은 서로 어울리지 않았다. …연초에 아내는 임신을 했지만 신속하게 유산해버렸다. 아이의 침대가 살림살이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물론 침대 때문에 유산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바타넨에게는. 그는 기자라는 자신의 직업을 향해서도 한숨쉬고 있다.
[그의 직업은 그럴듯한 것이었다! 그가 만드는 잡지는 온갖 불공정한 일을 보도한다면서 막상 사회의 근원적인 병폐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침묵하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그는 시키는 일만 하면서 비판적인 지적은 포기했다. …경영자가 어떤 기사를 기대하는지를 별 볼일 없는 영업 담당자가 전해주는 상황이었고, 그에 맞추어 기사를 쓸 수밖에 없었다. 잡지는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 아는 것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정보가 희석되고 더러워지고 경박한 오락거리로 변조되는 것이었다. 정말로 멋진 직업 아닌가!]

 

그래서 우연히 자신이 타고 가던 차로 달려와 부딪친 토끼와 함께 1년의 시간을 숲에서 숲으로, 호수에서 호수로 방랑했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사건을 감당해야 했으며, 더불어 많은 부조리한 범죄-그에게는 22개의 범죄 목록이 달렸으니-를 뒤집어 썼다. 아내와 직업과 함께 한 도시에서의 생활에 그가 얼마나 진저리를 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위에 인용한 부분 외에는 자세히 알 수가 없지만 가끔 작은 소도시에 나와서도 갑갑함을 느끼며 얼른 숲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그와 토끼를 보면, 그가 이미 야생 토끼랑 같은 환경을 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한번 말하겠다. 바타넨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특별히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평범한 도시인이다. 도시인은 누구나 자연과 일탈을 꿈꾼다. 물론 도시의 삶을 외면하고 숲으로 걸어 들어갈 용기를 가진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바타넨이 숲으로 들어갈 만큼 남보다 더 절박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좋은 기회, 토끼라는 황금의 인연을 만났고 그래서 모두가 꿈꾸는 자연의 삶을 맛볼 수 있었다.

 

『토끼와 함께한 그 해』는 절박하게 못 견디게 그리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득 문득 뒤통수 어디쯤에 와서 '똑똑' 손기척을 주는, 그 달콤한 일탈에 대한 가벼운 이야기였다.

뒤집어 쓴 범죄 때문에 그는 수감되었고, 탈옥했고, 누구도 그의 행적을 모른다. 그는 자연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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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머니
이시다 이라 지음, 오유리 옮김 / 토파즈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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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의 시대고 돈의 시대다. 성실이니 노력이니 도덕이니 하는 옛 시대의 덕목들은 말 그대로 '낡아빠진 구호'가 되어 이제는 공허한 외침조차 만들어낼 수 없다. 매주 발표되는 로또 한 방에 인생역전을 노리는 것은 일상이 되었고, '대박'이란 단어는 한국인의 기본 어휘로 오늘도 바쁘게 여기저기를 부유한다. 부자가 되는 것, 돈을 거머쥐는 것 말고는 꿈이 없는 사람들의 시대다. 아이들에게 꿈이나 소원을 물어보면 열에 여덟은 부자가 되는 것이라고 답한다. 부자가 되어서 뭘 할 것인가를 물으면 그 대답이란 것이 아무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조악하기 그지없는데, 이는 한 밑천 만들기를 평생토록 소원하는 어른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돈의 시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만드는 땀방울을 밀어내고 '하이 리스크에 하이 리턴'을 외치며 그저 부자 되기만을 노래한다. 그 돈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시류에 영합-'쩐의 전쟁' 운운하는 띠지는 또 뭐람-한 듯한 참으로 멋대가리 없는 『빅 머니』라는 제목의 이 책 역시 돈의 시대에 부자가 되는 길, 그 짜릿하게 살 떨리는 쾌감을 보여줄 뿐, 그 이상은 없다.


어디에 이력서 넣기 심히 민망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주인공 청년은 20대의 가진 것 없는 백수가 지닐, 딱 그 만큼의 비뚤어짐으로 세상을 보며 하루하루를 빠찡코에서 보내는 중이다. 꿈도 희망도, 돈도 일도 없이 지방의 부모에게 1년의 보조를 부탁하며 그럭저럭 살고 있었다. [누군가를 위해, 세상을 위해선 어떠한 도움도 되고 싶지 않다. 무리에서 떨려난, 굶주린 늑대라도 된 양 배배 꼬인 자존심에 겨우 매달려 있을 뿐. 번듯한 일자리를 여봐란 듯 꿰찬 또래들로부터 뒤처져, 갈수록 힘들어지는 내리막을 두 발바닥에 올곧이 느끼면서도 나는 남다른 존재라 맘 한켠에서 믿고 있었다.] 말은 이렇게 해도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현재 처지란 것이 늑대는커녕 살찐 오리도 못 된다는 것을. 이쯤에서 알 수 있듯 주인공은 평범한 젊은이였다, 노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런데 야거(yager)는 야거를 알아본다던가. 웬 노인이 그에게 다가와 아르바이트로 비서직을 제안했다. 노인은 지하 경제에서 돈 좀 굴린다는 할아버지로-어쩐지 '쩐의 전쟁'에서 신구 할아범과 주인공이 연상되는-청년에게서 뭔가를 감지한 모양이다. 청년은 이때부터 몇 달 간의 투자전쟁에 몸을 싣게 되고 이것은 그의 인생을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든다. [그곳은 근면과 성실성 같은 일상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덕목이 별 의미를 갖지 못하는 세계다. …일단 뼈까지 시장에 담그고 나면 이쪽 세상으로 되돌아오긴 어려울지도 모른다. 마켓을 지배하는 황금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노동의 대가가 아닌, 리스크를 감수한 대가로 벌어들이는 돈에 맛이 들기 때문이다.]


『빅 머니』는 청년이 노인을 만나 마쓰바 은행을 상대로 한 투자전쟁을 치르는 몇 달 간의 이야기다. 노인은 그 시간 동안 청년에게 마켓이라는, 돈이 돈을 부르고 돈이 사람을 먹어치우는 무서운 세계를 보여준다. 노인이 마쓰바 은행을 상대로 전투를 감행하게 된 데는 해묵은 은원도 있고, 변액 융자 보험 피해자들에 대한 나름의 정의감도 있었다. 근데 그 정의감이란 것에서 좀 피식하게 되었다. 그 피해 노인들의 이야기가 슬슬 몰아치는 부분에선 '어이, 제발 정의인양 잰 체하지만 말아줘.' 라는 심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시대가 변했어. 한 나라의 성쇠를 판가름하는 파도가 몇 차례 지나갔네. 이제부터는 청운의 로망도, 다같이 일하고 다같이 잘 살자는 공동성장도 기대할 수 없어." 이야기는 그저 너무도 변한 오늘의 시장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더 이상 생산하고 판매하여 수익을 올리는 것으로는 경제의 한 귀퉁이에도 다리를 걸칠 수 없는 미친 시대에 '나는 마켓과 상관없어, 난 돈놀이 몰라, 투자? 그게 뭔데?' 라고 아무리 아닌 척해봤자 전 세계를 덮고 있는 시장의 우산에서, 그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 모르는 우리는 어쩌나. 그저 당할밖에 도리가 없다, 보험 피해자인 그 불쌍한 노인들처럼. 이 책을 읽으면 당하지 않느냐? 물론 아니다. 돈도, 기술도, 두뇌도, 근성도, 하다못해 체력조차 없는 나는 앞으로도 계속 당하고 살 것이다. 나와 상관없는 누군가가 흔드는 마켓의 우산, 그 우산이 만드는 그늘 아래서 웃고 울 것이다. 그래도 알고 당하는 거랑 모르고 당하는 거랑은 다르지 않겠냐고? 다르긴 뭐가 달라, 마찬가지지. 눈물 콧물 뽑는 건 마찬가지지.


마쓰바 은행의 주가가 77엔에 이르고 노인이 매수 주문을 냈을 때야 증권거래법 위반에 생각이 미쳤다. 나는 그렇다 치고 그 청년은 정말 그 때까지 거기에 대해선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걸까? 그렇담 그는 마켓이라는 마약에 빠져 정신 못 차리고 있었음이 분명하고, 그게 아니라면 작가가 그 뻔한 결말로 이끌기 위해 미리 안배한 것일 텐데…… 그 결말이 너무 뻔해서 이야기는 입체감이랄까 그런 것이 없더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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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개
양쯔쥔 지음, 이성희 옮김 / 황금여우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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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인정스럽고 반듯하며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을 보고 '인간적이다' 라는 표현을 쓴다. 이와는 달리 거칠고 제멋대로이며 도리를 모르는 사람을 욕할 때 '개 같다' 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있다. 앞서 말한 '인간적이다' 에서 그 인간이란 우리가 그렇다는 것일까? 난 당연히 아니며, 우리의 이상이 녹아든 관용적인 표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욕을 할 때 개를 들먹이는 것 또한 우리의 오만한 천성이 깃든 표현일 뿐이지 실제로 개들의 습성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세상에 난 것 중에 싸잡아 한 마디 말 안에 구겨 넣을 수 있는 것이 몇이나 될까. 사람과 개도 그리 단순하게 나눌 수는 없다. 특히나 요즘처럼 연일 경악할 만한 사건과 범죄가 일어나는 인간세상이나, 사람대신 그 눈이 되어 평생을 사는 개의 이야기를 접한다면 무엇이 인간적이고 무엇이 개 같은 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야야 할 것이다.


『사자개』는 인간이면 마땅히 이러저러하게 살아야 한다고 모두가 생각하는 그런 인간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개 이야기를 읽고 왜 인간성에 대해 생각해야 할까? 여기 등장하는 사자개들 한 마리 한 마리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티베트 초원을 지키고, 초원의 사람들을 수호하는 사자개는 우선 그 겉모습부터가 다른 개와는 다르다. 티베트 사람들이 사자개를 지칭하는 썬거라는 말이 사자를 뜻한다니, 게다가 칭기즈칸의 유럽 정벌에 한 역할을 담당했고 당시 유럽으로 건너간 이들에 의해 현재의 대형 견종 상당수가 탄생했다니, 이 녀석들이 그저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개들이 아님은 분명하다. 곰이나 늑대들도 두려워하는 야수보다 더한 야수가 바로 이들이다. 이들은 그 육체의 강함을 그에 못지않은 정신의 강인함으로 더욱 공고히 하여 자연과 인간을 지킨다.


이야기는 작가의 아버지가 기자로서 티베트 초원에 파견되었을 때 겪은 경험을 기자가 들려주는 형식이다. 아버지가 발령받은 시제구 초원으로 가는 길에 샹야마 초원의 일곱 아이들과 깡르썬거라는 황금빛 갈기를 가진 사자개를 만났다. 그리고 이들의 길고 긴 모험담이 펼쳐진다. 깡르썬거와 일곱 아이들은 지난 사자개 전쟁 당시 원수지간이 된 시제구 초원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시제구 초원의 영지견들을 상대하게 된다.


이를 시작으로 독자는 앞으로 깡르썬거의 반려가 될 나르, 시제구 초원의 사자개 대왕과 나르의 언니 궈르, 대왕의 충신인 회색 사자개, 양치기 개지만 야심만만한 까바오썬거, 그리고 송귀인이 복수의 도구로 기른 음혈왕까지 수많은 사자개를 만나게 된다. 이들은 아버지, 티베트 사람들, 초원에 와서 공산당의 정책에 따른 포섭 정책을 펼치는 한인들과 마찬가지로 작품 안에서 주요한 하나하나의 캐릭터가 된다. 작품은 이들 각자의 개성을 뚜렷하게 그리고 있다. 많은 개가 마치 사람처럼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이 이 책의 매력이다.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는 힘이다.


이야기는 매력적이고 흥미롭다. 그러나 글이 유려하다고는 할 수 없다. 게다가 번역은 자연스러운 문장이 되지 못하고 교정을 본 건지 의심스럽게 만드는 오타들이 끊임없이 눈에 띄었다. 어쨌든 그런 상황에서도 사자개들은 인간을 위해 그들을 지키고 그들의 원수를 꺾기 위해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인간을 살리기 위해 몸의 피 한 방울까지 젖으로 만들어내는가 하면, 무리의 왕을 죽게 한 원수조차도 그가 인간이라는 이유로 도울 수밖에 없다. 그들의 피가, 태고부터 기억된 영혼 속 인자가 그들을 그렇게 이끄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초원의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숭배된다. 초원의 사람들에게 사자개는 가뭇없이 사라지는 하찮은 생명이 아닌, 신의 현신과 같은 존재다.


깡르썬거가 온갖 고난을 이기고 초원의 사자개 왕이 되는 것, 아버지가 많은 어려움을 뛰어넘어 믿음으로 사자개를 구하고 초원의 평화를 끌어오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박진감도 넘치고 재미있다. 조금 더 들어가면 진정한 인간성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주고 있어 유익하기도 하다. 어찌 보면 단순한 주제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성을 잃어가는, 인간성이란 것이 사라져 가는 현대에 개를 통해 인간을 말하는 역설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힘이 있다.


이야기의 진행은 답답하고 때때로 부조리한 상황에 도달하기도 한다. 왜 저렇게 꼬여만 가는 걸까, 왜 저렇게 막무가내일까. 그러나 그것이 당시 중국의 모습이고 당시 티베트 초원의 모습일 것이다. 신과 함께하는 사람, 자신들만의 종교와 법률을 지키고 숭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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