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이하의 것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호영 옮김 / 녹색광선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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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렉의 책 중 두번째로 읽은 책이다. 그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사물들]을 만났을 때의 당황과는 다른 마음의 준비로 시작한 페렉 다시 읽기! 언어사용실험, 자전적인 글을 쓰기 위한 훈련..뭐 이런 차원으로 그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수월하다. 그러나 그 이면의 의도를 찾으려는 나의 강박적 읽기가 한사코 밑줄을 긋고야 말겠다고...

유럽 대륙에서 건너온 여행자가 처음 런던에 도착하면 두 가지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다. 첫 번째는 그의 반사 행동과 관계된다. 여행자는 길을 건너기 전에 본능적으로 왼쪽을 쳐다보겠지만, 차들은 그의 오른쪽에서 온다. 그의 목 근육이 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데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아주 작은 차이 때문에 런던은 우리에게 정말로 ‘외국‘ 도시처럼 보이게 된다. - P127

낡았지만 놀랍도록 빠른 지하철들이 하루 종일 사방으로 교차하는 이 거대한 도시에서, 우리는 결국 아주 작은 부분만을 보고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히드로 공항으로 우리를 태우고 가는 버스가 아주 잠깐 엿보게 해주는 그 순간 동안만 반분리형 전원주택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는 광활한 교외를 어렴풋이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결코 런던을 제대로 알지 못하겠지만, 런던과의 친분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단편적이고 한가로운 산책들에서 오랫동안 지울 수 없는 추억들을 간직하게 될 것이다 - P135

이 세계의 위대한 인물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막중한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 실제로는 침묵, 침착함 그리고 신중함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공간에 대해 말하자면, 아마도 깊은 명상에 잡긴 채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공간이면 충분할 것이다. 물론 인터폰의 경우도, 비서를 시켜 누구에게 전화를 걸거나 아무개와의 약속을 취소하게 하고, 자신에게 또 다른 아무개하고의 점심 약속과 오후 5시 콩코드 광장에서의 약속을 상기시키게 하고, 알카 셀체를 가져다 달라고 하거나 베르제를 보내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면 족하다. 정상 회담을 위해서는 안락의자 두세 개 정도만 있으면 총분하다. 하지만 그들의 공간에는 행정 업무의 고된 현실이나 관료들의 낮 두꺼운 술책들을 상기시키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기도
없고, 걸어 놓은 파일들도 없으며, 스테이플러이나 접착제 통, 토시(덧붙여 말하자면, 요즘에는 흔히 볼 수 없는 것)도 없다.
여기서는 단지 생각하고, 구상하고, 결정하고, 협상하는 것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충실한 노동자들이 아래층에서 성실하게 수행할 모든 하급의 일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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