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기다리다 마르코폴로의 도서관
리 코토미 지음, 서지은 옮김 / 마르코폴로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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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서도 그러했지만 서구에서 흑인을 도구처럼 부리던 노예제는 긴 시간 이어져 왔으나 결국은 철폐되었다. 법적으로는 없어졌다고 하겠지만 그럼에도 지금까지 인종차별등의 방식으로 그 여파가 남아 있다. 그러나 이조차도 결국엔 사라질 것이다. 지금 당장엔 불합리해 보이는 여러 제도들조차도 존속과 폐지의 여부는 그 사회 공동체의 의식 성장에 달려 있다. 불합리한 제도라도 그 제도로 인해 이익을 보는 이들이 있는 한 그 제도는 오래 가겠지만 그럼에도 가치와 정의심이라는 의식이 충분히 전파되는 시기가 되면 옛 제도의 폐지와 새 제도의 시작은 이어진다.

리 고토미 작가는 '출생합의제'라는 독특한 개념을 제시한다. 임신한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이 사회에 나오고 싶은지를 아기 본인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태아가 이를 찬성하면 출산이 이루어지고 이를 거부한다면 낙태를 결정하는 것이다. 청소년에 대한 인권이 아직도 정착되지 않은 현재의 단계에서 이와 같은 '태아권'은 매우 생소한 개념이다. 당연하게도 이와 같은 가정은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근 미래에 나올 수 있는 개념으로는 상상해볼만 하다.

리 고토미 작가는 소설 <너를 기다리다> (번역 서지은, 도서출판 마르코폴로, 원제: 생을 축하하다)에서 근 미래에 일어날 법한 소재를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다뤘다. 이를 장르로 분류하자면 하드 SF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너무나 환상적이어서 근 미래에 일어나기는 커녕 아주 먼 미래의 가능성조차 생각하기 쉽지 않은 환타지 SF에 비해 리 고토미의 <너를 기다리다>는 많은 명작 하드 SF가 보여주듯이 다가올 미래의 논제를 미리 소환한다. 과학이 지금보다 더 발전하고 인류의 평균의식이 지금보다 더 성장한다면, 뱃속의 태아가 어떤 결정을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삶의 주체권을 주어지게 하려는 것이라는 설정은, 지금은 터무니없어보여도 한번 상상해 볼 수는 있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를 두 손으로 받기 위해 기다리는 염원을 담은 듯한 소설 표지의 장면은 그 자체로 매우 인상적이다.

<너를 기다리다>는 지금부터 수십년 후의 어느날 일본의 두 동성애 여성이 아기 출산을 염원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출산을 위해 태아에게 초음파로 의견을 물어볼 수 있는 단계가 되었고 출산 여부는 전적으로 태아의 의지에 달려 있다. 이 출산을 전후로 한 두 여성과 가족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궁금증을 자아내며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이야기의 내러티브 상으로 보자면 더 길게 가져가도 충분한 상황인데도 리 고토미 작가는 약간의 긴박감을 담아 팽팽한 전개를 이어간다. 이야기의 전개와 재미와 긴박감이 조화롭게 구성되었으면서도 현실로 보더라도 논쟁적인 이슈가 이어지면서도 결국엔 감동을 선사한다.

리 고토미의 <너를 기다리다>는 형식은 SF이지만 내용은 의식의 진화와 사회제도의 바람직한 조화와 정착이라는 화두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뛰어난 소설이다. 이 쉽지 않은 주제를 수려한 이야기로 풀어가는 작가의 역량이 놀랍고 SF의 소수 덕후만을 위한 작품이 아닌, 문학을 좋아하는 모든 이들에게 받아들여질 보편성을 담고 있기에 더욱 추천하고픈 작품이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서 언급하기도 하지만 언어학자 촘스키의 보편문법처럼 리 고토미의 작품은 다소 특수해 보이는 소재를 보편적인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 황동혁 감독의 <오징어 게임>이 서바이벌 장르한계에 닫혀있지 않고 자본주의의 보편적 문제인 경쟁과 계급 갈등을 다룬 것과 다르지 않다.

다소 추리적인 설정, 반전의 요소와 기승전결의 전개는 독자를 충분히 끌어들이고도 남을 것이다. 현상에 대한 판단유보와 다양한 묘사, 열린 결말 등이라는 고도의 문학 전개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아쉬울지 모르나 이또한 취향과 방식의 다름이라는 면에서 볼 때 충분히 받아들일만 하다.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처럼 사회 이슈적인 방식의 소설은 이런 르포적 전개가 더 어울릴 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독서토론모임에 가장 어울리는 소설로 추천하고픈 작품이다. '출생권'과 '사망권' 등을 비롯한, 이 소설에서 제기되는 여러 이슈들이 토론의 소재로 너무나 잘 어울린다.

<너를 기다리다>에서 제기하는 '태아권'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보자면 신의 뜻 혹은 섭리 혹은 자연의 질서라고 불리우는 주제를 인간문명의 영역으로 적극적으로 가져오는 문제에 속한다. AI의 발전에 비추어 보자면 인간은 신의 영역에 한 걸음 더 들어서는 문제인 셈이다. 인간 의식이 충분히 진화하지 못하면 신의 영역을 가져오더라도 혼란과 불안을 피할 수 없을 것이고 인간 의식이 충분히 성장했다면 신의 영역에 한 걸음 더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문명의 전개란 신비의 영역에서 합리의 영역을 넓히고, 미신의 영역에서 과학의 영역을 넓히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이런 신학적 철학적 근본 개념과 상관없이 이 소설은 일상에서의 소재를 바탕으로 재밌고 흥미진진하게 풀어간다는 점에서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작품이다. 이 원작을 바탕으로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도 기대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금봉'이라는 대만 출신의 인물이 일본에서 성장하면서 '리 고토미'라는 이름으로 일본어 소설을 낸 지점도 흥미롭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과 경계의 문제, 성소수자를 비롯한 여러 마이너리티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을 낳는데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정체성과 경계의 문제를 겪는 모든 작가가 뛰어날 수는 없겠지만 조선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어로 <빛 속으로 (번역 김석희, 녹색광선)>라는 뛰어난 소설을 남긴 김사량 작가라든가 한국인의 핏줄을 이어 받았지만 미국에서 영어로 <파친코 (번역 신승미, 인플루엔셜)>를 쓴 이민진 작가나 <작은 땅의 야수들 (번역 박소현, 다산책방)>을 쓴 김주혜 작가를 연상케 한다. 이들 작품들이 모두 비슷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누구보다 자아의 정체성에 고민한 예술가들이 작품으로 표현한 정점의 어떤 부분들을.

서지은 작가는 이전 번역작품이었던 쓰시마 유코의 <빛의 영역>처럼 자신의 삶과 전혀 별개로만 볼 수 없는 작품을 택하여 한국에 소개했다. 수려하고 시의적인 번역은 번역가의 능력이지만 작품들과 자신과의 공감대가 가느다란 실처럼 공명으로 연결되어 설득력을 더했을 것이다. 여러 책을 내면서도 재미와 의미심장함을 동시에 선사해주는 도서출판 마르코폴로에게도 응원을 보낸다.

바로 지금의 한국처럼 사회제도가 합리적으로 민주적으로 발전하는 것처럼 보여도 어느 때고 반동은 일어날 수 있다. 이 반동의 망령은 개인의 체험이나 트라우마와 같은 생존 부분과 연결되어 있을 때는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한다. 이를 없애기 위해서는 단기적으로는 살균의 방식이 필요할지 모르겠으나 장기적으로는 소통과 해원이 필요할 것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의식은 늘 성인 수준으로 앞서가거나 짐승 수준으로 뒤처지거나 하는 존재들이 상존하기 마련이지만 이들 모두는 그 자체로 귀하다. 건강한 상식의 주류가 이끌면서도 소통과 해원을 놓치지 않는다면 덜 떨어져 보이는 존재들조차 건강한 문명의 보금자리에서 조금이라도 나아갈 실마리가 있을 것이다. 타자 존재의 문제가 심각해 보이더라도 바로 해결하기엔 여러 근원적인 문제들이 있는만큼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단기적인 처방은 처방대로, 장기적인 풀어감은 풀어감대로 이어가야 한다. 실은 지금 당장 완벽해 보이는 제도조차도 미래에서 되돌아보면 오점 투성이일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소설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완벽해 보이는 시스템 속에서도 이를 빠져나갈 숨구멍을 열어두는 것, 뒤쳐져 보이고 한심해 보이는 타자의 의식이라도 무시하고 단절할 것이 아니라 소통하고 토론하며 희망의 씨앗을 발견하고 키워가는 것, <너를 기다리다>에서 이런 의미를 발견한 것은 소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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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오기傳 - 활자 곰국 끓이는 여자
김미옥 지음 / 이유출판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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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옥 작가의 <미오기傳>은 유례를 찾기 쉽지 않은 책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례를 위해 조선시대 박지원의 <허생전>까지 거슬러가야 할까요. 유머와 희극과 비극과 한탄 등이 골고루 있고 분명 본인의 얘기를 하는 책임에도 자서전도 아닌 것이 전기도 아닌 것이 생명을 지니고 살아 움직이는 책 같습니다. 자신의 삶을 출생부터 현재까지 단선적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이뤄진 사건을 통해 느끼게 하는 상황에의 풍경화와 같습니다. 비유하자면 <미오기傳>은 자신의 삶을 둘러싼 인물들과 사회를 통해 돌아보는 세계의 점묘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책을 제대로 읽는 독자는 금새 느낄 것입니다. 김미옥=미오기는 아니라는 것을요. 그러나 이 두 캐릭터가 전혀 다르다고는 또 말할 수 없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삶을 소재로 글을 썼으나 놀라운 정도로 적정한 거리두기에 성공합니다. 김미옥과 미오기를 아주 떨어뜨려 놓지도 않고 초근접시키지도 않음으로써 자기 객관화를 문학적으로 승화시킵니다. 곰탕에는 여러 재료가 들어가겠지만 오랜 시간 푹 고아낸 그 요리는 들어간 재료자체만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이미 곰탕을 만드는 이의 손맛과 요리철학이 들어가 있습니다. '활자 곰국 끓이는 여자'라는 부제가 붙은 것처럼 <미오기傳 >은 '김미옥'이라는 인물의 치열했던 삶에서 벗어나 몇차원 이상의 시선을 통해 '미오기'라는 캐릭터로 재탄생합니다.

김미옥의 치열하고 지극한 삶은 미오기의 넉넉하고 유연한 시선으로 부활하고 있습니다.

김미옥의 삶에는 에고가 자리잡고 있지만 미오기의 삶에는 본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에고는 이기적이고 편협하고 본성은 이타적이고 보편적인 성격이 어쩔 수 없이 자리잡고 있겠지만 자기객관화의 과정을 긴 시간 이뤄내는 존재는 에고와 본성의 거리가 멀지 않다고 느끼게 될 겁니다. 결국에는 에고와 본성이 별개가 아님을 깨달을 때가 올 겁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우주의 시간만큼 길고 긴 영혼의 여정을 걸어가는지도 모릅니다.

고대 시절부터 자아탐구 혹은 자기주시를 통한 삶의 수행은 오랜 역사가 존재합니다. 근래에 와서 메타인지라고 하며 자기객관화 등으로 일상화된 용어로 자리잡기 시작했다는 것은 보편적인 수행론이 대중으로도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객관화는 어렵고 메타인지는 인지하기 쉽지 않습니다.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감정의 관찰자'로 높은 시선을 유지하기보다는 '감정의 주인공'으로 휩싸여 살아가는 것이 훨씬 쉽고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지혜의 잠언들이 있고 무엇보다 예술과 문학이 있습니다. 지혜의 잠언은 온전한 수행으로 들어갈 준비가 된 이들에겐 바로 본론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영혼의 나이가 아직 채 되지 않더라도, 소명의식까진 아직 갖추고 있지 못하더라도 자아의 중심을 에고보다는 본성의 시선으로 점차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때가 옵니다. 예술과 문학은 그것이 중요함을 여러 형태를 통해 알려줍니다. 우리가 미처 시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뿐이지 주위에 관심을 두게 된다면 예술과 문학은 늘 이정표를 마련해두고 있습니다.

니체가 얘기했듯이 '신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해석을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신이라는 정의 자체가 죽지 않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필멸의 존재라는 것과 대비되어 말이지요. 신은 죽었다고 할때의 신은 죽거나 말거나 스스로는 신경쓰지도 않습니다. 그저 인간들이 중세시절 이전엔 신이 모든 것인냥 숭배하다 르네상스 등을 거치며 신의 인간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급격히 줄어들었음을 선포한 것 뿐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신의 이름을 빙자한 사제들이 영성도 희박한 채로 인간사회의 주류 이데올로기로 행사하다가 점차 인간문명 중심의 이데올로기에 자리를 내어준 것이지요.

그렇기에 사실은 영성이 빠진 형태의 종교나 제도나 도그마는 그 극심한 폐해를 생각한다면 차라지 죽는 게 나으며 신이 주류 이데올로기로 행사하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영성이 충만한 이들은 표면적으로든 아니든 사제나 보살의 역할을 실질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대형교회의 권력세습이나 큰 사찰의 주지쟁탈같은 것에 아랑곳 않고 하루 한끼를 걱정하는 이들에게 밥을 제공해 주고 드러나지 않는 곳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는 이들이 표면적인 사제보다 육신을 입은 천사와 보살에 가깝습니다. 이들은 물질의 재물보다 영혼의 봉사가 더 오래 가고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이들입니다.

진정으로 예술과 문학을 하는 이들에게 종종 사제라는 비유를 드는 것은 결코 억측이나 과장이 아닙니다. 우리는 도시문명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자연과 멀어지고 영성과 멀어집니다. 예술과 문학은 찐 사제들과 더불어 우리의 잃어버린 중심, 잃어버린 영혼, 잃어버린 본성을 찾아 올라가도록 도와주는 사다리와도 같습니다.

김미옥 작가는 장점이든 단점이든 이쁜 것이든 흉물이든 가리지 않고 스스로의 삶과 주변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되 더 넓은 시선으로 돌아보고 삶의 지혜를 얻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자아의 진화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시작하는 것이라는 영감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스스로가 남자에 비해 취급도 못 받고 태어나는 것조차 희박했을 뿐만 아니라 교육기회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취업전선에 바로 뛰어들어 가족까지 챙긴 삶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주변독자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로 산다는 것은 인간승리를 넘어 거듭났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겁니다. 문학의 전도사, 문학의 사제 역할은 자연스럽게 소명의식을 지니게 된 작가에게 부여된 훈장과도 같습니다.

문학이 어떤 거창한 목적을 위해, 말하자면 잃어버린 영성을 되찾아주는 역할도 한다는 점에서 도구로 본다거나 프로파간다의 역할을 한다는 오해는 없길 바랍니다. 문학은 문학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할 때 이미 그 역할을 다한 것입니다. 김미옥 작가처럼 오랜 시간 삶으로부터 독서로부터 세계의 이해로부터 이어온 긴 시간의 곰탕같은 진국을 내어 놨음에도 스스로 뻐기지 않고 간략하고 소박하게 그러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여유는 문학의 재미가 얼만큼 다양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 바탕에 우리는 더 넓은 시선과 본성을 항해하는 의식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지니게 될 겁니다.

어린 시절 두 할머니의 흔한 예명을 고상한 한문이름으로 지어준 면서기를 통해 '인생도처 유상수'를 배울 수 있으며, 젊은 시절 가장 힘든 시기에 기둥서방에게 두들겨 맞았던 밤의 여자가 차려준 소박한 김치찌개 밥상을 받으며 '인생도처 유선인'을 배울 수 있습니다. 김미옥 작가는 자라면서 여러 이들에게 받았던 것을 글을 통해 대중에게 되돌려주는 문학의 보살과도 같습니다. 남에게 뱉은 침은 자기에게 돌아오며, 남에게 준 꽃은 자기에게 주는 것과 같습니다. 별과 행성들만이 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연도 돌고 돕니다.

아무런 대과나 큰 계산없이 문학의 독자들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한다는 정신은 대단합니다. 그러나 희생이나 봉사라는 생각조차 없이 활동한다면 결국엔 더 큰 결실로 돌아올 겁니다.

물질적 체험이 간절하거나 어린 영혼들에겐 인생에 심각한 과제가 잘 주어지지 않습니다. 편안하고 부유한 곳에서 경험을 누리기에도 바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오래된 영혼, 성숙한 영혼일 수록 가히 인생의 과제라고 할 만한 숙제가 나타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물질적으로 결핍되고 인간적으로는 주위에 나쁜 놈들과 사기꾼들이 그득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영혼은 결국 모래 속에서 바늘을 찾고 시장통에서 도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백세시대에 <미오기傳>의 등장은 절반의 인생을 보여준 셈이니 후반의 <미오기傳 2>를 위해서라도 부디 슬기롭게 모든 것을 넘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생은 완벽해서 살만한 것이 아니라 부족함 투성이고 좌충우돌과 시행착오의 역사가 자신의 삶의 대부분이라고 하더라도 살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통해서 성찰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으로 충족하느라 모든 삶을 보낸 존재보다는 노력하느라 방황하는 영혼으로 인해 모든 삶을 소진해버린 존재가 역설적으로 결국에는 웃을 수 있습니다.

재물은 자아와 함께 갈 수 없지만 영혼의 경험은 자아 속에 스며들어 우주의 품에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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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소년 세트 - 전4권
유페이윈 지음, 저우젠신 그림, 황선미 외 옮김 / 마르코폴로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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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의 실패는 실패라고 할 수 없고, 가장 큰 실패는 꾸준히 노력할 용기를 잃는 것이란다"
- <대만의 소년> 중에서, 아버지와의 꿈의 대화
(유페이윈 글, 저우젠신 그림, 도서출판 마르코폴로)

대만의 현대사를 잘 모르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영화를 통한 이해는 좋은 통로의 역할을 한다. 에드워드 양 감독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나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비정성시>는 명작일 뿐만 아니라 대만이란 이웃나라를 조금 더 알게 되는 계기를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들은 제작된지 수십년이 지났기에 영화마니아가 아니라면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인데 이를 보완하고 해소해 줄 또 하나의 작품이 나왔다. 이번에는 만화로.

이 만화의 주인공인 차이쿤린은 1930년에 대만에서 태어나 안타깝게도 작년까지 이 세상을 지내다 간, 말 그대로 대만현대사를 관통하는 인물이다. <대만의 소년>은 1권 독서를 좋아하던 어린 시절(일본제국 식민지 시절), 2권 반란누명으로 10년동안 뤼다오 감옥을 지내던 시절 (외성인 중화민국 지도그룹의 대만이동 시절), 3권 소년잡지 <왕자>를 비롯한 출판계 전성기 시절 (반공과 검열의 시절), 4권 후학과 대만 민주화를 위해 활동한 시절 (대만 정권교체기) 등을 다루고 있다.

어린 인물이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사회와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나 논픽션은 여러 것이 있지만 <대만의 소년>은 그 중에서도 모범이라 할 만 하다. 우리가 자세히 몰랐던 2.28 사건이나 백색테러 사건, 상상 이상으로 심각했던 대만시절 장제스의 반공정책이 차이쿤린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일제 식민지 시절의 깊은 잔해, 외성인(중국대륙)과 본성인(대만인)의 충돌, 국공내전으로 표현되는 이데올로기의 충돌, 20세기의 끝에 와서야 이루어지는 대만 최초의 정권 교체 등은 묘하게도 대한민국의 현대사와 겹치는 부분들이 많다. TSMC라는, 대만의 세계적인 반도체 회사만이 한국의 삼성과 경쟁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발전조차도 한국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발전을 이뤄왔던 것 같다.

중학생 시절 독서회 활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반란분자로 찍힌 차이쿤린의 삶은 말 그대로 가장 험난한 시대를 관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휴머니티는 지닌 채, 포기를 모르며 긍정적 변화의 시대를 이끌어 가는 역할을 보여준다. 시대를 풍미했던 소년잡지 <왕자>를 비롯한 출판업을 이끌고 재난을 비롯한 큰 고난이 있었음에도 노년에는 정권 교체를 비롯한 민주화 과정의 발언자 역할을 함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차이쿤린보다 한참 어린 유페이윈이라는 여성작가가 저우젠신이라는 만화가와 손잡고 차이쿤린의 삶을 이야기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그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 개인의 삶은 사회와 역사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 대표적인 모델이 차이쿤린일 것이다. 국공내전에서 패하고 대만으로 이전한 중화민국이 중국이라는 이름조차 중공에게 빼앗겨 버리고 국제사회에서 소외받는 지경이지만 대만은 여전히 만만한 나라가 아니다. 대만에 국립고궁박물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에드워드 양, 허우샤오시엔, 이안, 차이밍량 같은 영화인에 더하여, 차이쿤린같은 깨어 있는 인물들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대만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만화이지만 만화 이상의 매력을 보여준 <대만의 소년>을, 늘 시사성과 흥미로움과 쉬지 않는 출판의 열정을 보여주는 도서출판 마르코폴로에서 한국판으로 발간했다. 각 4권을 황선미, 김정은, 권애영, 박은혜 씨가 번역의 수고를 맡았다. 대만어, 중국어, 일어가 섞인 원전을 저우젠신의 매력적인 그림과 무리없이 배치되어 나왔다. 커버를 비롯한 디자인이 만화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뤘다. 대만에서도 한국판을 보면 반갑고 고마워했을 것이다.

한류가 퍼져가고 있지만 넓게 보면 아시아의 정신, 동양의 정신이 포함된 그 무엇일 것이다. 점점 망가지고 있는 중공에게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 국가로 더 건강한 중화민국이 건재하길 바란다. 이미 세상을 떠난 대만의 소년도 그 바램을 하늘에서도 잃지 않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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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미래에서 너를 만나고 시작시인선 499
허향숙 지음 / 천년의시작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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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의 삶을 살피고 같이 살아가며 보듬는]
- 허향숙 시집 - <오랜 미래에서 너를 만나고, 2024, 천년의시작>

허향숙 시인에게 있어서 존재란 조명을 받지 않아도, 두드러지지 않더라도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이고, 삶이란 이들을 살피고 같이 살아가는 것과도 같다. 이는 무위의 삶과도 닮아 있으며 적극적으로 보이지 않으나 내밀하며 빛나지 않으나 은은하다는 점에서 유위의 삶을 넘어간다.

<그리움의 총량>에 이어서 두번째 시집인 <오랜 미래에서 너를 만나고>는 허 시인의 문학적 역량과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확연히 볼 수 있는 작품집이다. 삶과 존재를 바라보는 허 시인의 시선은 굳건하되 더 부드러워지고 넓어졌다. 작가에게 있어서 두번째 작품은 의미심장하다. 작품의 정체성과 방향성에다 자전적인 요소까지 드러날 수 밖에 없는 첫번째 작품집에서는 대개 특유의 고유성만이라도 담고 있다면 신선도 지수로 인해 좋은 인상과 점수를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두번째 작품집에서 작가는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른다. 이 시험은 사실 외부적 시선보다는 스스로의 내적 시선으로부터 출발할 수 밖에 없다. 허 시인처럼 관찰의 눈과 자기 객관화가 잘 준비된 이들은 이 시험을 기꺼이 치룰 것이다.

'슬픔이 흘러왔다
흐르게 두었다

분노가 돋아났다
돋게 두었다

기쁨이 엎질러졌다
그냥 두었다'

- <무애를 살다> 중에서

무애를 사는 것은 갇혀 있지 않은 삶을 의미할테지만 감정의 주인공이 아닌 감정의 관찰자로 사는 것과도 같다. 이는 자기 관찰, 자기 객관화로 가는 과정이기도 하고 유위적인 삶이 아닌 무위적인 삶에 가까운 것이기도 하다. 넓은 시선, 통찰의 시선은 여기로부터 비롯될 것이다.

'태풍은 나비의 날개에 꼭꼭 숨고
소란은 고요에 꼭꼭 숨고
어둠은 빛에 꼭꼭 숨고
슬픔은 기쁨에 꼭꼭 숨고
고통은 환희에 꼭꼭 숨고
울음은 웃음에 꼭꼭 숨고'

- <숨바꼭질> 중에서

그렇기에 태풍과 나비의 날개는, 소란과 고요는, 어둠과 빛은, 슬픔과 기쁨은, 고통과 환희는, 울음과 웃음은 서로의 반대말이 아니라 서로의 짝을 이루는 앞면과 뒷면임을 알려준다. 인간사 새옹지마라는 의미에서 더 나아가서 보자면 이분법적으로 보이는 모든 현상과 감정들은 억지로 불러 들이거나 반대로 피해야 할 것들이라기 보다는 다가오는 것들을 겪되 그것에만 빠지지 말고 흘러가도록 놔두는 것과도 같다. 겪음을 피함으로써 순수해지는 것이 아니라 겪음을 지나감으로써 순수함의 중심으로 더 갈 수 있는 의식의 진화를 밟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개미 한 마리
보리 한 알 물고
담벼락 오르다
떨어지고
다시 오르고
떨어지고
다시 오르고
.....
보리 한 알 물고
일생을 두고




거야'

- <넘다> 중에서

그러므로 의식의 진화는 통찰의 시선을 이루고 더 넓은 시선을 이룬다. 인간에게 있어서 개미의 삶은 하루살이와도 같을지도 모른다. 역설적으로 이는 영원한 삶을 사는 신이 100세도 채 못 사는 인간을 바라보는 것과도 같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미와 이보다 못 해 보이는 미생물조차도 거대한 생태계를 이루는 필수 존재라고 믿는 이들에게 어느 하나 하찮은 존재란 없다. 인간에게 인생의 과제는 개미에게 보리 한 알 물고 벽을 넘어 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신처럼 넓은 통찰의 시선을 지닌 이에게 미생물이나 개미나 인간은 각자 의식의 진화에 어울리는, 스스로가 부여한 일생의 숙제를 하나씩 넘어가려고 애쓰는 애뜻한 존재들이다. 한때 개미였으나 인간이 된 존재가 개미를 바라보고, 한때 인간이었으나 신이 된 존재가 인간을 바라보면서 육신에 갇혀 있지 않은 넓은 시선으로 가고자 하는 의식의 진화를 멈추지 않는 한 언젠가는 신의 시선을 지니게 될 것이다.

'옷처럼 생을 벗고 입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하다가
.....
삼십 년 전에 벗어놓은 생 꺼내 입으면 소원이 없겠다 생각하다가'

- <옷처럼 생을 벗고 입을 수 있다면> 중에서

전생이 봉인된 삶은 옷처럼 생을 벗고 입을 수 있기를 바라지만 봉인의 기억이 해제되는 순간에 우리의 영혼이 육신을 옷을 벗고 입듯이 흘러왔음을 알 때가 올 것이다. 실제로는 옷을 벗고 입듯이 삶이 흘러왔으되 옷을 벗고 입는 생을 또다시 바라는 것은 봉인된 삶에서 근원적으로 욕망할 수 밖에 없는 역설이다. 이 바램으로 인래 삶은 더 치열할 수 밖에 없다. 지금 이 삶을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면 내던져진 삶의 알리바이를 얼마든지 주장하더라도 도피하지 않는 치열함을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장도 못한 채
생략된 나 때문에
울지 말아요
.....
천 년을 떠도는
바람의 몸짓으로
나 여기 있어요

당신의 숨 속에'

- <나, 여기 있어요> 중에서

짧은 생을 살든 긴 생을 살든 육신의 삶은 우주의 영원성에 비하면, 아니 그보다 훨씬 수명인 태양이나 지구에 비하더라도, 심지어 수백년을 살아온 소나무보다도 부질없다. 그러나 부질없는 순간의 삶은 그 자체로 지금, 여기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체험 삶의 현장이므로 전혀 하찮지가 않다. 참척의 비극이라는 굴레에 갇히지 않고 문학적인 승화를 시키는 과정은 먼저 저승으로 떠나간 이가 가장 바라는 바였을 것이다.

지난 생은 길게 살았으니 이번 생은 짧게 살아볼께요. 지난 생은 내가 부모였으니 이번 생은 내가 자식이 될께요. 다음 생은 친구로 만나요. 언젠가는 풀 한포기 새 한마리가 되어 당신 앞에 나타날지도 몰라요. 나와의 인연이 우주의 인연처럼 길다면 바람의 몸짓으로 불현듯 다가오더라도 알아볼 수 있을 거예요. 가슴 속의 숨처럼.

'처음
당신은
눈부신 흙이었을 터

하늘과 구름과 달과
별 바라
푸른 꿈 키웠을 터
.....
풍화에 금 가고
색 바래

뒤뜰 구석진 자리'

- <옹기> 중에서

한 무더기의 흙이 장인의 손길을 통해 옹기로 태어난다는 것은 유일한 존재로서의 지위를 얻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는 흙으로 인간을 빚는 신의 입장과도 다르지 않다. 옹기이든 육신이든 생명없어 보이던 존재들이 뭉쳐짐으로써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허 시인의 시선은 생물과 무생물을 차별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애정을 드러낸다. 이는 첫 시집인 <그리움의 총량>에서 익히 드러난 것들의 확인이자 확장이다.

'사랑은 그대를 입고 나를
사는 일인데
나는 그대를 입지 못하여
나를 살지 못하네

사랑하는 이여'

- <사랑은 그대를 입고> 중에서

이 시를 멋진 작곡가가 노랫말로 쓴다면 많은 이들의 애청가요가 될 것만 같다. 이 시가 지닌 대중성 뿐만 아니라 보편성과 직관성으로 인해 긴 시간 사랑받는 명곡처럼.

허향숙 시인은 두번째 시집인 <오랜 미래에서 너를 만나고>를 통해 시인으로서 긴 생명력을 보여줄 것임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이는 허 시인의 특장점인 관찰성과 관념성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관찰을 위한 관찰은 중심을 벗어나 떠돌기 쉽고 관념을 위한 관념은 골방에 갇혀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할진대, 관찰이 관념을 위해 보조하고 관념이 관찰의 중심을 잡음으로써 훌륭한 조화를 이룬다. 이 조화의 의식은 진화를 거듭할 수록 이 시집의 제목이 주는 표현처럼 오랜 미래에서도 허 시인의 작품을 기대케 한다.

첫 시집인 <그리움의 총량>의 인기가 우연이 아니었음을 보여준 두번째 시집인 <오랜 미래에서 너를 만나고>를 통해 더 넓어지고 깊어진 허향숙 시인의 세계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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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칭 인간
이은정 지음 / 득수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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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끝장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땅속으로 가만히 숨고 싶어진다. 알고 보면 시기만 다를 뿐 모두 비슷한 패턴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본인도 다를 바 없는데 타인에 대해서만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일관하기에 우린 그토록 오만한 것이 된다. 자신은 거의 모든 삶의 피해자이고 타인은 대체로 삶의 가해자라는 피해의식 속에서 우린 그토록 이기적인 것이 된다. 그렇게 이기적이고 오만하게 혼자가 되는 늙음, 나도 그 길을 걷고 있었다.'

- p.186, '소란'의 일부, 이은정 소설집 <비대칭 인간> 중에서 (도서출판 득수)

외눈박이만 사는 마을에 양눈을 지닌 존재가 홀로 가면 필시 돌연변이나 비정상으로 취급되어 왕따나 홀대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서의 정상과 비정상은 주류에 속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구분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은정 작가의 새로운 소설집인 <비대칭 인간>은 의미심장하게도 책을 거꾸로 세워서 제목을 보면 <인간 비대칭>으로 읽힌다. 얼굴의 좌우가 다르게 보이거나 움직임이 따로일 때의 표현을 비대칭 인간이라고 표현한다면 이 때의 존재는 전체 속의 일부이자 대중과는 다른 존재의 표현이다. 그러나 비대칭 인간의 경우는 우리 모두는 똑같지 않고 다 다른 존재라는 표현에 가깝다. 비대칭 인간은 일반 속에서 특수를 특정해서 추출하는 경우라면 인간 비대칭은 우리 모두 각자가 특수한 존재라는 표현에 가깝다. 그렇기에 '비대칭 인간의 사회'는 주류 속에서 소외가 배태될 가능성이 높고 '인간 비대칭의 사회'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포용있는 곳에 가까울 것이다. 이은정 작가의 새 소설집은 비대칭 인간의 시선을 넘어서 인간 비대칭의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자는 문학적 제안으로 읽힌다.

젊은이들의 우연처럼 보이는 사고를 '눈'으로 복수하는 <눈이 와요>, 젊은 연인들의 아슬아슬한 결별과 화해를 다룬 <침대는 잘못이 없었다>, 정작 주위는 관심없어 보이는데 스스로가 얼굴의 왼쪽 오른쪽이 다르다고 고민하는 <비대칭 인간>, 배경과 스펙이 좋은 허위가족의 허울을 벗어던지고 진짜 가족을 이루려는 <유령 가족>, 갑을관계나 다름없는 건물주 틈에서 다뤄지는 세입자의 생존기인 <입금하는 사람>, 긴 기간동안 인간관계의 오해와 비난이 덧대워진 것을 한참 후에 다시 풀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소란>, 여러 희생을 감수하며 한없는 사랑을 베푸는 엄마의 행복의 자리는 어디인지 살펴보는 <엄마 같은 말> 등이 수록된 이번 소설집은 말 그대로 지금 여기 한국사회의 어떤 한 모습일 것이다. 바로 옆집 혹은 이웃의 모습과도 다르지 않은 이 이야기들은 적지 않은 울림과 감동을 준다.

모든 작가들이 그러한 경향을 지닌 건 아니지만 이은정 작가는 작품의 세월을 통해 성장의 진화를 엿볼 수 있는 부류일 것이다. 이은정 작가의 첫번째 소설집인 <완벽하게 헤어지는 방법>이 소재의 치열함을 통해 인간군상의 희비극을 다뤘다면 이번 작품들은 좀 더 일상적이면서도 삶과 사회를 이루는 질문들을 다룬다. 삶의 일상을 주로 다루는 홍상수 감독 영화의 문학적 버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보자면 이은정 작품을 작품답게 하는 지점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혹은 정상적으로 보이는 평범한 삶의 끝에서 경계 밖으로 추락하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하는 젊은이들의 묘사에 있다.

이 작가가 보기에 젊은이들은, 특히 한국사회의 젊은이들은 위태롭다. 실은 여러 젊은이들중에서 평범하고 안온하고 부유한 젊은이들이 아니라 하루하루 살기 위해 분투하는 젊은이들을 작품으로 호출한다. 이때의 젊음은 영혼의 젊음과도 다르지 않다. 육신만 이제 막 어른이 됬기에 삶과 사회를 지혜로운 원로처럼 대처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저 영악하게 살만큼 이기적이지도 않다.

살기 위해서든 깨닫기 위해서든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젊음은 멀리서 바라보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면 얼마나 치열한가. 이 치열함과 복잡다단함은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도 아니고 먹는 것이 해결된 상태에서의 고고한 명상도 아니고 '체험 삶의 현장'에서 모든 것을 거는 외줄타기와도 같은 아슬아슬함 속에서 조금씩 깨닫는 무엇과도 같다. '삶이 곧 수행'이란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삶이 수행이란 것을 의식하며 사는 것과 그냥 사는 것은 적지 않은 결과의 차이를 보여준다. 삶의 현장 한 가운데에 있다 보면 '감정의 관찰자'가 되기 보다는 '감정의 주인공'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학은 혹은 연극을 비롯한 여러 예술은 우리 각자가 인생이라는 무대위의 배우로 와서 잠깐 살다가는 존재라는 것을 환기시켜주는 훌륭한 장치이다. 삶의 주인공 보다는 삶의 관찰자로 살 때를 깜빡 하고 있을때 이은정 작가를 통해 문학은 그 사실을 다시 일깨워준다. 이은정 작가는 작품에 따라 여러 성격과 주제가 드러나지만 지금 여기 한국사회의 지점을 좀체 벗어나지 않는다. 아주 옛날 과거의 이야기도 아니고 이쁜 풍경화처럼 아름다운 소재의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나 진정한 미학이 선악을 넘고 미추를 넘어 삶의 총체성을 통해 나타나는 경험과 깨달음이라고 볼때 실존의 진정성은 진가를 드러낸다.

자연은 많은 소리를 들려준다. 동물소리, 물소리뿐만 아니라 식물조차도 소리를 들려준다. 도시도 많은 소리를 들려준다. 인간의 소리, 문명의 소리가 소음에 가까울 정도로 들린다. 귀와 눈이 열린 존재는 그것이 열린 만큼 이 총체속에서 배우고 나아갈 것이다. 작가와 예술가는 더 나아가서 여기에서 영감을 받고 작품을 통해 새로운 총체를 구축한다. 자신이 경험한 즐거움 뿐만이 아니라 처절했던 순간의 경험조차도 그것을 버리지 않고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이때 치열한 삶의 무대로 걸어가는 작가 혹은 예술가의 선택은 잠재의식적인 영혼의 선택에 가깝다. 육신을 지닌 고단한 존재는 치열한 삶의 무대를 거부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를 선험적으로 차단하고 봉인된 의식으로 선택한다. 육신의 부유함과 안온함이 아니라 생존조차도 위협받는 치열한 삶의 무대를 선택한 영혼은 용기있고 성숙한 영혼이다. 섭리는 삶의 과제를 해결할 만한 존재에게 큰 과제를 주는 법이다. 위대한 작가와 예술가는 기꺼이 이 벅찬 과제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기어이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이은정 작가처럼 실존의 진정성을 놓치지 않으려는 문학의 기획이 기어코 삶의 고단함을 넘어서길 바란다. 먼 훗날 피안에서 회고할 때, 평온했으므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치열했으므로 행복했노라고 얘기할 날이 오기를 바란다. 이는 지상에서의 상업적 성공이 어느 정도였는가와는 별개로 엄청나게 진화한 예술적 영혼이 누릴 수 있는 훈장과도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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