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가는 길
임채욱 지음 / 아트제ARTSEE(주)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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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에 지리산은 어머니같은, 뭇 생명들을 품는 넉넉한 산이다. 이쁜 것과 특색을 쉽게 나타내지 않지만 생명이 살아 있는 친근한 모습을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산이다.

이 점은 이 산이 경상남도와 전라남북도의 5개 행정구역에 걸쳐 있는 넓은 공간으로서의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이 세상에 넉넉한 산이 한둘이 아니고 넉넉하지 않은 산이 어디 있겠냐만은 지리산을 생각할 때면 유독 그 넉넉함이 늘 다가온다. 모든 사람들에게 나름의 캐릭터가 보이듯이 인간들은 여러 산들에게 나름의 정체성을 부여하기 마련인데 설악산처럼 화려하고 금강산처럼 풍광이 뛰어난 것에 비해 지리산은 얼핏 보기에도 이쁜 면으로 자신을 보이는 산은 아닌 듯 하다. 또한 이병주의 <지리산>이나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접한 이들이라면 지리산이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같이 한 배경을 지닌 산이라는 점에서 이 산의 느낌과 성격을 더욱 다양하고 복잡하게 바라보이게 만들지도 모른다. 사실 아름다움의 기준은 각자 다르겠지만 지리산은 외향적인 아름다움을 쉬이 내보이지 않는다. 백두대간의 끝자락으로 내려와 넉넉한 공간에 자리잡으면서 한편으로 심심하고 무심한 듯이, 생명있는 모든 것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산처럼 보이기도 한다.

임채욱 작가의 <지리산 가는 길>의 첫 번째로 수록된, 지리산의 병풍처럼 펼쳐진 작품을 펼쳐 보았을 때의 이 산은 일찍이 하서 김인후 선생이 얘기했던 산외유산산부진(山外有山山不盡; 산 밖에 산이 있으니 산이 다함이 없네)의 구절이 저절로 떠오르는 장관이다. 이 장면은 몇몇 특징에서 다른 산 사진들과는 차별점을 보인다. 마치 큰 종이로 산의 스카이라인을 그려서 가위로 오려낸 후 그 종이마다 검푸른 물감을 물들인 후 여러 장의 그 종이 산(?)들을 중첩시키면 이 작품과 얼핏 비슷해 보이지 않을까. 차이점이 있다면 생명이 살아숨쉬는 산을 담았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므로 첫번째 작품의 이 지리산은 산들의 산, 드넓고 넉넉한 산, 어머니와도 같은 산의 모습이다. 이 모습은 지리산의 특색을 이쁨이나 절경이라는 형태로 잘 드러내지는 않는다. 이곳이 지리산이라는 명기를 하지 않는다면 어느 이름모를 산이겠거니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일반성이 지리산의 정체성과 보편성을 잘 보여준다. 얼핏 보면 동양화같기도 하고 검푸른 채색이 입혀진 추상화처럼 보일 정도로 특색과 구체적 아름다움이 거의 배제된 장면이지만 엄연히 실사를 담은, 그러나 넉넉한 지리산의 정체성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넓고 넓은 지리산을 담은 풍경들은 수도 없이 많고 사람마다 지리산의 느낌이 다를 터라서 한 작품만으로 말한다는 것이 우스운 일일 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 하나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감동했고 지리산이 지닌 어떤 한 면을 잘 드러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 4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집에서 1장 지리산 종주길은 지리산의 드넓은 모습을 보여주기 전에 지리산으로 입장하는 듯한 작은 숲길을 먼저 보여준다. 그 길에서 토끼도 만나는 장면도 정겹지만 마치 한반도 모양을 닮은 듯한 숲과 허공이 그려내는 모습의 장면에서 작가의 남다른 눈썰미가 느껴진다. 이어서 드러나는, 말 그대로 첩첩산중이라는 단어가 그대로 떠오르는, 줌아웃이 극대화된 지리산의 장관이다. 몇몇 장면에서는 조금 줌인하여 숲과 나무의 모습들이 드러나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산세가 잘 드러나는 전경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산위에서 오롯이 자태를 자랑하는 소나무들과 자연의 풍화에 거의 모든 것을 내주고 거의 줄기만 남은 채로 서 있는 고목과 이름모를 혹은 이름붙여졌을지도 모를 바위의 몇몇 장면은 살아있는 풍성함을 더했다.

2장 지리산 둘레길에서 임채욱 작가는 하동 평사리에 있는 부부송(나란히 서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면서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따라 대상이 지닌 모습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임 작가는 무려 수십장을 할애해 부부송과 주변의 장면들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1년 후에도 5년 후에도 거의 그대로인 콘크리트 건물에 비해 1분 1초후에도 다르게 보여질 수 있는 모습이 자연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모습이 소나무라는 정체성을 유지한다. 생명의 변화와 정체성의 성격은 늘 인간들에게 영감을 준다. 바라보는 그 시선을 잃지 않는다면 말이다. 개인적으로 부부송의 여러 장면들 중에서 하얀 새들이 나무 위에서 쉬고 있는 장면은 너무나 정겨웠다. 지리산 둘레길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도보여행을 할 수 있는 총 300여km에 이르는 순환의 순례길이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도 훌륭하지만 지리산 둘레길도 산티아고와 단순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순례길이다. 그곳을 지나다보면 이 매력적인 부부송을 만날 때가 있을 것이다. 임 작가는 지리산 둘레길에서 자칫 산악열차 건설이라는 자연의 파괴 앞에 없어질 지도 모를 부부송 주변의 풍광을 애정어리게 수록했다. 2장만 보더라도 임채욱 작가의 사진집이 여러 평범한 풍경사진집(?)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3장 지리산 실상길에서 작가는 가장 인간적인 줌인으로 내려와 지리산 마을 한 가운데에 있는 실상사의 모습과 그 곳의 도법 스님과 그 분이 조성해 놓은 실상길을 비춘다. 지리산의 넓이와 둘레길의 사이즈(!)에 비하면 작고 짧기 그지없는 공간이지만, 쌀 한톨에도 우주가 담겨있듯이 그곳에도 자연과 인간의 세계가 온전히 들어 있다. ‘넓은 절 마당, 푸르른 소나무, 고요한 눈빛, 가벼운 발걸음, 그리고 온 실상사, 온 세상, 온 우주와 함께’라는 도법 스님의 시처럼 신비한 작은 길은 삶과 구도의 길과 자연의 길이 다른 듯 하나임을 보여준다. 수행을 위해서는 별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얘기들 하지만 우리의 삶 자체가 곧 수행과 다르지 않다. 다만 삶이 수행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과 의식하는 것은 결과의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나를 바라보며 삶을 바라보며 의식을 한다면 삶의 시간은 조금 더 알차게 흘러갈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가 보여주는 실상길은 우리 모두가 걸어가지만 길을 걷는다는 것이 수행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은연중에 일깨우는 작은 길이 아닐까.

4장 지리산 예술길에서 임채욱 작가는 작품의 소재와 방식을 2차원적인 공간에만 한정시키지 않는 면을 보여준다. 지리산 풍광을 배경으로 인간문명과 문화의 활동이 동적으로 나타난다. 이런 시청각적 작품은 여러 작가들이 시도하는 것이기도 한데 자연과 문명의 한 가운데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며 간접체험하는 느낌을 주는 듯 하다. 이 체험은 온라인, 오프라인의 경계를 넘고 대화적인 소통의 가능성을 높이는 것으로서 자주 시도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어떤 변화든 시도이든 간에 지리산같은 자연이라는 배경은 늘 넉넉한 공간을 제공할 것이다.

임채욱 작가는 마지막 작품에서 첩첩산중의 지리산을 다시 한번 펼쳐보인다. 이때의 장면은 처음 작품과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처음 작품은 지리산이라는 자연만을 보여주었다면 마지막 작품은 마을군락을 이루는 인간의 문명, 문화와 함께 하는 지리산을 보여주었다. 크게 본다면 우리는 자연과 함게 사는 것이 아니라 드넓은 자연 속에서 아주 작은 공간에 자리잡고 앉아 자연의 혜택을 받고 사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인간이 자연파괴를 걱정하는 것은 자연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터전이 파괴되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자연은 파괴되지 않는다. 인간이 없어지더라도 자연은 회복될 것이고 리듬을 지키며 순환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은 인간조차 살 수 없는 환경으로 만드는 인간문명을 걱정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지리산은 좌충우돌하는 인간과 문명을 바라보면서도 보듬고 품에 안아주는 넉넉한 어머니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작가는 작품을 통해 얘기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사진집의 장마다 수록된 표문송 경기도어린이박물관장, 박남준 시인, 이상윤 숲길 이사, 도법 스님, 최연하 큐레이터, 도서출판 아트제 김종필 대표, 임채욱 작가의 글들도 진솔함과 진정성이 잘 드러나 많은 것들을 성찰하는 계기를 준다.

점점 한류의 영역과 영향력이 커지는 시점이지만 여전히 출판시장의 환경은 녹록치 않다. 입시와 참고서, 실용서 위주의, 비정상적으로 쏠려있는 출판환경에서도 예술과 문화의 가치를 알리고자 뛰어드는 사명감을 지닌 아트제와 같은 출판사와 김종필 대표를 보노라면 그 용기와 열정에 고마움과 박수를 드리고 싶다.

작곡가인 구스타프 말러가 혹독함에 가까운 지휘활동과 공연의 일정 속에서도 짬을 내어 오스트리아의 아터제라는 호수가 있는 작은 오두막에서 자연을 벗삼아 작곡의 시간을 내고 교향곡 3번과 같은 불멸의 작품을 남겼듯이 소명을 지닌 출판사의 기획과 작품들은 사람들에게 휴식과 위안과 영감을 줄 것이다. 위안과 영감을 받을 독자들이 할 일은 그저 이들에게 큰 성공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속가능한 존재로 남을 수 있도록 애정과 관심을 잃지 않는 일일 것이다. 복지사회를 지나 본격적인 문화사회로 가는 길이 백범 선생의 언급처럼 우리 모두의 소원이 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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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 어느 포로수용소에서의 프루스트 강의
유제프 차프스키 지음, 류재화 옮김 / 밤의책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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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의무는 현세에서 상벌을 받는 게 아니며, 이 세계와는 동떨어진 세계, 선의, 세심, 희생에 기초를 둔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성싶다. 인간은 그 세계에서 나와 이 지상에 태어나고, 아마도 머잖아 그 세계로 되돌아가 미지의 법도의 지배 밑에 다시 사는 게 아닐까. 그러나 이에 앞서, 인간은 이 지상에서 그 법도에 따른다. 왜냐하면 어떤 손이 적었는지 모르는 채, 마음속에 법도의 가르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9 – 갇힌 여인>, 국일미디어, 246쪽.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이 모든 것을 떠나는 것은 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무언가 때문이 아니며, 종교라는 이름의 무언가 때문도 아니다. 전광석화같은 깨달음에 휩싸여서다. 코르크로 벽을 다 막은 방 안에서 그는 ’살아 죽은‘ 채로 묻힌다(나는 프루스트의 운명과 주인공의 운명을 기꺼이 뒤섞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점에서는 둘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죽을 때까지 자신의 ’절대‘인 예술에 복무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마지막 권인 <되찾은 시간>은 기쁨의 눈물들로 뒤범벅되어 있으며, 이는 단 한 알의 소중한 진주를 사기 위해 전 재산을 팔아치운 사람이 부르는 승전가다. 하루살이처럼 덧없는 모든 것, 찢어지는 듯한 고통, 세상의 모든 기쁨과 청춘과 명성 그리고 에로티시즘의 공허함이 창조자의 기쁨과 비교된다. 한 문장 한 문장 직조하며 매 페이지를 만지고 또 만지는 이 존재는 결코 전적으로 닿을 수 없는, 닿는 것이 영영 불가능한 무언가를 찾아가고 있을 뿐이다.’

- 유제프 차프스키 지음, 류재화 옮김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풍월당 밤의책, 112쪽.

세계2차대전의 개전초기 역사를 조금 아는 이들이라면 1940년 소련의 그랴조베츠 포로수용소의 이야기에 과거 한국의 식민지 해방 후와 같은 약간의 기시감을 느낄 지도 모르겠다.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로 독일은 유럽의 여러지역을 침공할 계획을 세우는데 히틀러가 증오했던 공산주의 체제인 소련과는 예상외로 독소불가침 조약을 맺고 유럽의 몇몇 부분을 나눠가지기로 하는 비밀협약을 맺는다. 바로 이 협약의 대표적인 희생양이 폴란드였다.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2차대전의 비극적 서막을 연다. 또한 독일의 요청으로 소련은 폴란드의 동부를 점령함으로써 폴란드는 자신들의 의지와 능력과는 상관없이 나치즘과 공산주의의 압제 하에 놓이게 된다.

유제프 차프스키는 폴란드의 화가이자 작가였으며 집안 내력에 의해 풍부한 지적 풍토와 문화적 환경에서 자라게 되나 독일의 침공으로 장교로 참전하게 되지만 소련에 의해 포로가 되어 생사를 오가는 고초를 겪게 된다. 차프스키의 증언에 의하면 15,000여명의 동료군인들중에서 학살과 유배 등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는 400명이었다. 이 비극속에서 차프스키는 영하 45도를 오르내리는 소련의 그랴조베츠 포로수용소에서 노역을 끝내고 돌아온 늦은 저녁시간에 동료포로들을 앞에 두고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강의하는, 시간과 공간의 숭고함을 일구어 낸다. 유제프 차프스키는 당시 이렇다할 자료 하나없이 기억만으로 동료들에게 프루스트의 삶과 문학을 공유한다. 풍월당의 밤의책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자 류재화의 번역으로 나온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는 바로 그 당시의 강의내용을 담은 생생한 기록이다.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마르셀 프루스트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와 더불어 근대 모더니즘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 살펴봐야 하는 소설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문학의 위대한 정점을 이룬 작품이다. 이 소설은 이렇다할 전통적인 기승전결 구조나 드라마틱한 사건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이, 유년시절의 기억과 추억에서부터 중년까지의 ‘나’를 여러 에피소드와 기억과 추억과 상상으로 이어간다. 수많은 인물들과 수많은 사건들이 하나하나 사소하지 않게 묘사되지만 결국은 지나간다. 이것들을 되살리는 주인공은 ‘나’ 혹은 더 본질적으로는 마르셀의 마음, 의식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자신의 또다른, 그러나 결국은 자신일 수 밖에 없는 ‘문학적 자아’를 통해 삶과 세계를 예술적으로 재구성한 걸작이다. ‘문학적 자아’의 불멸을 위해 프루스트는 스스로 유폐된 방에서 자신의 삶과 육신을 말 그대로 온전히 문학의 제단에 바쳤다. 너무나 예민하고 너무나 총명했던 프루스트는 이 재능을 인생의 마지막까지 불태웠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7부에 이르는, 일반도서 기준으로도 3~4천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프루스트가 펼치는 문학세계가 거시적이고 난해한 철학을 보여주고자 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첫권부터 바로 펼쳐 읽어도 좋을지 모른다. 그러나 유례없는 형식과 내용의 새로움에 약간의 적응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덧붙여 이 책을 읽은 자이든 읽지 않은 자이든 이 책을 바라보는 시선의 다양함을 바라보기 위해서라도 차프스키의 이 강의록을 보는 것은 매우 적절하고 훌륭하다.

흥미롭게도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를 읽으면서 차프스키의 자아는 프루스트의 자아와 공유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고 느꼈다. 책을 덮으면서 그 느낌은 더 커졌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나’는 마들렌 과자와 차를 마시면서 그 감각이 문득 어린 시절의 나로 되돌려놓는다. 없어졌다고 생각한 유년의 기억들이 일제히 되살아나고 있다. 내가 주체적으로 먼저 옛 기억을 불러낸 것은 아니지만 아주 사소해 보이는 물리적 감각의 자극은 나를 새로운 시간으로 인도한다. 차프스키는 이에 비해 포로수용소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프루스트의 작품을 기억으로부터 소환한다. 그의 수감이 주체적이 아닌 강제적인 것이었지만 그로 인한 절박감은 기억을 불러내는 계기를 만든다. 또한 프루스트는 지나간 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작품을 이어가지만 차프스키는 프루스트와 작품에 대한 기억을 소재로 강의를 이어간다.

또 하나의 공유점이라고 볼 수 있는 점은 프루스트 작품에 대한 차프스키의 시선이다. 지금에서는 프루스트의 작품이 개인적으로 싫든 아니든 모더니즘 문학의 중요한 분수령으로 자리매김했지만 차프스키가 포로수용소에서 강의할 당시는 지금과는 평가가 달랐을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1부에 해당하는 <스완네 집 쪽으로>가 출판사의 평판을 못 얻어 프루스트가 자비출판으로 시작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2부에 해당하는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가 콩쿠르상을 받음으로써 인정을 받기 시작했지만 이 방대한 작품에 대해 전반적인 이해를 하는 이는 여전히 많지 않았을 것이고 상황은 새롭게 일어나는 문학적 경향의 한 사례로 치부되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차프스키는 이 작품을 처음 접할 때는 생소해했으나 점점 이 작품의 매력에 빠져든다. 몇몇 부분은 읽고 또 읽고를 반복한다. 차프스키는 프루스트 시대의 그 작품을 이해하고 공감한 몇몇 이들 중의 한 명이었다. 이는 프루스트처럼 차프스키도 문학 이외의 미술이나 예술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교양이 높았던 점이 작품전반을 이해하는 데 한몫 했을 것이다.

차프스키가 정식 대학 강단이나 일반 강연의 환경이었다면 그의 프루스트에 대한 깊은 이해에도 불구하고 해설방식이 상당한 체계를 갖춘, 그러나 다소 평범한 구성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동료포로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가고 자신조차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포로수용소에서 저자의 말대로 ‘무너지지 않기 위해’, 동료들과 희망의 끈을 이어가기 위해 나누는 이야기들은 사실상 군더더기가 없고 본질적일 수 밖에 없다. 절박함은 핵심을 낳고 핵심은 심연을 관통한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생생한 묘사로 풀어낸 프루스트처럼 차프스키는 자신이 즐기고 탐독했던 프루스트의 기억을 한달음에 풀어낸다. 그리하여 그저 여러 해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제일 위에 인용한 구절처럼 작품의 단면 혹은 핵심의 하나를 비춰준다. 가장 비극적인 환경이었지만 그 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종전 후에 회고하는 차프스키의 언급은 큰 공명을 울린다.

조금의 소음도 허용치 않는 밀폐된 코르크로 덮힌 방의 프루스트라는 존재와 언제 저승으로 갈지 모르는 포로수용소의 차프스키라는 존재와 언제 확진이 될지 모르는 사회적으로 제약이 큰 환경의 독자라는 존재 중에서 누가 더 나은지 단순비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한 환경이 아니라(그것 자체가 이미 불가능한 것일테지만) 여러 제약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자아를 확인하면서 진화시켜왔다. 차프스키의 프루스트는 그 진화를 위한 또 하나의 위안과 계기가 될 것이다.

독자인 ‘나’의 프루스트를 더 이해하고 더 나아가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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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생각보다 잘 살고 있어 - 이 시대 2인 가족의 명랑한 풍속화
박산호 지음 / 지와인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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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넘어진 자신을 일으켜 세워주는 일이 하나씩은 있다. 식구들이 먹을 밥을 짓는 일, 아침마다 이불을 개고 걸레로 방바닥을 박박 닦는 일, 운동화 끈을 묶고 동네 한 바퀴를 달리는 일, 신문의 잉크 향을 맡으며 제일 먼저 눈이 가는 기사 하나를 꼼꼼히 읽는 일, 좋아하는 화초에 물을 주며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다정한 얼굴을 보여주는 일.’

- 박산호 지음, 도서출판 지와인 <생각보다 잘 살고 있어> ‘그런 일이 하나쯤 있지’ 편에서.

이제 막 어른이 되어 가는 딸 릴리와 시크하기 짝이 없는 고양이 송이와 입양한지 얼마 안된 강아지 해피와 살고 있는 엄마이자 번역가인 박산호 작가의 진솔한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평범과 비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흐릿할 뿐만 아니라 무의미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책의 소개에도 나온 것처럼 현재 한국의 가족형태는 1인이나 2인 가족이 3인이나 4인 이상의 가족보다 더 많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이 오순도순하게 사는 가족형태는 여러 형태의 하나일 뿐 이제 더 이상 주류라고 할 수도 없고 모범이라고도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있을 건 있어야 하고 갖추어야 할 것은 갖춰야 한다면 세탁기와 냉장고만으로도 충분할지도 모른다.

저자의 글을 통해 나타나는 딸 릴리의 모습은 발랄하고 총명하다. 때론 수긍하고 때론 반대하지만 엄마와 딸이 대화를 통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 모습은 너무나 일상적이면서도 너무나 아름답다. 서로 좌충우돌하면서도 서로를 솔직하게 바라봐주고 성장시켜주는 모습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쉬운 일이 아니다. 솔직히 이런 관계는 적지 않은 많은 모녀들에게 로망이 아닐까. ‘완벽하지 않은 여자와 아직 자라고 있는 여자’라고 소개되었지만 내가 보기엔 우주처럼 오랜 시간을 거쳐온 성숙한 영혼들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삶과 인간관계에 관한 호기심과 열정으로 지칠 줄 모르고 나아가며 배우는 것 같다.

저자가 딸과 고양이와 막 가족이 된 강아지와 사는 모습이 이미 평범하지 않다고 할 수 없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가족은 무엇인가 비범하다. 주된 이유는 가족과 삶을 바라보는 저자의 넒은 안목과 지혜때문일 것이다. 저자의 글은 잔잔하면서도 문득문득 드러나는 삶의 지혜와 빛이 드러난다. 저자의 지혜는 결혼과 이혼, 딸의 출산, 영어교육에서 번역분야로의 진출 등등 여러 변화의 와중에 진전되었을 테지만 이런 삶의 소재가 항상 지혜의 소재가 되지는 않는다. 누구는 슬퍼하고 누구는 원망하고 누구는 후회한다. 그러나 몇몇 이들은 이런 경험을 결국에는 지혜의 소산으로 받아들인다. 아마도 저자는 이런 존재일 것이다. 이것은 주체적인 영혼이 자리잡고 있기에 가능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쉽지 않은 길임에도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제일 위의 인용문처럼 일상의 소중함을 간직하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가 번역하기도 했던 ‘매튜 스커더’ 탐정 시리즈에서처럼 매일매일 커피와 신문, 지하철과 도서관, 호텔과 술과 책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지는 아날로그적인 일상은 저자에게도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편인 ‘우리들의 리추얼’처럼 주말 오전에 딸 릴리와 보내는 브런치의 시간은 이 일상의 리듬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자 삶을 재충전시켜주는 시간일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은 존재하는 모든 일상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 일상은 리듬을 담고 있다. 일상의 리듬은 비범을 예고하고 리듬 속에 빛나는 부분은 삶의 미래가 더 충만할 것임을 암시한다.

박산호 작가는 스릴러장르의 문학을 포함한 수십편의 작품을 번역하고 에세이 등을 낸 중견작가이다. 그녀의 수많은 다른 번역작품을 접한 적이 없는 채로 이 책을 처음 접한 것이 개인적으로는 조금 미안하면서도 이제라도 알게 된 것이 반갑다. 바다에 사는 ‘산호’는 책에도 나온 것처럼 18세기까지 식물로 오인했다가 석회질 골격이 있다 해서 광물로 여겨졌다가 최종적으로는 동물이라는 정체성이 밝혀진 시간이 길지 않다고 한다. 이름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산호가 인간들에게 알려지는 과정이 변화무쌍했던 것처럼 저자에게 삶의 여러 우여곡절과 변화가 있었음은 이 책을 통해서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결혼했지만 나름의 이유로 남편과 헤어지기로 한 것은 슬프고 아쉬운 일이었을 테지만 작가만큼 총명한 딸 릴리를 키우고 있는 것은 저자에게 가장 큰 보람의 하나일 것이다. 그보다 인상적이었던 점은 저자의 영어에 대한 능력과 과정을 볼 때 교육영역에서 나름 잘 나갈 수 있는 기회가 분명 있었을텐데 한국의 출판환경에서 쉽지 않은 번역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더디지만 조금씩 더 좋아지려는 경향을 보이는 출판영역에서 저자같은 번역가들과 작가들에게 더 밝은 미래가 있기를 고대해 본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딸이 완전히 독립하다 보면 저자의 삶은 또다른 시기를 맞이할 것 같다. ‘내 안의 올렌카’에서도 언급했듯이 누구를 바라보며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다른 의미에서 나를 주체로 내세우는 것, 그러면서 새로운 삶과 인간들과 여러 형태의 경험들이 일상이 기다리고 있을 듯 하다. 그때에 딸 릴리는 떨어져 살거나 혹은 근처에 살겠지만, 그때에 새로운 고양이와 강아지들이 식구가 되겠지만, 저자는 새로운 친구들 혹은 애인을 만나겠지만 주체적인 ‘나’로서 산다는 것의 의미가 조금 더 부상할 것 같다. 그때의 삶과 경험이 어떤 식으로든 나타나게 될 저자의 다음 작품을 일찌감치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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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검찰을 떠난 이유 - 검찰 부패를 국민에게 고발하다
이연주 지음, 김미옥 해설 / 포르체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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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무죄를 무죄라고 했다가 '얼치기 운동권 검사', '막무가내 검사', '부끄러운 검사'라는 온갖 화살을 맞은 고슴도치가 되어버린 그 사람의 화살을 하나라도 빼주어야겠어요. 제가 외면했던 그 모든 문제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피를 뿌리며 걸어간 그 사람이 조금이라도 덜 아프도록, 마음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바로 보게 해준 그 사람을 위해 저는 거기에 가려 합니다." - <내가 검찰을 떠난 이유> 시어머님께 보내는 편지 357쪽.


한때는 군대가 그랬고 한때는 국정원(전 중앙정보부 혹은 안기부)이 그랬다. 국가 조직 혹은 기관의 공공적인 성격과는 상관없이 특유의 폐쇄성이 권력의 사유화와 도구화로 오랜 기간 악용된 역사가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그리고 다른 조직들이 적지 않게 털어낸 안 좋은 유산을 검찰은 여전히 쥐고 있다.  

 

이연주 변호사의 <내가 검찰을 떠난 이유>는 책 표지의 글귀대로 검찰 조직의 민낯을 거침없이 폭로한다. SNS에 연재된 글을 정리해서인지 내용이 현실적이고 생생하다. 아마도 이 책은 일반 시민이 접할 수 있는 검찰 내부의 가장 가까운 이야기일 것이다. 어떤 조직이든 오랜 기간 존속함에도 불구하고 쇄신의 시간을 갖지 못하면 고이고 썩은 물이 생기고 매너리즘에 빠지기 마련이다. 


한때 검찰에 근무했던 이 변호사는 검사 당시의 경험과 그 곳을 나온 이후의 여러 사건들을 둘러싼 안팎의 이야기들을 현미경 들여다보듯이 생생히 묘사한다. 이 책은 크게 조직의 불합리, 스폰서 문제, 도덕적 해이 등을 다룬 1장, 검언유착, 제 식구 감싸기, 무소불위에 가까운 권력을 다룬 2장, 증거, 사건, 기록을 조작한 이야기를 다룬 3장, 여자로서 검찰에서 일한다는 것을 주로 다룬 4장의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사건의 안팎에 대한 사실과 요약을 김미옥 작가가 일목요연하게 매 글마다 덧붙였다. 이전부터 검찰에 관심이 있었던 일반시민이라도 이 책을 보면 이 조직이 이 정도였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달(the Moon)은 공전시간과 자전시간이 같고 공전시간은 지구의 자전시간과 같다. 지구에서 볼 때 달의 표면은 늘 밝은 면만 보인다. 우주선을 타고 날아가서 달의 어두운 뒷면을 보지 않는 한 대부분의 지구인은 직접 목격할 일이 없다. 직접적인 법조 관계자가 아니면 대부분 볼 수 없는 검찰의 어두운 뒷면을 이 변호사는 솔직하고 진정성 있게 보여준다.


이 변호사는 1990년대에 감사원이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 소유가 상당히 큼에도 작은 것처럼 통계를 조작한 것을 언론에 제보한 이문옥 감사관을 연상케 한다. 또한 미국 3대 담배회사의 하나였던 B&W의 니코틴 효과 증폭을 위해 암모니아 화합물을 추가한 사실을 폭로한 연구개발자인 제프리 와이갠드도 떠오르게 한다. 이연주 변호사는 검찰 밖에서, 임은정 검사는 검찰 안에서 역사의 진화를 이어가려는 공익수호자이다.


이 변호사는 책에서 역사상 최악의 기회주의자의 한 명으로 꼽히는 프랑스의 조제프 푸셰의 전기를 썼던 츠바이크의 이야기를 빌어 현재의 검찰이 푸셰와 얼마나 비슷한지를 꼬집는다.

 

"어느 도박판이든 아무래도 좋다. 왕국의 판이든 제국의 판이든 공화국의 판이든 상관할 바 없다... 권력에 달라붙어 핥고 뜯어먹기만 하면 된다. 어떤 찌꺼기 권력이라도 그것을 물리치는 도덕적, 윤리적 힘을 결코 갖지 않을 것이며, 자부심이나 긍지 같은 것을 갖는 일도 결코 없을 것이다..... 누가 무엇을 주는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 속에서 어떻게 승리하고, 나에게 이익이 되고 내 몫을 챙길 수 있는가가 문제인 것이다."(88쪽)

 

물론 이 책은 검찰의 어두운 이야기를 중심으로 서술했으므로 이런 점이 검찰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난 과거를 볼 때 여러 권력과 재력의 비리를 검찰이 성공적으로 재판에 넘긴 사례도 적지 않다. 문제는 기소권과 수사권이라는 양대 검을 쥔 검찰이 오랜 기간 국민보다는, 심지어 국가를 넘어 검찰 조직 자체라는 이권을 위해 존속하지 않았는지를 물어보아야 할 때이다.

 

"우리는 신이 아니기에 완전한 정의를 달성할 수 없고 그것에 이르는 영원한 과정에 있을 뿐이다. 그 끝나지 않을 과정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내 안의 인간과 내 밖의 인간이지, 무슨 조직이 아니다. 그러나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 것에만 온몸의 감각이 집중된 탓에 인간의 마음을 느끼는 능력이 퇴화하여 괴물이 되어버린 검사들은 조직을 사랑한다는 핑계를 대며 인간을 향해 오만한 칼날을 찍어 누른다." (81쪽)

 

현재의 대한민국은 시기적으로 보자면 힘이 있다면 모든 것이 정당화되고 통했던 권력 중심의 시대에서 인간적인 상식과 합리를 중심으로 하는 가치의 시대로 서서히 옮겨가고 있다. 실적과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위력의 시대에서 사람과 뭇 생명의 존재를 살피며 개선과 진화를 이루어 가는 인간 중심의 시대로 가고 있다. 목적보다 수단이, 인간보다 이념을 빙자한 이데올로기가 우위에 서는 세상으로 퇴행하지 않도록 지켜보고 나아가는 시민들이 증가하고 있다.


일찍이 춘추전국시대의 혼란 속에서 한비자(韓非子)는 진나라를 통해서 공평무사한 법치주의 국가의 모범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주었다. 법가 철학은 여전히 그리고 오히려 이 시대에 절실하고 유효하다. 한비자의 유도(有度)편에서는 유명한 구절인 '법불아귀(法不阿貴)'가 나온다. '법은 귀한 신분이라고 해서 아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법이 존재하되 선택적 정의와 선택적 처벌을 일삼는다면 그 법은 그들만의 법일 뿐이다. 21세기에 들어 물질적 풍요의 시대에 도달했다고 자화자찬하더라도, 복잡하고 정교한 법 규정이 있더라도, 법의 근본정신을 되새기지 못한다면 우리는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거나 여전히 시행착오를 반복해야 할지도 모른다.


기소권과 수사권이 포함된 비대한(!) 검찰권력은 일제 강점기의 묵은 숙제를 이제야 푸는 것에 불과하다. 그 당시의 경찰권력은 검찰보다 훨씬 컸고 이에 따른 권력견제의 일환이었던 부분이 있었고,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검경 수사권 조정에 대한 시기판단 등의 건설적인 토론도 이미 존재했다. 그러나 한시적으로 두기로 했던 권한집중의 시기는 너무나 길었고 조직의 관성은 브레이크없는 질주를 이어 왔다.


이제는 그 관성을 멈추고 정의롭고 공정한 검찰로 진작에 다시 태어나야 할 시기다. 이연주 변호사가 용기와 열정과 정의감으로 검찰의 어두운 부분들을 나무와 잎의 묘사처럼 생생하게 증언했다. 그렇기에 이제는 전체적인 숲의 그림을 다시 그려나갈 때이다. 그러나 숲의 그림은 모든 이가 함께 그릴수록 더 아름다울 것이다. 합리적 논의와 공론의 장은 이루어지면 이루어질수록 더 좋은 결과가 나오는 법이다. 폐쇄와 불통은 과거를 부여잡고 소통과 절차는 미래를 부른다.


너무나도 시의적절하게 나왔지만 바로 그 시의성 때문에 이 책의 취지를 많은 이들이 받아들일지언정 모두가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일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연주 변호사의 <내가 검찰을 떠난 이유>가 한국사회를 좀 더 진화시키기 위한 디딤돌의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 본질적 가치와 절대적 이상향에 바로 이를 순 없더라도 퇴행을 막고 엉뚱한 곳으로 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정표는 필요하다.


힘의 사회가 가치의 사회로 넘어가면 갈수록 비로소 대한민국 시민들은 민본과 정의와 공평무사가 허공 속의 구호가 아니라 살아 있는 가치로 느낄 것이다. 대다수의 행복은 바로 그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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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게 헤어지는 방법
이은정 지음 / 마음서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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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슬픔이나 비참함을 머금은 사람의 등 뒤에서 언제나 빛나고 있었을 저 별들은 정작 보아야 할 대상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절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희망이 있다는 희망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고 할 때, 그때도 저렇게 뒤에서 반짝이며 서 있다. 네가 믿지 않아도 나는 존재한다는 식으로 가증스럽게. 주로 힘없는 사람들의 생에서는 앞에서 절망이 빛나고 희망은 그 뒤에서 웅크리고 있다.’

- 이은정 작가의 소설집 <완벽하게 헤어지는 방법> 중에서, 43쪽(도서출판 마음서재).


이 책의 표지를 처음 본 순간 굴곡지고 고단한 삶을 일찌감치 체험한 듯한 젊은 여자의 마음이 조금 느껴졌다.

IMF 구제금융 이후 한국사회는 국가적으로는 부도사태를 간신히 탈출했으나 사회적으로는 중산층의 붕괴와 양극화의 심화라는 후유증을 낳았다. 이 후유증은 잦아들기는 커녕 이어진 국내외의 여러 큰 사건들과 금융, 부동산 사고를 통해, 심지어는 예측이 쉽지 않는 전지구적인 감염병 사태까지 번져 긴 시간 많은 이들에게 직간접의 상처를 주고 있다.

이은정 작가의 소설집 <완벽하게 헤어지는 방법>에 나오는 인물들은 2000년 이전이라면 경제적 하위계층 혹은 심신이 유달리 남다르거나 힘든 이들의 특별한 소재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은 대부분의 독자들은 느낄 것이다. IMF 이후로는 이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이젠 더 이상 먼 나라 얘기거나 다른 사회 얘기가 아니라 나의 얘기이거나 가족, 친척 혹은 이웃들의 이야기임을. 최소한 나의 친구들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이 소설집은 우연히 친구에게 엮이게 된 사건을 다룬 <잘못한 사람들>, 가족들로부터의 탈출 혹은 자유를 꿈꾸는 <완벽하게 헤어지는 방법>,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다 발생하는 이야기인 <그믐밤 세 남자>, 이혼의 쓰라린 현실을 다룬 <피자를 시키지 않았더라면>, 정직하지 않은 어른들이 아이에게는 정직함을 요구하는 <친절한 솔>, 며느리가 숨어 살고 싶었으나 정작 시어머니가 숨어 버린 <숨어 살기 좋은 집>, 작가를 꿈꾸는 남녀의 애환을 다룬 <엄 대리>, 밧줄을 풀고 자유롭게 사는 강아지를 통해 삶을 비춰보는 <개들이 짖는 동안> 등 여덟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소설집의 이야기들은 독자들이 보기에 암울하거나 슬프거나 부조리하다. 혹은 미스테리하거나 미처 이해를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인물들은 살아가고 삶은 흘러가고 독자들은 느낄 것이다. 실존의 부조리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까뮈의 이방인에서 그런 것처럼 뫼르소의 눈에 비친 강렬한 태양빛 때문에 살인했던 부조리는 과거의 이야기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적인 차이가 있을지언정 등장인물 모두가 경제적으로 쉽지 않거나 심신이 불안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서로에게 도움이 필요한 존재들이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으로 보자면 이 책은 <힘든 사람들>이란 부제를 붙여도 좋을 것이다.

이은정 작가는 소설을 통해 쉽게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생활정보지를 폐지로 주워가는 바람에 생계가 위협받게 된 남자가 할머니를 폭력하는 장면에서의 하늘은 세상을 살펴주는 존재가 아니라 불을 붙여버리고 싶은 연탄같은 하늘이다(잘못한 사람들, p.22). 세상의 좋은 점을 경험하고 인간적인 덕목을 배워야 할 어린이는 어른들의 가식, 위선, 계산을 먼저 터득하고 마는 생존법에 길들여진다(친절한 솔). 육신으로부터 결별이, 마음과 기억으로부터의 결별이 아니라 트라우마로 잠재의식 속에 잠시 묻어둔다는 것을 모르거나 외면한 채로 완벽한 이별이 시작되었다고 믿고 싶어한다(완벽하게 헤어지는 방법, p.68).

한편으로 삶은 부조리하거나 미스테리한 것이다. 할머니를 죽이는 사람은 친구인데 그 댓가를 치루는 것은 나다. 정말 잘못한 사람들은 혹은 이렇게 된 환경은 도대체 누구 때문인가(잘못한 사람들). 공황장애 등으로 인적드문 곳에서 자신을 잘 챙겨주는 남편과 조용히 살고 싶은 것은 며느리인데 그것을 사사건건 간섭하고 틈입하는 시어머니가 오히려 더 바로 옆 조용한 곳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존재로 있고 싶어 한다(숨어 살기 좋은 집).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이어지는 한 희망의 빛은 아주 조금씩 비춰진다. 그믐밤 해안가에서 나와 태수 아버지와 물에 빠질 뻔한 남자는 서로에게 쌓이거나 궁금했던 사연들을 풀어 가면서 인간과 삶에 대한 이해가 한 뼘은 넓어진다(그믐밤 세 남자). 남자가 작가가 되기를 바랬지만 혹은 작가를 계속 꿈꾸기를 바랬지만 그 희망을 잃은 뒤 헤어졌던 남녀가 로또맞은 것 같은 우연한 기회로 다시 재회할 가능성을 남겨두기도 한다(엄 대리).

이 소설집의 소재는 이 시대에 존재하는 적지 않게 많아진 힘든 계층들의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많은 독자들은 이 이야기에 공감하고 위로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더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소재주의의 알레고리에 빠지지 않고 넓고 높은 시선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의 마지막은 크게 ‘발광’을 하거나 침묵을 지키는 것처럼 그믐달이 초승달보다 날카롭다'는 구절(그믐밤 세 남자, p.92)처럼 혹은 제일 위의 인용글처럼 작가의 작품은 별과 달을 포기하지 않고 ‘의식한다’. 이야기의 소재를 소재에 머무르지 않게 바라보며 삶의 통찰과 세계의 시선이 번득이는 구절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그렇기에 앞으로도 더 넓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되 긴장감과 진정성을 잃지 않는 시선을 향해갈 수 있다면 작가 미래의 한계조차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게오르그 루카치가 언급했던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의 시절은 아니겠지만, 별과 달의 존재를 마냥 이쁘게만(?) 볼 수 있는 시절은 아니지만, 그것이 존재하는 한 그 존재로부터 시선을 거두지 않는 마음은 얼마나 충만한가.

작가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개들이 짖는 동안>에 나왔던 강아지 '덕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료를 안정적으로 받아먹고 외부인의 침입을 막으며 밧줄에 묶여 지낼지, 새로운 모험과 위험이 상존하지만 자유를 위해 밧줄을 끊고 뛰쳐 나갈지.

결국 모든 작가들은 소포클레스의 후배이며, 작중 인물들은 오이디푸스의 후예일 것이다. 운명을 예측할 수 없는 부조리한 삶이 이어짐에도 불구하고 실존을 포기하지 않는 존재의 자기존엄은 찬란하다. 치열한 작품을 남기기 위해서 치열한 삶을 살지 않기란 오히려 쉽지 않은 일이다. 화가인 프리다 칼로가 온갖 사고와 역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모델로 위대한 작품을 남겼던 것처럼 삶의 대가와 작품을 맞바꾸는 운명의 장난은 의외로 자주 일어난다. 왜 태어났는지, 언제 태어나고 싶은지도 결정할 수 없는 - 혹은 원초적인 기억이 봉인된 - 삶은 언제 떠나는 지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원초적으로 비극적이다. 그러나 지금 살아가는 실존의 모습을 이은정 작가처럼 작품으로 증언한 존재는 훗날 자신을 배태한 자연에게 혹은 신에게조차 하소연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나라는 실존으로부터 출발했으되 세계를 담고자 했으므로, 육신에 갇혀 있었으되 별을 보며 살았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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