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의 위엄 - 상 민들레 왕조 연대기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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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그토록 잔인하고, 비윤리적이고, 변태적이고, 풍기문란한 내용이 많다.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한 영웅 이야기를 조금만 틀어서 봐도 쓰레기 같은 인물이 땅콩처럼 줄지어 나온다. 땅콩을 캐어본 적이 있는 사람 중에 그리스 로마 신화를 만화로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로마 신화는 어린아이 시절부터 말초적인 막장드라마처럼 흥미진진했다. 널리 인간을 복되게 하고, 사바세계의 중생을 해탈의 경지로 이끌며, 목숨과 몸을 바쳐 인류를 구하고자 하는 신과 신화들과는 다른 인간적인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3세대 아이돌처럼 열댓 명 넘는 신과 별처럼 많은 영웅 가운데 내 취향이 하나는 나올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린 나이에 [그리샤·로오마 신화]를 읽었던 내 마음에도 서양을 동경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그 많은 조각상과 그림들은 어찌나 예쁘고 생생하던지. 화내고, 웃고, 용서하고, 책략을 쓰고, 미인을 좋아하고, 고기를 사랑하고, 이기면 기뻐하고, 죽으면 슬퍼하고 후회하는 그 신들과 영웅들의 이야기가 [일리아드]라는 대서사시라는 것은 많이 큰 후에 알았다. 그리고 그 속편인 [오디세이]가 왜 그토록 많은 영웅 가운데 오디세우스를 콕 찍어서 주인공으로 삼았는지는 오랜 궁금증 중에 하나였다.

[종이 동물원]을 읽으면서 이 작가의 다른 작품, 특히 장편이 참 궁금했다. 초기작이고 단편인 글에서는 거침없는 상상력과 간결한 표현력이 부러웠는데 긴 호흡으로 써야 하는 장편을 끌고 갈 힘이 있는 작가인지도 알고 싶었다. 미국에 살지만 어쩔 수 없는 중국 출신의 다음 작품에서는 중화사상과 중국풍의 분위기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도 알고 싶었고. 솔직히 중국의 세계적인 위상이 이 작가를 띄워주는데 한몫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도 좀 있었다. 미국과 중국의 두 정상이 만나서 처음 이야기를 시작할 때 언급하기 참 좋은 소재가 아닌가 해서.

옮긴이의 글에 매료되었다는 이가 많았는데, 일부러 안 읽었다. 책의 뒷면이나 날개 부분도 읽지 않고 바로 본문을 시작하고 스무 장쯤 읽고서야 어딘지 황제가 진시황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완전 창작이 아니라 기존의 초한지를 현대 버전으로 '번안'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유방과 항우, 한신, 우미인과 사면초가 정도 밖에 초한지를 모르기 때문에 나무 위키를 찾아서 각 인물들에 대한 사전 지식을 조금 익힌 후에 이 책을 정독했지만, 사실 전혀 몰라도 상관없다. 이야기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인물 설정이나 역사적인 흐름은 비슷하게 전개되는 것 같은데 다음 권을 읽어봐야 알겠지만 좋은 책이다. 긴 호흡으로 이 전개하는 방식도, 소소한 재미를 넣은 자잘한 구성도. 영리한 선택을 한 것 같다, 이 작가. 장편을 쓰면서 기본 얼개를 탄탄한 곳에서 따오면 훨씬 짓기가 수월할 테니. 나 같은 변태에 가까운 독자라면 유방과 항우의 발음이 중국어로 '쿠니 가루'와 '마타 진두'라고 혹시 읽히나 궁금해할 수도 있겠지만...;

많은 작품에서, 소소한 일화에서 유방은 그다지 매력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나이의 기개를 갖춘 자는 항우였고 그저 운 좋은 인간에 가깝게 묘사된 인물은 유방이었다. 그러나 켄 리우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다. 두 인물 모두 호방하고 매력적으로 나오고, 1권에서는 적어도 사이도 나쁘지 않다. 혹시 한족일지도 모를 작가의 사심이 들어간 것은 아닐까 하는 못된 의구심이 든다. 묘사는 중국의 과장법을 충실히 따라서 8척 키(240cm!)와 두 개씩의 눈동자가 나오는데 작가의 장르가 SF이기 때문에 거부감 없이 읽힐 것 같다. 다른 문화권이라도. 작가가 볼수록 영리한 듯.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여러 신이 등장하지만 막장이 흘러넘치는 묘사나 전개는 그다지 없고, 중국의 여러 옛이야기들보다 훨씬 순화된 묘사들이어서 오밀조밀한 재미가 있다. '실크 펑크'라는 장르는 과학의 기술이 발달한 가상의 과거를 다룬다지만, 몇몇 묘사를 빼고는 여전히 중국 고전처럼 느껴진다. 중국의 현대화된 드라마를 보는 기분도 들고. 중국의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재미있는 중국 역사 공부 입문서 역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1권이 민들레 왕조의 첫 번째 이야기라고 하니 그 속편들의 전개도 역사 속 한나라와 비교해보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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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 흘리는 소설 땀 시리즈
김혜진 외 지음, 김동현 외 엮음 / 창비교육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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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초년생이 아닌, 사회만렙들이 읽고 초년생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주어야 할 필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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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 흘리는 소설 땀 시리즈
김혜진 외 지음, 김동현 외 엮음 / 창비교육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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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느라 땀도 흘리고, 야근하느라 피도 쏟고, 속상해서 눈물도 떨구고, 호된 질책에 오줌도 지릴법한 사회 초년생. 그리고 비정규직. 그리고 여자.

 

 

읽어보고 싶고, 일하던 시절의 생각도 날 법 한데도 이상하게 첫 페이지가 펴지지 않았다. 관심가는 젊은 작가가 셋이나 있어서라도 소장하고 싶은 책이다 싶었는데 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 나는 사회에서 그들이 겪는 그 모든 고난과 부조리에 같이 분노하고 난 뒤 맞이할 수 있는 보상이 미미하다는 것을, 그들의 인생이 저 짧은 단편들에서 결코 해피하게 엔딩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흔들다리같은 직장의 위태로움에, 시기와 질투와 극악의 이기심이 점철된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조차도 알려줄 수 없기 때문에 더 속상했을까.

가기 싫은 직장에 출근하듯이 꾸역꾸역 읽기 시작했더니, 또 읽어지기는 술술 읽힌다. 게다가 작가들이 그런건지 편집자가 그런건지 단편 뒤에 짧은 코멘터리가 있어서 내용 이해는 물론 생각해 볼 점도 짚어준다. 그래도 책의 카피에는 그다지 동조가 안 된다.'알바생은 1차 회식비보다도 못한 존재일까?'라는 큰 카피는 아주 와닿지만, '사회에 첫발을 내딛을 당신이 꼭 읽었으면 하는 소설'에는 글쎄, 다 읽고 나니 현실에 한숨만 더 나온다. 아, 그랬지. 젊고 빠릿하고 싼 인력도 이런 취급을 받는데, 하물며 나는 어쩌나. 우울한 마음이 더 커진다. 한편 생각하니 현실을 모르는 '밝고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사회로 발사될 청년들이 직시해야 할 사회의 모습인 듯 싶기도 하다.

글쎄, 이 책은 사회에 첫발을 내딛을 그 새잎들 보다는 오랫동안 그 사회에 상주해온 사람들이 읽어보아야 할 책인 것은 아닐까. 우리가 바꿨어야 하고, 우리가 방향을 잘못 정해놓은 이 사회의 군데군데를 다시 되돌아 볼 필요가 있으니까. 처음 시작하는 그 모든 사람들처럼 우리에게도 '초보'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상기해보도록. 그리고 바른 방향으로 함께 가도록 손을 잡자고 먼저 말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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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미숙 창비만화도서관 2
정원 지음 / 창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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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미숙하여 힘든 이를 위한 위로이며, 자존심과 합리화의 끔찍한 혼종이 빚는 폭력성을 이겨내는 성숙한 삶에 대한 담담한 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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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미숙 창비만화도서관 2
정원 지음 / 창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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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으로 주목받아 본 사람은 안다. 자신의 이름이 얼마나 어깨를 억누르는지. 경찰이 발표하는 범죄자 명단을 잘 보면 순 한글 이름은 거의 없다고, 순 한글 이름의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견뎌야 하는 주위의 시선에 대해 농담처럼 말하던 친구가 있다. 미숙이는 순 한글 이름이 아니었음에도, '미숙아'라는 발음 때문에 힘들다. 안 그래도 잔뜩 주눅이 든 아이인데, 예쁜 얼굴도 아니고 남의 놀림을 받아칠 깡도 없다. 시인 아버지에 그 후배인 어머니가 지은 이름 치고는 참으로 실망스러운 '정숙'과 '미숙'이의 삶은 고되다. 밝은 기운과 여유로운 마음은 금전적 여유에서 나온다더니, 별 따먹고 사는 시인 아버지는 라이터 만드는 엄마에게 가계를 맡겨놓았다. 고고하고 이상이 잘 드러나는 시를 쓰면 뭐 하나, 자식 때리고 아내에게 허세나 부리는 삶인데. 이 책에서 나오는 여러 인물 가운데 미숙이에게 가장 잔인한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었지만,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폭력을 모두 행사한 가장 강력한 존재는 아버지였다. 엄마는 어떤가, 미숙이 얼굴에 난 상처가 남편 때문에 생긴 걸 보고도 치료하러 가지 않는다. 두고두고 니 잘못을 보라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 표출이었다면 그 상처를 평생 지고 가야 할 아이의 마음을 보듬어 주지 않는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자기 글을 인정해주지 않는 아버지와 갑갑한 집안 분위기 때문에 엇나가기 시작한 언니는 가장 만만한 존재에게 폭력을 시작한다. 어머니에게는 욕, 동생에게는 주먹. 하나만 있어도 숨이 안 쉬어질 이 모든 것이 함께한 집도 싫고, 미숙아라는 놀림을 당하는 학교도 싫을 때, 나의 구원자 재이가 등장한다. 재이.

중2병의 집합체 같은 재이는 미숙이의 이름을 다르게 불러주었고, 미숙이가 제 이름 불리는 것에 설레게 해주었고, 미숙이의 계란말이를 먹어주었고, 미숙이를 놀리는 다른 아이를 응징해주었고, 미숙이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답해주었다. 그 여름에 미숙이는 불러주는 이가 다른 누구였대도 집 밖으로 나갔을 텐데, 나와 같은 하늘을 보는 재이가 미숙이의 이름을 상냥하게 불러주었으니 미숙이의 행복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재이의 행동은 결국 용서가 안 되는 나쁜 짓이었으나, 미숙이는 재이를 영원히 미워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불행한 한 시절을 함께 겪어준 사람은 오래 미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재이도 처음에는 분명 미숙이의 글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다 미숙이가 글 쓰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을 미숙이보다 재능이 덜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했을 테지. 사과하지 못한 것은 자존심이라고 재이는 합리화했을 것이다. 속으로는 알면서. 그래서 더 못되게 굴었을 것이다. 다른 이들도 그럴 거다. 미숙이 아버지도, 어머니도, 언니도. 속으로는 누구보다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선뜻 사과를 못한다. 그 사과가 제때 도착하지 않아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더 먼 길로 돌아서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지 모르면서. 결과적으로는 미숙이가 가장 성숙한 인간이었다. 각자에게 맞는 방식으로 사과를 받아주었으니까.

이 책은 아픈 시절을 겪어낸 미숙이들을 위로하는 책일지도 모르지만, 성숙하지 못하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나를 돌아보게 하는 책이기도 하다. 나의 합리화와 자존심이라고 내세우고 싶었던 것이 실은 누군가를 찌르는 바늘이었다고. 스스로의 허벅지를 꼬집는 폭력부터 세뇌된 못난이에서 벗어나서, 그냥 '나는 나'이고 다른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입에서 나와 공기 속으로 흩어진다는 것을 깨달으라고.

중간중간에 미숙이가 읽는 책 제목이 은근히 상황과 맞아서 재미있다. 작가님은 저걸 넣으면서 얼마나 흐뭇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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