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 어느 포로수용소에서의 프루스트 강의
유제프 차프스키 지음, 류재화 옮김 / 밤의책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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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의무는 현세에서 상벌을 받는 게 아니며, 이 세계와는 동떨어진 세계, 선의, 세심, 희생에 기초를 둔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성싶다. 인간은 그 세계에서 나와 이 지상에 태어나고, 아마도 머잖아 그 세계로 되돌아가 미지의 법도의 지배 밑에 다시 사는 게 아닐까. 그러나 이에 앞서, 인간은 이 지상에서 그 법도에 따른다. 왜냐하면 어떤 손이 적었는지 모르는 채, 마음속에 법도의 가르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9 – 갇힌 여인>, 국일미디어, 246쪽.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이 모든 것을 떠나는 것은 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무언가 때문이 아니며, 종교라는 이름의 무언가 때문도 아니다. 전광석화같은 깨달음에 휩싸여서다. 코르크로 벽을 다 막은 방 안에서 그는 ’살아 죽은‘ 채로 묻힌다(나는 프루스트의 운명과 주인공의 운명을 기꺼이 뒤섞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점에서는 둘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죽을 때까지 자신의 ’절대‘인 예술에 복무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마지막 권인 <되찾은 시간>은 기쁨의 눈물들로 뒤범벅되어 있으며, 이는 단 한 알의 소중한 진주를 사기 위해 전 재산을 팔아치운 사람이 부르는 승전가다. 하루살이처럼 덧없는 모든 것, 찢어지는 듯한 고통, 세상의 모든 기쁨과 청춘과 명성 그리고 에로티시즘의 공허함이 창조자의 기쁨과 비교된다. 한 문장 한 문장 직조하며 매 페이지를 만지고 또 만지는 이 존재는 결코 전적으로 닿을 수 없는, 닿는 것이 영영 불가능한 무언가를 찾아가고 있을 뿐이다.’

- 유제프 차프스키 지음, 류재화 옮김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풍월당 밤의책, 112쪽.

세계2차대전의 개전초기 역사를 조금 아는 이들이라면 1940년 소련의 그랴조베츠 포로수용소의 이야기에 과거 한국의 식민지 해방 후와 같은 약간의 기시감을 느낄 지도 모르겠다.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로 독일은 유럽의 여러지역을 침공할 계획을 세우는데 히틀러가 증오했던 공산주의 체제인 소련과는 예상외로 독소불가침 조약을 맺고 유럽의 몇몇 부분을 나눠가지기로 하는 비밀협약을 맺는다. 바로 이 협약의 대표적인 희생양이 폴란드였다.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2차대전의 비극적 서막을 연다. 또한 독일의 요청으로 소련은 폴란드의 동부를 점령함으로써 폴란드는 자신들의 의지와 능력과는 상관없이 나치즘과 공산주의의 압제 하에 놓이게 된다.

유제프 차프스키는 폴란드의 화가이자 작가였으며 집안 내력에 의해 풍부한 지적 풍토와 문화적 환경에서 자라게 되나 독일의 침공으로 장교로 참전하게 되지만 소련에 의해 포로가 되어 생사를 오가는 고초를 겪게 된다. 차프스키의 증언에 의하면 15,000여명의 동료군인들중에서 학살과 유배 등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는 400명이었다. 이 비극속에서 차프스키는 영하 45도를 오르내리는 소련의 그랴조베츠 포로수용소에서 노역을 끝내고 돌아온 늦은 저녁시간에 동료포로들을 앞에 두고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강의하는, 시간과 공간의 숭고함을 일구어 낸다. 유제프 차프스키는 당시 이렇다할 자료 하나없이 기억만으로 동료들에게 프루스트의 삶과 문학을 공유한다. 풍월당의 밤의책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자 류재화의 번역으로 나온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는 바로 그 당시의 강의내용을 담은 생생한 기록이다.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마르셀 프루스트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와 더불어 근대 모더니즘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 살펴봐야 하는 소설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문학의 위대한 정점을 이룬 작품이다. 이 소설은 이렇다할 전통적인 기승전결 구조나 드라마틱한 사건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이, 유년시절의 기억과 추억에서부터 중년까지의 ‘나’를 여러 에피소드와 기억과 추억과 상상으로 이어간다. 수많은 인물들과 수많은 사건들이 하나하나 사소하지 않게 묘사되지만 결국은 지나간다. 이것들을 되살리는 주인공은 ‘나’ 혹은 더 본질적으로는 마르셀의 마음, 의식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자신의 또다른, 그러나 결국은 자신일 수 밖에 없는 ‘문학적 자아’를 통해 삶과 세계를 예술적으로 재구성한 걸작이다. ‘문학적 자아’의 불멸을 위해 프루스트는 스스로 유폐된 방에서 자신의 삶과 육신을 말 그대로 온전히 문학의 제단에 바쳤다. 너무나 예민하고 너무나 총명했던 프루스트는 이 재능을 인생의 마지막까지 불태웠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7부에 이르는, 일반도서 기준으로도 3~4천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프루스트가 펼치는 문학세계가 거시적이고 난해한 철학을 보여주고자 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첫권부터 바로 펼쳐 읽어도 좋을지 모른다. 그러나 유례없는 형식과 내용의 새로움에 약간의 적응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덧붙여 이 책을 읽은 자이든 읽지 않은 자이든 이 책을 바라보는 시선의 다양함을 바라보기 위해서라도 차프스키의 이 강의록을 보는 것은 매우 적절하고 훌륭하다.

흥미롭게도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를 읽으면서 차프스키의 자아는 프루스트의 자아와 공유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고 느꼈다. 책을 덮으면서 그 느낌은 더 커졌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나’는 마들렌 과자와 차를 마시면서 그 감각이 문득 어린 시절의 나로 되돌려놓는다. 없어졌다고 생각한 유년의 기억들이 일제히 되살아나고 있다. 내가 주체적으로 먼저 옛 기억을 불러낸 것은 아니지만 아주 사소해 보이는 물리적 감각의 자극은 나를 새로운 시간으로 인도한다. 차프스키는 이에 비해 포로수용소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프루스트의 작품을 기억으로부터 소환한다. 그의 수감이 주체적이 아닌 강제적인 것이었지만 그로 인한 절박감은 기억을 불러내는 계기를 만든다. 또한 프루스트는 지나간 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작품을 이어가지만 차프스키는 프루스트와 작품에 대한 기억을 소재로 강의를 이어간다.

또 하나의 공유점이라고 볼 수 있는 점은 프루스트 작품에 대한 차프스키의 시선이다. 지금에서는 프루스트의 작품이 개인적으로 싫든 아니든 모더니즘 문학의 중요한 분수령으로 자리매김했지만 차프스키가 포로수용소에서 강의할 당시는 지금과는 평가가 달랐을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1부에 해당하는 <스완네 집 쪽으로>가 출판사의 평판을 못 얻어 프루스트가 자비출판으로 시작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2부에 해당하는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가 콩쿠르상을 받음으로써 인정을 받기 시작했지만 이 방대한 작품에 대해 전반적인 이해를 하는 이는 여전히 많지 않았을 것이고 상황은 새롭게 일어나는 문학적 경향의 한 사례로 치부되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차프스키는 이 작품을 처음 접할 때는 생소해했으나 점점 이 작품의 매력에 빠져든다. 몇몇 부분은 읽고 또 읽고를 반복한다. 차프스키는 프루스트 시대의 그 작품을 이해하고 공감한 몇몇 이들 중의 한 명이었다. 이는 프루스트처럼 차프스키도 문학 이외의 미술이나 예술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교양이 높았던 점이 작품전반을 이해하는 데 한몫 했을 것이다.

차프스키가 정식 대학 강단이나 일반 강연의 환경이었다면 그의 프루스트에 대한 깊은 이해에도 불구하고 해설방식이 상당한 체계를 갖춘, 그러나 다소 평범한 구성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동료포로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가고 자신조차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포로수용소에서 저자의 말대로 ‘무너지지 않기 위해’, 동료들과 희망의 끈을 이어가기 위해 나누는 이야기들은 사실상 군더더기가 없고 본질적일 수 밖에 없다. 절박함은 핵심을 낳고 핵심은 심연을 관통한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생생한 묘사로 풀어낸 프루스트처럼 차프스키는 자신이 즐기고 탐독했던 프루스트의 기억을 한달음에 풀어낸다. 그리하여 그저 여러 해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제일 위에 인용한 구절처럼 작품의 단면 혹은 핵심의 하나를 비춰준다. 가장 비극적인 환경이었지만 그 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종전 후에 회고하는 차프스키의 언급은 큰 공명을 울린다.

조금의 소음도 허용치 않는 밀폐된 코르크로 덮힌 방의 프루스트라는 존재와 언제 저승으로 갈지 모르는 포로수용소의 차프스키라는 존재와 언제 확진이 될지 모르는 사회적으로 제약이 큰 환경의 독자라는 존재 중에서 누가 더 나은지 단순비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한 환경이 아니라(그것 자체가 이미 불가능한 것일테지만) 여러 제약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자아를 확인하면서 진화시켜왔다. 차프스키의 프루스트는 그 진화를 위한 또 하나의 위안과 계기가 될 것이다.

독자인 ‘나’의 프루스트를 더 이해하고 더 나아가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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