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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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 되게 빠져들었다. 가제본을 펼친 순간 주변의 소음이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다. 지금 당장 눈앞에서 펼쳐지는 김초엽의 세계가 너무도 촘촘하고 아름다워서. 그 세계 속에서 부유하는 질문이 서늘해서.



김초엽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가제본으로 먼저 만나 보았다. 2019서울국제도서전(이하 2019SIBF) <여름, 첫 책> 일정에 맞춰 출간 준비 중에 있는 이 책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은 가까운 미래에서 벌어지는 다채로운 이야기를 사실감 있게 담아낸 SF소설집이다. 「관내분실」로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부문 대상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가작을 동시에 수상한 뒤 1년 여 만에 소설집으로 묶인 셈이니 이례적이라면 이례적인 속도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아닌 '김초엽'이기에 가능한 쾌거가 아닐까.



김초엽은 SF 소설가 중에서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세계관을 정교하게 구축하는 작가다. 어디 그것 뿐인가. 섬세하고 탁월한 감각으로 삶의 다양한 문제를 그려내고, 지금-여기에서 잊혀지고 지워지는 소수자를 다양한 형태로 등장시켜 소설의 중심에 자리하게 한다. 경계와 비경계, 정상과 비정상, 단절과 비단절, 수용과 배제, 회피와 도전처럼 이분법적인 항을 끊임없이 대립시키며 독자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지금-여기에서 답하길 미뤄둔 문제에 대해 진득하게 생각해 볼 것을 요청한다.



마을에서는 의미를 갖지 못했던 특성이 지구에서는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 할 수 있는 이유가 되고(「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한낱 연구 대상에 지나지 않았던 외계 지성체를 자신과 같은 영혼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이 찾아오고(「스펙트럼」), 인간성의 가장 큰 특성인 이타성이 사실은 고등 외계 생물과의 공생으로 학습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내세우고(「공생 가설」), 우주의 극히 일부만을 공유하게 되었음에도 우주를 지배한 것처럼 구는 욕망 때문에 무엇이 희생될 수 있는지 보여주고(「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인간이 감정을 통제하는 존재라고 보는지, 통제 받는 존재라고 보는지 질문을 던지고(「감정의 물성」), 도서관에서 분실된 마인드를 찾는 과정에서 모성애에 대한 편견을 깨고(「관내분실」), 특정 부류에게만 가혹해지는 평가의 잣대와 한 사람의 실패가 집단 전체의 실패로 간주되는 상황을 보여주는(「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등 낯선 세계를 빌려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지워지고 잊혀지는 존재를 선명하게 각인시킨다.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어딘지 모르게 서늘한 구석이 있는데 그건 아마 질문의 이면에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가까운 미래에도 인류는 지금과 같은 과오를 반복 할 것'이라는 날카로운 지적이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선택해야 할 차례다. 시초지에서 난생 처음 선택의 순간에 선 순례자들처럼,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선택을 스스로 해야 할 때다.



김초엽을 주목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SF소설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여성사'에 있다. 등장인물의 대다수가 여성인 것도 놀라운데, 그중 몇몇의 단편에는 중년 여성과 노년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중년 여성 혹은 노년 여성이 소설의 주인공이 되는 건 그리 놀라워 할만한 일이 아닌데도 놀라게 되는 이유는 여지껏 읽었던 대다수의 SF소설 중 주인공으로 등장한 인물은 젊은 남성이거나 중년 남성인 경우가 많았던 탓이다. 그도 아니면 어리숙한 모습의 청소년 여성이나 이제 막 어른이 된 젊은 여성이거나.



터널의 발견으로 가족이 정착한 행성에 갈 방법이 요원해진 상황에서도 언제 올지 모르는 우주선을 기다리는 과학자의 이야기(「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나 다섯 개의 인공위성이 뜨는 행성에서 조우한 외계인을 어떻게든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과학자의 이야기(「스펙트럼」) 속 주인공은 ‘할머니 과학자’다. 노년-여성-과학자가 바라보는 우주 저편에 대한 사유를 개인사와 인류사, 우주사를 한데 엮어 풀어냈는데 그 속에 담긴 내용과 깊이가 알차고 깊어 경이로울 지경이다.



현실 여성들이 겪는 부조리한 상황이나 대상에 따라 판단을 달리 내리는 이중잣대를 소설에 녹여내며 소녀들의 롤모델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소설(「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도 있다. 발군의 실력으로 정식적린 절차와 시험을 통과해 자격을 획득했음에도 기혼 유자녀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격없음을 주장하는 키보드워리어 군단의 등장 및 여론몰이는 너무나도 익숙하다. 심지어 성공의 역사를 갖지 못했다는 이유로 집단 전체가 실패자 취급을 받는 것도 지금-여기의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김초엽은 소설을 통해 소녀에게 필요한 건 성공한 영웅이 아니라 도전한 여성이라는 것, 남성으로 가득한 롤모델 시장에 어떤 형태로든 여성 역시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그와 동시에 한 인간으로 존중 받아 마땅한 어머니의 이름과 모성애에 대해서도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을 시도한다. 도서관에서 분실된 어머니의 마인드를 추적해가는 과정에서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존중하려 하지 않았던 인간-여성으로서의 어머니를 직면하고 이해하는 이야기(「관내분실」)는 자녀를 낳은 직후 자연스럽게 취득되는 어머니라는 이름에 대해, 그들에게 요구되는 모성애에 대해 다른 시선을 제시한다.



김초엽은 자신이 지닌 탁월한 감각을 통해 먼 미래를 가까운 미래로 옮겨온 것도 모자라 우리가 발 붙이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문제의 그 시대의 문제로 만들어 세계를 확장하고 있다. 그 덕에 독자들은 온 마음을 다해 그 세계를, 그곳에서 더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인물들을, (감히) 같거나 비슷하거나 어쩌면 열등할 거라며 대상화를 서슴치 않았던 외계 지성체를, 그 시대의 방식으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해 경계의 벽을 낮추려는 유무형의 존재들을 응원하고 사랑하고 수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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