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나귀님 > 두 가지 논쟁에 관하여...

 

 

 

 

 

"논쟁"이란 것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다보니, 문득 생각나는 것이 두 가지 있었다. 그중 하나는 윌버포스 주교 대 토머스 헉슬리의 "진화론 논쟁" (1860년) 이고, 또 하나는 F. C. 코플스턴 신부 대 버트런드 러셀의 "하느님의 존재 논쟁" (1948년) 이다. 나름대로 이런저런 생각도 정리할 겸, 두 가지 논쟁에 대해 서술한 책을 꺼내 보았다. 첫 번째 논쟁은 여러 가지 버전이 있겠지만, 내가 특히 재미있게 읽은 것은 칼 세이건과 앤 드루얀이 공저한 <잃어버린 조상의 그림자>(김동광, 과학세대 옮김, 고려원)에 나오는 대목으로, 사실은 원본 그대로가 아니라 1930년대에 나온 어느 할리우드 영화의 한 대목을 시나리오 형식으로 옮긴 것이다. 이 논쟁에서 유명한 클라이막스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실제로는 그런 내용이 없었다는 둥, 헉슬리의 말이 다르다는 둥)이 있지만, 일단은 여기 서술된 것처럼 그런 게 "있다"고 치겠다. 두 번째 논쟁은 버트런드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송은경 옮김, 사회평론)에 나온 것이다.

 

1. 첫 번째 논쟁 : 윌버포스 대 헉슬리의 "진화론 논쟁" 중에서

  • 이튿날, 커다란 홀의 문이 활짝 열린다. 사람들로 가득 차 북적대고 있는 회장에 한 사람의 목소리만 울려 퍼진다. 옥스퍼드 주교 새뮤얼 윌버포스(조지 앨리스)의 얼굴이 커다랗게 클로즈업된다. 손가락을 옷깃에 넣은 채 그는 노골적으로 헉슬리(잠시 후면 그와 한바탕 싸움을 벌이도록 정해져 있는 그는 물론 그 자리에 있다)에게 얼굴을 향하고는, 일부러 꾸며낸 정중함을 가장하며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당신이 주장하는 바대로 원숭이의 자손이라면, 그것이 당신의 할아버지 쪽을 통해서 이어져 온 것이오, 아니면 할머니 쪽 가계에서 온 것이오?"
  • 특히 "할아버지"라는 대목에서는 간살을 떠는 듯 이상한 비음을 섞어 발음했다. 그러자 청중들은 낮게 "오!" 하는 탄성을 질렀고, 이내 모든 이들의 시선은 헉슬리에게 모아졌다. 헉슬리는 자리에 앉은 채, 주위 사람들을 향해 거의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다행스럽게도 신이 윌버포스를 내게 인도해 주셨군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눈으로 윌버포스를 응시하면서 입을 열었다.
  • "현실을 직시할 수 없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두 마리 원숭이 쪽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 아무도 주교가 뭇 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면전에서 그런 모욕을 당하는 일을 본 적이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대경실색했다. 여성들은 실신하고, 남자들도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챔버스는 그런 청중들 속에서 매우 유쾌한 표정이다. 그때 누군가 한 사람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뉴질랜드 총독의 임기를 마치고 막 영국으로 돌아왔던 전 해군 중장 로버트 피츠로이(로널드 레이건)이다. "다윈의 미친 생각에 대해서는 벌써 30년 전에 비글 호 선상에서 그 본인과 논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그런 다음, 피츠로이는 성서를 꺼내 무기처럼 휘두르며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그리고 이것만이 진리의 근원이오." 회장은 다시 숙연해졌다. (85-86쪽 : 인용문 가운데 일부는 문맥에 더 어울리게 약간 수정했다.)

 

2. 코플스턴 신부와 러셀의 "하느님의 존재 논쟁" 중에서

  • 코플스턴 : (...) 그 다음엔 이렇게 말하겠죠. 그 본질과 실재는 동일함에 틀림없다. 만일 하느님의 본질과 하느님의 실재가 동일하지 않다면, 이 실재에 대한 충분한 이유는 하느님 너머에서 찾아져야 하니까요.
  • 러셀 : 그러니까 모든 게 이 충분한 이유라는 문제로 돌려지는군요. 그렇다면 나는, 신부님이 "충분한 이유"란 것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의해주지 못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군요. 충분한 이유를 어떤 의미로 쓰시죠? 원인이란 의미 아닌가요?
  • 코플스턴 : 반드시 그런 의미만은 아닙니다. 원인도 충분한 이유의 일종이니까요. 오직 우연적인 존재만이 원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곧 그 자신의 충분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자신의 원인은 아닙니다. 내가 "완전한 의미에서의 충분한 이유"라고 할 때는, 어떤 특정 존재의 실재에 적절한 설명이란 뜻입니다.
  • 러셀 : 하지만 설명이 적절할 때가 언제지요? 예를 들어 내가 성냥으로 불을 붙인다고 해봅시다. 이것을 "내가 성냥곽에 성냥을 긋는다"고 하면 신부님은 적절한 설명이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 코플스턴 : 글쎄요, 실제적 목적에서는 그렇지요.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부분적 설명에 불과합니다. 적절한 설명이란 궁극적으로 총체적인 설명이어야 하며, 따라서 더 이상 덧붙일 게 없어야 합니다.
  • 러셀 : 그렇다면 나로선 신부님이, 가질 수도 없고, 따라서 가지길 바라서도 안 되는 어떤 것을 찾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군요.
  • 코플스턴 : 그것을 찾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그것을 찾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다소 독단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 러셀 : 글쎄, 모르겠네요, 내 말은, 한 가지를 설명하는 일은 다른 것으로 하여금 또 다른 것에 의존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일이기 때문에, 결국 신부님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이 딱한 사물 체계를 통째로 파악하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긴데, 그건 우리로선 하기 힘든 일이란 거죠.
  • 코플스턴 : 그러니까 경께서는, 우리가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얘깁니까, 아니면 이 딱한 사물 체계 전체, 다시 말해 우주 전체의 실재 문제를 아예 제기하지도 말라는 겁니까?
  • 러셀 : 그렇습니다. 나는 그것이 전혀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우주'란 말은 문맥에 따라선 편리한 말이지만, 나는 그것이 의미를 가진 어떤 것을 대표한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214-215쪽)

 

3.

난 솔직히 "논쟁"이란 것이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결과적으로는 서로의 "입장 차이"만을 다시한 번 확인하게 될 뿐 아무 것도 변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논쟁에서 이기는 쪽이건, 지는 쪽이건 사정은 마찬가지다. 어떤 한 가지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이라면 굳이 논쟁을 벌여서 지는 한이 있더라도 쉽게 승복하지 못할 것이고, 혹시나 궤변으로라도 이긴 사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는 논리적이지만 철저히 논리적이진 못하다. 논리적으로 자신이 궁지에 몰렸다는 사실을 깨닫더라도 승복하기보다는 그 궁지를 빠져나갈 또 다른 논리를 개발하기에 여념이 없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언젠가 유대교의 젊은 랍비들을 만난 자리에서 시험삼아 그들을 논리적 모순의 궁지로 몰아넣었지만, 그들이 이리저리 치고 빠지고 비틀어서 달아나는 솜씨에 대해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탄"을 표시한 적이 있다. 하긴 수천 년 동안이나 그렇게 치고 빠지고 비틀어서 달아나는 방법을 연구한 사람들이니, 그 정도의 감탄을 표시하는 것은 예의에 속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사람은 순수히 논리적이지 못하고 감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논쟁에는 백발백중 감정이 끼어들게 마련이다. 따라서 감정을 겨냥하는 것은 비록 논리적이지는 않을 망정, 매우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굳이 감정을 겨냥하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 논파된다는 것은 상당히 굴욕적인 일이다. 논리의 헛점이란 일종의 과실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물론 매사에 논리적으로 완벽한 인간이란 존재할 수 없을 텐데도 말이다. 그러니 무엇이든지 주장하고픈 것이 있으면 논리가 정연해야 한다. 거꾸로 말하자면 논리가 정연하지 못하면 뭔가를 주장하거나 옹호하거나 함으로써 논쟁에 가담할 엄두를 내지 않는 편이 낫다. 차라리 외면하고 사는 게 낫다. 아무도 내 의견을 묻지 않고, 나 역시 아무에게도 내 의견을 표시하지 않으면 그보다 속 편한 일이 또 없다. 청맹과니처럼 살아가는 것인데, 진정으로 매사에 청맹과니가 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야말로 대단한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닐까?

나는 앞에서 두 가지 논쟁에 대해 소개했다. 우리가 흔히 "논쟁"이라는 말을 들을 때 떠올리는 모습은 사실상 (1)에 가깝다. 즉 클라이막스가 있고, 멋진 "한 방"이 있으며, 두고 두고 읊어댈 만한 "명언"이 등장하는 논쟁이다. 승부는 깨끗하게 갈리고, 비록 상대방이 승복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둘 중에 어떤 쪽이 "이긴" 것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생활에서 벌어지는 논쟁이 양상은 오히려 (2)에 가깝다. 클라이막스고 "한 방"이고 "명언"이고 승부고는 간 데 없고, 그냥 상대방의 말꼬리를 잡고, 또 이에 대한 해명으로 소꼬리를 제시하는 식으로 끝도 없이 한도 없이 언쟁이 지속되지만, 실상 두 사람의 입장은 영원한 평행선을 그릴 뿐이다. 내가 논쟁을 싫어하는 이유랄까 하는 점은 아마 코플스턴과 러셀의 논쟁 내용에 고스란히 나와 있지 않나 싶다. 유명한 <철학사>를 쓴 사람들이지만 어째서인지 가장 근본적인 철학 문제(하느님, 도덕 등)에 대해서조차 합의가 쉽지 않다. 우선 두 사람의 입장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며, 따라서 똑같은 용어조차도 다른 뉘앙스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면 결국 "입장이 다른 두 사람"을 붙여놓고 논쟁을 시키는 것이야말로 무의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이 논쟁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1)의 논쟁이 되진 못했다. 이야기는 맨 처음, 그러니까 한 사람이 인정하는 것에 대해 또 한 사람은 인정하지 않고, 한 사람이 의미 있다고 보는 것에 대해 또 한 사람은 의미 없다고 보는 입장 차이에서 전혀 진전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무슨 시간 낭비인 것인가. 러셀이 이 토론의 내용을 굳이 자기 책에 수록한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본인으로서도 코플스턴의 문제 제기에 대한 자신의 대응이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논쟁 내내 코플스턴은 무엇을 "인정"하자는 쪽인 반면, 러셀은 오히려 상대방이 쓴 단어의 "의미"를 걸고 넘어지는 쪽이다. 물론 그것은 논리를 강조하는 러셀의 철학적 입장이 반영된 것이겠지만, 사실 정말 그가 논리적 명확성을 원했다면 그는 애시당초 이런 토론에 나오지 말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여간 코플스턴과 러셀의 논쟁은 지루하고도 짜증스럽고,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 현실의 실제 논쟁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에 참으로 읽기가 곤혹스럽다. 대 철학사가와 논리학자도 결국 논쟁에 있어서는 한 이불 속에서 벌어지는 부부싸움의 수준("그건 니 생각이지, 아니 니 생각이야, 아님 말아라, 너 잘났다")을 벗어나지 못했다니, 그야말로 역설적인 일이 아닌가.

물론 (1)의 논쟁과 달리 (2)의 논쟁은 단순히 각자의  "신념", 또는 "믿음"에 근거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문제가 아닌 이른바 "사실"에 대한 문제에서도 이런 식의 어려움은 없지 않다. 왜냐하면 "사실"조차도 경우에 따라서는 "신념"의 문제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것이 "사실"인지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경우가 그렇다. 한 사람은 어떤 것을 "사실"이라 여기고, 또 한 사람을 같은 것을 그렇게 여기지 않을 경우, 이는 단순히 정보의 유무보다도 "신념"과 연관되는 경우가 많다. 즉 사실을 직시하지 않거나 간과함으로써 일종의 취사선택을 하는 것이다. 물론 과연 100퍼센트짜리 "사실"이 존재하느냐 하는 쪽으로 회의적인 입장을 고수하기만 한다면, 어떤 논쟁에서도 "지지 않을" 것은 뻔한 이치다. 하지만 지지 않는다고 해서 "이기는" 것은 아니다. 회의적인 태도는 논쟁 자체를 불가능하고 무의미하게 만든다. 물론 그 당장에는 유용한 방법이지 모르지만, 솔직히 나로선 인간이 영원히 회의적이진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뭔가 단단한 것을 필요로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래처럼 부슬부슬 흩어지는 기반 위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모든 것을 무의미나 불가지로 돌리는 것은 단순히 논쟁의 전략으로는 유용할지 몰라도, 인생의 지침으로는 그리 유용하지가 않다. 인간은 결국 뭔가 의미있는 것을 말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남은 것은 타협 밖에 없는데, 이는 논쟁이라기보다는 일정 부분에 대한 회피로 가능한 것이다. 논리적으로야 만족스러울 수 없겠지만, 그래도 마음은 편하다. 일단 뭔가를 매듭짓긴 했기 때문이다. 비록 언젠가는 다시 끌러질, 어설픈 매듭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가끔은 하기 싫어도 그래야 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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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싸나이들과 범생이들의 대결에선 모두가 패자다!
학교와 계급재생산 - 반학교문화, 일상, 저항
폴 윌리스 지음, 김찬호 외 옮김 / 이매진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폴 윌리스는 교육학 전공자들에게는 꽤 잘 알려진 학자이고, 국내에도 몇 차례에 걸쳐 청소년 문제나 교육 문제를 다룬 국제 심포지엄에 다녀간 적이 있다. 예전에 모 신문에서 인터뷰도 진행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책을 교재로 세미나를 진행해본 경험이 있는 분들도 꽤 될 거라고 생각한다. 본래 원저는 "Learning to Labour"로 우리 말로 번역해보자면 "노동자로 학습하기" 또는 "노동계급으로 교육하기" 정도가 될 듯 하다. 원저명도 그렇지만 그것을 좀더 쉽게 풀어쓴 국내판 번역명이 책의 내용을 좀더 정확하게 일러주고 있기는 한데 다소 미흡한 부분도 있다.

책의 내용은 소개에도 잘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영국의 노동계급이 주로 다니는 해머타운의 공립학교 문제아 남자 아이 12명을 질적연구방법을 이용해 장기간에 걸쳐 인터뷰하고 관찰해본 결과를 논문으로 정리한 것이다. 국내에도 이런 연구방법과 주제를 응용해 진행된 연구가 상당수 있다. 예를 들어 김고연주의 "길을 묻는 아이들 - 원조교제와 청소녀(책세상문고 우리시대 092)" 같은 연구 역시 심층면접이란 방식을 이용해 진행된 것이다. 폴 윌리스의 "학교와 계급재생산"은 연구방식이란 점에 주목해서 볼 수도 있고, 말 그대로 '학교'라는 장소에서 어떻게 '계급재생산'이 일어나는지, 이른바 문제아들은 왜 문제아가 되는지를 미시적이면서 동시에 사회학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심층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학교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에게는 매우 중요하고, 재미있는 책이다.

윌리스가 다루고 있는 연구 현장이 1970년대 중후반의 영국사회란 점에서 이것을 그대로 한국사회에 적용시키는 것에는 문제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연구가 보여주는 통찰이 한국사회의 계급재생산 구조와 판이하게 다르다고 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최근 한국사회에서 빚어지고 있는 갈등의 중요한 부분들이 계급고착화 현상, 다시 말해 교육을 통한 계급상승의 길이 닫히고 있다는 점에서 초래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보면 말이다. "학교와 계급재생산"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제1부 문화기술지'에서는 문화기술지(ethnography)라는 낯선 연구방식이 무엇인지, 자신이 어떻게 연구했는지를 실제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제2부에서는 이에 관한 분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교육선진국처럼 받아들여지는 영국의 교육체계가 공립과 사립으로 이원화되어 있으며, 영국사회가 오랜 세월 굳어진 계급사회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평준화 교육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최근까지도 치열한 논쟁들이 전개되고 있는데, 그 핵심은 내 돈 가지고, 내 자식을 내가 원하는 대로 특수하고, 특별한, 좀더 수준높은 교육서비스를 받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만약 이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 아이를 한국이 아닌 교육선진국에 보내 교육받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당연히 영국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다. 피터 위어 감독의 영화 "죽은 시인들의 사회"에 등장하는 것과 같이 기숙사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비슷한 수준의 사회적 지위와 부를 누리는 일부 계급의 자녀들이 입학하는 사립학교가 있고, 노동계급의 자녀들이 지역에서 통학하며 다니는 공립학교가 있다.

영국 사회에서 계급격차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완고해서 옥스포드나 케임브리지 같은 대학에 노동계급 출신이 진학하는 것이 제도적으로 막혀있지는 않지만 해마다 상류계급의 대학문화에 적응하지 못한 노동계급 출신 학생이 자살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미국의 대학문화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진 않아서 미국 대학 중에서도 일년 학비가 3만 달러에 달하는 귀족학교로 명성이 높은 예일대는 높은 학비 못지 않게 학교내에 존재하는 비밀엘리트 집단인 "Skull and Bones"로 유명하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맞붙은 부시나 케리 모두 이 클럽 출신이다.) 그런가 하면 영국의 노동계급의 자부심 또한 매우 강해서 그들만의 독특한 노동계급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어쨌든 폴 윌리스는 노동계급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 현장의 문제아들, 이른바 "싸나이들"이란 작은 그룹의 악동들을 집중적으로 인터뷰하고 관찰하여 계급재생산 구조를 분석한다. 어째서 이들 어린 "싸나이들"은 기존의 권위에 대해, 특히 교사에게 반항하고, 교사의 훈육을 따르는 순응적인 아이들을 못 살게 굴고, 거부하는 것일까? 왜 "싸나이들"은 여성을 비하하고,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일가? 왜 "싸나이들"은 인종차별주의를 드러내며 다른 인종의 아이들을 혐오하는 태도를 보일까? 이들이 주로 기존의 권위(교사)에 도전하는 방식은 한국의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주로 개기고, 거짓말하고, 까불고, 익살을 떨며 그것을 즐긴다. 끼리 문화를 만들어 범생이들을 깔보고 괴롭히며, 그들을 폄하한다.
 
윌리스의 분석을 거칠게 인용해보자면 이것이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문화가 지배하는 노동현장의 분위기가 그대로 이들의 문화로 전유된 탓이라는 것이다. 가끔 미디어는 놀라운 모범생 신화를 만들어 내고, 널리 유포한다. 부모세대의 낮은 생활 수준에도 불구하고, 서울대에 입학한 입지전적인 청소년을 등장시켜서 그렇지 않은 많은 청소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거봐! 공부하니까, 되잖아. 넌 왜 이렇게 못하는 거야. 가난해서 공부하기 어렵다는 건 핑계일 뿐이야."라고... 통계와 과학적 입증을 즐기는 기자들도 이때만큼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지방보다는 서울, 서울에서도 강남 출신의 부유한 부모를 둔 자녀들의 서울 명문대 입학 비율이 높으며, 대한민국 사회의 계급재생산 구조가 완성단계에 이르러 이들을 통해 부의 세습과 계급 세습이 고착화되어 가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는 사실은 은폐되는 대신 평준화 교육으로 인해 학생들이 지닌 다양한 자질이나 개성이 평준화되는 문제로 치부된다. 한국사회에서 이토록 맹렬한 과외열풍, 논술열풍이 부는 이유는 계급상승의 막차라도 올라타고 싶은 부모 세대의 욕구가 상승기류를 타고 활활 타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중산층 부모의 맹렬한 욕구를 바라보면서 더 높은 상위계급에 속한 부모들은 이들의 다급한 추적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할 충분한 용의가 있다. 그런데 교육정책이 발목을 잡고 있다.

그들만의 끼리문화를 만들어 낸 "싸나이들"은 학교와 교사의 훈육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미래가 궤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간파한다. "싸나이들"은 산타클로즈를 믿지 않으며 교육이 신분상승을 이루어줄 수 없다는 것을 깨우치고 있을 만큼 영악하다. 그들은 세상의 이면을 속속들이 모두 깨우쳤다고 거만하게 웃으며 학교에 있는 동안 자신들의 즐거움과 약한 사냥감을 찾아 즐긴다. 이들이 여성에 대해 비하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은 이들이 앞으로 접하게 될 현장이 육체의 강인함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에 뒤처지는 상대적으로 약한 여성(실제 사회에서 여성 노동이 취급받는 현실을 보라)에 대해 우월감을 만끽한다. 이주노동자들의 값싼 노동력은 이들의 미래 일자리를 빼앗는 존재들이다. 만약 학교가 학생들에게 미래의 희망을 이루어 줄 수 없다는 사실이 간파되었을 때, 교사는 무엇으로 학생들을 통제할 수 있을까?

조주은의 "현대가족 이야기(퍼슨웹)"는 대기업 남성노동자 중심의 독특한 사회를 이루고 있는 현대공장의 가족 이야기를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현대가족 사회의 독특한 문화는 영국 노동계급의 가족문화와 일견 흡사한 측면을 보여주는데, 남성의 사회노동을 여성의 가사노동보다 우월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나, 여성의 사회활동을 가볍게 바라보는 시각 등이 그렇다. 이와 같은 남성중심 노동사회의 신입구성원으로 편성될 것을 일찌감치 간파한 "싸나이들"은 미리부터 그와 같은 과정들을 학습하고, 그들의 문화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폴 윌리스는 이와 같은 "싸나이들"의 간파과정이 사실은 국가와 사회구조로부터 받는 이중의 교란이라고 역설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노동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습득하고, 타협하는 과정이 재생산된다는 것이다. 윌리스의 통찰을 한국의 "싸나이들"에 빗대어 보면 한국의 싸나이들은 부모문화(한국사회에서는 남성중심의 지배문화)와 갈등하고 순응하면서 냉소적인 현실주의를 내면화한다.

한편으로는 세상의 부조리함을 탓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론 힘에 대한 갈망과 순응 속에서 '현실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패배주의로 나타난다. 이것이 이라크 파병을 묵인하고, 비정규직 노동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게 한다. 스스로도 사회적 약자이면서 자신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적응했으므로 자신보다 더 약자에게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고, 때로 그 자신이 강자의 즐거움을 맛보고자 하는 것이다. 교육에 적응하는 것도, 교육에 저항하는 것도 결국 체제를 강화하는 길이라고 했을 때, 디오게네스처럼 아예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살아가지 않는 한 그 앞에 선 우리들의 입장은 난감해질 수밖에 없다. 폴 윌리스도 그런 우리들의 입장을 간파했는지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말로 마지막을 맺고 있다.

"Whistle down the wind or whistle in the dark"

* 폴 윌리스는 이후 해머타운 학교의 "싸나이들"과 범생이들의 삶의 행로를 지속적으로 살핀 모양이다. "싸나이들"이 평생동안 반항으로 일관할 수는 없었을 텐데, 그 가운데 한 명은 자신에게 맞는 직장을 찾아 이후 그 사회에 순응하게 되었고, 범생이 가운데 한 명은 사회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반항아가 되었다고 전한다. 사실 이와 같은 계급재생산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지만 어쩌면 그 해답은 의외로 쉬운 곳에서 찾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제2차세계대전 이후 영국사회가 노동계급 젊은이들에게 베풀었던 대학교육의 혜택, 혹은 성인 교육이 어떤 성과를 가져왔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시기적으로 이 시대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영국 문화연구는 그 자체로 좋은 본보기이다. 영국 문화연구의 주요 연구자들이 노동계급 출신으로 전후 영국에서 행해진 성인교육의 혜택을 받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직 다 읽지 못했지만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이매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빈곤계층에게 가장 필요한 교육은 인문학이라는 주장을 담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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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기인 > 파리, 모더니티의 수도를 다 읽고

David Harvey, Paris, Capital of Modernity(2003), 8~18

8. Abstract and Concrete Labor

9. The Buying and Selling of Labor Power

10. The condition of Women

11. The Reproduction of Labor Power

12. Consumerism, Spectacle, and Leisure

13. Community and Class

14. Natural Relations

15. Science and Sentiment, Modernity and Tradition

16. Rhetoric and Representation

17. The Geopolitics of Urban Transformation

Part Three Coda

18. The Building of the Basilica of Sacre-Coeur

8. Abstract and Concrete Labor & 9. The Buying and Selling of Labor Power

우선 ‘Abstract Labor' ’Concrete Labor'의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맑스가 상품과 가치라는 자본주의에 현상에 대해서 이론화하면서 도출된 개념이다.

상품은 교환을 목적으로 생산된 것이므로, 어느 한 상품의 사용가치가 다른 상품과 교환되는 양적인 비율로 규정되는 '교환가치'를 갖는다. 따라서 상품은 사용가치임과 동시에 교환가치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교환가치는 시간, 장소, 상황에 따라 항상 유동적이며, 하나의 상품은 그것이 교환되어 지는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다양한 교환가치를 갖는다. 그러므로 교환되어지는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다양한 교환가치를 갖는다. 그러므로 교환되는 각 상품은 어떤 의미에서 동등해야 하며, 따라서 서로 동등하게 교환되는 모든 상품을 표현하는 상품이 있게 마련이다. 즉 교환가치는 구별되어질 수 있는 다른 무엇의 현상형태이다. 동일한 양이라는 이 공통요소는 그 상품들의 이질성 때문에 해당 상품의 물리적 및 자연적 속성과 화합될 수 없다. 교환과정에서는 동질적인 것이 표현되며, 모든 상품이 갖는 유일한 공통적 속성은 상품이 노동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교환과정은 상품을 생산하는 여러형태의 모든 노동을 동질화 시킨다. 상품을 생산하는 동질적 노동을 추상적 노동이라 부른다. 이 때 가치는 추상적 노동의 구체화 또는 물질화로 규정되고, 가치의 현상형태는 상품의 교환가치이다. 그러므로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아니라 사용가치와 가치로 된다. (다중생활도서관 노동자의 책 <맑스주의사상사전>의 <가치> 항목 중에서

http://www.laborsbook.org/dic/view.php?dic_part=dic01&idx=5)

즉 ‘구체적 노동’은 말 그래도 개별 노동자들의 구체적 노동인 반면, 추상적 노동은 하나의 상품을 생산하는데 요구되는 사회적 노동 (모든 총 노동자들의 구체적 노동을 추상화 시킨 형태)이다.

당시 노동자는 4가지 계층으로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자기 직업에 관련된 모든 국면에 통달한(대개 도제기간을 통해) 수공업 노동자, 세밀하게 분화된 노동 범주 내에서 전문화된 과제에만 국한된 기술을 지닌 숙련 노동자, 대개 떠돌이 막벌이꾼이며 “위험한 계급”이라든가 “룸펜 프롤레타리아” 등의 다양한 이름 아래 빈곤한 범죄적 계급으로 분류되는 비숙련 노동자, 글을 읽을 줄 알 고 숫자를 아는 화이트칼라 노동자가 그것이다. (253 참고)

부르주아가 두려워하는 것은 화이트칼라 노동자를 제외하고 (그들은 소부르주아지로 점차 변모되어 갔고) 모든 노동자들이지만, 각기 두려워하는 이유는 다르다. 우선 노동자 계급에서는 ‘맏이’뻘 (중세적이라는 의미에서, 또 소득수준과 교육수준에서)인 수공업 노동자는 말그대로 ‘수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로 ‘장인’과 비슷한 존재이다. 자신이 맡은 분야에 대해 일정기간의 숙련을 통해 대체하기 힘든 노동력으로, 근대화로 인해 지위가 격하되기 시작했지만 때문에 불만도 많고 목소리도 크다.

수공업 노동자들은 모범성과 정치적 지도력을 무기로 이론의 여지없이 1840년대의 파리 노동시장을 주도하는 존재였으며, 1848년 노동자 운동의 핵심이었다. 자본의 연합이 투쟁해야 하는 대상은 그들이었다. (253)

둘째인 숙련 노동자는 비숙련 노동자보다는 ‘숙련’되었지만 수공업처럼 완전히 자신이 한 분야를 장악하고 그 일을 모두 하는 것이 아니라, 분업에 의해서 조그만 부분에 숙련된 노동자이다. 이들은 근대화와 분업화가 진행되면서 비숙련 노동자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어쨌든 자본은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바라기 마련이고, 그러면 언제나 대체가능한 비숙련 노동으로도 생산이 가능한 시스템을 만드려고 노력하는 것이 이득이 된다. (요즘 ‘신자유주의’도 매한가지. 다만 이제 그 동안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만들어왔던 고용 안정을 위한 최소한의 ‘제도’를 붕괴하려고 투쟁하는 것) 그리고 분업은 생산성의 향상과 함께, 모든 노동을 간단하게 만들어 숙련의 정도가 낮아도 되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결과적으로, 생산성은 높아졌지만 임금은 낮아질 수 있었다. ‘수요-공급’에 의해. 또 소생산자와 장인들은 대량 시장의 형성과 신용 재정에 있어서 대규모 산업에 의해 점점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또 산업과 상업의 관계에서 상업이 산업을 진두지휘하는 형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실제로는 개인과 소기업과 외주 노동자와 삯일꾼들이 고도로 효율적인 생산 시스템에 통합되는, 점점 더 복잡하고 세부적으로 전문화된 노동 분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수많은 소기업들은 보다 큰 조직 형태의 하도급 단위에 불과한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본가-생산자나 원격조종 상인들에게 매여 있는, 도제적 노동 시스템에서 활동하는 존재였다. (233)

제2제정에서는 생산과 판매의 격리가 점점 커지며 권력 관계가 점진적으로 뒤집혀 파리 산업의 많은 부분이 점점 더 상업의 지시에 복종하는 꼭두각시의 처지가 된 것이 특징이었다. (...) 전형적으로 하도급 조직망, 즉 주문 생산이나 삯일에 의한, 혹은 외주에 의한 생산 조직망의 축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하여 자율성이 점점 강해진 상인 계급은 직공과 수공업 노동자를 상인 자본의 지배 아래 포섭하는 공식적인 중개자가 되었다. (238)

소생산자들은 한때 자부심 있고 독립적인 수공업 노동자와 장인이었지만 점점 더 빚과 의무, 특정한 지시와 통제된 공급의 그물 속에 갇힌 존재가 되었다. 그들은 어디로 발전해나갈지 자기들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전체 생산 시스템 속에서 세부 작업을 하는 노동자의 지위를 강요당했다. (241)

전통 한지를 만드는 ‘장인’ -문화재 전수자와 모닝글로리 노동자를 비교해보라!

제2제정기에는 노동시장에 대한 수공업 노동자의 장악력이 점점 줄었다. 또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탁월하게 묘사하는 과정인 기술의 재규정, 즉 생산과정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노동의 사회적 분화가 진행되면서 생산이 기계와 공장제 생산으로 넘어가는 현상도 일어났다. 일부 산업에서는 수공업 기술이 배제되고 세분화된 분업 체제에서 요구되는 전문화된 기술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 저품질 대량 생산 시스템에서의 탈기술화 경향과 쉽게 복제될 수 있는 기술을 사용하는 쪽으로의 이동이 대세였다. 기술과 조직에서의 변화를 감안할 때, 기술 없는 이주민이나 여성을 작업장에 들여놓기가 쉬워질수록 기술자와 비기술자 사이의 경계선은 점점 더 흐려졌다. (.....) 1870년의 노동시장의 성격이 1848년의 것에 비해 경쟁적 개인주의가 훨씬 더 강해졌다는 데 동의한다. (254)

결국 그 어떤 정치적 탄압보다도 그들의 힘을 잠식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은 노동 과정의 변화였다. 추상적 노동의 조건이 변화함에 따라 수공업 노동자들이 제공할 수 있는 구체적 노동의 중요성이 감소했다. 하지만 새로운 노동 배치도 속에서도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활용할 기회는 여전히 충분했다. 장인과 노동자 사이의 경계선이 대개 아주 엉성한 것인 한,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상향 이동은 여전히 가능했다. 그들 자신의 노동 시스템이 가진 위계적 조직 역시 세밀하고 사회적인 노동 분업 내에서 감독이나 심장, 하도급자로 투입될 기회를 주었다. 기술과 교육, 적응능력 덕분에 그들은 새로운 직종이 만들어질 때 그 분야를 장악하고 새로운 기술을 독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수공업 노동자로서의 지위를 잃고 1871년 이후 노조사회주의의 기반이 되는 “노동 귀족”의 핵심이 되었다. (.....) 그것이 대표하는 이념은 수공업 전통에서 나오는 상호부조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산업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노동조합 의식으로 바뀌었다. (255-257)

여기서 우리는 ‘노동조합’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관련 책 진짜 많은데, 특히 민주노총 쪽에서 나온 책이 많은데, 읽지도 않고 무지를 들어내며 세미나때 나불대기만 했다. -_-; 공부하자! )

당시 노동자들은 ‘중앙집중적인 국가 통제보다는 생산조합이나 자율 관리, 혹은 상호부조의 형태를 기대했’고 ‘대부분의 수공업 노동자들이 1848년에 노동을 재조직하고 생산의 사회적 관계를 개혁하여 앞으로 올 몇 십 년 동안 그들 자신의 사회적 진보를 위한 무대를 마련하려는 자신들의 노력을 지지해줄 사회주의 공화국의 창설’을 기대했다. (227)

산업의 동일 직종 또는 동일 분야에서 노동자들의 결합은 상당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널리 퍼져있는 운동으로서 노동조합주의는 자본주의적 임금노동의 성장의 산물이다. 초기 노동조합은 보통 파괴적 조직으로 간주되었으며, 국가의 탄압도 빈번하였다(프랑스에서는 1884년까지, 독일에서는 1890년까지 불법이었다). 법의 방치 상태는 폭동적 형태의 사회적 저항과 결합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초기 영국 노동쟁의의 급진주의에 의해서 강한 영향을 받아 노동조합을 아주 상세하게 분석했다. 엥겔스는 《노동계급의 상황》의 한 장을 "노동운동"에 할애했으며 (주로 랭카셔 목화공장 노동자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리고 또한 석탄광부들의 노동조합주의에 대해서 논했다.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을 영국의 조합 투쟁에 대한 열정적 평가로 끝맺었다. 그리고 점점 더 확대되는 노동자들의 연합을 가져오는 지역적 결합에 대한 견해는 《공산당 선언》에서 반복되었다. 이러한 초기 저작들은 중요한 세 가지 논의를 전개 시켰다. 첫째, 노동조합은 자본주의적 산업의 자연스런 결과물이다. 즉 노동자들은 임금 인하나 기계에 의한 노동의 대체에 대항하는 방어책으로서 결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 조합은(푸루동이나 뒤에 라살레가 주장한 것처럼)경제적으로 비효과적이지 않다. 즉 조합은 고용주들이 노동력의 가격을 그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낮추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조합은 그 수준 위로 임금을 올릴 수 없고, 그들의 방어력 조차 자본의 집중과 순환되는 경제위기에 의해서 마멸된다(마르크스, 《임금노동과 자본》). 셋째, 그러므로 방어적 경제활동의 제한된 효력으로 인해서 노동자들은 더욱 더 폭넓은 계급적 기반 위에 점증적으로 조직되며, 정치적 요구를 제기하고 궁극적으로는 혁명적 계급투쟁에 종사하게 된다(인용된 영국의 예들은 목화 노동자들의 10시간 노동 운동, 인민헌장 운동, 그리고 1845년의 전국노동조합연합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 외의 노동조합 경험은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계급의식을 확대시켰다. 즉 "전쟁의 학교로서 조합을 능가할 만한 것은 없다"(엥겔스, 앞에서 인용한 책).

그러나 영국의 대규모 운동은 곧 붕괴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서신 왕래에서 자신들의 환멸을 토로하였다. 즉 조합은 노동자귀족의 보호처가 되었으며, 조합지도자들은 시민계급 정치가들에 의해서 타락했으며 전체 노동자계급은 식민지 착취의 열매로 매수되었다. 그러나 1860년대 마르크스는 제1인터내셔날에서 영국의 주요 조합지도자들과 협력하였는 데, 그들의 참여가 제1인터내셔날의 성공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는 《가치, 가격 그리고 이윤》에서, 그리고 다음해 제네바 회의를 위한 결의안 초고에서 조합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확대하도록 촉구하였다. 비록 그러한 측면에서의 기대는 곧 실망스런 결과로 나타났으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문제에 대한 어떠한 논의도 행하지 않고 있는 고타강령을 비판하면서 (엥겔스가 베벨에게 보낸 편지, 1875년 3월 18일-28일) 노동조합은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계급적 조직"이었다고 여전히 주장할 수 있었다.

1850년대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경험과 저작에는, 합법적이면서 안전한 제도로서의 조합관과 보다 더 급진적 잠재력과 그 실천이라는 전망 사이에 긴장이 존재하고 있다. 놀랍게도 이 긴장은 결코 체계적으로나 이론적으로 대립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본론》은 노동조합에 관해서는 매우 부분적 언급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비록 노동시간을 제한하려는 정치투쟁이 다소 자세하게 거론되고는 있지만).

나중에 노동조합주의에 대한 관점은 크게 4가지로 분류된다. 특히 전미노동조합연맹(AFL)과 관련되어 있지만, 또 영국 조합주의의 성격이기도 한, "순수하고 단순한" 노동조합주의는 알게 모르게, 그리고 명백하게 조합의 목적과 방법의 골격으로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수용한다. 그것은 1890년대에 유럽에서 형성된 가톨릭 노동조합에도 적용된다. 무정부주의적인 생디칼리즘적 노동조합주의는 매우 혁명적이었으며, 투쟁적 계급의식으로 무장된 조합을 자본주의 전복을 위해서 필요하고도 충분한 토대라고 보았다(→생디칼리즘). 실제로 점점 개량주의로 빠져들어간 제2인터내셔날의 지배적 입장은,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은 서로 보완적이지만 뚜렷이 구별되는 자신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유럽의 많은 곳에서는 전국적 조합이 사회-민주적 지도 아래 생겼으며, 20세기로 접어든 뒤 그들은 대부분 자율성을 확립하였다. 마지막으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이 있다. 예를 들면 룩셈부르크는 노동조합 활동을 "시지프스의 노동"으로 보았다. 즉 관료적 관리에 의해서 지배되는 조합은 고용이라는 좁은 문제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이다."노동조합의식"이라는 레닌의 개념은 이와 비슷한 경향이 있다. 양자는 조합 안에서 혁명적 전략을 위해서 싸우며, 경제와 정치 사이의 구분을 타파하고, 사회민주당이 이 조정을 지도해야 할 필요성을 주장하였다(→파업). (다중생활도서관 노동자의 책 <맑스주의사상사전>의 <노동조합> 항목 중에서

http://www.laborsbook.org/dic/view.php?dic_part=dic01&idx=17&keyword=노동조합)

이러한 상황에서 오스망은 파리에서 노동계급을 없애려고 일자리를 줄이려는 정책(산업을 교외로)을 쓰면서 노동자들의 정치권력을 제거하려고 노력했다. 또 토지 가격과 임대료 때문에 도심에서 견딜 수 있는 일부 산업을 제외하고는 산업들이 모두 교외로 이동했다. 도심에 남아있던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높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어 3시간 이상 걸리는 출퇴근을 감수해야 했고, 그들의 임금은 최저 생계비 아래였다. (맑스의 <자본론>에서 나타난 당시 영국 노동계급의 비참함이나, <전태일 평전>에서 나타난 70년대 남한 노동계급의 비참함! 당시 ‘숙련노동자’였던 제단공 전태일이 비숙련 ‘시다’들이 딱해서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물론 맑스 시대에 공장주들이 ‘공장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나 70년대 ‘근로기준법’이 유명무실이었던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맑스 시대 영국에서는 노동자 계급의 재생산을 우려한 정부에서 공장법 관리들을 파견하고, 노동자 계급 생활상태의 심각성이 어느 정도 부각된 반면, 우리는 ‘전태일’의 분신에 의해서야 이러한 악조건이 환기된다.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라

파리에서는 삯일로 유지되는 직업이 있는데, 그 일을 20년간 하다보면 노동자는 불구가 되고 탈진해 버린다. 다행히 그때까지 목숨이 부지된다면 말이다.(234))

70년대 남한의 ‘도시화’과 농촌의 억압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듯이, 파리도 마찬가지였다.

파리의 노동예비군은 대부분이 지방 출신이었다. 이주 움직임은 부분적으로는 1850년대 농촌의 불황에 원인이 있다. 또 그 불황은 부분적으로는 농촌 산업을 와해시키고 지역의 자족성을 무너뜨리며 프랑스 농업의 근대화 속도를 늦춘 공간관계의 변화 때문에 유발되었다. (261)

17. The Geopolitics of Urban Transformation & 18. The Building of the Basilica of Sacre-Coeur

결국 결론-결말에 가서 이 책의 집필(구성) 의도가 드러난다.(또는 독자는 결론-결말을 통해 이 책의 주된 집필-구성 의도를 추론한다) 이 책은 프랑스의 1848년 2월 혁명부터 1871년 파리 코뮌까지의 시기를 다룬다. 서론에서 이 책이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파리의 공간적 구조의 변모에 따른 산업 구조, 노동 방식, 거주민들의 (근본적/구조적)변모일 터이고, 이러한 변화는 ‘근대성’을 함축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진짜 의도(?)는 1848혁명으로 인한 제2제정(오스망)의 개혁 시도와 결국 이의 좌절로 인한 파리 코뮌의 발발까지의 역사적 행보이다. 그 와중에 하비의 특장이라면 ‘지정학적’인 관심과 문화-상징적 기술물들에 대한 관심으로 미시사적인 접근도 함께 하고 있다는 것.

마르크스가 프랑스 혁명사 3부작을 통해 동시대 프랑스의 혁명적 성과들에 대해 논평을 하며 운동을 끌어간 것과 같은 배치.

<1848년에서 1850년까지의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프랑스 내전>

각기 2월 혁명 직후, 제2제정이 시작되는 때, 그리고 마침내 파리 꼬뮌을 다루고 있는 이 세 역작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17과 18장은 17장이 앞선 2부의 결론과 같은 형태로 ‘요약’이라면 18장은 이제 이 책을 새롭게 읽게 만드는 새로운 시작으로서의 임무를 띠는 ‘파리 꼬뮌’에로의 초대이다. 지금까지 하비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설명을 한 것들이 모두, ‘파리 꼬뮌’이라는 역사의 결절점으로 모여든다.

1860년대에 파리에서 전개되어 코뮌을 예고한 투쟁은 영웅적이라 할 만한 수준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공동체와 계급 개념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또 계급 연대와 적대감의 진정한 기반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자신들의 요구를 강제하고 세력을 동원할 수 있는 정치적, 경제적, 조직적, 물리적 공간을 찾아내기 위한 투쟁이었다. 이런 모든 의미에서 그것은 파리의 정치와 문화뿐 아니라 파리 경제를 변형시키기 위한 지정학적 투쟁이었다. (422)

잘 나가던, 자본의 흐름에 최대한 따라가던 오스망과 제국은, 자본과 서서히 그 연결이 부식되어 갔다. ‘정부’주도식 파리는 부르주아와 노동자 둘 다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이들의 불만을 완화시키기 위한 대책들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발생한 파리 꼬뮌은 중앙집중론자와 탈집중론자들로 분열되고 공화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분열로 일관성이 결여되고 내적 갈등으로 점철되었다.

프로이센과의 전쟁으로 패퇴하던 프랑스의 국제 정치적 상황과 노동자들의 불만이 터져 나와 대규모 봉기로 이어지자, 부르주아들은 “내부의 적”에 대한 두려움에 프로이센에게 항복하는 것을 선택했고, 그 와중에 시민에게 발포하려던 프랑스의 군대 장군에게 거부하던 병사들과 함께 프랑스 시민은 그 장군을 총살하는 일이 발생한다. 1871년 3월 18일. 파리 꼬뮌의 탄생이다. 이에 대해 당시 프랑스 대통령 티에르는 파리에서 군대와 정부 요원들을 완전히 철수시키며 파리의 침공과 탈환을 준비했다.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는 파리를 진압하는데 필요한 프랑스 군대의 재조직을 허락하고, 대규모 프로이센 군대를 파리 주위에 주둔시킨다. 그들은 파리 코뮌과 프랑스 군대의 자국민 학살을 침묵 속에서 바라본다.

파리 시민들은 철수된 행정 기관을 모두 접수하고 빠르게 이를 다시 운영하며 3월 26일 선거를 치르고, 3월 28일 파리 코뮌을 선언한다. 부르주아들은 당혹해 했고, 상당수가 파리를 ‘탈출’했다. 파리는 프랑스 군대에 의해 ‘진압’당하며 2만에서 3만 명 사이의 코뮌 가담자들이 그 과정에서 죽고 또 처형당했다. (역사는 끊임없이 차이와 함께 반복된다. 이는 인식 주체의 한계 때문에 '반복‘으로 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행위 주체들의 공통점들도 간과할 수는 없다. 프랑스 꼬뮌으로부터 100년후, 1980년 광주 ’꼬뮌‘. 마찬가지로 부르주아들은 침묵했고 광주를 ’탈출‘했다. 파리 꼬뮌에 대한 연구는 은연중에 프랑스 학계에서 배척당하고, 파리 꼬뮌을 연구주제로 선택하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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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기인 > 물질화: 파리 1848~1870 -1

David Harvey, Paris, Capital of Modernity(2003), 3~7

3. Prologue

4. The Organization of Space Relations

5. Money, Credit, and Finance

6. Rent and the Propertied Interest

7. The State

3. Prologue

1부가 전체 책의 서론격이라면, 이제 2부(Materializations: Paris 1848-1870)는 본격적으로 오스망화(근대화)되었던 시기의 파리를 다루고 있다. 1부가 Representations: Paris 1830-1848이라면 이제는 Materializations 된다는 것. 옮긴이(김병화)는 이를 각각 ‘묘사’와 ‘물질화’로 옮기고 있지만, Representation은 ‘상상’혹은 ‘재현’으로 옮기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 representation-> materialization 으로 이행한다는 것을 살리려면 상상-> 물질화(실현)의 과정인 셈.

1848-1870은 루이 나폴레옹 3세가 공화국 대통령(1850~52), 황제(1852~71)로 재위했던 시기이며 오스망이 1853-1870년까지 파리의 도시계획을 책임지고 실행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1부에서 살펴본 1830-1848시기는 1830혁명으로 시작되어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하기까지의 시기로 이 때 또한 기존의 사회-경제적 불만들이 누적되어 혁명이 일어난 것으로 이 시기에 혁명으로 해결되지 못했던 많은 문제들이 이제 나폴레옹 3세 정권에게 이행되게 된 것이다. 1)

도시를 옥죄고 있는 또 다른 족쇄는 실질적으로는 18세기적 구조 그대로인 제조업, 금융, 상업, 행정, 노동관계들을 지배하는 사회 관행과 사회 하부구조였으며, 이런 활동들을 제약하고 있는 여전히 주로 중세적인 물리적인 하부구조(medieval frame of physical infrastructure: 결국 이 물리적인 infrastructure에 대한 관심이 하비 책을 특징짓는 요소일 것이다. 이 infrastructure을 ‘하부구조’로 번역하는 것도 조금은 미스다. 하부구조라는 용어는 당연히 맑스적 의미에서 읽히게 될 수밖에 없다. 인프라 구조나 사회간접자본(?) 등으로 번역해야 옳지 않았나 싶다. 그것이 더 하비적 맥락에 맞을뿐더러 쓸데없는 오해를 줄일 수 있다.) 역시 족쇄로 작용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7월 왕정 기간 동안 도시의 쇄신에 대한 이야기가 무성하게 나왔고 이따금씩 실제로 시도되기도 했지만 파리는 짓눌려 있는 상태였다. (143)

이러한 infrastructure는 ‘새로운 산업도시에서도 나타나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효율적으로 되어가는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비의 조직과 양립할 수 없었다’

자본 축적이 요구하는 새롭고 엄격한 수준을 충족시킬 만큼 효율적으로 파리가 움직이지 못한 정도에 비례하여 1847년에서 1848년 사이의 위기 동안 느껴진 고통은 배가되고 연장되었으며, 회복을 꾀하려해도 온갖 장애물이 널려 있었고, 정계와 문화계가 하는 일이라고는 의심과 혼란과 공포감을 만들어내는 것뿐이어서 문제가 더욱 복잡해졌다. (145)

결국 자본의 근대적 운동 방식(이윤 추구)에 방해되는 도시 구조는 당대의 상황을 읽고 이에 기민하고 정열적으로 대응한 오스망에 의해 변혁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제2제정의 18년간을 하비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그 기간은 지독하게 진지한 국가사회주의 형태, 즉 경찰 권력과 인민주의 기반을 가진 권위주의 국가의 실험이었다. 그런 실험이 대부분 그렇듯이 그것도 전쟁과 불화로 인해 몰락했지만 그 기간은 강력한 노동 규율의 부과와 자본 순환의 기존 규제에서의 해방을 특징으로 한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정확하게 어떤 새로운 사회적 실천, 어떤 제도적 틀과 구조, 혹은 사회적 투자가 제대로 작동할지가 분명하지 않았다. 그때 제2제정은 자본주의, 즉 그 안에서 다양한 경제적 정치적 이익들이 의식적으로 이런저런 장점이나 해결책을 추구해보지만 자기들의 행동이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에 얽매이는 일이 너무 잦은, 까탈스러우면서도 급속히 성장하는 자본주의에 적응하려고 분투하는 단계에 있었다.

황제와 자문관들이 파리를-그 삶과 문화와 경제를-그것을 까마득한 과거에 너무 답답하게 붙들어 매고 있는 규제들로부터 해방시킬 방법을 찾아나선 것은 그러한 맥락에서였다.(147~148)

그리고 이는 다음과 같이 본질적인 문제들을 발생시키고, 이 문제들에 대한 대응을 모색하게 했다. 이것이야 말로, 자발적 ‘근대화’의 고민과 면모들이며, 식민지 조선이 ‘주체적’으로 궁구하지 못했던, 맞닥뜨리지 못했던 문제들이다.

목적과 수단의 문제가 있었고, 개인의 이익과 자본 순환과 관련된 국가의 적절한 역할이 무엇인가, 노동시장과 산업 상업 활동이나 주거와 사회복지의 제공에 국가가 어느 정도로 개입할 것인가 하는 것도 문제였다. 무엇보다 아직도 강력한 상류 부르주아들의 완강한 저항과 부딪히지 않으면서, 또 겉보기에는 안정되게 뿌리박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나 한계상황으로 내몰릴 위협 아래 놓여 있는 중간 계급의 불안정성을 더 크게 만들지 않으면서, 노동자들을 노골적인 봉기로 내몰지 않고 파리 경제를 다시 확고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정치적인 문제가 있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황제가 처음에는 그처럼 방자하게 대하고 멸시하는 듯이 의표를 찔렀던 계급세력에게 궁극적으로는 포로가 된 사람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148)

결국 일반화를 최종 목적으로 하는 역사학자답게, 하비는 오스망과 황제 또한 ‘계급세력의 포로’, 즉 역사의 주체로서의 ‘계급’과 역사의 동력으로서의 ‘계급’을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오스망의 파리는 1870년에 끝난 것이 아니라 그 뒤 30년이 지난 뒤에도 그가 규정한 노선에 따라 개발되었음으로 ‘오스망화=파리의 근대화’라는 명제는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하비의 저술이 문학도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아무래도 경제적 심급과 ‘역사-지리적’변모가 의식과 문화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중요시한다는 것이며, 실제로 이에 대한 연구를 실행한다는데 있을 것이다.

제국 치하의 18년은 오스망의 작업이 도시의 물리적 바탕을 절개하고 개조하는 과정에서 파리인들의 의식 속 깊이 각인되었다. (149)

하비가 2부에서 서술하고자 하는 것은 이 시기 파리의 ‘역사-지리학적 변화’이며 이는 ‘도시 경제, 정치, 사회, 문화의 내적인 작동과 관계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설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하비는 각기 주제들은 모두 다른 주제들이 없으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전제 하에, 이 상호관계를 보여주려 한다. 특히 이 글이 구체적으로 다룰 5~7장인 ‘금융 자본, 부동산 이권, 국가’는

사회적 생산물이 이권과 임대료와 세금으로 분배된다고 하는 이론의 일부로서 함께 연결된다. 분배에 대한 고려가 생산보다 우선시되는 점이 좀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마르크스가 언급했듯이,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는 데 극히 중요한 “원초적 생산-결정 분배”라는 것이 있다.(번역이 약간 이상한데 “an initial production-determining distribution"으로 ”생산을 원초적으로 결정짓는 분배”정도로 이해된다.) 이 경우에는 대체로 새로운 공간관계(내면적, 외면적 모두)는 국가와 금융자본과 토지 이권의 연정聯政에서 창출되었으며, 그들 각각은 도시 변형의 과정에서 시행되어야 하는 과제를 위해 고통스러운 상호적응 과정을 거쳐야 했다는 사실에 따라 위치가 설정된다. 물론 국가는 단순한 분배 도구 이상의 존재이며(비록 세금이 없으면 별 도리가 없지만), 국가 활동의 다른 측면들, 적법성과 권위도 여기서뿐 아니라 뒤의 적절한 지점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154)

4. The Organization of Space Relations

*생시몽주의: 19세기초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드 생 시몽은 빈민의 처지를 염두에 둔 '새로운 그리스도교'를 역설했다. 생 시몽파는 화합의 정신이야말로 사회발전의 기초이며, 여기에 종교가 주된 역할을 한다면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개인주의와 적대감정을 점차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들은 자본이 유산계급의 사욕에서 벗어나 사회의 의지대로 처분되기 위해서는 상속권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생시몽파는 이러한 조처가 빈민들에 대한 착취를 효과적으로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empas 백과사전)

철도의 확충과 도로망의 신설 등의 공간관계 변화에 따라 자본의 순환 시간이 짧아지고, 생산과 분배, 두 분야 모두에서 대기업 경영의 가능성이 열렸다. 오스망은 도시 구역 내에서 상품과 인간의 유통 능력을 개선시켰다. 이러한 오스망의 개혁은 능동적이라기보다는 자본의 ‘요구’에 따르는 수동적인 개혁이었다.

오스망은 토지와 부동산 시장의 운영과 산업의 입지와 노동과정과 시장과 분배시스템과 인구 분산과 가정 형성 등의 온갖 변동 양상을 주도했다기보다는 그에 적응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파리의 내부 공간의 개조는 이미 가동되고 있던 과정에 대한 반응이라 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그 과정-산업과 상업 발전, 주거에 대한 투자와 주거 공간의 분리 등-이 뭉쳐지고 그들 자신의 궤적을 따라 활동할 수 있게 해주며 도시 진화의 새로운 역사지리학을 규정해주는 공간적 틀이 되기도 했다. (.....) 제국이 살아남으려면 자본과 노동력의 과잉은 기필코 흡수되어야 했다. 파리의 내부 공간을 그처럼 변형시킨 공공사업을 통해 그러한 과잉을 흡수하다보면 건조 환경의 특별한 공간 배치의 건설을 통해 자본이 자유롭게 순환하게 된다. 봉건적 족쇄에서 풀려난 자본은 파리의 내부 공간을 그 자신의 고유한 원칙에 따라 개조했다. 오스망은 파리를 서구 문명까지는 아닐지라도 프랑스에 걸맞은 근대적 수도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자본의 순환이 진정한 제국주의적 권력이 되어버린 도시를 만드는 것을 도왔을 뿐이다.(167-168)

오스망은 도시공간을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하고 다루었으며, 그 안에서 도시의 상이한 구역과 상이한 기능들은 상관관계를 맺고 활동하는 전체를 형성하였다. 이는 자본이 도시를 그렇게 파악한 것과 관계 깊을 것이다.

공간관계의 재형성과 그로 인해 발생한 공간적 규모의 변형은 도시화 과정에서 수동적 계기가 아니라 능동적 계기로 작용했다. 교통과 운송을 통한 공간의 실제 조직은 모든 역사적 지리적 분석이 반드시 파악해야 하는 1차적인 물질적 사실이다. 파리 안팎에서 이루어진 제2제정의 공간관계의 혁명은 연원이야 그 이전 단계에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1852년 이후에 이루어진 변화의 속도, 공간적 규모, 지리적 확장은 그 이전의 전반적 수준과 차원이 다르다. (172)

5. Money, Credit, and Finance

1851년의 당면 과제는 자본과 노동력의 과잉을 흡수하는 것이었다. (.....) 정부는 생시몽주의 노선을 채택하고, 직접적인 정부 개입과 신용 창조와 금유에 관한 구조 재정을 혼합함으로써 과잉 자본과 과잉 노동을 경제 부흥을 위한 기반인 새로운 물리적 infrastructure로 전환하려고 했다. (175)

그리고 이를 보조할 수 있었던 것 페레르 형제들이 ‘소액 저축을 동원하여 장기적 프로젝트를 감당하도록 신용기관들을 치밀한 위계적 형태로 조직하여 저축을 민간 차원으로 확산하는 길’이었던 것이다. 금융-정부의 연합. 저축 즉 투자 붐의 근대적 시작.

계획의 실행을 위하 투기적 자본을 끌어 모으지 않는다면 근대성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열쇠는 소규모 실개천 같은 자본을 한데 모아 필요한 규모의 기획에 착수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흐름으로 만드는 방법을 찾는 데 있다. 페레르 형제가 하려고 했고, 금융 분야에서 제도적 변화를 통해 달성하려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182)

실제로, 금융이 조금이라도 재편되지 않았다면 애당초 그처럼 빠른 속도로 변형이 진행될 수 없었다. 단지 도시가 돈을 빌려야 했다는 것(뒤에서 다룰 주제)뿐 아니라 오스망의 기획 자체가 그가 열어젖힐 공간을 개발하고 건설하고 소유하고 관리할 재정적 힘을 가진 회사의 존재에 기대었던 것이다. (178)

정부가 세금만으로, 공무원만으로는 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었다. 자본은 정부와 동시에 소시민들의 저축-투자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저축-투자를 하지 않으면 뒤떨어진다는 -손해를 본다는- 생각. 남들이 진보할 때 내가 서 있다면 나는 뒤떨어지는 것.

돈, 재정, 투기는 파리의 부르주아들에게 너무나 큰 강박관념이 되었으므로(“사업이란 다른 사람의 돈이다”라고 아들 알렉상드르 뒤마가 농담했다) 증권거래소는 지주들의 재산을 수없이 집어삼킨 무모한 투기와 타락의 중심이 되었다.(181) (ps. 채만식, 󰡔탁류󰡕에서 미두)

이러한 신용 시스템의 재편은 파리의 산업과 상업, 노동 과정과 소비 양식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어쨌든 모든 사람이 신용 거래에 의존했으니까. 유일한 질문은 누가 누구에게, 그리고 어떤 조건으로 빌려주느냐 하는 점이었다. 계절 실업으로 인해 시달리는 노동자들은 거기에 생계를 의존했다. 소규모 장인과 점포주는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주문을 처리하려면 신용 거래를 해야 했다. 이 같은 연쇄는 끝없이 이어진다. 채무상태는 모든 계급과 모든 활동 영역이 당하는 만성적인 문제였다. (183)

신용 시스템은 자본의 연합을 통해 합리화되고 확장되고 민주화되었지만 대개 무절제한 투기와 중앙집중화되고 위계적으로 조직된 시스템 속으로 모든 저축을 흡수해들이는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시스템 속에서 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화폐권력을 조금이라도 지닌 사람들의 제멋대로이고 변덕스러운 일시적 기분에 더욱 피해를 입기 쉬운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공간관계에서 혁명이 일어나려면 신용 시스템에서 혁명이 필요했다. 그러나 파리 내에서 그 과정은 금융자본과 토지자신의 훨씬 더 긴밀한 통합에 의존하여 진행되었다. (184)

6. Rent and the Propertied Interest

임대료와 부동산 이권이 점차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작동하기 시작하여 파리의 공간들이 분절되어 각기 용도에 맞는(높은 임대료를 부과할 수 있는 순으로) 구역들로 나뉘기 시작했다. 이제 파리의 부동산은 재정적 자산으로, 투자의 대상으로 인식-변모 되었다.

파리의 부동산은 점점 더 순수한 재정적 자산으로, 자본의 일반적인 유통과정에 통합된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전적으로 지배하는 의제자본 형태로 평가되었다.(185)

중하류층가 소부르주아들은 부동산 소유권에서 계속 배제되었고, 그들의 자리는 지주와 대상인들로 이루어지는 상류층 부르주아가 차지했다. 그러한 변화는 수공업과 소생산자와 점포주가 대상인과 금융에 종속되는, 상업, 금융, 제조업 구조의 중대한 변화와 일치한다. 모든 사회 집단들이 점점 더 투기를 위해 부동산 매매에 기꺼이 참여하고자 했다는 증거도 있다.

소유권은 분산되기 시작하여 계속 그러한 상태가 유지되었다. 도마르의 집계에 따르면 1846년에 평균적 소유자는 부동산 두 건만을 관리했고, 이들 가운데 개별적으로 대규모의 부동산도 일부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188)

파리의 부동산은 주식 시장의 전형적 특징인 불안정성으로부터 보호되는, 안정적이고 수익이 높은 투자처였다. (193)

이러한 인식변모의 와중에는 오스망이 파리라는 도시를 전체로 보고 이를 구역별로 운용하려는 그의 인식과 정책이 있다.

파리를 변형시키려면 자본을 동원해야 하는데, 그것은 매매뿐 아니라 전통적인 부동산 소유자들의 사생활 우선주의와는 상극이며, 집단적 원칙에 따르는 도시공간의 장기적 경영과 철거와 재편에도 투자할 자본이었다. (194)

오스망이든, 상류 부르주아든, 일반적 소시민이든 부동산에 대한 투자는 ‘자본의 순환이라는 기반’에 한데 묶여 있었다.

토지와 건물 자산의 임대료와 가격은 갈수록 현저하게 자본주의적 논리에 기대는 용도에 맞춰 토지를 할당하는 작용을 한다(201)

새로 도로시스템은 공간관계를 체계화하여 토지가격과 용도가 보다 체계적으로 조직된 시스템으로 넘겨주었다.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는 용도는 점차 밀려났고, 감당할 수 있는 용도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202)

좀더 순수한 자본주의적 노선에 따르는 토지와 부동산 시장이 새로운 신용 시스템의 성장에 고무되어 재편성된 현상(좌안에서처럼 전통주의자의 저항 중심도 물론 있지만)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즉 파리 내부 공간의 재편성이 공간을 장악하려는 여러 다른 사용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가격 경쟁에 점점 더 예속되어버리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 파리의 재건설을 통해 노동과 자본의 잉여를 흡수하는 일은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명백하게 병적이라고 여겼던 온갖 부정적인 결과들-퇴거당하거나 격리되는 일이 늘어나고, 일하러 더 먼 길을 가야 하며, 치솟는 집세와 인구과밀의 환경-을 가져왔다. (205)

이에 대해 이를 오스망-국가의 힘에 의한 일방적 결과인지는 다음 장에서 살펴볼 것이다.

(물론 ‘자본’의 운동과정에 따른 결과라고 제출될 것이다.)

7. The State

하비는 당시 프랑스 제국을 ‘국가 기관들이 근대의 요구와 자본주의의 모순점과 보다 밀접하게 조화하는 데 기여한, 프랑스 정부와 정치에서 중요한 변천 단계’로 보고 ‘이 정치적 변천 과정이 파리에서 어떻게 일어났으며, 그 도시의 역사적 지형에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오스망과 그의 파리는 자본의 ‘과잉 축적이라는 거대한 문제를 적자재정을 통해 자체 재정을 충당하는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했던 한 국가 기구가 결국은 이권을 장악하는 화폐 자본의 순환에 내포된 아슬아슬한 모순의 제물이 되고 만다’. 그 ‘정치 시스템이 이 분야에서 성장하는 자본주의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만 것이다. 결국 과잉축적을 해결하는 대외적 방법이 제국주의와 식민지 건설이라면, 내부적으로는 적자재정을 통한 건설경기 활성화일 것이다. 그리고 이 둘 모두가 원활하게 작동할 때, 제국주의시기 근대화는 가능할 것이다. 이는 안으로는 노동자들의 계급적 착취로 인한 자본의 증가와 밖으로는 식민지의 착취로 벌어지는 데, 둘 다 피지배계급의 저항에 맞닥뜨리게 된다. 식민지는 ‘준인간’이었기 때문에 무자비하게 죽이면 됬지만, 어느정도 ‘민주주의’의 역사가 있는 프랑스-파리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은 탄압하는 주체인 병사들 또한 설득되기 힘든 문제여서 결국 파리 꼬뮌으로 나아가고 만다.

이 시기 오스망의 강압적인 감시와 통제, 일방적 선전과 축제와 빵은 노동자들의 불만을 억누르거나 달래지 못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의 무자비한 노동운동 탄압과 함께 3S정책의 투박함을 떠올리게 한다.)

오스망과 자본의 연합으로 실행된 ‘사회적 재생산 공간의 형성’을 통해 소득계층에 따라 ‘주거가 점점 더 격리되는 현상은 위험하고 범죄적인 계급이 가하는, 실제이건 상상에 의한 것이건 위험으로부터 부르주아를 보호할 뿐 아니라 점점 더 도시를 상이한 사회계급들의 재생산을 위해 상대적으로 안전한 공간으로 변모시켰다.’

결국 오스망과 제국은 실각하고 만다. 파리 꼬뮌의 탄생이 그것이고, 이는 계급적 혁명을 의미한다.

도시 내에서 안정적인 계급 연대를 유지하기가 특히 어렵게 된 더 깊은 불만의 원천이 있었다. 변형 자체로 인해 “오래된 파리”가 사라지는 데 대한 광범위한 향수와 회환(귀족이나 노동자나 모두에게서)이 생겨났고, 이는 가이야르가 대단하게 평가하는 공동체의 상실감을 널리 퍼뜨리는 데 기여했다. 낡은 방식과 구조가 뒤집어진 것이다. (.....) 오스망은 파리를 통상적인 의미의 공동체로 보고자 하는 입장에 확고부동하게 반대하고 그것을 “유목민적”인 이익과 개인들이 왕래하여 일체의 고정적이거나 영속적인 의미의 공동체 형성이 애당초 배제되는 방식으로 움직이는 자본주의적 도시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리를 국가가, 국가를 위해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었으며, 이 목적을 위해 그는 선출된 관리보다 임명된 지사의 손에 모든 행정 권력을 쥐어주는 1855년의 정부조직법안을 발의하고 옹호했다. 파리 공동체를 이행기에 있는 것으로 본 점에서는 오스망이 옳았을지도 모르지만, 수도에서 대중 주권을 부정한 것은 수많은 노동자와 부르주아를 코뮌 지지로 끌어들인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오스망이 영구적인 계급 연대를 유지하는 데 실패한 것은 그가 한 일보다는 그 일을 한 방식과 더 많은 관련이 있다. 또 그렇다면 권위주의적인 그의 행정 스타일은 애당초 쿠데타를 발생시킨 상황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러므로 그가 자유주의 제국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없었다는 주장은 타당하다. (223-224)

결국 자본의 작동방식과 역사발전 과정에 부합하지 못했던 이전 프랑스가 쿠데타를 통해서 무너지고 다시 집권하게 된 나폴레옹 3세와 오스망이 근대적 기획에 따라 정부주도의 적자재정 경제정책을 폈지만 이 또한 내부적 한계로 무너지게 되었다. 여기서 더 살펴보아야 할 것은 당연히 오스망 직전과 직후의 프랑스 상황일 것이다.

1)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하기까지의 시기에 대한 연구는 하비가 추천하는 마르크스 <1848년에서 1850년까지의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참조 할 것. 전자는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2󰡕, 박종철출판사, 1992, 1~114면. 후자는 277~393면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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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읽기 Ⅲ : 맑스의 작품들


 

  칼 맑스(Karl Marx)는 1818년에 독일 남부 트리어에서 태어나 1883년 영국 런던에서 죽었다. 그와 평생의 동무 엥겔스는 책을 쓰고 급진적인 신문과 잡지를 만들었으며 쉴 새 없이 기고했다. 맑스의 주장들은 그가 살아 있을 때 출판된 것이든 노트로 남아 있다가 훗날 세상에 공개된 것이든 20세기 사상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맑스·엥겔스 저작들의 출판 상황


  20세기에 흔히 MEW로 지칭되는 『맑스·엥겔스 저작집』(Marx/Engels. Werke)이 출판됐는데 총 39책 41권과 2권의 보충판으로 구성됐다. 이 저작집에는 1835년부터 1895년 사이에 작성된 맑스와 엥겔스의 책, 글, 노트와 편지들이 실려 있다. 또한 MEGA로 불리는 『맑스·엥겔스 전집』(Marx/Engels. Gesamtausgabe)의 출간이 진행 중인데 편집위는 그 완간 시기를 대략 2030년으로 잡고 있다. 전체가 몇 백 권이 될 지 확실치 않으며 재정상의 문제로 발간이 지속될 것인지도 의문이다. MEW를 전집, MAGA를 총집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편 한국에서는 수많은 출판사에서 맑스와 엥겔스의 책들을 번역하여 펴냈다. 어떤 저작이 어느 출판사에서 나왔는지를 정리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체계가 없고 중복되고 난잡한 실정이다. MEW 가운데 『자본』이 이론과실천에서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이 백의에서 나왔고 박종철출판사에서 6권의 『맑스·엥겔스 저작선집』을 냈다. MEW나 MAGA의 한국어판 번역이 기획, 실행되지 않는 한 번역의 일관성도 주요 저작의 빠짐없는 출간도 희망하기 어렵다. <공산당 선언> 등의 인기 있는 상품만 계속 나오고 『독일 이데올로기』 같은 훌륭한 작품의 완역본은 출간 된 적이 없다.


  맑스의 주요 작품들


  1835년 17세의 맑스는 <직업 선택을 앞둔 한 젊은이의 성찰>이란 글에서 “우리는 자신이 신으로부터 소명을 받았다고 믿는 지위를 마음먹은 대로 차지 할 수 없다. 우리가 미처 그것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사회적 관계가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는 법률가가 되기 위해 대학 법학부에 들어갔고 나중에 철학 교수가 되고자 했으나 결국 급진적인 저널리스트로 일하게 됐다. 곳곳에서 추방당했고 망명 생활을 했으며 그런 가운데 국제적인 공산주의 운동가, 이론가, 지도자가 되었다.


  맑스의 대표작은 ‘정치경제학 비판’ 『자본』이고 가장 널리 읽힌 글은 <공산주의 선언>이다. 이 글에서는 맑스의 글, 노트, 책 가운데 17개의 주요 작품들을 선정하여 집필 시기 순으로 소개하고 그 내용 일부를 음미할 것이다. 각 인용 문장은 참고한 책의 번역문을 그대로 가져왔다. 몇 개의 이름과 지명 등은 통일시켰다. 그 인용문들이 맑스 저작을 즐겨 읽어온 사람들에겐 익숙한 문구들이겠지만, 낯선 사람들에게 맑스의 작품은 이러이러한 게 있고 각 작품에서 이런 말들을 했다고 안내하는 게 이 글의 목적이다.


1. 맑스의 박사학위논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Über die Differenz der demokritischen und epikureischen Naturphilosophie』(1841)

: 1841년 맑스는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철학논문을 제출한다. 그는 이 논문에서 그 동안 서양철학사에서 철저히 이단시 되고 온갖 비난을 받아오던 에피쿠로스를 새롭게 조명한다. ‘원자와 천체’를 아우르며 원자에 대한 세부적 차이가 천체라는 세계관의 차이로 이어지는 것을 논증하는데 그의 이러한 통찰은 훗날 ‘상품과 자본주의’를 다루는 『자본』의 분석방법에서도 재현된다.


  …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학 사이의 하나의 본질적인 차이, 가장 미세한 곳까지 관통하는 그 차이가 증명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값진 일이 될 것이다. 작은 것 안에서 증명될 수 있는 것은 더 큰 차원의 관계들이 포착되는 곳에서는 더욱 쉽게 보여질 수 있지만, 반대로 아주 일반적인 고찰로부터 [시작할 때는] 그 결과를 개개의 것들에서 확증할 수 있을지 불투명한 것이다.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은 이데올로기나 공허한 가정들이 아니라, 우리가 혼동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2. ‘헤겔 법철학’ 비판

<헤겔 법철학의 비판을 위하여. 서설>

(1843)

: 이 글에서 맑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의미와 혁명적 역할을 처음으로 논한다. 독일의 상황을 독일 특유의 사변적 화법으로 비판한 셈이다. 맑스는 청년헤겔학파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상가였다.


  종교적 비참은 현실적 비참의 표현이자 현실적 비참에 대한 항의이다. 종교는 곤궁한 피조물의 한숨이며,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또 정신 없는 상태의 정신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 물질적 힘은 물질적 힘에 의해 전복되어야 한다.

  철학이 프롤레타리아트 속에서 그 물질적 무기를 발견하듯이, 프롤레타리아트는 철학 속에서 자신의 정신적 무기를 발견한다.

  모든 내적 조건들이 충족된다면, 독일 부활의 날은 갈리아의 수탉의 울음 소리에 의해 고지될 것이다.


* 이 글의 비판 대상인 헤겔은 1820년에 출간한 『법철학』의 <서문> 마지막 부분에서 “철학이 회색에 회색을 칠한다면, 생의 한 형태는 노후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회색에 회색으로써는 생이 갱신될 수 없고, 다만 인식될 뿐이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어둑어둑한 황혼에야 비로소 날개를 편다”라고 했다. 맑스가 이 <서설> 마지막 문장에서 ‘프랑스의 프롤레타리아트’를 ‘갈리아의 수탉’으로 비유한 것은 ‘미네르바의 올빼미’에 대응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올빼미의 ‘황혼’과 달리 수탉은 ‘새벽’에 운다.


3.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수고)>/<파리 수고>

<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aus dem Jahre 1844>

: 1932년에야 세상에 알려진 이 노트들은 파리에서 작성되었다고 해서 ‘파리 수고’라고도 불린다. 이 노트에서 맑스는 처음으로 정치경제학 범주들을 연구하며 ‘소외된 노동’이라는 주제를 논했다. 맑스의 머리와 손을 통해 ‘고전 경제학’과 ‘헤겔 철학’이 동시에 비판된다. 이때의 문제의식들은 평생에 걸쳐 다듬어진다. 


  국민경제학은 노동자와 생산 사이의 직접적 관계를 고찰하지 않음으로써 노동의 본질 내부의 소외를 은폐한다.

  화폐는 만물의 현실적 정신이다. … 화폐는 눈에 보이는 신이며, 모든 인간적 자연적 속성의 그 반대의 것으로의 전환이요, 사물의 보편적 혼동과 전도이다. … 화폐는 인류의 외화된 능력이다.


4. 『신성 가족』/『신성 가족, 혹은 비판적 비판에 대한 비판. 브루노 바우어와 그 일파에 반대하여』

『Die heilige Familie』(1845)

: 엥겔스와의 최초의 공동 저작인데 당시 더 유명했던 엥겔스의 이름이 앞에 나온다. 엘리트들이 아니라 민중이 역사의 창조자라는 것을 주장했고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견해를 표명했다.


  국민 경제학의 모든 설명 전개는 사적 소유를 전제로 삼고 있다.

  이념은 결코 낡은 세계 상태를 넘어설 수 없으며, 항상 단지 그 낡은 세계 상태의 이념들을 넘어설 수 있을 뿐이다. 이념들은 일반적으로 아무것도 실현할 수 없다. 이념의 실현을 위해서는 실천적인 힘을 모으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5.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

(1845)

: 맑스가 기록한 11개의 테제들로 엥겔스가 발견해 1888년에 처음으로 공개됐다. 엥겔스는 “새로운 세계관의 천재적인 맹아를 간직하고 있는 최초의 기록”이라고 평했다.


  6)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본질을 인간의 본질로 용해시킨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각각의 개체 속에 내재하는 추상물이 아니다. 인간의 본질은 그 현실에 있어서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ensemble이다.

  11)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6. 『독일 이데올로기』/『독일 이데올로기. 포이어바흐, 브루노 바우어, 슈티르너로 대표되는 최근의 독일 철학과 그 다양한 예언자들의 독일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

『Die deutsche Ideoloie』(1846)

: 1932년에야 세상에 알려진 이 걸작은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견해로 유명하고 미래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언급도 보인다. 이때 이데올로기의 뜻은 허위의식이다. 독일에서 헛소리하는 이들에 대해 비판한다는 뜻이다.


  아무도 하나의 배타적인 활동의 영역을 갖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그가 원하는 분야에서 자신을 도야할 수 있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사회가 전반적 생산을 규제하게 되고, 바로 이를 통하여, 내가 하고 싶은 그대로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치며 저녁 식사 후에는 비판하면서도 사냥꾼으로도 어부로도 목동으로도 비판가로도 되지 않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우리에게 있어서 공산주의란 조성되어야할 하나의 상태, 현실이 이에 의거하여 배열되는 하나의 이상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을 공산주의라고 부른다. 이 운동의 조건들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전제로부터 생겨난다. 


7. 『철학의 빈곤』/『철학의 빈곤. 프루동 씨의 「빈곤의 철학」에 대한 응답』

『Das Elend der Philosophie』(1847)

: 프랑스의 소시민적 사회주의자 Proudhon이 1846년에 출판한 『빈곤의 철학』을 공격하기 위해 작성했다. 맑스는 이 책의 내용으로 독일노동자협회에서 강연했다.


  영국인이 인간들을 모자들로 바꾸어 놓는다면, 독일인은 그 모자들을 이념들로 바꾸어 놓는다. 그 영국인은 부유한 은행가이자 탁월한 경제학자인 리카도이며, 그 독일인은 베를린 대학의 단순한 철학 교수인 헤겔이다.

 

8. <공산주의당 선언>/<공산당 선언/공산주의 선언>

(1848)

: 공산주의자 동맹의 강령으로 작성한 선언문으로 당시에는 작성자의 이름을 넣지 않았다. 마지막에 쓰인 구호는 이후 맑스와 엥겔스가 주도하는 모든 국제 노동자 운동에서 변함없는 슬로건으로 사용된다.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 / 현대의 국가 권력은 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공동 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일 뿐이다. / 부르주아의 결혼이 사실상 아내 공유제이다. / 노동자들에게는 조국이 없다. / 한 시대의 지배적 이념은 항상 지배 계급의 이념이었을 뿐이다. / 계급과 계급 대립이 있었던 낡은 부르주아 사회의 자리에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가 들어선다. /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


9. <임금노동과 자본>

(1849 → 1891년 엥겔스가 수정)

: 1947년 브뤼셀에서 강연 했던 내용을 기초로 작성한 것이다. 엥겔스가 훗날 맑스의 연구성과를 반영해 일부 표현을 수정했다. 가령 ‘노동’을 ‘노동력’으로 고쳤다.


  흑인은 흑인이다. 일정한 관계들 속에서 그는 비로소 노예가 된다. 면방적기는 면방적을 하는 기계이다. 일정한 관계들 속에서만 그것은 자본이 된다.

  자본 또한 하나의 사회적 생산 관계이다. 그것은 부르주아적 생산 관계, 즉 부르주아 사회의 생산 관계이다.


10. <1848년부터 1850년까지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

(1850)

: 파리에서 1848년 2월 혁명이 일어나 입헌군주제 대신 공화정이 선포됐다. 맑스는 <신라인신문 정치경제 평론>에 이 혁명의 의미와 사태의 진전에 대해 연재했다. 원래 1849년까지만 다루었는데 1850년 ‘보통선거권 폐지’ 후에 비판한 글까지 하나로 묶었다. 국가, 혁명,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대한 견해를 밝혔고 화려한 문필력과 박학다식함으로 반동들을 규탄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패배는 비로소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자신의 처지를 아주 조금 개선하는 것조차 부르주아 공화국 내부에서는 하나의 공상이며, 이 공상은 자신을 실현하려 하자마자 범죄가 되고 만다는 진리를 깨우쳐 주었다.

  착취자는 동일하다 : 자본. 개별 자본가들은 저당권과 고리 대금업을 통해 개별 농민들을 착취하고, 자본가 계급은 국가 조세를 통해 농민 계급을 착취한다.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이다.

  헌법은 포위한 자들을 보호할 뿐 포위된 자들을 보호하지 않는 요새이다!


11.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1852)

: 대통령이던 루이 보나빠르뜨가 1851년 12월에 쿠데타를 일으켰다. 맑스는 즉시 분석에 들어갔다. 동시대에 일어나는 사태에 대해 맑스는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이 그런 정세와 상황을 발생시킨다는 관점으로 서술한다.


  로마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의 비용으로 살아갔던 반면, 현대 사회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비용으로 살아간다.(1869년 제2판 서문)

  인간은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즉 자신이 선택한 상황하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상황하에서 만든다. 모든 죽은 세대들의 전통은 마치 꿈속의 악마처럼, 살아 있는 세대들의 머리를 짓누른다.


12.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1857~8)

: 맑스는 이 수고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정치경제학 비판’이라고 메모했는데 그 시절에 쓰던 모든 글은 다 그 주제로 분류된다.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노아의 방주 이전에 적어도 개요나마 명확히 하기 위해서 나의 경제학 연구를 요약하는 데 밤새 작업하고 있네”라고 했다. 여기에서 이 노트의 전체 제목을 따왔다. 이 노트들이 최초로 출간된 것은 1939년이었다. 이 작품에서 맑스는 처음으로 ‘잉여 가치’, ‘잉여 노동’, ‘불변/가변 자본’ 등의 범주를 사용했다.


  인간의 해부는 원숭이의 해부를 위한 열쇠를 쥐고 있다. 이에 반해 하급 동물류에서 보이는 보다 고차원적인 것들에 대한 암시는 고차원적인 것 자체가 이미 알려져 있을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부르주아 경제는 고대 경제 등에 대한 열쇠를 제공해 준다.(서설)

  자본은 필연적으로 자본가이다. 그리고 자본은 필요하지만 자본가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몇몇 사회주의자들의 견해는 전적으로 오류이다.

  프루동은 가치 법칙에 따라 가치가 노동과 교환되는 것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점, 즉 이자를 지양하기 위해서는 자본 자체를, 교환 가치에 기초한 생산 양식을, 그러므로 임노동도 지양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13. 『정치경제학의 비판을 위하여』

『Zu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1859)

: ‘요강’을 작성하고 『자본』을 출판하기 전에 맑스는 이 글을 통해 정치경제학 비판의 주제들과 자신의 연구 경로 등을 밝힌다. <서문>에서 ‘상부구조와 토대’라는 비유를 사용하며 유물론적 역사 파악의 핵심을 간결하고 힘차게 설명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 처음으로 화폐 학설을 포함해 가치 이론을 체계적으로 서술한다.


  생산 관계들의 총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 즉 그 위에 법률적 및 정치적 상부 구조가 서며 일정한 사회적 의식 형태들이 그에 조응하는 그러한 실재적 토대를 이룬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 방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 과정 일반을 조건 짓는다. 인간들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


14. 『임금, 가격, 이윤』

『Wages, Price and Profit』(1865 → 1898)

: 1865년에 맑스가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에서 영어로 강연할 때의 원고다. 1898년에 그의 막내딸 엘레노어가 서문을 달아 출판했다. 이 짧은 원고에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정치경제학의 비판을 위하여』,  2년 후에 출판될 『자본』의 연구성과와 결론들이 모두 압축되어 있으며 이해하기 쉽다.


  …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돈다는 것이나, 물이 극히 연소되기 쉬운 두 가지의 가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역설이다. 우리를 현혹시키기 쉬운 사물의 외양만을 포착하는 일상적인 경험으로 판단할 경우, 과학적 진리는 언제나 역설이다.

  “공정한 노동에 공정한 임금을!”이라는 보수적 표어 대신에 그들(노동자들)은 “임금제도 철폐!”라는 혁명적 구호를 자신들의 기치에 써넣어야 한다.


15. 『자본』/『자본. 정치경제학 비판』

『Das Kapital』/『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Oekonomie』(1867)

: 맑스는 20여 년 동안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해 1,500여권의 책과 자료를 읽었고 노트로 옮겼으며 그 가운데 800여 권을 이 저작에 인용, 언급했다. 맑스는 『자본』을 가리켜 “부르주아지(지주를 포함하여)의 머리로 날아갈 가장 효과적인 미사일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고전 정치경제학을 지적으로 파괴하는 프로젝트’였는데 맑스는 이 책이 “예술적 총체를 이루고 있다”고 자부했다. 맑스는 1권만 출판했고 2권(1885년), 3권(1894년)은 엥겔스가 출판했다.


  현대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이 책의 최종 목적이다.

  자본가는 오직 인격화된 자본에 지나지 않는다. … 자본은 죽은 노동인데, 이 죽은 노동은 흡혈귀처럼 오직 살아 있는 노동을 흡수함으로써만 활기를 띠며, 그리고 그것을 많이 흡수하면 할수록 점점 더 활기를 띠는 것이다.

  동등한 권리와 권리가 서로 맞서 있을 때는 힘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의 역사에서 노동일의 표준화는 노동일의 한계를 둘러싼 투쟁, 다시 말하면 총자본[즉 자본가계급]과 총노동[즉 노동자계급] 사이의 투쟁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노동자는 여기에서는 노동시간의 인격화에 불과하다.

 

16. <프랑스에서의 내전>/<프랑스 내전.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의 담화문>

(1871)

: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 총평의회의 요청에 따라 맑스가 작성한 글로서 협회 회원들에게 보내는 담화문(격문) 형태로 발표되었다. 처음에 영어로 작성됐고 1871년 5월 30일 만장일치로 채택되어 13일 출간됐다. 


  꼬뮌에게 내려진 해석의 다양함과 꼬뮌에 표현된 이해관계의 다양함은 이전의 모든 정부 형태가 분명하게 억압적이었음에 반해 꼬뮌은 철저하게 확장적인(expansive) 정치 형태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꼬뮌의 진정한 비밀은 이것이었다. 꼬뮌은 본질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정부였으며, 전유 계급에 대한 생산 계급의 투쟁의 산물이었으며,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완성될 수 있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였다.


17. <독일 노동자 정당 강령에 대한 평주>/<고타 강령 비판>

(1875 → 1891년 발표)

: 1875년 5월 독일의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과 전독일 노동자 협회가 고타에서 통합 당대회를 가졌다. 그때 준비된 강령의 퇴보에 대해 맑스가 매우 격렬하게 비판한 글이다. 맑스는 주요 지도부에게 회람 후 돌려달라고 했다. 1891년 <신시대>를 통해 출판됐는데 엥겔스가 당시는 필요했지만 훗날에는 불필요한 표현들을 생략했다.


  권리는 사회의 경제적 형태와 이 형태가 제약하는 문화 발전보다 결코 더 높은 수준일 수 없다.

  공산주의 사회의 더 높은 단계에서 … 부르주아적 권리의 편협한 한계가 완전히 극복되고, 사회는 자신의 깃발에 다음과 같이 쓸 수 있게 된다 :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

  속류 사회주의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를 본받아 (그리고 이를 다시 본받아 일부 민주주의자들은) 분배를 생산 방식과는 독립된 것으로 간주하고 또 그렇게 다루고 있으며, 따라서 사회주의는 주로 분배를 중심 문제로 하고 있다는 듯이 서술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 사이에는 전자에서 후자로의 혁명적 전환의 시기가 놓여 있다. 또한 이 시기에 상응하는 정치적 이행기가 있으니, 이때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 이외에 다른 것일 수가 없다.


  ‘맑스 읽기’를 마치며 : 비판과 실천


  지금까지 세 개의 글을 통해 ‘맑스 읽기’에 대해 논했다. 첫 글 <그들은 왜 맑스를 읽어왔나>에서 오늘날 맑스를 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며 20세기에 그들- 맑스주의자, 맑스의 후예 혹은 문예비평가 -이 맑스로부터 어떤 영감과 영향을 받았는지 살펴보았다. 두 번째 글 <맑스로 가는 길>에서는 맑스(주의)를 탐구하는 세 가지 길을 논했다. 철학사를 통해 내려오거나, 동시대의 유행 사상을 살피거나, 전기와 작품을 통해 이해하기 등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연재에서 맑스의 주요 작품 17개를 선별하여 간단히 설명하고 맑스가 썼던 글에서 인용하여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맑스학Marxology을 수행하는 맑스 전문가, 맑스주의 문헌학자가 아니라면 그의 전 저작을 집필 순서대로 통독할 필요는 없다.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경우 맑스뿐만 아니라 엥겔스, 레닌 등 고전적 맑스주의자들의 저작들을 두루 찾아 읽긴 하지만 맑스의 박사학위논문이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등을 읽는 경우는 드물다. 그것들이 현실 운동에 직접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 경제학, 정치, 사회학 등의 분야의 맑스주의 학자들도 맑스의 전 저작을 고루 섭렵하진 않는다. 학자의 양심이나 성실의 문제라기보다는 오늘날 전 세계의 학문적 풍토가 그러하기 때문일 것이다.

  학적인 탐구나 전문가로서의 기초를 다지는 게 아니라 교양 차원에서 맑스와 친해지고자 한다면 이 연재에서 추천했던 전기들과 함께 <공산주의 선언>, ‘프랑스 혁명사 3부작’, <임금, 가격, 이윤> 정도 읽으면 될 것이다.


  결론이 나진 않은 주제


  ‘정치경제학 비판’과 관련한 책과 노트들은 분량이 방대해서 쉽게 권하기 어렵다. 또한 이름 높은 당대 최고라는 맑스주의 전문가들 수천 명이 달려들어 지난 세기를 다 소진하며 논쟁했지만 정리가 되지 않았다. 결론이 나지 않는 쉽게 결론 낼 수 없는 주제라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전문가들도 포기하거나 더 연구해야겠다며 물러서는 난제들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

  사정이 이러하니 사람들은 종종 ‘쉬운, 얇은, 일목요연한, 단순명료한’ 입문서/해설서를 찾곤 한다. 분량이 많든 적든 내용이 현학적이든 세속적이든 저자가 그 주제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자기 이해를 거쳐 결론을 내지 못한 상황에서 세상에 내보내는 그런 결과물들은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다. 스피노자로부터 맑스가 가져왔던 것처럼 ‘무지가 증명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동서고금의 고전들을 통해 지혜를 익힌, 철학과 역사를 통해 이치를 깨달은, 문학예술을 통해 글을 볼 줄 아는, 비록 자본주의 안에 살고 있지만 대안의 공동체를 희망하는 사람들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삶의 자세와 여정 속에서 만난 맑스라면 그의 대표작 『자본』에 그 모든 인류의 지혜가 ‘노아의 방주’처럼 집결되고 농축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예술적 총체’는 맑스와 그 가족들이 부르주아적 출세와 풍요 그리고 건강을 포기한 채 만들어낸 피눈물의 결실이기도 하다.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맑스는 대학을 떠나면서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은 이데올로기나 공허한 가정들이 아니라, 우리가 혼동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와 엥겔스는 평생 경제학자들과 사상가들, 다른 사회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를 조롱하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단 한번도 자신들에 대해서 노동자계급의 ‘이데올로그’라고 표현한 적 없고 자신들의 사상이 위대한 ‘공산주의(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정초한 것이라고 회고한 적도 없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라는 표현과 뜻이 맑스의 적대자들과 계승자들 모두가 이해하는 공용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식의 발상과 어의語義변화와 전도顚倒는 20세기의 서글픈 현상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죽은 맑스, 엥겔스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 즉 이데올로그로 세계 곳곳에서 경외의 대상으로 되었다. 공동묘지에 묻힌 맑스, 바다에 뿌려진 엥겔스의 죽음과 대조적으로 사람들은 우상숭배를 일삼으며 그들의 동상을 세웠다가 무너뜨렸다.

  그들이 그렇게도 증오했던 물신숭배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폐해들을 돌아보라. 이데올로기를 지양하는 게 아니라 또 다른 허위의식들의 바벨탑을 건설했던 게 아니겠는가. 맑스를 읽었을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했는지 의문이지만, 그 역시 지배 계급의 사상이 그 사회의 지배적 사상으로 군림하고 억압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맑스를 읽는 까닭은 당대의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와 그것에 아첨하는 이데올로그들의 감언이설에 현혹된 채 길을 잃지 말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맑스의 비판(Kritik)과 실천(Praxis)만큼 감동적이고 유익한 나침반이 또 어디 있겠는가.


오창엽 : 69년생. 청년진보당, 사회당에서 활동했고 진보매체 기자로 일했다. lastmarx@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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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고대문화(komun.net) 9, 10, 12월호 학술연재의 마지막 글로 최종 작성일은 2006년 11월 24일이다.

맑스 읽기Ⅰ : 그들은 왜 맑스를 읽어왔나

☞ 맑스 읽기Ⅱ : 맑스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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