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선동열 - 자신만의 공으로 승부하라
선동열 지음 / 민음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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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선동열이라니. 이 얼마나 도발적인가. 피겨는 김연아, 배구는 김연경이라는데는 다들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야구는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야구는 김시진이고, 누군가에게는 야구는 장명부나 이승엽, 혹은 박정태나 양준혁일 수도 있으니까. 물론 선동열은 훌륭한 야구선수이고 저 말이 틀리지 않지만 수긍하면서도 부루퉁한 반응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야구가 최동원이기 때문이다. 한국시리즈의 7차전 중에서 4경기에 등판해서 모조리 승리를 안겨준 영웅. 그와 같은 도시에 산다는 것은 또 얼마나 자부심이었던가. 하지만 따지고 보면 선동열을 대하는 호남 지역 사람들에게도 그는 손기정이나 서윤복에 버금가는 영웅이었으리라. 어린 시절에는 그가 속한 팀이 그다지도 악착같이 열심히 경기해서 승수를 쌓아가는 모습이 부러우면서도 얄미웠는데, 자라고 난 뒤 80년대의 광주를 알고 나서는 그전처럼 악다구니를 써가며 야유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서럽고 분하고 억울한 누군가에게는 그가 기도이자 의지였을 것이다.

연예인들이 자신을 공인이라고 지칭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고개가 갸우뚱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공인이 가지는 무게감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꿈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정치적인 압력에 설자리가 정해지는 아픔도 적지 않았나 보다. 담담한 어조로 풀어놓았지만, 꿈과 나의 거리가 손닿을 듯 가까이 느껴는 스무 살 언저리에 꿈을 접어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영광의 날도 있었지만 오욕의 날도 적지 않았던 듯하다. 또 출신 구단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감독을 맡았다는 기대감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고향 사람들의 응원이 비난으로 바뀌어 폭주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던 일(이때 나는 그가 계속 그 팀을 맡아주었으면 했다. 우리도 누군가의 위에 서는 경험을 많이 하고 싶어서), 관행에 따라 일처리를 했을 텐데 국회에 가서 전문가도 아닌 사람들에게 들어야 했던 모욕적인 표현(나는 전문가도, 국민의 대표나 심부름꾼도 아닌데 같이 그를 비난했다. 우리 팀에도 병역을 면제받아 마땅한 훌륭한 인재가 있다고 믿었거든. 그 멍청한 모모 선수 대신!). 그리고 가족을 향한 도 넘은 비난(야구팬들이 국회의원 팬들이었다면 우리나라는 어떤 쪽으로 건 간에 보다 급진적인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까지 영광과 오욕이 함께한 날을 돌아보는 선동열의 곁에 서서 우리도 그의 야구 인생과 삶을 함께 들여다본다, 이 책으로.

그 모든 날들을 지나 이제 한걸음 뒤에 물러서 자신을 담담히 돌아보는 글이 한 권어치나 된다는 것이 부럽다. 그리고 그 글들이 심지어 재미있고 알차다는 것이 샘난다. 느물느물하고 요령까지 갖춘 천재가 다른 편인 것만큼 분통터지는  일이 또 있을까. 건강히 자신의 야구 인생을 돌아보고, 감사할 사람에게는 감사하고, 사과할 사람에게는 사과할 수 있는  마인드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말대로 유인구나 변화구가 아닌, 우직한 직구로 인생을 승부해 살아온 것이 잘 드러나는 글을 읽고 나니 아주 오래된 질투와 샘이 조금은 옅어진다.

야구는 열 번 공을 만나도 세 번만 치면 수위타자다. 그리고 희생이 공식 용어로 인정되는 경기이기도 하다. 아무리 상대방이 이기고 있어도 9회 말까지 나의 기회는 주어지고, 스포츠 경기 중 유일하게 감독이 정장 대신 유니폼을 입는 경기이기도 하다. 비정해 보이기도 하지만 재미있고, 인간적이고, 간단하지만 복잡한 경기. 자신만의 공이나 폼을 견지하지 못하면 살아남기 힘든 게임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혹사당해서 은퇴했고 누군가는 지속적으로 관리하지 못해서 내리막을 걸었지만 선동열은 달랐다. 그래서 남아있는 투수 가운데 국보급이 되었고, 명성은 전설이 된  것일까. 인간 선동열이 자기 입으로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오래 건강해서 영향력을 발휘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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