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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잎사귀처럼 - <사이보그 선언문>의 저자 다나 J. 해러웨이의 지적 탐험, 다알로고스총서 2
사이어자 니콜스 구디브.다나 J. 해러웨이 지음, 민경숙 옮김 / 갈무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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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은 관계이다.”

‘다나 J. 해러웨이’라는 이름은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그녀가 연구하는 것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또한, 그녀는 새롭다. 그녀는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을 새롭게 보게 만든다. 『한 장의 잎사귀처럼』은 익숙하고 새로운 것을 말하는 해러웨이의 삶과 사상을 대담이라는 형식으로 쉽게 전해주고 있다.

익숙한 것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사람들은 감기가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을 하거나 말하는가? ‘감기를 이겨내야 한다.’ 이것이 통상적인 반응이다. 인간 몸의 면역체계는 바이러스와 싸우는 ‘전쟁터’로 인식된다. 하지만 해러웨이는 이런 이해가 “냉전 수사학”으로 적절하지 않고, 면역체계는 “자기-인식(self-recognition) 장치”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24쪽) 바이러스가 몸에 들어오면 몸 속 세포는 바이러스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고 서로 도와준다는 것이다. 생물학자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들은 이것이 ‘몸의 실수’라고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해러웨이는 이것을 좀더 적극적으로 사고하여 “서로를 인식하지 못하면 감염은 일어나지 않”고 그렇기에 “질병은 관계”라고 말한다.(131쪽) 우리가 그녀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질병에 대한 이해뿐 만 아니라 병 치료에 관해서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병이 들었을 때 바이러스를 죽이겠다는 생각으로 약을 먹고 치료를 하기 보단 (동양 의학에서 말하듯이) 몸의 전반적인 상태를 점검하고 병을 다스리는 치료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해러웨이는 이 밖에도 면역체계가 몸속에서 중요한 세포체계 간의 의사소통에 공간이라는 점도 강조한다. 이것은 세포 간에도 서로를 인식하고 관계 맺는 소통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관계의 문제이고, 관계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맺어지느냐에 따라 서로 달라질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즉, 세포도 구체적인 관계-맺기에 따라 다양하게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러웨이는 적은 표본으로 협소한 목록 만들기 식의 게놈 프로젝트를 비판한다.

또한 그녀는 인간의 모든 문제를 ‘유전자’로 해석하는 “유전자 물신주의”를 파괴적이고 나쁜 생물학이라고 말하며, 이런 상황은 현 시대에 유전자 연구가 대중적 존경을 받으며 자본의 투자가 집중되고 있는 상황에서 연출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런 지적은 ‘황우석 박사 신드롬’이라고 할 정도로 유전자 연구에 대해 사회적 관심이 증폭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곱씹을 만하다.

이 밖에도 이 책에서 그녀의 다양한 철학적, 문학적 면모와 그녀가 연구를 시작하고 지속시킬 수 있었던 삶의 모습을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특히, 철학, 문학, 생물학을 넘다드는 그녀의 연구는 역동적인 ‘지적 모험’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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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또노미아 - 다중의 자율을 향한 네그리의 항해 아우또노미아총서 1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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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을 ‘지금 유령이 한국을 배회하고 있다. “아우또노미아라는 유령이”’라고 시작한다면 지나칠까? 결코 지나치지 않을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한국 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혼종적인 사상이 출현하여 ‘아우또노미아’라는 이름으로 논쟁이 벌어지고, 그 안에서 새로운 사상을 낳고 또 사람들의 활동, 운동, 그 생기 가득한 힘들과 결합되어 등장하고 있다.

다만, 그것을 유령이라고 칭하는 것은, 그것이 아직 우리에게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 조정환의 말마따나 ‘안또니오 네그리’라고 하는 칠순이 넘은 정열적인 사상가는 어떤 이에게는 아나키스트로, 어떤 이에게는 맑스주의자로, 또 어떤 이에게는 테러리스트로 이해되고 있다. 그 어느 표현도 안또니오 네그리의 진면목을 드러내 주지 못한다. 그는 지금 ‘천 개의 얼굴’로 비쳐진다. '어떤' 거울들에 말이다.

‘유령’이라 함은 그 실체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안또니오 네그리는 제대로 이해되지도 못했다. 아우또노미아 라는 혼종적이고 복수적인 사상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럴 때에 필요한 것은 일종의 ‘선언’일까? 이 책의 제목을 단순히 ‘아우또노미아’라고 한 것은 어떤 면에서 하나의 ‘선언’처럼 들린다. 1848년에 출간된 어떤 ‘선언’ Manifesto 의 출간이 하나의 ‘사건’이었다면 이 책의 출간 역시 하나의 ‘사건’이다.

올해 한국에서 처음으로 이화여대에서 '맑스 코뮤날레'가 열렸을 때, 누구도 한국의 구좌파 교수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음에도 공공연하게 아나키즘을 공격하고, 들뢰즈를 비판하고,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을 비판했다. 마치 안또니오 네그리가 한국에 오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이 모두가 ‘유령’에 대한 제각기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10여 년이 넘게 아우또노미아, 그리고 안또니오 네그리의 사상에 대해 연구해온 저자 조정환이 내놓은 이 책은 둘러말하지 않고 그 자체로서 전면적으로 다룬다. 거울을 치우고 그를 그로서 다룬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이 책은 네그리에 대한 연구서이기도 하면서, 아우또노미아 사상, 그리고 운동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좋은 입문서이기도 하다. 책에 따르면 세계에서 처음으로 ‘아우또노미아’를 다룬 책이라고 한다.

‘다중의 자율을 향한 네그리의 항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아우또노미아’ Autonomia 는 저자가 머리말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탈리아어로 ‘자율’이라는 뜻이다. 이탈리아에서 태동한 아우또노미아 운동에 대해 그 내용에 대해 가치론, 계급구성론, 사회편성론, 제국론, 국가론, 코뮤니즘론, 조직론 등의 측면에서 다룬다.

최근 들뢰즈, 가따리의 책이 한국에 많이 소개가 되면서 스피노자, 네그리, 하트 역시 함께 읽혀졌다. 그것은 스피노자-맑스-들뢰즈-가따리의 계열 속에서 '네그리'를 이해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이해한다면 '네그리'의 특이성보다는 다른 사상가들과의 연속성만이 강조될 위험이 있다. 사실, 한국에서 네그리는 아직 제대로 '소개', '이해'조차 되지 못했고, 따라서 '오해'의 소지는 매우 컸다. 이러한 때에 조정환의 새 책은 네그리의 사상을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하고 있어 반갑다.

이 책의 출간은 한국에서 하나의 사건이다. 앞으로 이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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