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류학이란 무엇인가
리햐르트 반 뒬멘 지음, 최용찬 옮김 / 푸른역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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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최근에 학계와 대중을 불문하고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고 '문화'라는 용어가 우리 삶의 총체적 제 영역들을 새로이 설명하는 핵심적인 개념으로 대두하고 있다는 것은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역사학에서도 기존의 역사학에서의 지향과 방법을 비판하며 포괄적인 의미로서의 '문화'를 다루고자 하는 문화사가 각광을 받고 있다.

지난 수십 년 간 뚜렷한 성과를 남긴 새로운 경향의 역사연구들, 즉 미국의 신문화사나 이탈리아의 미시사, 프랑스의 심성사, 독일의 일상사와 역사인류학 등을 고정적인 하나의 범주로 묶어 동질적인 단위로 사고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따르는 일이겠지만, 이들 사이에는 분명 몇 가지 공유하는 속성이 있다.

기존의 정치·경제사와 사회사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것, 보통 사람의 행위와 가치 그리고 그들이 거기에 부여하는 의미와 같은 지금까지 그러한 역사학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영역에 주목한다는 것, 문화인류학의 이론과 연구 성과들을 직·간접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대개 방법론적으로 미시적인 단위에서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분석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경향의 역사학이 갖는 이러한 속성은 곧 근대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반성에서 시작한다.

즉, 지금까지의 역사학이 기술 혹은 해석한 바대로 과거(혹은 '전통')가 오늘날의 근대를 목적론적으로 지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근대 때문에 역사에서 배제된 다양한 지향의 과거를 고찰하는 것이 새로운 역사학의 과제이다. 이 책은 역사학계 내에서의 그러한 새로운 움직임 중 하나로 독일의 역사인류학의 발전과정과 시각, 연구주제와 과제들을 개괄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따져 볼 것은, 새로운 역사학에 대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보다도 이러한 책이 우리말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책이 우리말로 굳이 번역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신문화사로 통칭되는 새로운 경향의 역사학이, 다른 부문에서의 혁신적인 시도들과 결합하여 인간과 그 역사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서구 지성사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새로운 역사학의 동향을 국내에 소개하는 것은, 비록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충분히 고민하기도 전에 그것으로 인해 새로운 문제의식을 떠안게 될 우려가 있지만, 방법론적인 면에서 한국의 역사학자들에게도 좋은 자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찬찬히 읽어 봤을 때, 이것이 그러한 자극을 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학문적 논의에도 민족주의적 동기는 있다. 프랑스의 사료를 다루는 것만이 프랑스의 역사학인 것은 아니다. 역사를 기술하고 해석하는 프랑스만의 독특한 방법과 이론이 있다면 그것도 '남의 나라'의 역사와 구별되는 프랑스의 역사학이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이 책은 독일 역사학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독일의 지식대중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뿐, 우리에게 어떤 새로운 시사점을 주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아 보인다. 특히 저자가 책 속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사실 새로운 역사학에서 독일의 역사학계는 다소 주변적이고 미국과 프랑스 혹은 이탈리아와 같은 독일 이외의 국가들이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데, 우리는 주변국의 문제의식까지 수입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이 책에서의 언급이 주요 연구 성과와 학자 이름의 나열에 그치고 있고, 독일에서의 시도들에 치중하여 독일 바깥에서 나온 굵직굵직한 연구 서적에 대해서는 어떤 심도 있는 해석이나 평가도 없는 대신, 새로운 경향의 역사학에 영향을 끼쳤다는 이유로 기어츠나 부르디외 혹은 살린즈 같은 학자들의 사진을 여러 장 실어 놓은 것은 우스꽝스럽다 못해 한심스럽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지금 물밀 듯이 국내에 소개되고 또 그럭저럭 팔려나가고 있는 '문화' 또는 '문화사' 관련 서적들에 '묻어서' 같이 휩쓸려 온 게 아닌가 생각한다. 새로운 역사학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해당 분야의 고전적인 저작들을 직접 읽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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