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 용서받을 자격과 용서할 권리에 대하여
시몬 비젠탈 지음, 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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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에 대한 독자 심포지엄]

2차세계대전 당시 시몬 비젠탈은 유대인 수용소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극한의 상황을 견디고 아내와 함께 극적으로 살아남습니다. 그러나 그의 친인척 89명은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난 뒤였습니다. 비젠탈은 종전이 되기 전 수용소 생활에서 근처의 병원으로 강제노역을 갔다가 다 죽어가는 젊은 나치장교를 만나게 됩니다. 그 나치장교는 병상에 누워 비젠탈에게 자신이 이전에 다른 독일군인들과 함께 저지른 유대인 학살에 대한 사건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비젠탈은 이 환자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이야기를 거의 들어주지만 조용히 그 병실을 나옵니다. 그리고 종전후 살아남은 뒤에 죽은 나치장교의 어머니를 찾아가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런 사건들을 겪은 후 비젠탈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해바라기>를 내놓습니다. 해바라기는 죽은 독일군인들 무덤에 함께 심어놓은 꽃입니다. 아마 자신이 죽었더라면 웅덩이에 다른 시체들과 함께 이름도 없이 썩어없어질 것에 비해 독일군인들의 무덤은 죽은 후에조차 해바라기가 함께 한다는 처지를 비관해서 쓴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치장교는 죽었고 그는 살아남았습니다. 시몬 비젠탈은 종전후 세계 곳곳에 뿔뿔이 흩어졌으나 조용히(?) 살고 있는 많은 나치잔당(!)들을 추척해 체포해서 법정에 세웁니다.  그는 지상에서라도 정의가 끝까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일을 한 것 같습니다. 

후일 그는 <해바라기>를 통해 나치장교의 에피소드를 들려주며 다시 현재의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의 용서를 나라면 받아줄 수 있을까? 나치장교는 용서받을 자격이 있고 비젠탈은 용서할 권리가 있을까? 내가 비젠탈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2부 심포지엄에서는 53명의 여러 인사들이 이에 대한 답변을 제시합니다. 이에 대한 글들은 너무나 각양각색이기도 하지만 비젠탈이 제시한 질문은 이 시대의 문명과 인간성에 대한 화두와도 같습니다. 

저는 이 책으로부터 여러 감흥이 일어나는 울림을 받았고 그 느낌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아마 이 책을 읽은 많은 분들도 여러 울림을 받았을 것입니다. 저희가 진행하는 일다포럼 독서모임에서는 지난 주말 이책으로 독자 심포지엄을 진행했습니다. 그중의 몇분 글들을 함께 올림으로써 이 책에 대한 느낌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시몬 비젠탈이 제기한 질문은 정신적이면서도 근본적이고 우리의 삶과 문명과도 떼놓을 수 없는 화두일 겁니다. 그러나 그 답변조차도 지금에 남긴 것이 10년 후에 다시 남기는 것과도 똑같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을 기록함으로써 나중에 내가 어떻게 변하고 진화했는 지를 살펴보는 데에 좋은 참조가 되리라 믿습니다.

시몬 비젠탈이 짓고 박중서 씨가 번역한 뜨인돌출판의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의 구성은 1부는 비젠탈의 에피소드를 담은 해바라기이고 2부는 이에 답변하는 53명의 글이 담긴 심포지엄입니다. 이에 일다포럼 독서모임에서는 3부의 형식으로 독자 심포지엄을 아래에 추가합니다. 이 독자 심포지엄의 형식에 많은 이들이 더 참여해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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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심포지엄 1. 인간성의 회복을 위한 용서 - 하늘나리]

본문 중에서....

나는 문득 거리 왼쪽에 있는 군인묘지를 쳐다보았다. 묘지 주위에는 철조망 울타리가 낮게 둘러쳐져 있었다. 듬성듬성한 덤불과 관목 사이로는 일렬로 나란히 늘어선 무덤이 보였다.

그리고 그 무덤가마다 해바라기가 한 그루씩 심겨 있었다. 마치 행진하는 군인의 모습처럼 꼿꼿하게 말이다.

나는 넋을 잃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꽃의 머리 부분은 마치 거울처럼 햇빛을 흠뻑 빨아들여 줄기를 통해 땅속 깊은 어둠으로 내려보내는 것 같았다. 내 눈길은 해바라기와 무덤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갔다. 지표면을 뚫고 올라온 듯한 해바라기의 모습은 잠망경을 연상시켰다. 꽃은 밝은색이었으며 나비들이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혹시 이 무덤에서 저 무덤으로 무슨 소식이라도 전해 주는 것일까?

그렇게 해서 꽃에게 뭔가를 속삭여주면 무덤에 누워있는 군인에게도 전달되는 것일까? 그래, 바로 그것이었다. 죽은 사람들은 이 꽃들을 통해 햇빛과 소식을 전달 받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나는 죽은 군인들이 부러워졌다. 그들 모두는 이 세상과 연결되는 해바라기를 한 그루씩 갖고 있었으며, 나비가 그들의 무덤을 찾아와 주었기 때문이다. 내겐 해바라기가 없었다. 내가 죽으면 그저 다른 시체들과 함께 커다란 구덩이에 던져질 뿐이었다. 내가 누운 어둠 속에 햇빛을 가져다줄  해바라기도 없을 뿐더러, 내가 파묻힌 무시무시한 무덤 위에는 나비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을 것이었다.

읽고나서.....

시몬 비젠탈 님. 당신의 질문을 들고 고민하던 이 한 달간 잠들어서도 당신의 질문을 놓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과연 제게 당신의 질문에 답할 자격이 있을까요?  

하지만 이제 대답할 시간이 되었고 어쨌든 이 잔을 들어야 합니다.

당신이 처했던 것 같은 기가 막힌 상황을 저는 한 번도 겪어보지도  곁에서 구경해보지도 못했습니다. 굳이 비견하자면  5.18민주항쟁이 있었네요. 하지만 저는 아직 전씨를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도 뉘우치지도 않고 있으니까요. 

당신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해보니 깊은 망망대해를 긴 대나무다리 두 개에 의지해서 겨우 걸어 건너고 있는데, 수영복 멋지게 차려입고  뛰어들어 헤엄치던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잡아제쳐 빠뜨려 죽이며 앞으로 나아가다가 힘이 빠지니까 살려달라고, 용서해 달라고 손을 내미는 모습이 상상이 되었습니다. 겨우 숨쉬고 눈 하나 깜박일 힘밖에 남지 않은 당신에게 말입니다. 그 때 당신에겐 그를 용서할  힘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살아남기에 절박했듯 그 SS대원 역시 자신의 영혼이 살아남기를 절박하게 원했던 듯 싶습니다. 다만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께가 아니라 신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거라고 믿습니다. 당신께는 참회를 하는 것 거기까지가 그가 했어야 하는 일이고요. 

여기까지 쓰고 나니 다른 사람의 죄를 어디까지,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사형제도는? 이런 저런 질문이 함께 떠오릅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사형시키는 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권한을 가진 이는 이미 죽었을 것이므로 살아있는 사람 누구에게도 사형시킬 권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사회에서 같이 살아갈 권리를 잃은 그를 격리시키는 것은 가능하겠지요. 용서가 아니라요.

다시 당신이 만났던 그 장면을 생각해 봅니다. 육체적 죽음과 영혼의 죽음에  그토록 가까이 가 본 사람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 두 죽음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영혼을 다시 깨워 일으키는 과정이 당신의 일생을 건 그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그 때 당신의 영혼의 죽음을 위협하는 요청을 받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당시엔 어떤  대답도 당신의 영혼에 심각한 상처를 입혔을 것입니다.  그리고 평생에 걸쳐 그 답을 찾아 오셨지요. 제가 당신이었다면 당연히 그의 죄와 함께  그를 두고  떠났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기적인 사람이라 "가망없는 일에 내 에너지를 소모하고 싶지 않아 " 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고백하자면 개인적인 일들의 경우  용서가 아니라 잊어버리는 쪽을 선택합니다. 그의 죄를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죄를 일깨워 뉘우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회심시키고 개심시켜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가려는 게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는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잊어버리는 쪽을 선택합니다. 제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또 그 사람이 바뀌지 않을 거라는 절망감에 그를 포기하는 것이지요. 당신의 질문 앞에서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스무살 적에 누군가를 아주 많이 미워해보고 나서야 개인적인 증오나 복수심, 미움, 이런 것들을 가슴에 키우는 일은 내 마음이 황무지가 되어  다른 어떤 좋은 식물도 자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용서가 아니라 망각을 방어기제로 선택하며 살아왔던 저를 반성하게 되네요. 하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 죄를 깨닫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해 허비할 에너지는 없기에 그를 그의 죄와 함께 두고 돌아서서 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제 생존 전략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회피하며 살아온 제게 누군가 한 개인이 자신의 죄를 참회하면서 용서를 빈다면,  반드시 용서냐 아니냐 하는 절박한 순간이 온다면? 제가 할 수 있는 용서라면 그의 참회와 간청을 들어 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질문은 개인을 넘어선 것입니다. 

개인적인 죄와 그에 대한 용서가 아니라면,  집단과 사회에 대한 크나큰 죄라면, 참회와 속죄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라는 질문은 그 다음이지요. 

사회의 통합과 발전을 위해서 인류의 정신의 발전을 위해서 우리는  화합을 이루어 가야 하니까요.  그것이 사회의 발전과 인류의 생존에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나간 역사에서 우린 배우는 것이 있기는 있는 걸까요? 여전히 우리 인류는 다른 민족에 대해 크나큰 죄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스니아에서, 킬링필드에서, 르완다에서, 심지어는 지금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도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요.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게 저지르는 만행은 사람들을 서로 사냥하고 사냥당하는 야만의 초원으로 데려가고 맙니다.  아니 동물들도 동족을 집단으로 사냥하진 않습니다.  종족번식을 위해 다른 놈의 새끼를 죽이고 자신의 씨를 심기는 하지만요. 아니 정말 닮았군요.  동물과 인간의 사이엔 습자지 한장의 차이밖에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쟁에 따른 살생은 사람은 영원히 변화시키므로 전쟁을 하지 않는 아서 클라크의 SF소설 "라마" 에 나오는 팔지거미 종족이 생각납니다. 어쩔 수 없이 지구종족과 전쟁을 하게 되었을 때, 전쟁에 참여한 거미족 전사들은 전쟁이 종결 된 후 사망이 예정되어 있었지요. 살생은 사람의 심성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에 사회 생활을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지요. 살생은 정말 사람의 심성의 무언가 야수의 부분에 채워졌던 자물쇠를 부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살생을 저지른 사람의 심성은 뭔가 심각하게 달라지는 것이라고, 회복불가능한 변화가 생기는 거라고 생각해요. 용서의 문제를 떠나서요. 그런데 직접적인 살생을 했다는 인식을 못하고도 그보다 더한 만행을 저지를 수도 있는 인간의 창의성이 있으니까요. 얼마나 많은 폭력들이 집단의 그림자 속에 숨어서 폭력에 대한 인식이 없는 채로 저질러 지고 있는지 암담하기만 합니다. 

집단폭력은 우리 안에 내재 되어 있고 우리들은  끊임없이 그에 맞서 싸워 나가야 하는 미개한 종족인가 하는 좌절감이 듭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사형시킬 권리가 없는 것처럼 용서할 권리도 없는 것이라고, 용서는 죽은 사람과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사회의 통합을 위해서 생존자와 가해자가 함께 일으켜 세워가야하는 전후 복구의 상황에서 우리들은 봉합하는 길을 찾아 내야만 하지요. 그것이 참회와 속죄의 길이고 그건 끝이 없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네, 시몬 비젠탈 씨.  당신에게는 용서할 권한은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평생 그 질문에 답하려고 노력하며 살아 온 당신은 어쩌면 그의 무덤에,  또 훗날 당신의 무덤에 해바라기를 심는 일을 해온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당신의 영혼을 불러 깨워 일으켜 신에게로 손을 뻗치는 일, 해를 바라며 피는 해바라기처럼  우리가 영혼의 죽음을 피하기 위해 평생 해야 하는 일. 

저는 오늘 당신이 심은 해바라기에 눈물 한방울을 떨어뜨렸을 뿐입니다.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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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심포지엄 2. 우리는 왜 용서를 하는가 - 김설미]

시몬 비젠탈의 용서에 관한 질문은 크게는 두 가지로 나뉠 것 같다. 먼저는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로 내 개인이 같은 상황에서 어찌 행동했을 지를 묻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용서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먼저 첫번째 질문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르투르의 말대로 이들이 겪고 있는 상황을 그대로 겪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내가 어떻게 했을 지 전혀 모르겠다. 아마도 독일인 전체에 대한 분노와 미움에 휩싸여, 죽어가는 독일인이 참회하며 용서를 구한다 해도 전혀 들어주고 싶은 마음도 없고 용서라는 것은 떠오르지도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 죽어가는 사람 (나치로서가 아니라 그냥 인간으로서)에 대한 연민으로 그냥 용서한다고 말을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결국은 그저 말로만 용서한다고 했을 뿐 실제로는 용서는 하지 못한 것이겠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이 상황에서 아마도 이 독일 병사를 용서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시몬 비젠탈은 용서를 하지 않은 채 (사실 이것도 용서를 하지 않은 것이 맞는 지 잘 모르겠다)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났다. 나라면? 그 죽어가는 독일인을 향해 어떻게 감히 용서를 구할 수 있느냐고 했을까? 아니면 시몬 비젠탈처럼 그냥 말없이 떠났을까? 솔직히 전혀 모르겠다. 

한편 “용서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라면 그 나치가 진정으로 참회를 했다면 용서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그 나치는 정말로 참회를 한 것일까? 그가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똑같이 용서를 구했을까? 그가 한 참회는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자의 자기 위안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본인의 마음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그저 누구든 상관 없이 유대인 “아무”에게나 본인의 죄를 털어놓은 것뿐이 아닌가? 그래서 유대인 죄수를 한 명 불러달라 하고 그 유대인 죄수가 왔을 때 이름도 물어보지 않은 것 아닌가? 그에게는 유대인은 개별성이 상실된 그저 “유대인”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이를 진정한 참회라 볼 수 있을까? 그저 본인의 괴로움을 달래기 위해 저질렀던 일을 고백하는 것만을 참회라 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것이 아닐까?

또 이 책에서 많은 이들이 “용서의 자격”을 얘기하는데, 유대인들은 용서란 피해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살인에 대해서는 용서를 해 줄 수 있는 피해자가 이미 이 세상에 없으니 용서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편 기독교에서는 종교적 의미로서 용서를 얘기한다. 시몬 비젠탈이 모든 유대인을 대표하여 용서를 할 수는 없었겠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결국 이들은 모두 유대인으로서 고통을 받았을 뿐 아니라 누구든 그 대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용서, 참회, 속죄, 처벌, 복수, 보상, 화해… 이 글을 읽으면서 다시금 생각해보는 말들이었다. 진정한 참회와 속죄는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법률적이고 도덕적인 책임을 지며, 과거의 잘못이 누구에 의해서건 다시금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용서는 무엇이고 왜 하는 걸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은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하여 생을 통해 크건 작건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으며, 타인의 잘못에 대해 원망과 미움을 갖고 살아가는 것보다는 서로간의 상처를 보듬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 바로 “용서”라는 것이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다는 것이 과거의 일을 잊어버리거나 없었던 일로 하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며 홀로코스트와는 다른 성격이지만 비슷한 시기에 우리가 일본인들에게 당했던 강제 징용과 위안부라 불리는 성노예 문제들이 떠올랐다. 베트남 전 중에 우리 군인들이 저질렀던 잔혹했던 양민 학살들도 떠올랐다. 또한 홀로코스트를 당했던 유대인들이 세운 국가인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가하고 있는 폭력들도 떠올리게 됐다. 이런 사실들은 우리는 언제나 피해자이거나 언제나 가해자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고 언제든 그 위치가 뒤바뀔 수 있음을 알려준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의 잘못을 용서해야 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보다는 분명하게 잘못을 인식하고 이러한 과오가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이 있을 때에만 용서도 함께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용서에 대해서 나 스스로의 자세를 분명하게 갖지는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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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심포지엄 3. 모든 용서는 추하다 - 티타나]

제대로 지켜지기만 한다면 모세의 율법만으로도 세상은 훨씬 나아질 수 있다. 모세 후 1500년, 예수의 시대엔 율법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지 않았다. 공정한 법집행은 사라졌고 부자를 우대하고 약자를 천시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만 잘 지켜졌어도 유대 땅에 예수가 올 일이 없었을지 모른다. 받은 것의 열배로 갚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마찬가지로 아무 댓가 없이 사면하는 것 또한 정당하지 못하다. 신의 의지는 공정함에 있다. 세상이 이처럼 엉망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용서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남발되어서 사실상 거의 모든 용서가 추하기 때문이다. 모든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다. 적절한 용서, 정당한 복수, 신적인 사랑, 공정한 정의 모두 아름답다. 싸구려 용서, 폭력적인 복수, 맹목적인 사랑, 불의한 사법 모두 추하다. 세상이 엉망인 것은 추한 것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용서 중 얼마 정도가 아름다운가? 당신의 세상은 너무 아름답고, 깨끗하고, 황홀한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법이나 사회적인 평가나 다른 어떤 것도 공정하지 않다. 문제는 이것이다. ‘용서도 복수도 법도 부자(강자)에게 관대하고 빈자(약자)에게 냉엄하다.’ 과유불급이라 했다. 그 무엇이라도 사랑이나 정의마저도 지나쳐서 좋을 게 없다. 용서도 지나치면 좋을 게 없다. 이렇게 질문할 수 있겠다. ‘오늘날 우리 사회엔 용서가 부족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마치 그것은 ‘우리 사회엔 영양이 부족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영양은 과잉상태다. 다만 좋지 않은 것을 너무 먹는 게 탈이다. 또한 정말 영양이 필요한 곳에 적절하게 분배되지 않는 것이 탈이다. 마치 콜라와 과자, 튀김과 밀가루로 칼로리를 두 세배 채우는 것과 같다. 또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과 비만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공존하는 세계를 보자. 우리 사회에 용서가 적다고? 천만에. 용서도 넘쳐난다. 최소한 부족하지는 않다. 문제는 그 용서의 질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용서가 필요한 곳에는 닿지 않는다. 부자에게 편중된 용서를 보라.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에게 주어진 사면의 크기를 보자. 밀수업자 이병철, 폭력배 수준의 숱한 재벌 2세들, 조중동과 검사 의사들에게 베풀어지는 호의를 보자. 가진 자의 리그에서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용서와 면죄를 보라. 정작 용서가 필요한 ‘배고파서 빵 하나 훔친 사람’에게는 징역 몇 년을 선고한다. 만약 어느날 어떤 신적인 존재가 나타나 공정하게 용서를 집행한다면 현재 우리의 용서는 1%도 남지 않을 것이다. 현재 대다수의 용서는 남발이다. 그래서 모든 용서는 추하다고 한 것이다. 김대중이 전두환을 용서한 것은 개인적이어야 했다. 자기 다리를 절게 한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나는 감동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통령의 직함을 가지고 독재자를 용서한 것은 명백하게 잘못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국민 다수는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법도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대통령은 공정해야 할 책임이 있다. 국민과 법을 무시하고 행동한다면 독재자와 다를 바 없다. 당시엔 여러 의미를 두고 그런 행위를 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김대중은 죽었고 전두환은 살았으며 그에게 죽은 국민도 산 국민도 전두환의 존재로 고통당하고 있다. 신원식 전직 장군 현직 국회의원을 보면 답이 나온다. 전두환이 제대로 정의의 심판을 받았으면 그런 적폐가 감히 입을 열어 법무장관을 음해하는 음모를 꾸미지는 못했을 것이다. 고통은 김대중이 아닌 살아남은 국민의 몫이다. 용서한 자만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떴을 뿐이다. 남아 있는 아직 전두환을 용서하지 못한 국민은 어쩌란 말인가. 모든 용서가 아름다운가를 철학적으로 논하기 전에, 과연 아름다운 용서가 실제로 몇 퍼센트나 되는지를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용서냐 복수냐가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공정하게 집행되느냐다.

용서는 유전자 단위부터 존재하며 국가와 인류를 넘어서도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가 논하는 용서는 인간(유전자, 분자, 세포도 단체, 국가, 인류, 신도 아닌)간에 한정하고 집중해야 마땅하다. 비유하자면, 내가 세포인데 옆에 암세포가 있다. 내 양분을 빼앗아 가고 조직을 위협한다. 나라는 세포는 그 암세포을 용서해야 하는가? 나는 용서하더라도 ‘개체 인간’은 백혈구를 보내든 항암치료를 하든 할 수 있다. 차원이 다를 때 용서는 무의미하다. 개인은 암세포를 용서해야 하는가? (요즘말로 인류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용서해야 하는가??) 똑같은 논의를 세포-개인 대신 인간-국가에 적용해보자. 개인(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세포(인간)가 있을 때 그것을 처단하는 것이 용서로 접근할 문제인가. 접근한다고 해도 우선시해야 할 것은 생존이다. 생존을 위협하는 것을 막아내는 게 모든 존재의 최우선 과제다. 내가 죽는데 암세포를 용서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용서받지 못할 자를 용서 코스프래 해주는 것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모든 용서를 제거하는 편이 싸구려 용서를 장려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무죄추정에 따라 판결이 나오기 전엔 범죄자라고 하지 않는다. 법의 부드러운 면이다. 용서의 강한 면은 유죄추정이다. 국가 차원에서는 참회와 개선이 충분하지 않은 자를 용서해서는 안된다. 개인이 행하는 용서와 상위 차원인 국가의 용서-사면은 달라야 한다. 신은 인간을 용서하지 않는다. 용서할 필요도 없다. 인간의 입장에서 홀로코스트는 비극이지만 신의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개미 군체를 파괴하는 인간은 개미에게 사죄해야 하는가. 암으로 위를 잘라내버리는 인간은 위에게 사죄해야하는가 아니면 고통을 준 위암세포를 용서해야 하는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용서는 사람 사이의 영역일 뿐이다. 다른 차원간의 용서 문제는 실제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고, 학문적인 접근을 한다고 해도 ‘동일 차원’의 용서 문제와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

예수는 몇 번이나 용서했는가. 용서를 ’말했는가’가 아니다. 나는 ‘한 번도 용서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유사 용서’의 사례까지 포함시킨다고 해도 성경 전체에서 3회 정도에 불과하다. 물론 용서를 이야기한 것은 30번 정도 된다. 예수는 말로 가르치기 위해서만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라 몸으로 본을 보이기 위해서도 이 땅에 왔다. 용서에 대한 예수의 모범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의 말 뿐 아니라 실제 행동에도 주목해야 한다. 물론 그 세 번의 본은 놀라운 것이고 철학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깊은 의미가 있다. 그렇지만 예수가 분노하며 복수한 경우는 그보다 훨씬 많다. 예수는 바라새인들을 용서했는가. 그들에게 분노한 것은 몇 번이고 거짓으로 선동하는 그들에게 말로 되갚은(복수한) 것은 또 몇 번인가. 마음 속으로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라면 행동으로는 극도로 신중하게 용서하는 것이 예수의 본보기가 아닐까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용서를 쉽게 정의내리고 이래야한다 저래야한다 하기 보다는 우리의 무지(총체적인 무지와 용서가 무엇인가에 대한 무지)를 인정하고 조심스럽게 최소한만 용서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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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심포지엄 4. 용서는 어떻게 가능한가 - 율리시즈]

2차대전 당시에 죽어가던 젊은 나치장교를 병상에서 만난 시몬 비젠탈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인생의 화두처럼 다가옵니다. 유대인인 비젠탈이 수용소에 잡혀 있는 상태인 데다가 본인조차 언제 죽을지 알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한 나치장교의 유대인 학살을 저지른 일에 용서를 비는 대목에서 독자들은 충격과 분노, 슬픔, 연민 등의 여러 감정이 교차되었으리라 봅니다. 정작 비젠탈은 이 상황을 차분하게 지켜본 것 같습니다. 그의 놀라울 정도의 침착함은 다 죽어가는 이 젊은 나치장교를 만나기 전에 이미 수많은 차별과 혐오와 죽음을 수없이 지켜봤더라도 놀라운 데가 있습니다. 그는 인간이하의 대접을 숱하게 받으면서도 인간다운 모습을 잃지 않은채 나치장교의 고백을 거의 듣고는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왔습니다. 그의 이런 행동이 용서와 비용서의 결정적인 선택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후세에게 던져준 그의 질문이겠지요. 당신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과연 내가 비젠탈이라면 나치장교를 용서했을까요? 아니 그런 권리조차 나에게 있는 것일까요?

정의의 입장에서 볼 때 나치장교에 대한 용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가 교전중에 적군을 죽인것도 아닌 민간인들을 한 건물에 몰아넣어서 폭파시키고 불태운 사건은 그가 주동자가 아니라 여러 독일군들의 지휘체계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라 하더라도 그 학살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겁니다. 더군다나 심판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더 명확해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뒤늦게 용서를 빌어도 이미 그들은 세상을 떠난 뒤였고 용서를 빌 대상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입장에서 보자면 그는 하늘에 가서 그들에게 용서를 빌어야 하겠지요.

내가 비젠탈이었다 하더라도 나치장교를 용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더군다나 그 극한 상황에서도 비젠탈이 병실에서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거의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준 자세가 인간적으로 보여준 최선의 하나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른 뒤에 21세기가 지나가고 있는 여기에서 우리는 비젠탈이 제기한 질문을 듣고 2부 심포지엄에서 제시된 여러 인사들의 의견을 들은 후 자신의 생각을 차분히 정리할 여지라도 지니지만 2차대전 당시로 돌아가 내가 비젠탈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어림짐작조차 쉽지 않은 극한 상황의 하나에 놓여졌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고 우리는 어두운 역사의 반복을 막기 위해 성찰과 행동을 멈출 수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비젠탈이 당시에 보여준 최선의 인간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당시의 비젠탈로 돌아간다면 실제로는 어떻게 했을지는 짐작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나의 마음으로는 나치장교의 손을 잡아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뿐만 아니라 용서를 받아주는 것이 온당하면서도 최선이라고 느낍니다. 이는 젊은 나치장교가 죽음을 앞두고 할 수 있는 육신 최후의 고백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한때 가톨릭교도였던 그가 신부를 불러 고백성사를 올렸는 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그가 죽음을 앞두고 있지 않았거나 다른 상황이라면 그가 용서를 빌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용서를 비는 것은 가장 인간적인 일이고 용서를 받아주는 것조차 가장 인간적인 일이라고 믿습니다. 용서를 비는 자격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용서를 받아주는 권리도 누구에게나 있다고 믿습니다. 이는 상대방의 미래를 위해서도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도 숭고한 가치입니다. 또한 역사를 통해 반복되는 전쟁과 학살의 이야기를 멈추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입니다.

2차대전 당시에 유대인들이 나치독일에 의해 자행된 차별과 학살의 역사는 너무나 끔찍한 것이어서 지금 이 시대에도 자주 그 어둠의 역사가 다시 이야기되고는 합니다. 그 어떤 이유로도 특정한 종족의 대규모 인원을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방법으로 제거하고 학살하는 것을 용납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한사람 한사람의 생명이 소중한 가치에서 이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지요. 이는 당시의 독일인들에게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여러 나라들을 포함해서 더 나아가서는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끊임없이 성찰해야 하는 역사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나치의 유대인에 대한 홀로코스트는 역사적으로 볼 때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는 사건의 하나입니다. 그 학살의 대규모성과 계획성, 조직성에 있어서 전례를 찾기가 쉽지 않은 사건이지요. 그러나 이 홀로코스트가 유일한 사건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홀로코스트 이전에도 또한 그 이후에도 많은 학살의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유럽에서 비롯된 노예제도에 미명하에 많은 노예들이 죽음을 당했고 미국 초기의 건국과정에서 주도자들이 북미에 정착하면서 수많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학살한 역사가 있습니다. 소비에트연방 당시 스탈린 공산지도부는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수많은 이들을 동토로 유배시키거나 처형했습니다. 2차대전 이후로도 캄보디아에서는 킬링필드의 비극이, 르완다에서는 내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했습니다. 유럽에서 있었던 보스니아 내전과 학살의 경우도 어두운 역사의 기록입니다. 한국에서도 제주4.3과 광주5.18로 인해 수많은 인명이 저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학살을 넘어서 있는 전쟁 그 자체입니다. 1차대전으로 2,800만명이, 2차대전으로 7,000만명에 가까운 군인과 민간인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전쟁이든 비인간적인 결과로 나타나는 학살이든 투쟁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멈추기 쉽지 않다는 일입니다.

이를 조금이라도 낮추거나 저지하기 위해서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의식에서 벗어나야 할 때라는 것이고 지구촌 모두가 형제자매라는 의식이 더 구체화되어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로마서(12:19)에서는 ‘여러분 자신이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원수갚은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주겠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 원수가 배고파하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 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내십시오’라고 얘기하는 사도 바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마태복음(18:21)에서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면 일곱 번 용서해주면 되겠습니까 라는 질문에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일반인은 물론이고 신자들이 종종 듣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막상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란 것을 압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인간적인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 지향성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제 문명의 미래를 위해서 나는 제일 먼저 유대인들이 개인이든 단체이든 앞장서서 분노와 투쟁의 관습을 접고 화해와 용서의 삶에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모세가 이집트로부터 유대민족을 살려내기 위해 애쓴 이후로도 많은 이들이 개인적이든 민족적이든 생사의 기로에서 많은 고초를 겪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을 건국하기 이전의 그 고초에 대해 다른나라 사람들이 일일이 다 헤아릴 수는 없는 일일 겁니다. 하지만 이에 못지 않은 다른 민족들도 많은 외침과 학살의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국도 그 예외가 아닙니다. 지금의 상황을 냉정히 바라보십시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영토를 살고 있고 미국, 유럽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적지 않은 권세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 권세가 결코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에서 타민족들과 여전히 분쟁을 일삼고 그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숱한 과거의 상처와 트라우마로 인한 앙갚음이라는 면에서는 일면 이해되는 면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대부분의 헤게모니를 쥔 이들은 바로 당신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이 투쟁의 연속에 앞장선다는 것은 역사의 장에 더욱더 어두운 기록을 더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헤게모니를 쥔 이들이 화해와 용서의 길로 들어설 때 지구촌의 미래는 현실적인 희망을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이를 위해서 스스로를 먼저 용서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진정한 출발이라고 믿습니다. 투쟁의 시대에서 조화의 시대로 가기 위한 첫걸음이기도 합니다. 약자의 용서가 약하고 강자의 용서가 강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모든 용서는 아름다우니까요. 그러나 역사의 물줄기는 바꿀 수 있는 곳에서 먼저 바꿀 때에 진정한 역사가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지탄을 받는 존재가 용서를 구하는 범위와 대상을 찾는 것도, 그 용서를 받아주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용서를 받아줌으로써 할 일을 하고 타인들이 받아줄 수 있는 용서와 하늘이 작용하는 섭리와 용서는 그것의 뜻대로 맡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용서는 내 마음을 닫아두고 용서는 마음을 열어줍니다. 비용서의 마음은 내 마음을 닫아둠으로써 타인과의 분리감을 형성하고 넓게는 사회, 종족, 국가가 분리되고 투쟁하는데 큰 원인이 됩니다. 나 스스로의 심신에게 해로운 분리감을 계속 지니고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자주 극적인 체험을 하곤 하지만 이해한 순간 바로 자유로와지는 것이 나 스스로에게나 타인에게도 이로운 일입니다. 

정의의 심판은 그 역할을 맡은 사회와 역사와 섭리에 맡겨도 될 겁니다. 모든 존재는 선이든 악이든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한 대로 돌려받을 것입니다. 섭리의 무지로 인한 나 자신의 의식은 내가 주체가 되어 종종 정의의 심판관이 되려 하지만 이는 내 역할의 오용이거나 과용일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의 섭리의 베일을 한두개씩 벗겨나가고 이해하는 일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과정이겠지만 그 이해의 정도와 상관없이 섭리의 가장 큰 뜻은 사랑과 용서라는 바탕에서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와 다른 입장이라도 나와 다른 입장이기에 오히려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나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과 함께 이 세상에서 좀 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겠지요. 복수는 복수를 낳고 투쟁은 투쟁을 낳지만 용서는 용서를 낳고 화해는 화해를 낳고 평화는 평화를 낳습니다. 복수와 투쟁을 낳는 곳에 복수와 투쟁을 보태지 말고 용서와 화해를 낳는 곳에 용서와 화해를 더 보탬으로써 우리는 평화의 시대를 좀 더 넓히는 주류의 시대로 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21세기의 끝자락에 가서도 지금처럼 중동과 아프리카 등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일어나는 역사의 어두운 반복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채 크나큰 댓가를 계속 치뤄야 할지도 모릅니다.

용서는 정신적인 활동으로써 내 자신에 대한 용서로부터 시작할 때 힘을 발휘합니다. 그럼으로써 더 나은 내 자신이 될 수 있는 바탕이 됩니다. 용서는 외적이거나 물질적인 것을 투자하지 않는 활동임에도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주변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보복과 비용서는 분노와 투쟁을 낳습니다. 그것들의 연속이 이제까지의 역사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화해와 용서는 조화와 평화를 낳습니다. 그것들의 연속이 앞으로의 주류 역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앞당기는 것은 나 자신의 주체성을 비하하지 말고 신성함을 되살리며 의식적으로 더 나은 내가 되겠다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봅니다. 용서가 용서를 비는 대상에게나 용서를 수용하는 내 자신에게나 궁극의 해결점은 아닙니다. 용서를 빌고 그것을 수용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다시 새로운 것을 배우고 깨달아야 할 많은 사회적, 법적, 문명적 과정이라는 시간을 거쳐야 할 겁니다. 그러나 용서는 누구의 강요도 요구받지 않은 채 나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출발하는 정신적인 활동으로써 평화의 시대가 주류로 잡기 위한 훌륭한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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