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싸나이들과 범생이들의 대결에선 모두가 패자다!
학교와 계급재생산 - 반학교문화, 일상, 저항
폴 윌리스 지음, 김찬호 외 옮김 / 이매진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폴 윌리스는 교육학 전공자들에게는 꽤 잘 알려진 학자이고, 국내에도 몇 차례에 걸쳐 청소년 문제나 교육 문제를 다룬 국제 심포지엄에 다녀간 적이 있다. 예전에 모 신문에서 인터뷰도 진행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책을 교재로 세미나를 진행해본 경험이 있는 분들도 꽤 될 거라고 생각한다. 본래 원저는 "Learning to Labour"로 우리 말로 번역해보자면 "노동자로 학습하기" 또는 "노동계급으로 교육하기" 정도가 될 듯 하다. 원저명도 그렇지만 그것을 좀더 쉽게 풀어쓴 국내판 번역명이 책의 내용을 좀더 정확하게 일러주고 있기는 한데 다소 미흡한 부분도 있다.

책의 내용은 소개에도 잘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영국의 노동계급이 주로 다니는 해머타운의 공립학교 문제아 남자 아이 12명을 질적연구방법을 이용해 장기간에 걸쳐 인터뷰하고 관찰해본 결과를 논문으로 정리한 것이다. 국내에도 이런 연구방법과 주제를 응용해 진행된 연구가 상당수 있다. 예를 들어 김고연주의 "길을 묻는 아이들 - 원조교제와 청소녀(책세상문고 우리시대 092)" 같은 연구 역시 심층면접이란 방식을 이용해 진행된 것이다. 폴 윌리스의 "학교와 계급재생산"은 연구방식이란 점에 주목해서 볼 수도 있고, 말 그대로 '학교'라는 장소에서 어떻게 '계급재생산'이 일어나는지, 이른바 문제아들은 왜 문제아가 되는지를 미시적이면서 동시에 사회학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심층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학교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에게는 매우 중요하고, 재미있는 책이다.

윌리스가 다루고 있는 연구 현장이 1970년대 중후반의 영국사회란 점에서 이것을 그대로 한국사회에 적용시키는 것에는 문제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연구가 보여주는 통찰이 한국사회의 계급재생산 구조와 판이하게 다르다고 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최근 한국사회에서 빚어지고 있는 갈등의 중요한 부분들이 계급고착화 현상, 다시 말해 교육을 통한 계급상승의 길이 닫히고 있다는 점에서 초래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보면 말이다. "학교와 계급재생산"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제1부 문화기술지'에서는 문화기술지(ethnography)라는 낯선 연구방식이 무엇인지, 자신이 어떻게 연구했는지를 실제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제2부에서는 이에 관한 분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교육선진국처럼 받아들여지는 영국의 교육체계가 공립과 사립으로 이원화되어 있으며, 영국사회가 오랜 세월 굳어진 계급사회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평준화 교육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최근까지도 치열한 논쟁들이 전개되고 있는데, 그 핵심은 내 돈 가지고, 내 자식을 내가 원하는 대로 특수하고, 특별한, 좀더 수준높은 교육서비스를 받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만약 이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 아이를 한국이 아닌 교육선진국에 보내 교육받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당연히 영국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다. 피터 위어 감독의 영화 "죽은 시인들의 사회"에 등장하는 것과 같이 기숙사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비슷한 수준의 사회적 지위와 부를 누리는 일부 계급의 자녀들이 입학하는 사립학교가 있고, 노동계급의 자녀들이 지역에서 통학하며 다니는 공립학교가 있다.

영국 사회에서 계급격차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완고해서 옥스포드나 케임브리지 같은 대학에 노동계급 출신이 진학하는 것이 제도적으로 막혀있지는 않지만 해마다 상류계급의 대학문화에 적응하지 못한 노동계급 출신 학생이 자살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미국의 대학문화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진 않아서 미국 대학 중에서도 일년 학비가 3만 달러에 달하는 귀족학교로 명성이 높은 예일대는 높은 학비 못지 않게 학교내에 존재하는 비밀엘리트 집단인 "Skull and Bones"로 유명하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맞붙은 부시나 케리 모두 이 클럽 출신이다.) 그런가 하면 영국의 노동계급의 자부심 또한 매우 강해서 그들만의 독특한 노동계급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어쨌든 폴 윌리스는 노동계급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 현장의 문제아들, 이른바 "싸나이들"이란 작은 그룹의 악동들을 집중적으로 인터뷰하고 관찰하여 계급재생산 구조를 분석한다. 어째서 이들 어린 "싸나이들"은 기존의 권위에 대해, 특히 교사에게 반항하고, 교사의 훈육을 따르는 순응적인 아이들을 못 살게 굴고, 거부하는 것일까? 왜 "싸나이들"은 여성을 비하하고,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일가? 왜 "싸나이들"은 인종차별주의를 드러내며 다른 인종의 아이들을 혐오하는 태도를 보일까? 이들이 주로 기존의 권위(교사)에 도전하는 방식은 한국의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주로 개기고, 거짓말하고, 까불고, 익살을 떨며 그것을 즐긴다. 끼리 문화를 만들어 범생이들을 깔보고 괴롭히며, 그들을 폄하한다.
 
윌리스의 분석을 거칠게 인용해보자면 이것이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문화가 지배하는 노동현장의 분위기가 그대로 이들의 문화로 전유된 탓이라는 것이다. 가끔 미디어는 놀라운 모범생 신화를 만들어 내고, 널리 유포한다. 부모세대의 낮은 생활 수준에도 불구하고, 서울대에 입학한 입지전적인 청소년을 등장시켜서 그렇지 않은 많은 청소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거봐! 공부하니까, 되잖아. 넌 왜 이렇게 못하는 거야. 가난해서 공부하기 어렵다는 건 핑계일 뿐이야."라고... 통계와 과학적 입증을 즐기는 기자들도 이때만큼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지방보다는 서울, 서울에서도 강남 출신의 부유한 부모를 둔 자녀들의 서울 명문대 입학 비율이 높으며, 대한민국 사회의 계급재생산 구조가 완성단계에 이르러 이들을 통해 부의 세습과 계급 세습이 고착화되어 가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는 사실은 은폐되는 대신 평준화 교육으로 인해 학생들이 지닌 다양한 자질이나 개성이 평준화되는 문제로 치부된다. 한국사회에서 이토록 맹렬한 과외열풍, 논술열풍이 부는 이유는 계급상승의 막차라도 올라타고 싶은 부모 세대의 욕구가 상승기류를 타고 활활 타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중산층 부모의 맹렬한 욕구를 바라보면서 더 높은 상위계급에 속한 부모들은 이들의 다급한 추적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할 충분한 용의가 있다. 그런데 교육정책이 발목을 잡고 있다.

그들만의 끼리문화를 만들어 낸 "싸나이들"은 학교와 교사의 훈육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미래가 궤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간파한다. "싸나이들"은 산타클로즈를 믿지 않으며 교육이 신분상승을 이루어줄 수 없다는 것을 깨우치고 있을 만큼 영악하다. 그들은 세상의 이면을 속속들이 모두 깨우쳤다고 거만하게 웃으며 학교에 있는 동안 자신들의 즐거움과 약한 사냥감을 찾아 즐긴다. 이들이 여성에 대해 비하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은 이들이 앞으로 접하게 될 현장이 육체의 강인함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에 뒤처지는 상대적으로 약한 여성(실제 사회에서 여성 노동이 취급받는 현실을 보라)에 대해 우월감을 만끽한다. 이주노동자들의 값싼 노동력은 이들의 미래 일자리를 빼앗는 존재들이다. 만약 학교가 학생들에게 미래의 희망을 이루어 줄 수 없다는 사실이 간파되었을 때, 교사는 무엇으로 학생들을 통제할 수 있을까?

조주은의 "현대가족 이야기(퍼슨웹)"는 대기업 남성노동자 중심의 독특한 사회를 이루고 있는 현대공장의 가족 이야기를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현대가족 사회의 독특한 문화는 영국 노동계급의 가족문화와 일견 흡사한 측면을 보여주는데, 남성의 사회노동을 여성의 가사노동보다 우월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나, 여성의 사회활동을 가볍게 바라보는 시각 등이 그렇다. 이와 같은 남성중심 노동사회의 신입구성원으로 편성될 것을 일찌감치 간파한 "싸나이들"은 미리부터 그와 같은 과정들을 학습하고, 그들의 문화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폴 윌리스는 이와 같은 "싸나이들"의 간파과정이 사실은 국가와 사회구조로부터 받는 이중의 교란이라고 역설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노동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습득하고, 타협하는 과정이 재생산된다는 것이다. 윌리스의 통찰을 한국의 "싸나이들"에 빗대어 보면 한국의 싸나이들은 부모문화(한국사회에서는 남성중심의 지배문화)와 갈등하고 순응하면서 냉소적인 현실주의를 내면화한다.

한편으로는 세상의 부조리함을 탓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론 힘에 대한 갈망과 순응 속에서 '현실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패배주의로 나타난다. 이것이 이라크 파병을 묵인하고, 비정규직 노동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게 한다. 스스로도 사회적 약자이면서 자신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적응했으므로 자신보다 더 약자에게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고, 때로 그 자신이 강자의 즐거움을 맛보고자 하는 것이다. 교육에 적응하는 것도, 교육에 저항하는 것도 결국 체제를 강화하는 길이라고 했을 때, 디오게네스처럼 아예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살아가지 않는 한 그 앞에 선 우리들의 입장은 난감해질 수밖에 없다. 폴 윌리스도 그런 우리들의 입장을 간파했는지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말로 마지막을 맺고 있다.

"Whistle down the wind or whistle in the dark"

* 폴 윌리스는 이후 해머타운 학교의 "싸나이들"과 범생이들의 삶의 행로를 지속적으로 살핀 모양이다. "싸나이들"이 평생동안 반항으로 일관할 수는 없었을 텐데, 그 가운데 한 명은 자신에게 맞는 직장을 찾아 이후 그 사회에 순응하게 되었고, 범생이 가운데 한 명은 사회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반항아가 되었다고 전한다. 사실 이와 같은 계급재생산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지만 어쩌면 그 해답은 의외로 쉬운 곳에서 찾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제2차세계대전 이후 영국사회가 노동계급 젊은이들에게 베풀었던 대학교육의 혜택, 혹은 성인 교육이 어떤 성과를 가져왔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시기적으로 이 시대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영국 문화연구는 그 자체로 좋은 본보기이다. 영국 문화연구의 주요 연구자들이 노동계급 출신으로 전후 영국에서 행해진 성인교육의 혜택을 받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직 다 읽지 못했지만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이매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빈곤계층에게 가장 필요한 교육은 인문학이라는 주장을 담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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