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기인 > 파리, 모더니티의 수도를 다 읽고
David Harvey, Paris, Capital of Modernity(2003), 8~18
8. Abstract and Concrete Labor
9. The Buying and Selling of Labor Power
10. The condition of Women
11. The Reproduction of Labor Power
12. Consumerism, Spectacle, and Leisure
13. Community and Class
14. Natural Relations
15. Science and Sentiment, Modernity and Tradition
16. Rhetoric and Representation
17. The Geopolitics of Urban Transformation
Part Three Coda
18. The Building of the Basilica of Sacre-Coeur
8. Abstract and Concrete Labor & 9. The Buying and Selling of Labor Power
우선 ‘Abstract Labor' ’Concrete Labor'의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맑스가 상품과 가치라는 자본주의에 현상에 대해서 이론화하면서 도출된 개념이다.
상품은 교환을 목적으로 생산된 것이므로, 어느 한 상품의 사용가치가 다른 상품과 교환되는 양적인 비율로 규정되는 '교환가치'를 갖는다. 따라서 상품은 사용가치임과 동시에 교환가치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교환가치는 시간, 장소, 상황에 따라 항상 유동적이며, 하나의 상품은 그것이 교환되어 지는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다양한 교환가치를 갖는다. 그러므로 교환되어지는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다양한 교환가치를 갖는다. 그러므로 교환되는 각 상품은 어떤 의미에서 동등해야 하며, 따라서 서로 동등하게 교환되는 모든 상품을 표현하는 상품이 있게 마련이다. 즉 교환가치는 구별되어질 수 있는 다른 무엇의 현상형태이다. 동일한 양이라는 이 공통요소는 그 상품들의 이질성 때문에 해당 상품의 물리적 및 자연적 속성과 화합될 수 없다. 교환과정에서는 동질적인 것이 표현되며, 모든 상품이 갖는 유일한 공통적 속성은 상품이 노동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교환과정은 상품을 생산하는 여러형태의 모든 노동을 동질화 시킨다. 상품을 생산하는 동질적 노동을 추상적 노동이라 부른다. 이 때 가치는 추상적 노동의 구체화 또는 물질화로 규정되고, 가치의 현상형태는 상품의 교환가치이다. 그러므로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아니라 사용가치와 가치로 된다. (다중생활도서관 노동자의 책 <맑스주의사상사전>의 <가치> 항목 중에서
http://www.laborsbook.org/dic/view.php?dic_part=dic01&idx=5)
즉 ‘구체적 노동’은 말 그래도 개별 노동자들의 구체적 노동인 반면, 추상적 노동은 하나의 상품을 생산하는데 요구되는 사회적 노동 (모든 총 노동자들의 구체적 노동을 추상화 시킨 형태)이다.
당시 노동자는 4가지 계층으로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자기 직업에 관련된 모든 국면에 통달한(대개 도제기간을 통해) 수공업 노동자, 세밀하게 분화된 노동 범주 내에서 전문화된 과제에만 국한된 기술을 지닌 숙련 노동자, 대개 떠돌이 막벌이꾼이며 “위험한 계급”이라든가 “룸펜 프롤레타리아” 등의 다양한 이름 아래 빈곤한 범죄적 계급으로 분류되는 비숙련 노동자, 글을 읽을 줄 알 고 숫자를 아는 화이트칼라 노동자가 그것이다. (253 참고)
부르주아가 두려워하는 것은 화이트칼라 노동자를 제외하고 (그들은 소부르주아지로 점차 변모되어 갔고) 모든 노동자들이지만, 각기 두려워하는 이유는 다르다. 우선 노동자 계급에서는 ‘맏이’뻘 (중세적이라는 의미에서, 또 소득수준과 교육수준에서)인 수공업 노동자는 말그대로 ‘수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로 ‘장인’과 비슷한 존재이다. 자신이 맡은 분야에 대해 일정기간의 숙련을 통해 대체하기 힘든 노동력으로, 근대화로 인해 지위가 격하되기 시작했지만 때문에 불만도 많고 목소리도 크다.
수공업 노동자들은 모범성과 정치적 지도력을 무기로 이론의 여지없이 1840년대의 파리 노동시장을 주도하는 존재였으며, 1848년 노동자 운동의 핵심이었다. 자본의 연합이 투쟁해야 하는 대상은 그들이었다. (253)
둘째인 숙련 노동자는 비숙련 노동자보다는 ‘숙련’되었지만 수공업처럼 완전히 자신이 한 분야를 장악하고 그 일을 모두 하는 것이 아니라, 분업에 의해서 조그만 부분에 숙련된 노동자이다. 이들은 근대화와 분업화가 진행되면서 비숙련 노동자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어쨌든 자본은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바라기 마련이고, 그러면 언제나 대체가능한 비숙련 노동으로도 생산이 가능한 시스템을 만드려고 노력하는 것이 이득이 된다. (요즘 ‘신자유주의’도 매한가지. 다만 이제 그 동안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만들어왔던 고용 안정을 위한 최소한의 ‘제도’를 붕괴하려고 투쟁하는 것) 그리고 분업은 생산성의 향상과 함께, 모든 노동을 간단하게 만들어 숙련의 정도가 낮아도 되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결과적으로, 생산성은 높아졌지만 임금은 낮아질 수 있었다. ‘수요-공급’에 의해. 또 소생산자와 장인들은 대량 시장의 형성과 신용 재정에 있어서 대규모 산업에 의해 점점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또 산업과 상업의 관계에서 상업이 산업을 진두지휘하는 형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실제로는 개인과 소기업과 외주 노동자와 삯일꾼들이 고도로 효율적인 생산 시스템에 통합되는, 점점 더 복잡하고 세부적으로 전문화된 노동 분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수많은 소기업들은 보다 큰 조직 형태의 하도급 단위에 불과한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본가-생산자나 원격조종 상인들에게 매여 있는, 도제적 노동 시스템에서 활동하는 존재였다. (233)
제2제정에서는 생산과 판매의 격리가 점점 커지며 권력 관계가 점진적으로 뒤집혀 파리 산업의 많은 부분이 점점 더 상업의 지시에 복종하는 꼭두각시의 처지가 된 것이 특징이었다. (...) 전형적으로 하도급 조직망, 즉 주문 생산이나 삯일에 의한, 혹은 외주에 의한 생산 조직망의 축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하여 자율성이 점점 강해진 상인 계급은 직공과 수공업 노동자를 상인 자본의 지배 아래 포섭하는 공식적인 중개자가 되었다. (238)
소생산자들은 한때 자부심 있고 독립적인 수공업 노동자와 장인이었지만 점점 더 빚과 의무, 특정한 지시와 통제된 공급의 그물 속에 갇힌 존재가 되었다. 그들은 어디로 발전해나갈지 자기들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전체 생산 시스템 속에서 세부 작업을 하는 노동자의 지위를 강요당했다. (241)
전통 한지를 만드는 ‘장인’ -문화재 전수자와 모닝글로리 노동자를 비교해보라!
제2제정기에는 노동시장에 대한 수공업 노동자의 장악력이 점점 줄었다. 또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탁월하게 묘사하는 과정인 기술의 재규정, 즉 생산과정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노동의 사회적 분화가 진행되면서 생산이 기계와 공장제 생산으로 넘어가는 현상도 일어났다. 일부 산업에서는 수공업 기술이 배제되고 세분화된 분업 체제에서 요구되는 전문화된 기술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 저품질 대량 생산 시스템에서의 탈기술화 경향과 쉽게 복제될 수 있는 기술을 사용하는 쪽으로의 이동이 대세였다. 기술과 조직에서의 변화를 감안할 때, 기술 없는 이주민이나 여성을 작업장에 들여놓기가 쉬워질수록 기술자와 비기술자 사이의 경계선은 점점 더 흐려졌다. (.....) 1870년의 노동시장의 성격이 1848년의 것에 비해 경쟁적 개인주의가 훨씬 더 강해졌다는 데 동의한다. (254)
결국 그 어떤 정치적 탄압보다도 그들의 힘을 잠식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은 노동 과정의 변화였다. 추상적 노동의 조건이 변화함에 따라 수공업 노동자들이 제공할 수 있는 구체적 노동의 중요성이 감소했다. 하지만 새로운 노동 배치도 속에서도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활용할 기회는 여전히 충분했다. 장인과 노동자 사이의 경계선이 대개 아주 엉성한 것인 한,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상향 이동은 여전히 가능했다. 그들 자신의 노동 시스템이 가진 위계적 조직 역시 세밀하고 사회적인 노동 분업 내에서 감독이나 심장, 하도급자로 투입될 기회를 주었다. 기술과 교육, 적응능력 덕분에 그들은 새로운 직종이 만들어질 때 그 분야를 장악하고 새로운 기술을 독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수공업 노동자로서의 지위를 잃고 1871년 이후 노조사회주의의 기반이 되는 “노동 귀족”의 핵심이 되었다. (.....) 그것이 대표하는 이념은 수공업 전통에서 나오는 상호부조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산업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노동조합 의식으로 바뀌었다. (255-257)
여기서 우리는 ‘노동조합’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관련 책 진짜 많은데, 특히 민주노총 쪽에서 나온 책이 많은데, 읽지도 않고 무지를 들어내며 세미나때 나불대기만 했다. -_-; 공부하자! )
당시 노동자들은 ‘중앙집중적인 국가 통제보다는 생산조합이나 자율 관리, 혹은 상호부조의 형태를 기대했’고 ‘대부분의 수공업 노동자들이 1848년에 노동을 재조직하고 생산의 사회적 관계를 개혁하여 앞으로 올 몇 십 년 동안 그들 자신의 사회적 진보를 위한 무대를 마련하려는 자신들의 노력을 지지해줄 사회주의 공화국의 창설’을 기대했다. (227)
산업의 동일 직종 또는 동일 분야에서 노동자들의 결합은 상당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널리 퍼져있는 운동으로서 노동조합주의는 자본주의적 임금노동의 성장의 산물이다. 초기 노동조합은 보통 파괴적 조직으로 간주되었으며, 국가의 탄압도 빈번하였다(프랑스에서는 1884년까지, 독일에서는 1890년까지 불법이었다). 법의 방치 상태는 폭동적 형태의 사회적 저항과 결합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초기 영국 노동쟁의의 급진주의에 의해서 강한 영향을 받아 노동조합을 아주 상세하게 분석했다. 엥겔스는 《노동계급의 상황》의 한 장을 "노동운동"에 할애했으며 (주로 랭카셔 목화공장 노동자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리고 또한 석탄광부들의 노동조합주의에 대해서 논했다.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을 영국의 조합 투쟁에 대한 열정적 평가로 끝맺었다. 그리고 점점 더 확대되는 노동자들의 연합을 가져오는 지역적 결합에 대한 견해는 《공산당 선언》에서 반복되었다. 이러한 초기 저작들은 중요한 세 가지 논의를 전개 시켰다. 첫째, 노동조합은 자본주의적 산업의 자연스런 결과물이다. 즉 노동자들은 임금 인하나 기계에 의한 노동의 대체에 대항하는 방어책으로서 결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 조합은(푸루동이나 뒤에 라살레가 주장한 것처럼)경제적으로 비효과적이지 않다. 즉 조합은 고용주들이 노동력의 가격을 그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낮추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조합은 그 수준 위로 임금을 올릴 수 없고, 그들의 방어력 조차 자본의 집중과 순환되는 경제위기에 의해서 마멸된다(마르크스, 《임금노동과 자본》). 셋째, 그러므로 방어적 경제활동의 제한된 효력으로 인해서 노동자들은 더욱 더 폭넓은 계급적 기반 위에 점증적으로 조직되며, 정치적 요구를 제기하고 궁극적으로는 혁명적 계급투쟁에 종사하게 된다(인용된 영국의 예들은 목화 노동자들의 10시간 노동 운동, 인민헌장 운동, 그리고 1845년의 전국노동조합연합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 외의 노동조합 경험은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계급의식을 확대시켰다. 즉 "전쟁의 학교로서 조합을 능가할 만한 것은 없다"(엥겔스, 앞에서 인용한 책).
그러나 영국의 대규모 운동은 곧 붕괴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서신 왕래에서 자신들의 환멸을 토로하였다. 즉 조합은 노동자귀족의 보호처가 되었으며, 조합지도자들은 시민계급 정치가들에 의해서 타락했으며 전체 노동자계급은 식민지 착취의 열매로 매수되었다. 그러나 1860년대 마르크스는 제1인터내셔날에서 영국의 주요 조합지도자들과 협력하였는 데, 그들의 참여가 제1인터내셔날의 성공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는 《가치, 가격 그리고 이윤》에서, 그리고 다음해 제네바 회의를 위한 결의안 초고에서 조합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확대하도록 촉구하였다. 비록 그러한 측면에서의 기대는 곧 실망스런 결과로 나타났으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문제에 대한 어떠한 논의도 행하지 않고 있는 고타강령을 비판하면서 (엥겔스가 베벨에게 보낸 편지, 1875년 3월 18일-28일) 노동조합은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계급적 조직"이었다고 여전히 주장할 수 있었다.
1850년대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경험과 저작에는, 합법적이면서 안전한 제도로서의 조합관과 보다 더 급진적 잠재력과 그 실천이라는 전망 사이에 긴장이 존재하고 있다. 놀랍게도 이 긴장은 결코 체계적으로나 이론적으로 대립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본론》은 노동조합에 관해서는 매우 부분적 언급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비록 노동시간을 제한하려는 정치투쟁이 다소 자세하게 거론되고는 있지만).
나중에 노동조합주의에 대한 관점은 크게 4가지로 분류된다. 특히 전미노동조합연맹(AFL)과 관련되어 있지만, 또 영국 조합주의의 성격이기도 한, "순수하고 단순한" 노동조합주의는 알게 모르게, 그리고 명백하게 조합의 목적과 방법의 골격으로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수용한다. 그것은 1890년대에 유럽에서 형성된 가톨릭 노동조합에도 적용된다. 무정부주의적인 생디칼리즘적 노동조합주의는 매우 혁명적이었으며, 투쟁적 계급의식으로 무장된 조합을 자본주의 전복을 위해서 필요하고도 충분한 토대라고 보았다(→생디칼리즘). 실제로 점점 개량주의로 빠져들어간 제2인터내셔날의 지배적 입장은,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은 서로 보완적이지만 뚜렷이 구별되는 자신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유럽의 많은 곳에서는 전국적 조합이 사회-민주적 지도 아래 생겼으며, 20세기로 접어든 뒤 그들은 대부분 자율성을 확립하였다. 마지막으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이 있다. 예를 들면 룩셈부르크는 노동조합 활동을 "시지프스의 노동"으로 보았다. 즉 관료적 관리에 의해서 지배되는 조합은 고용이라는 좁은 문제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이다."노동조합의식"이라는 레닌의 개념은 이와 비슷한 경향이 있다. 양자는 조합 안에서 혁명적 전략을 위해서 싸우며, 경제와 정치 사이의 구분을 타파하고, 사회민주당이 이 조정을 지도해야 할 필요성을 주장하였다(→파업). (다중생활도서관 노동자의 책 <맑스주의사상사전>의 <노동조합> 항목 중에서
http://www.laborsbook.org/dic/view.php?dic_part=dic01&idx=17&keyword=노동조합)
이러한 상황에서 오스망은 파리에서 노동계급을 없애려고 일자리를 줄이려는 정책(산업을 교외로)을 쓰면서 노동자들의 정치권력을 제거하려고 노력했다. 또 토지 가격과 임대료 때문에 도심에서 견딜 수 있는 일부 산업을 제외하고는 산업들이 모두 교외로 이동했다. 도심에 남아있던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높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어 3시간 이상 걸리는 출퇴근을 감수해야 했고, 그들의 임금은 최저 생계비 아래였다. (맑스의 <자본론>에서 나타난 당시 영국 노동계급의 비참함이나, <전태일 평전>에서 나타난 70년대 남한 노동계급의 비참함! 당시 ‘숙련노동자’였던 제단공 전태일이 비숙련 ‘시다’들이 딱해서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물론 맑스 시대에 공장주들이 ‘공장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나 70년대 ‘근로기준법’이 유명무실이었던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맑스 시대 영국에서는 노동자 계급의 재생산을 우려한 정부에서 공장법 관리들을 파견하고, 노동자 계급 생활상태의 심각성이 어느 정도 부각된 반면, 우리는 ‘전태일’의 분신에 의해서야 이러한 악조건이 환기된다.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라
파리에서는 삯일로 유지되는 직업이 있는데, 그 일을 20년간 하다보면 노동자는 불구가 되고 탈진해 버린다. 다행히 그때까지 목숨이 부지된다면 말이다.(234))
70년대 남한의 ‘도시화’과 농촌의 억압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듯이, 파리도 마찬가지였다.
파리의 노동예비군은 대부분이 지방 출신이었다. 이주 움직임은 부분적으로는 1850년대 농촌의 불황에 원인이 있다. 또 그 불황은 부분적으로는 농촌 산업을 와해시키고 지역의 자족성을 무너뜨리며 프랑스 농업의 근대화 속도를 늦춘 공간관계의 변화 때문에 유발되었다. (261)
17. The Geopolitics of Urban Transformation & 18. The Building of the Basilica of Sacre-Coeur
결국 결론-결말에 가서 이 책의 집필(구성) 의도가 드러난다.(또는 독자는 결론-결말을 통해 이 책의 주된 집필-구성 의도를 추론한다) 이 책은 프랑스의 1848년 2월 혁명부터 1871년 파리 코뮌까지의 시기를 다룬다. 서론에서 이 책이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파리의 공간적 구조의 변모에 따른 산업 구조, 노동 방식, 거주민들의 (근본적/구조적)변모일 터이고, 이러한 변화는 ‘근대성’을 함축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진짜 의도(?)는 1848혁명으로 인한 제2제정(오스망)의 개혁 시도와 결국 이의 좌절로 인한 파리 코뮌의 발발까지의 역사적 행보이다. 그 와중에 하비의 특장이라면 ‘지정학적’인 관심과 문화-상징적 기술물들에 대한 관심으로 미시사적인 접근도 함께 하고 있다는 것.
마르크스가 프랑스 혁명사 3부작을 통해 동시대 프랑스의 혁명적 성과들에 대해 논평을 하며 운동을 끌어간 것과 같은 배치.
<1848년에서 1850년까지의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프랑스 내전>
각기 2월 혁명 직후, 제2제정이 시작되는 때, 그리고 마침내 파리 꼬뮌을 다루고 있는 이 세 역작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17과 18장은 17장이 앞선 2부의 결론과 같은 형태로 ‘요약’이라면 18장은 이제 이 책을 새롭게 읽게 만드는 새로운 시작으로서의 임무를 띠는 ‘파리 꼬뮌’에로의 초대이다. 지금까지 하비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설명을 한 것들이 모두, ‘파리 꼬뮌’이라는 역사의 결절점으로 모여든다.
1860년대에 파리에서 전개되어 코뮌을 예고한 투쟁은 영웅적이라 할 만한 수준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공동체와 계급 개념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또 계급 연대와 적대감의 진정한 기반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자신들의 요구를 강제하고 세력을 동원할 수 있는 정치적, 경제적, 조직적, 물리적 공간을 찾아내기 위한 투쟁이었다. 이런 모든 의미에서 그것은 파리의 정치와 문화뿐 아니라 파리 경제를 변형시키기 위한 지정학적 투쟁이었다. (422)
잘 나가던, 자본의 흐름에 최대한 따라가던 오스망과 제국은, 자본과 서서히 그 연결이 부식되어 갔다. ‘정부’주도식 파리는 부르주아와 노동자 둘 다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이들의 불만을 완화시키기 위한 대책들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발생한 파리 꼬뮌은 중앙집중론자와 탈집중론자들로 분열되고 공화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분열로 일관성이 결여되고 내적 갈등으로 점철되었다.
프로이센과의 전쟁으로 패퇴하던 프랑스의 국제 정치적 상황과 노동자들의 불만이 터져 나와 대규모 봉기로 이어지자, 부르주아들은 “내부의 적”에 대한 두려움에 프로이센에게 항복하는 것을 선택했고, 그 와중에 시민에게 발포하려던 프랑스의 군대 장군에게 거부하던 병사들과 함께 프랑스 시민은 그 장군을 총살하는 일이 발생한다. 1871년 3월 18일. 파리 꼬뮌의 탄생이다. 이에 대해 당시 프랑스 대통령 티에르는 파리에서 군대와 정부 요원들을 완전히 철수시키며 파리의 침공과 탈환을 준비했다.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는 파리를 진압하는데 필요한 프랑스 군대의 재조직을 허락하고, 대규모 프로이센 군대를 파리 주위에 주둔시킨다. 그들은 파리 코뮌과 프랑스 군대의 자국민 학살을 침묵 속에서 바라본다.
파리 시민들은 철수된 행정 기관을 모두 접수하고 빠르게 이를 다시 운영하며 3월 26일 선거를 치르고, 3월 28일 파리 코뮌을 선언한다. 부르주아들은 당혹해 했고, 상당수가 파리를 ‘탈출’했다. 파리는 프랑스 군대에 의해 ‘진압’당하며 2만에서 3만 명 사이의 코뮌 가담자들이 그 과정에서 죽고 또 처형당했다. (역사는 끊임없이 차이와 함께 반복된다. 이는 인식 주체의 한계 때문에 '반복‘으로 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행위 주체들의 공통점들도 간과할 수는 없다. 프랑스 꼬뮌으로부터 100년후, 1980년 광주 ’꼬뮌‘. 마찬가지로 부르주아들은 침묵했고 광주를 ’탈출‘했다. 파리 꼬뮌에 대한 연구는 은연중에 프랑스 학계에서 배척당하고, 파리 꼬뮌을 연구주제로 선택하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