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멸의 즐거움 문학동네포에지 59
김명리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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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남루만큼 따뜻한 이웃 다시 없어라
몰골이 말이 아닌 두 탑신이
낮이나 밤이나 대종천 물소리에 귀를 씻는데'

- 김명리 시집 <적멸의 즐거움> 중에서 (2022, 문학동네 시인선 포에지)

김명리 시인이 시집 <적멸의 즐거움>을 통해 주로 다루는 대상들은 사라져 가는 것들, 소멸해 가는 것들이다. 삶으로 치자면 생로병사의 '사(死)'이자 흥망성쇠의 '쇠(衰)'를 다루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에 김 시인의 시선으로 보는 소실되어 가는 모든 것들은 고적하다. 쓸쓸하다. 애잔하다.

흥미롭게도 김 시인이 바라보는 소실되어 가는 것들은 대부분 삶과 죽음의 명확한 경계를 넘어가지 않는다. 폐사지의 사찰로서의 기능이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폐가조차 바로 철거되지 않는다. 오래된 나무 한 그루조차도 바로 베어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듯 죽어있는 듯 서서히 사라져 간다. 이로 인해 모든 대상들은 자연과 다른 대상들과 대비해 명확한 객체성을 유지하지 않는다. 폐사지에서 어느 곳이 절이고 어느 곳이 터이고 어느 곳이 땅인가. 명확한 구획과 분리가 의미없다. 그저 자연의 일부로 쓸쓸하지만 서서히 스며들어 갈 뿐이다. 허물어져 가는 오래된 탑들조차도 바람과 새들과 더불어 우주 속으로 녹아들어 간다. 너와 나와의 경계가 무의미하고 삶과 죽음의 명확한 시간이 덧없다.

김 시인이 바라보는 죽음과 쇠락은 한 순간의 결정이나 순간이 아니라 오랜 기간의 과정일 뿐이다. 그리하여 생명 탄생의 순간이나 약동하는 봄의 활력이 주는 에너지의 반대급부로서 쇠락과 소멸의 슬픔과 쓸쓸함을 던져주는 듯 하다. 그러나 육신의 끝이 비극처럼 보일지라도 영혼의 입장에서는 또다른 삶의 단계로 가기 위한 과정이듯이 자연과 그 곳에 녹아든 소실되어 가는 대상들은 새로운 계절을 맞기 위한 갈무리를 보여준다.

끝은 끝이 아니다. 육신의 끝이 영혼의 끝이 아니듯이. 낙엽의 끝이 나무의 끝이 아니듯이. 나무의 끝이 자연의 끝이 아니듯이. 자연의 끝이 우주의 끝이 아니듯이. 그저 인간에게는 한 인간의 삶의 주기가 있고, 나무에게는 한 나무의 주기가 있고, 지구조차 한 행성의 주기가 있을 뿐이다. 특정한 대상의 한 끝은 새로운 주기를 위한 소멸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준비의 과정이기도 하다. 거지로 태어났다 삶을 마감하기도 하고 부자로 태어나도 삶을 마감하는 때가 있고 절대권력의 왕으로 태어나도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다. 이 모든 경험이 한 영혼에게서 일어나는 주기의 과정일 뿐이다.

김 시인은 삶과 자연의 찬란한 때, 절정의 시기를 주목하지 않고 그들의 전성기가 한참 지난, 쇠락하여 사라져 가는 주기의 소실점을 주목한다. 모두가 피하고 싶어하고 외면하고 싶어하는 소멸의 시간과 공간을 주목함으로써 역설적으로는 자연과 세계가 들려주는 위대한 섭리의 가치를 드러내어 준다. 이 가치는 고고학적인 단어와 문장을 건져냄으로써, 기꺼이 삶과 세계와 자연이 어우러져, 결여처럼 보이는 기나긴 소멸의 과정을 슬프도록 처연하게 들려줌으로써 언어의 사제라는 지위를 자연으로부터 서품받는다.

재물의 부자를 체험한 영혼은 마음의 부자를 체험하고 싶어한다. 마음의 부자를 체험한 영혼은 마음조차 비우고 싶어한다. 완전한 비움의 그 때가 우주의 의식과 연동이 되거나 하나가 되는 순간일 것이다. 어쩌면 억겁의 시간이 걸릴 지라도 다가올 그 순간은 물질적으로는 적멸의 시간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열반의 시간이다. 육신적, 물질적으로는 이 과정이 괴로움을 수반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즐거움을 수반한다. 이 과정을 선천적으로 받아들인 영혼은 봉인된 시간으로 인해, 육신과 함께 하는 것으로 인해 희노애락의 감정을 드러낼 수 밖에 없으나 상위의 의식은 사랑의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을 것이다. 수백년이 걸리든 수만년이 걸리든 불과 한 방울로 시작된 우리 모두의 영혼은 이 여정 위에 과정으로 존재한다. 육신으로서 가진 것이 많은 존재는 이승을 떠날 때 가져갈 것이 빈약하다. 영혼으로서 가진 것이 많은 존재는 설령 육신을 굶겼을 지라도 저승으로 가져갈 것이 많다. 그것은 영혼의 진화라는 선물이다.

육신이 고될 수록 영혼은 한층 진일보한다. 물질적인 결여가 육신에겐 고통일 수 있어도 영혼에겐 베일에 가려지지 않은 세계를 볼 수 있는 정신의 풍요를 준다. 육신은 짧고 영혼은 길다.

김 시인은 마음의 귀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으로, 이 땅에 바짝 엎드려 대지가 들려주는 수만가지의 소리를 듣는다. 폐사지의 서서히 소멸해 가는 처연한 아름다움을 듣는다. 그리고는 독자들에게 생소하지만 숨어 있던 고귀한 단어와 문장으로 고고학의 시어를 들려준다. 한번 파서는 알 수 없고 파고 또 파야 서서히 드러나는 고대 유물의 실체처럼 감상하고 또 감상하며 되새김질하며 잠자던 영혼의 원류를 일깨우는 것처럼.

현대인의 삶은 도시의 삶, 일상의 삶, 육신의 삶으로 거칠게나마 요약될 수 있다. 김 시인은 이런 현대인의 쳇바퀴의 잔잔한 삶에 노크를 한다. 도시보다는 자연을 조금 더 바라보자고, 일상의 삶에서 시를 통해 주목하지 않았던 존재들에 대해, 육신의 삶에서 가장 끝처럼 보이는, 소멸하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들을 바라봄으로써 우리 영혼을 거울처럼 되돌아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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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총량 시작시인선 379
허향숙 지음 / 천년의시작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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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문학가들에게 있어서 자전적인 경험은 작품의 주요 요소로 작용하곤 한다. 더군다나 시인에게 있어서 삶과 작품은 떼어놓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강한 연관성을 지닌다. 자식을 먼저 보낸 참척의 비극을 겪은 허향숙 시인에게 있어서 ‘시(詩)’란 가족 혹은 핏줄의 배경으로부터 출발하거나 주요동인이 되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

‘내가 지고 네가 피는 것인데
네가 살고 내가 죽는 것인데

부모 자식 간의 연속성
비켜 간 자리
생리혈 같은 통곡
질 줄 모르고 피어 있네’
- <통점> 중에서

그러나 시간을 거슬러간 비극에도 불구하고 허 시인은 슬픔을 개인의 영역에 고립된 슬픔으로만 남겨두지 않는다.

‘비가 사선을 긋는 이유도
구름이 하늘을 흐르게 하는 이유도
별빛이 어둠 가르며 내리는 이유도
풀벌레 우는 이유도
꽃이 피고 지는 이유도
슬픔이 내 몸을 지나는 이유도
웃음 한 말 빌려 오는 이유도
숨을 고르는 이유도
온통 너이기 때문이다’
- <그리움의 총량> 중에서

이 때의 ‘너’는 떠나보낸 핏줄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영혼적으로 매우 오랜 시간 떠나왔던 곳의 원천이기도 하다. 가슴으로 마음으로 그리는 온통 너라는 존재는 언젠가 다시 만나는 곳의 너이기도 하고 궁극적으로는 너와 나의 구분이 없는 하나의 세계, 고향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옷처럼 생을 벗고 입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했다’는 시인의 말은 육신의 삶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바램을 얘기했으나 스스로, 직관적으로 생명이라는 것이 연속성과 영원성을 지니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

‘수백 수천 번의 한탄과 설움, 험담, 음해, 음모, 배신 등속
비밀스런 이야기
단 한 번도 발설하지 않는 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 <나무> 중에서

영혼은 삶과 죽음의 과정을 오랜 기간 거치며 육신의 옷을 잠시동안 갈아 입으나 나무는 사계절을 통해 아주 긴 시간 생명의 속성을 보여준다. 인간의 육성으로는 알려주지 않는 나무이지만 나무 곁에 서서 그를 마음으로 바라보면 온갖 고초를 다 겪은 지혜의 선배가 많은 속삭임을 들려주는 것 같다. 그렇게 본다면 매일매일 흘러가고 있는 우리의 삶과 일상은 일상이 아니라 기적과도 같다.

‘얼었던 강물 풀리는 일
산과 들 꽃 피우는 일이
나비의 날갯짓,
철새가 대양을 넘고
대륙을 횡단하는 일이
...
이게 어디 보통 일인가요?
당신과 내가 만나
사랑하는 일이’
- <이게 어디 보통 일인가요> 중에서

우리의 삶이 일상이 아니라 기적처럼 보인다면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저 하찮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과도 같을 것이다. 인간의 눈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미생물, 꽃밭이나 정원에 가도 무시하거나 잘 눈에 띄지 않는 풀들은 인간적으로는 있으나마나 한 존재인지 몰라도 신의 시선이나 자연의 세계에서는 정작 필수불가결한 존재들이다.

‘나를 잡초라 하지 말아요
당신이 나를 모른다고
나의 이름을 모른다 해서’
- <신의 꽃> 중에서

허 시인의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애정은 생명의 경계를 넘어 무생물에게조차 시선을 잃지 않는다. 그저 음푹 파인 구덩이가 비가 온 뒤에 작고 아름다운 연못이 되거나 지나가다 걸린 돌부리가 삶의 일깨움을 자극시켜준다. 돌멩이란 무생물은 다시 삶과 인간으로 환원되어 되돌아온다.

‘아파트 뒤편
비포장 산책로에
나흘 전 내린 게릴라성 폭우로
생긴 물웅덩이
흙물 가라앉자
맑은 빛 거울 되었어’
- <물거울> 중에서

‘산길 가는데
돌멩이가 발을 걸어왔다
넘어질 뻔한 나는 돌멩이를 걷어차다가
그만 울컥, 했다
...
나도 그랬어
사랑한다는 말 대신
독한 말로 나를 넘어뜨리곤 했었지
그걸 알아채지 못하고
원망하며 떠나온 나’
- <돌멩이> 중에서

허향숙 시인의 작품세계의 가치관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나 굳이 애써 하나를 꺼내보자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애정이다. 마치 <화엄경>에 나오는 구절처럼 거대한 것,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은 것, 살아있는 것, 고정되어 있어서 죽은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가리지 않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사랑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존재하는 이 모든 것들이 반짝반짝 빛나기를 바란다.

‘그녀의 살(肉) 닿는 곳마다
부드러워지고 촉촉해지고 따뜻해지고
싹이 돋고 꽃이 피어난다

투명한 그녀의 살
일곱 빛에서 나서 수천 빛깔로,
둥근 것에서 나서 수억의 형태로 변하는’
- <햇살> 중에서

허 시인에게 있어서 햇살은 시인의 시선과도 맞닿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품는 여성성, 모성으로 인해 ‘햇살’은 ‘그녀’라고 표현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햇살과 공기가 없으면 우리 모두가, 아무도 살아갈 수 없듯이 이의 시혜를 알게 모르게 받는 존재들은 자기답게 살아갈 때, 존재답게 살아갈 때 가장 빛난다.

‘모든 것은 존재하기 위하여 살아간다

겨울은 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은 구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바다는 섬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엄마는 자식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너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겨울을 살기 위하여 겨울이 있고
하늘을 살기 위하여 하늘이 있고
바다를 살기 위하여 바다가 있고
엄마를 살기 위하여 엄마가 있고
나를 살기 위하여 내가 있을 뿐

모든 것은 살기 위하여 존재한다’
- <모든 것은 존재하기 위하여 살아간다> 전문

허향숙 시인은 삶과 죽음이 영원한 단절이 아니라 우주의 시간이 흘러가는 것에 따라 리듬처럼 이어질 것을 직감하고 있으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소중함을 인지하고 있으며 그 모든 것들을 애정으로 바라볼 때 생명력이 더 살아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직업으로서의 문학을 지니기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많은 시인들과 작가들이 쉴새없이 나오고 있다. 특히 한국처럼 다이나믹한 세계에서는 약간의 글재주만 있다면 자신의 삶의 인생 경험 하나만으로도 자전적인 소설과 시집 한 권쯤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한 권을 넘어서거나 승화시키는 것은 또다른 진화이거나 별개의 자세를 요구받는다. 이는 자신을 객관화하고 세계를 매일매일 새롭게 온전히 바라보는 시선이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허 시인은 스스로 부여한 숙제를 넘어서야 할 테지만 시선의 넓이와 진화의 열정을 지녔기에 또다른 미래를 기대케 한다.

노자의 도덕경이나 불경에서 보던 삶과 세계의 가치들의 단편들을 허 시인의 작품들로부터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한 마디의 진리처럼 바로 서술하기는 힘든 일이지만 느낄 수는 있다는 행복을 준다. 물론 자신의 삶을 사적으로 한정하지 않고 승화시키며 육신의 시선을 극복해서 넓게 보고자 하며 섭리의 세계로 다가가는 시도는 쉽지 않은 일이고 스스로의 한계를 한계로 규정하지 않고 스스로 넘어서는 일은 시인을 포함한 우리 모두의 숙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아가 스스로 던진 질문이자 숙제라면 영혼의 봉인된 기억이라는 선험성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인생의 숙제를 받아들일 것이다.

시인을 포함한 우리 모두가 나름의 벅찬 숙제를 지니고 있는 인생의 길 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허향숙 시인의 작품에서 공감과 위안의 한 조각을 얻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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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세 감독, 이창동·홍상수·봉준호 - 임우기 영화비평
임우기 지음 / 솔출판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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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샤먼(Great Shaman)은 어떻게 밝혀지는가.
- 임우기 평론가의 <한국영화 세 감독 - 이창동, 홍상수, 봉준호> 비평.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지난 시점인, 21세기를 넘기기도 전인 1996년에 독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위르겐 하버마스가 내한해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현대사회에서 철학의 역할이란 주제로 강의를 했었다. 그 당시 프레스센터엔 하버마스뿐만 아니라 김우창, 이명현, 김광수 교수 등을 비롯한 한국지성들이 같이 모여 이 멋진 주제에 대한 질문과 토론을 이어갔다. 당시 나는 하버마스의 현대성에 대한 철학적 담론과 의사소통과 공론장에 대한 하버마스의 책과 글들이 주요 관심이기도 해서 일과로 바쁜 몸을 이끌고 참석했었다. 현대성(Modernity 혹은 근대성)이란 당시 유행하던 포스트 모더니즘의 유행과 맞물려 폐기해야 할 근대의 산물인지 여전히 질서를 위한 최소한의 개념인지에 대한 성찰에 많은 고민을 했었던 것 같다. 또한 지금에서도 여전히 한국에서 자리잡고 있지 못한 의사소통을 위한 사회적 공론장의 토대가 어떻게 가능한 지를 놓고서도 사색의 중점을 두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프레스센터에서 하버마스의 여러 이야기 가운데 가장 폐부를 찌른 것 중의 하나는 한국은 아시아의 긴 전통 속에서 불교를 비롯한 여러 사상적이고 철학적 소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지성들이 이를 영감으로 하거나 바탕으로 삼은 지성적 성과물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우회적 비판을 한 기억이 난다. 이미 구한말에 동도서기(東道西器)란 말이 등장했음에도 우리는 서구 물질문명의 모든 장점과 단점을 온전히 겪고난 21세기가 되어서야 아시아를 비롯한 한국 정신문명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는 것일까.

출판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임우기 선생의 영화평론집 <한국 영화 세 감독, 이창동, 홍상수, 봉준호>는 내가 인지하는 한 동학을 중심으로 혹은 한국사상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영화평론을 전개한 독보적이고 선구적인 저작이다. 이 사실은 임 평론가가 <네오 샤먼으로서의 작가>를 통해서 이미 문학에서 고유의 평론을 전개하였지만 영화의 영역으로 그 관심사를 넓힘으로써 사상적으로나 장르적으로도 한국사상을 기초로 한 비평이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영향력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제대로 확인시켜 준다.

임 평론가가 전개하는 영화평론은 ‘유역문예론’에 바탕한 작품비평이다. 이는 책의 후반에 설명되어 있기도 하지만 유역문예론은 나의 이해 선에서 요약하자면 전 세계의 각 지역에서 배태된 고유문화를 이해하고 그 존재성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피며 연대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민족이나 국가라는 거대한 영역보다는 조금 더 구체적이며 각 개인의 특성보다는 더 넓은 영역의 가치를 지닌다. 다른 의미로는 지역적 공동체의 문화적 특성을 각기의 점(點)으로 하고 이 각각의 점들을 이어가는 선(線)에 의해 이루어 가는 포괄적 공동체 문화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점과 선들이 모이면 아름다운 유역문화의 면(面)이 구성된다. 임 평론가가 유역문예론에 대한 자신감과 이를 바탕으로 전개하는 그 근거는 당연히 동학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 구체적으로는 한국사상에 도도히 흐르고 있는 동양적 가치 때문일 것이다. 주역의 음양오행(陰陽五行),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향아설위(向我設位) 등등의 사상적 바탕이 작가와 예술가들에게 면면히 이어지고 이는 평론으로도 이어진다. 물론 이런 전개는 많은 작가들에게 작품을 통해서 의식적인 부분과 무의식적인 부분이 섞여서 나타난다. 다만 임 평론가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끄집어 내어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본격적으로 이야기한다. 바로 이 부분이 가장 빛나는 성과의 하나일 것이다.

임 평론가의 사상비평적 바탕에 비추어 볼 때 가장 제대로 진단할 작가 중의 한명은 단연코 이창동 감독일 것이다. 이는 문학가 출신으로서의 이창동 감독이 보여주는 고도의 상징과 비유가 영화적으로, 어쩌면 문학에 있었을 때보다 영화계로 갔을 때 이 감독의 진가가 더 제대로 발휘되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 문학적 상징의 비유가 단순히 장르적 이전에 머물지 않고 동양적 미학을 매우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창동 영화의 재발견, 임 평론가의 영화적 해석의 독보성이 드러난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은 픽션과 논픽션, 드러남과 은폐됨, 진실과 거짓말이 혼재되어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그것의 사실성 여부의 너머로 삶의 진성성과 세계의 문제를 다루는 문제적 걸작이다. 이 감독은 명작 <밀양>을 통해서도 칸 영화제에서도 인정받기 했지만 <버닝>은 대단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서구에서는 일부애호가들만 인지할 뿐 여전히 대중들에게는 미지의 안개와도 같은 작품이다. 그러나 임 평론가는 <버닝>의 숨겨진 매력들을 유역문예론에 입각해 하나하나씩 풀어낸다. 임 평론가가 보기에 이 영화의 매력은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과 음(陰)으로 상징되는 그늘 혹은 여백의 의미와 카메라가 바라보는 전지적 시점이 의식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세계의 통찰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이는 <버닝>, <밀양>, <시>를 통해 ‘보이지 않는 자연’을 보여준다는 점과 일맥상통한다(p.19). 이는 다시 말하자면 노자의 무위자연과 연결되는 지점이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이청준 원작의 <벌레 이야기>를 가져왔는데 걸출한 연기자인 전도연과 송강호를 통해 군림하는 신, 일방적으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신이 아닌 인간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응시하는 주체적인 선택으로서의 신의 문제를 영화적으로 승화시킨다. 이런 경우에 인간의 삶의 환경은 피동적인 삶이 아니라 주체적인 환경을 이루어 간다는 점에서 신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신과 함께 하는 삶으로서의 세계가 드러난다. <밀양>의 후반부에서 신애가 머리카락을 자르는데 영혼의 일부인 머리카락들은 흩날리고 햇볕(陽)은 그늘(陰) 곁에 흐르는 도랑물 위에서 반짝인다(p.83). 세상의 모든 것들이 영적인 요소가 없는 것이 없다고 보는 애니미즘적인 시선에서 본다면 하찮은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사소한 행동은 아무 것도 없다.

이창동 감독의 <시>의 후반에서 미자가 쓴 첫 시를 낭송하는 장면에서 희진으로 빙의되는 장면은 희진의 자살장면의 직전이 아니라 근원적 자연과 영매의 활동으로써 이 감독의 숨은 스토리텔링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p.95). 미자의 존재를 통해 시인은 영매가 된다. 이 감독은 영화를 통해 자연신을 불러내는 샤먼의 역할을 한다. 예술가는 작품을 통해 영혼을 들여다보기를 의식적으로, 무의적으로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사제와 예술가는 그 역할이 다르지 않다.

영화를 조금 깊이 들여다보는 애호가들은 홍상수 감독이 에릭 로메르 감독의 적자거나 큰 영향권 안에 있음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홍상수 감독은 한국에서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삶과 일상을 허위의식과 솔직함의 방식으로 드러냄으로써 홍상수표 세계관을 독자적으로 일구고 있다. 임우기 평론가가 120쪽에서 무려 25여쪽에 걸쳐 전개하는 <북촌방향>의 비평은 욕망과 이성, 우연과 필연, 역할의 이중성과 바꿈, 드러남과 은폐, 자연의 질서에 흘러가는 인간존재의 문제와 연계된 홍 감독의 작품관을 유감없는 비평의 역량으로 제대로 보여준다. 동양적 시선 혹은 유역문예론의 시선이 아니면 안개 속으로 감추어졌을 내용들이 수면 위로 나타난 것과 다르지 않다. 홍 감독의 작품관은 스스로의 역량과 한계에 대한 솔직함을 일상성이라는 장치로 보여주는 방식이며 이는 스스로의 반성과 함께 스스로 진화하려는 홍 감독의 인격과 작품이 별개가 아닌 셈이다. 홍 감독의 삶과 작품에 호불호가 있음에도 그를 미워할 수 없는 이유는 스스로를 객관화하고 반성하는 시도를 작품을 통해 은연중에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모든 분야에서 지덕체를 갖춘 완전체가 아니다. 다만 자신의 장점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방편의 하나로 삼기도 하고 이를 통해 모자란 부분을 포기할지(?) 보완할지 고민하기도 하지만 이는 최고부자부터 최고빈자까지 누구나 지니는 자신만의 숙제같은 것이다.

세 감독의 비평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대한 에세이는 서두에서 언급하듯이 본격적인 영화비평과는 조금 다르다. 다만 임 평론가는 <기생충>에 대한 기존의 평론들이 계급론에 치우친 면이 있어 이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보여준다. 지상, 반지하, 지하에서 이루어지는 삶들이 계급적으로 자연스럽게 보이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지만 임 평론가는 지하 깊은 곳에 은거하는 ‘근세’라는 인물을 주목한다. 실제로는 귀신이 아님에도 지상의 아이에겐 귀신처럼 목격되어 ‘그림’으로 남은 이 존재는 우리가 잊고 싶어하지만 사라질 수 없는, 그러나 이 세계의 숙제와도 같은 그런 존재이다. 이 점이 해결되지 않으면 종종 나타나 우리를 괴롭힐 것이고 어쩌면 우리가 근세와 같은 존재가 되어 지하로 추락할지도 모른다.

임 평론가는 봉준호 감독의 <마더>, <살인의 추억>, <기생충>을 통해 ‘귀신론’을 설파한다. <마더>에서 김혜자가 처음 장면에서 혼자 춤추는 장면과 후반의 버스에서 같이 춤추는 장면은 무(巫)의식의 접신과 떼어놓고 설명하기 힘들다.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 두만은 서울에서 내려온 형사 태윤 앞에서는 과학수사를 해야지 하면서도 수사가 미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자 점집을 찾기도 한다. <괴물>에서 괴물의 입으로 들어갔는지 잡혀갔는지 모를 실종된 현서가 가족들이 식사하는 자리에 나타나 같이 식사를 한다. <기생충>에서는 부자와 빈자의 대립이라는 표면적 스토리를 넘어 시각,청각,후각,촉각 등을 통해 은폐된 내러티브가 마침내 드러난다. 이는 귀신처럼 작용하는 근세의 역할을 통해 예술의 생생함을 보장한다(p.223). 이에 의하면 봉준호 감독은 귀신과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으로 혹은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가장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감독 중의 한 사람이다.

임우기 평론가는 영화비평에 대한 이력이 길지 않고 세 감독을 중심으로 한 몇몇 작품에 대해서 비평을 남겼지만 이 비평은 독보적이고 선구적이어서 모든 영화감독들이 이 책을 읽고 용기와 자극을 얻기를 바란다. 또한 영화애호가들이 이 책을 통해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의 확장을 얻기를 바란다. 이 시선은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것이어서 영화와의 대화를 위한 매개체로서 아쉬움이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우리의 사상에 애정이 깊고 수행의 방편으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적 프레임으로만 영화를 보지 않았는지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마도 적지 않은 이들이 이 책을 통해 비평적 시선의 관점을 넓힐 좋은 계기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얼마 전에 이창동, 김태용, 이명세, 나홍진, 홍상수, 박찬욱, 봉준호 등을 한국을 대표하는 7인 감독으로 꼽은 바 있다. 현재의 활약상이나 여러 면으로 볼 때 박찬욱 감독과 나홍진 감독에 대해서도 임우기 평론가가 이야기해줄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예를 들면 나홍진 감독의 <곡성>은 서구의 <엑소시스트>와 같은 영화의 주제와 통하면서도 이를 넘어서는 역작이자 유역문예론에 잘 어울리는 작품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해마다 나오는 영화편수만큼 모든 영화가 작품(!)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적지 않은 영화들은 상업성과 대중성의 한계에 갇혀서 소리소문없이 사라진다. 그러나 명작도 종종 이해받지 못하거나 오해를 받아서 사라진다. 안개에 가려진 명작들을 다시 해석하고 길러내는 평론가의 역할은 숨어있던 본성과 영혼을 발견한다는 점에서 샤먼의 역할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부록해설로 실린 유역문예론 등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내 소감을 말하자면, 솔직히 이에 관한 것만으로도 책 한권을 별도로 쓰고 싶은 분량의 이야기이다. 다만 이에 대한 나의 소감을 간략히나마 얘기하고 나머지는 임 평론가의 이전 저작인 <네오 샤먼으로서의 작가> 등을 비롯한 후일의 소감을 남길 때마다 언급하고 싶다.

아시아의 사상은 유학을 비롯한 현실적인 가치를 담는 부분과 노자, 장자를 비롯한 도교로서의 부분으로 크게 나눌 수 있을 듯 하다. 여기에 네팔, 인도를 통해 중국에서 들어온 불교가 아시아의 사상적 배경에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의 사상은 유학사상, 도교사상, 불교와 함께 이미 고조선 시대부터 비롯된 하늘사상이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고운 최치원이 한국의 사상을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國有玄妙之道曰風流)”라고 한 것은 매우 상징적이며 현실적이며 탁월한 표현이라고 본다. 유불선이 골고루, 그리고 시대를 달리하며 주도적으로 혹은 배경으로 하며 끊이지 않고 한민족의 세월과 함께 해 온 것은 우리 민족의 마음그릇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원효의 불교사상, 고봉 기대승과 퇴계 이황의 이기론 논쟁, 화담 서경덕, 혜강 최한기와 다산 정약용의 사상 등은 어떤 종교적, 사상적 배경을 띠고 있던지간에 한국 사상의 넓은 그릇이 배경으로 작용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한민족의 가세가 급격히 기울고 쇠락하던 구한말 무렵에 나타난 수운 최제우, 증산 강일순, 소태산 박중빈은 한국 사상사에서 가장 신비롭고도 기적적인 사건에 해당한다. 이들의 등장이 기울어가던 조선을 다시 세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들의 역할은 그 당시의 조선을 새로이 정립하고자 한 것 보다는 후일을 위한 사상과 가치의 개벽을 위한 선지자로서의 역할이 지대하다. 이 세 인물이 준비한 개벽시대는 물질문명에서 정신문명으로의 전환을 위한 예비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그리고 이 예비는 정신과 영성이 매우 중요한 주제임을 인지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정신문명의 본격적인 정립은 구한말 이후로 100년 후가 되든 200년 후가 되든 이들의 행적을 종교와 도그마의 외피에 머물게 하지 않고 사상으로서의 배경과 핵심을 수면 위로 드러내는 것이 본격적인 시작일 것이다. 이를테면 도올 김용옥 선생의 <동경대전>은 한국사상을 제대로 알리고 촉발시키는 하나의 트리거인 셈이다.

또 하나 꼭 얘기하고 싶은 것은 샤먼의 성격이다. 미르치아 엘리아데 등이 샤머니즘을 알려주었던 장점을 넘어서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샤먼의 보편적인 성격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선지자와 샤먼은 다르지 않다. 모세는 선지자이지만 샤먼이기도 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최수운은 샤먼이지만 선지자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샤먼 중에서도 대 샤먼(Great Shaman)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인은 대 샤먼과도 같다. 성인은 위대하고 보편적인데 샤먼은 지역적이고 토속적이고 협소하다는 편견을 그 역사적 용례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버릴 때가 되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다. 최수운은 한울님으로부터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라는 주문을 받았다. 이 우주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관장하는 영역이 더 클지, 최수운의 한울님이 관장하는 영역이 더 클지는 정신과 영혼의 핵심에서 다룰 문제일지는 모르나 그 역할은 다르지 않다. 주기도문에서 나오는 ‘뜻이 하늘에서 임한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의 문장은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 願爲大降)’의 주문의 격과 하등 다르지 않다. 대 샤먼이 받은 주문은 지구적이고 보편적 성격을 지닌다. 샤먼의 토속적, 지역적 성격을 지구적으로 확장시킨다기 보다는 원래 지닌 대 샤먼의 뜻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원래부터 보편적이었음을 밝히는 것, 이는 땅에 묻혀서 조금만 드러난 가치의 얼굴을 더 제대로 발굴하여 온전한 전체 모습을 드러내는 화석탐구자의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신문명으로의 개벽시대는 이 밝힘의 정도에 따라 느려지기도, 빨라지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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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마운틴
임채욱 지음 / 아트제ARTSEE(주)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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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친구들과 오대산 초입의 소금강 입구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때 바라본 소금강의 정경은 비와 안개가 어우러진 환상적인 걸작 동양화의 한 폭과 다르지 않았다. 그 이전까지의 동양화에 대한 내 생각은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상상 속의 그림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그 날의 소금강을 본 순간 내 편견을 접어야 했다. 이쁘지만 사실적인 서양화의 풍경을 보는 것에 익숙해져 있던 한 동양인이 이윽고 한국의 산수(山水)와 동양화의 아름다움에 새로운 눈을 뜨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또한 내겐 이런 편견도 있었다. 사진이란 풍경을 그저 잘 담는 도구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가 쉽지 않은 매체일 것이라고. 그러나 임채욱 작가의 사진집 <블루 마운틴>을 본 후로는 확실히 이런 편견을 접어야 했다. 임채욱 작가의 <블루 마운틴>은 한국의 검푸른 첩첩산중의 미학을 제대로 보여주는 사진 산수화집이다. 이 책의 첫장을 보자마자 하서 김인후의 ‘산밖에 산이 있어 산이 다함이 없고(山外有山山不盡)’ 라는 구절이 저절로 연상되는 파노라마의 장관이 펼쳐진다. ‘블루 마운틴’ 하면 호주의 블루 마운틴과 커피로도 유명한 자메이카의 블루 마운틴을 떠올리는 이들도 많을 테지만 한국의 블루 마운틴은 시린 겨울 첩첩산중의 서사성을 보여준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한 독자성을 확보한다. 이 점이 더 알려질 수 있다면 순전히 임채욱 작가의 공일 것이고 한국의 블루 마운틴은 더운 지방의 두 블루 마운틴과는 다른 매력을 확실히 드러낼 것이다.

임 작가는 블루 마운틴을 위해 덕유산을 중심으로 하고 대둔산을 일부로 하여 산의 고지에서 빙 둘러봤을 때 충정도, 경상도, 전라도의 지리산 자락까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에서 작업을 진행했다. 한국의 블루 마운틴은 사시사철 언제든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다. 작가 노트에 따르면 바람 불지 않는 낮은 기온의 맑은 날씨에 오전 9시에서 12시 사이, 산을 등지고 해가 비추는 역광이나 측면에서만 가장 짙푸른 산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시간적 길이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찰나의 미학이 연상되기도 한다. 언제 어느때든 볼 수 있는 순간이 아니라 그때만이 가능한 순간이 있다. 임 작가의 말처럼 위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시간과 공간의 산 정상에 서 있다면 한국의 블루 마운틴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임 작가의 작품에서 느끼는 감흥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 직접 산에 당도했을 때의 고유성과는 달리 임채욱 작가는 과감한 일반화를 시도한다. 그 결과가 문화예술분야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는 아트제 출판사에서 나온 <블루 마운틴> 작품집이다. 너무나 흥미롭게도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의 배경인 인왕산 자락에서,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영감을 제공해 준 안평대군의 무계정사가 자리 잡았던 바로 옆 자하미술관에서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것은 순전히 우연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임채욱 작가의 <블루 마운틴>은 크게 세 가지 점에서 경계로 넘어가는 작품이다.

첫째로 <블루 마운틴>은 사진에서 그림으로 넘어가려는 경계에 서 있다. 임 작가는 해상도가 가장 높다는 1억화소의 카메라를 들고 대상을 담았음에도 불구하고 명징성을 포기하고 번져 스며가는 한지에 작품을 담아 전시회를 열었다. 세밀화를 그리는 환경에서 투박화로 돌아가는 이 역설은 나무보다는 숲을, 실제대상보다는 분위기로 접근하려는 작가의 철학을 그대로 보여준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은 사진과 영상의 출현으로 인해 기술적으로 양적으로 대량복제가 흔해진 시대에서 이들 매체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고귀하고 유일한 ‘아우라’가 희석되거나 파괴되는 것을 우려했고 이의 극복을 위한 성찰을 보여주었다. 벤야민이 볼 때 작품의 전시적 가치는 당연한 것이나 제의적 가치까지 제시할 수 있다면 그 매체의 도구는 더 이상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전시적 가치는 땅(대중들)을 향한 것이고 제의적 가치는 하늘(눈에 당장 보이지 않는 숭고한 대상)을 향한 것이다. 새벽의 심산유곡에서 들어주는 이가 없어도 대금을 부는 이는 자연이라는 청자와 자아의 본성이 귀담아 듣고 있다는 것을 안다. 사진같은 그림도 많고 그림같은 사진도 많다. 임 작가의 작품은 후자에 속하지만 양적인 부류에서 질적인 부류로 도약한 소수에 속할 것이다.

둘째로 <블루 마운틴>은 그의 작품이력으로 볼 때 구상화에서 추상화로 넘어가는 경계에 서 있다. 그림으로 보자면 서양화법에서 동양화법으로 넘어가는 과정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동양화과 출신인 데다 그의 이전 작품집인 <인수봉>과 <지리산 가는 길>에서도 경향이 드러나긴 했지만 <블루 마운틴>에서는 그가 보여주는 관념 산수화(!)의 세계를 여실히 감상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겸재 정선의 등장으로 기존의 관념 산수화에서 진경 산수화의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 바 있는데, 임채욱 작가는 오히려 가장 실사적인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관념 산수화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을 보인다. 서양화같은 동양화, 동양화같은 서양화가 제법 많아진 세계에서 굳이 이런 구분이 의미있을까 싶지만 실사적인 풍경 사진을 넘어서 가치의 본질을 담고자 하는 작가의 열정과 집념을 엿볼 수 있다.

셋째로 주목할 점은 <블루 마운틴>을 통해 풍경에서 서사의 경계로 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서사는 자연의 서사성 뿐만이 아니라 역사의 서사성까지 포함한다. 좋은 사진은 인물이든, 도시의 풍경이든, 자연의 모습이든 그 자체로 멋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진을 그냥 모아둔다고 해서 항상 위대한 작품집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임채욱 작가는 <지리산 가는 길>의 ‘부부송’ 작품의 변주들을 통해서 한 대상이 어떻게 다양하게 보여질 수 있는지를 멋지게 보여주었다. 더 나아가서 <블루 마운틴>의 임 작가는 한국의 청산이 마치 한국인의 심성처럼 얼마나 강인하면서 짙푸를 수 있는지를 장엄하게 웅변한다. 이 검푸르고도 짙푸른 서사는 날씨와 빛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변천의 이야기를 지닌다는 점에서 인간적인 서사마저도 품고 있다. 환경의 산물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특히 한국인이라면 검푸른 첩첩산중의 모습에 자신의 심성이 깃들여져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강인함과 인내심의 모습은 자연으로부터 인간으로 흘러들어간다.

임채욱 작가의 <블루 마운틴>은 말하자면 ‘한국 청산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는 이 변주를 위해 크게 세가지의 프레임으로 구성했는데 파노라마, 랜드스케이프, 포트레이트의 형태가 그것이다. 파노라마를 통해 임 작가는 왼쪽으로부터 오른쪽으로 장대하게 펼쳐지는 첩첩산중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미국의 그랜드 캐넌이나 호주의 블루 마운틴과는 다른 성격의 스케일이자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고유성의 스케일이기도 하다. 랜드스케이프를 통해 임 작가는 우리 시선이 보여주는 가장 안정된 구도의 풍경을 보여주는데 이는 위압감을 내려놓은, 우리에게 더 가깝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모습의 청산이기도 할 것이다. 포트레이트는 세로의 직사각형 프레임으로서 첩첩산중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형태이기도 하다. 포트레이트의 몇몇 작품들에서 나는 정선의 <금강전도>가 떠올랐다. 첩첩산중의 세로 미학이 그대로 드러난 셈인데 하나는 그림이고 하나는 사진이란 것만 빼고는 이 둘의 주제가 하나로 지금 만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포트레이트의 연작에서는 병풍 그림을 연상케 함으로써 동양적 가치의 적자임을 알려주었다. 또한 랜드스케이프와 포트레이트의 다른 작품들에서는 바위산과 나무가 바로 눈앞에 나타나고 멀리 배경으로 산들이 펼쳐지는 모습에서는 정선의 <통천문암도>가 연상이 되었다. 겸재 정선이 조선시대 진경산수화의 새 장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은 상대적으로는 서양화와 비교하자면 동양화의 범주에 있기에 서양인들이 본다면 비현실적이거나 환상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정선의 그림과 교감이 된다는 점은 열정과 인내의 소산이 아닐 수 없다.

임채욱 작가의 <블루 마운틴>은 마치 검푸른 먹을 사용한 수묵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서양화와 사진이 보여주는 ‘주객분리’의 성격은 ‘물아일체’를 지향하는 동양화와 다른 경향을 지니기에 ‘밖으로는 자연을 배우고 안으로는 마음의 근원에서 얻는다’는 당대 수묵화가 장조의 말처럼 포기할 수 없는 주제일지도 모른다. 이 주제의 회복을 위해서는 경계와 실험의 시도를 멈출 수 없는 일이다. 조선의 이징이 검은 비단에 금물을 이용해 <이금산수도>를 남겼던 것처럼 새로운 시도는 새로운 실험과 매체의 희귀성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 시도가 걸작을 낳을 보장은 될 수 없을지언정 걸작의 출현을 저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첨단매체와 솔루션을 활용하되 그것을 썼다는 마음마저 내려놓을 수 있을 때에 그 작품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지도 모른다. 동양화의 가치가 옛날 것이고 고루하다고 생각할 여지가 많은 요즘 시대에 숨겨진 매력을 부흥시키려는 노력은 동양화를 한국화로 자신있게 호명할 수 있는 시기를 당긴다는 점에서, 한류의 영역을 넓힌다는 점에서 내적,외적 가치가 결코 작지 않다.

사진을 통한 동양적 아름다움의 추구는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연상되더라도 대단한 일이지만 안견의 <몽유도원도>처럼 평원, 고원, 심원을 한 장의 사진에 담는 관념산수화의 영역으로 갈 수록 합성을 하지 않는 한 사실상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임 작가의 청산 주제에 의한 변주처럼 보이는 연작 형태가 이의 극복을 위한 서사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여러 장면을 통해서 현실에서 환상으로, 혹은 꿈속으로 갔다가 현실로 되돌아오는 내러티브를 구성한다면 웬만한 관념산수화가 부럽지 않을지도 모른다. 결국 이 점은 이야기를 구성하는 마음과 그 내재적 가치에 있을 것이다.

<몽유도원도>를 그림으로 보든 미학적 가치로 보든 걸작으로 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림의 기술을 넘어서서 안평대군의 꿈속의 이야기와 그 호접몽과도 같은 이야기를 그림으로 조화스럽게 한 장의 그림으로, 내러티브로 구성한 안견의 마음때문일 것이다. 동양적 미학에서 마음의 수양을 결코 빠트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임 작가는 블루 마운틴 작업을 하면서 이 장면들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서 관념산수화처럼 보인다고 했지만 여기에서의 관념은 말 그대로 상대적인 것이어서 사진과 한지의 조합을 통한 외적 역량과 그것을 심화시키는 내적 마음이 깊어질 수록 관념의 깊이도 더해질 때가 올 것이다. 지금도 훌륭하지만 이제서야 인생의 절반을 지나가는 임 작가의 미래에 기대가 더 커질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삶과 세계는 모두 다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괴로움은 피할 수 없다(일체개고;一切皆苦), 그러나 모든 것은 변하며 영원한 것은 없다(제행무상;諸行無常), 그러니 육신을 지닌 나란 존재가 유일한 나라는 것마저 내려놓으면 우주의 나를 만날 때가 있을 것이다(제법무아;諸法無我). 동양화의 매력을 접하다보면 위의 구절과 다르지 않음을 느낄 때가 있다. 임 작가의 작품도 이 범주에 진입해 있다.

임채욱 작가의 <블루 마운틴>은 한국의 청산을 통해서 익숙했지만 못 보았던 새로움의 다름을 선사한다. 그러나 이 새로운 다름은 보면 볼수록 자신의 심성과 다르지 않기에 한국의 산하로부터 자신의 심성에 어떤 영향을 주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산하는 사시사철 다르게 변화하며 질서와 변주를 만들어 낸다. 이 질서와 변주가 결국 세계와 우주가 돌아가는 모습이라면 대상과 내가, 산과 강이 둘이 아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작품이란 내가 있고 대상이 따로 있어서 예쁨을 멀리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속의 일부임을 느끼게 될 때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이 다르지 않음을 알리는 것이 예술가 역할의 한 본령일 것이다. 블루 마운틴의 드넓은 장관 속에서 조그맣게 자리잡고 있는 문명과 인간의 흔적은 그 주제의 일부일 것이다.

경쟁에서 조화로, 물질에서 정신으로 가치가 옮겨가고 있는 시대에 임채욱 작가의 <블루 마운틴>은 첨단사진기술과 전통한지의 조화 속에서 정신 중심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역설의 가치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의 사다리를 넘어 가서 참나의 발자국을 지나 진정한 자아를 모두가 만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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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가는 길
임채욱 지음 / 아트제ARTSEE(주)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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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에 지리산은 어머니같은, 뭇 생명들을 품는 넉넉한 산이다. 이쁜 것과 특색을 쉽게 나타내지 않지만 생명이 살아 있는 친근한 모습을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산이다.

이 점은 이 산이 경상남도와 전라남북도의 5개 행정구역에 걸쳐 있는 넓은 공간으로서의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이 세상에 넉넉한 산이 한둘이 아니고 넉넉하지 않은 산이 어디 있겠냐만은 지리산을 생각할 때면 유독 그 넉넉함이 늘 다가온다. 모든 사람들에게 나름의 캐릭터가 보이듯이 인간들은 여러 산들에게 나름의 정체성을 부여하기 마련인데 설악산처럼 화려하고 금강산처럼 풍광이 뛰어난 것에 비해 지리산은 얼핏 보기에도 이쁜 면으로 자신을 보이는 산은 아닌 듯 하다. 또한 이병주의 <지리산>이나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접한 이들이라면 지리산이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같이 한 배경을 지닌 산이라는 점에서 이 산의 느낌과 성격을 더욱 다양하고 복잡하게 바라보이게 만들지도 모른다. 사실 아름다움의 기준은 각자 다르겠지만 지리산은 외향적인 아름다움을 쉬이 내보이지 않는다. 백두대간의 끝자락으로 내려와 넉넉한 공간에 자리잡으면서 한편으로 심심하고 무심한 듯이, 생명있는 모든 것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산처럼 보이기도 한다.

임채욱 작가의 <지리산 가는 길>의 첫 번째로 수록된, 지리산의 병풍처럼 펼쳐진 작품을 펼쳐 보았을 때의 이 산은 일찍이 하서 김인후 선생이 얘기했던 산외유산산부진(山外有山山不盡; 산 밖에 산이 있으니 산이 다함이 없네)의 구절이 저절로 떠오르는 장관이다. 이 장면은 몇몇 특징에서 다른 산 사진들과는 차별점을 보인다. 마치 큰 종이로 산의 스카이라인을 그려서 가위로 오려낸 후 그 종이마다 검푸른 물감을 물들인 후 여러 장의 그 종이 산(?)들을 중첩시키면 이 작품과 얼핏 비슷해 보이지 않을까. 차이점이 있다면 생명이 살아숨쉬는 산을 담았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므로 첫번째 작품의 이 지리산은 산들의 산, 드넓고 넉넉한 산, 어머니와도 같은 산의 모습이다. 이 모습은 지리산의 특색을 이쁨이나 절경이라는 형태로 잘 드러내지는 않는다. 이곳이 지리산이라는 명기를 하지 않는다면 어느 이름모를 산이겠거니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일반성이 지리산의 정체성과 보편성을 잘 보여준다. 얼핏 보면 동양화같기도 하고 검푸른 채색이 입혀진 추상화처럼 보일 정도로 특색과 구체적 아름다움이 거의 배제된 장면이지만 엄연히 실사를 담은, 그러나 넉넉한 지리산의 정체성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넓고 넓은 지리산을 담은 풍경들은 수도 없이 많고 사람마다 지리산의 느낌이 다를 터라서 한 작품만으로 말한다는 것이 우스운 일일 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 하나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감동했고 지리산이 지닌 어떤 한 면을 잘 드러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 4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집에서 1장 지리산 종주길은 지리산의 드넓은 모습을 보여주기 전에 지리산으로 입장하는 듯한 작은 숲길을 먼저 보여준다. 그 길에서 토끼도 만나는 장면도 정겹지만 마치 한반도 모양을 닮은 듯한 숲과 허공이 그려내는 모습의 장면에서 작가의 남다른 눈썰미가 느껴진다. 이어서 드러나는, 말 그대로 첩첩산중이라는 단어가 그대로 떠오르는, 줌아웃이 극대화된 지리산의 장관이다. 몇몇 장면에서는 조금 줌인하여 숲과 나무의 모습들이 드러나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산세가 잘 드러나는 전경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산위에서 오롯이 자태를 자랑하는 소나무들과 자연의 풍화에 거의 모든 것을 내주고 거의 줄기만 남은 채로 서 있는 고목과 이름모를 혹은 이름붙여졌을지도 모를 바위의 몇몇 장면은 살아있는 풍성함을 더했다.

2장 지리산 둘레길에서 임채욱 작가는 하동 평사리에 있는 부부송(나란히 서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면서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따라 대상이 지닌 모습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임 작가는 무려 수십장을 할애해 부부송과 주변의 장면들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1년 후에도 5년 후에도 거의 그대로인 콘크리트 건물에 비해 1분 1초후에도 다르게 보여질 수 있는 모습이 자연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모습이 소나무라는 정체성을 유지한다. 생명의 변화와 정체성의 성격은 늘 인간들에게 영감을 준다. 바라보는 그 시선을 잃지 않는다면 말이다. 개인적으로 부부송의 여러 장면들 중에서 하얀 새들이 나무 위에서 쉬고 있는 장면은 너무나 정겨웠다. 지리산 둘레길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도보여행을 할 수 있는 총 300여km에 이르는 순환의 순례길이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도 훌륭하지만 지리산 둘레길도 산티아고와 단순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순례길이다. 그곳을 지나다보면 이 매력적인 부부송을 만날 때가 있을 것이다. 임 작가는 지리산 둘레길에서 자칫 산악열차 건설이라는 자연의 파괴 앞에 없어질 지도 모를 부부송 주변의 풍광을 애정어리게 수록했다. 2장만 보더라도 임채욱 작가의 사진집이 여러 평범한 풍경사진집(?)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3장 지리산 실상길에서 작가는 가장 인간적인 줌인으로 내려와 지리산 마을 한 가운데에 있는 실상사의 모습과 그 곳의 도법 스님과 그 분이 조성해 놓은 실상길을 비춘다. 지리산의 넓이와 둘레길의 사이즈(!)에 비하면 작고 짧기 그지없는 공간이지만, 쌀 한톨에도 우주가 담겨있듯이 그곳에도 자연과 인간의 세계가 온전히 들어 있다. ‘넓은 절 마당, 푸르른 소나무, 고요한 눈빛, 가벼운 발걸음, 그리고 온 실상사, 온 세상, 온 우주와 함께’라는 도법 스님의 시처럼 신비한 작은 길은 삶과 구도의 길과 자연의 길이 다른 듯 하나임을 보여준다. 수행을 위해서는 별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얘기들 하지만 우리의 삶 자체가 곧 수행과 다르지 않다. 다만 삶이 수행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과 의식하는 것은 결과의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나를 바라보며 삶을 바라보며 의식을 한다면 삶의 시간은 조금 더 알차게 흘러갈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가 보여주는 실상길은 우리 모두가 걸어가지만 길을 걷는다는 것이 수행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은연중에 일깨우는 작은 길이 아닐까.

4장 지리산 예술길에서 임채욱 작가는 작품의 소재와 방식을 2차원적인 공간에만 한정시키지 않는 면을 보여준다. 지리산 풍광을 배경으로 인간문명과 문화의 활동이 동적으로 나타난다. 이런 시청각적 작품은 여러 작가들이 시도하는 것이기도 한데 자연과 문명의 한 가운데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며 간접체험하는 느낌을 주는 듯 하다. 이 체험은 온라인, 오프라인의 경계를 넘고 대화적인 소통의 가능성을 높이는 것으로서 자주 시도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어떤 변화든 시도이든 간에 지리산같은 자연이라는 배경은 늘 넉넉한 공간을 제공할 것이다.

임채욱 작가는 마지막 작품에서 첩첩산중의 지리산을 다시 한번 펼쳐보인다. 이때의 장면은 처음 작품과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처음 작품은 지리산이라는 자연만을 보여주었다면 마지막 작품은 마을군락을 이루는 인간의 문명, 문화와 함께 하는 지리산을 보여주었다. 크게 본다면 우리는 자연과 함게 사는 것이 아니라 드넓은 자연 속에서 아주 작은 공간에 자리잡고 앉아 자연의 혜택을 받고 사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인간이 자연파괴를 걱정하는 것은 자연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터전이 파괴되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자연은 파괴되지 않는다. 인간이 없어지더라도 자연은 회복될 것이고 리듬을 지키며 순환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은 인간조차 살 수 없는 환경으로 만드는 인간문명을 걱정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지리산은 좌충우돌하는 인간과 문명을 바라보면서도 보듬고 품에 안아주는 넉넉한 어머니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작가는 작품을 통해 얘기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사진집의 장마다 수록된 표문송 경기도어린이박물관장, 박남준 시인, 이상윤 숲길 이사, 도법 스님, 최연하 큐레이터, 도서출판 아트제 김종필 대표, 임채욱 작가의 글들도 진솔함과 진정성이 잘 드러나 많은 것들을 성찰하는 계기를 준다.

점점 한류의 영역과 영향력이 커지는 시점이지만 여전히 출판시장의 환경은 녹록치 않다. 입시와 참고서, 실용서 위주의, 비정상적으로 쏠려있는 출판환경에서도 예술과 문화의 가치를 알리고자 뛰어드는 사명감을 지닌 아트제와 같은 출판사와 김종필 대표를 보노라면 그 용기와 열정에 고마움과 박수를 드리고 싶다.

작곡가인 구스타프 말러가 혹독함에 가까운 지휘활동과 공연의 일정 속에서도 짬을 내어 오스트리아의 아터제라는 호수가 있는 작은 오두막에서 자연을 벗삼아 작곡의 시간을 내고 교향곡 3번과 같은 불멸의 작품을 남겼듯이 소명을 지닌 출판사의 기획과 작품들은 사람들에게 휴식과 위안과 영감을 줄 것이다. 위안과 영감을 받을 독자들이 할 일은 그저 이들에게 큰 성공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속가능한 존재로 남을 수 있도록 애정과 관심을 잃지 않는 일일 것이다. 복지사회를 지나 본격적인 문화사회로 가는 길이 백범 선생의 언급처럼 우리 모두의 소원이 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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