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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 - 2004년 제28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김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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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을 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바라본 하늘엔 별 한 점 없고 유흥가의 휘황한 불빛이 바닷물에 투영되어 휘황하게 일렁이는 밤, 바다는 우주가 되고 바다 위에 떠있는 배들은 행성으로, 통통배가 비추는 불빛들은 이름없이 스러져갔을 혜성들의 몇억년 전 빛처럼 느껴진다.

뭔가에 이끌리듯 하염없이 걸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일상은 저 멀리 사라지고 슬픔도 외로움도 아닌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관념으로는 그려지지 않는 물기같은 같은 것이 밀물이 되어 바닷물이 차오르듯 가슴속에 차오르는 걸.

'밤을 지나다'는 평화로운 일상에서 어느날 갑자기 낯선 곳에 내팽개쳐진 듯 아스라이 슬프고, 낮잠에서 깨어나 낯설움에 놀라 울어대는 어린애 처럼 서러운 그런 마음의 작은 움직임이 너무나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어 여성작가가 쓴 듯이 느껴진다

주인공은 자신이 낯선 행성에 잘못 불시착하였다고 느끼며 혜성처럼 스쳐 지나가는 낯선 남자에게 이끌린다. 낯선 남자는 낯선 곳에 내던져진 자신과 소통할 수 있은 동질감을 지녔을 가능성이기도 한 것 같다. 밤을 새우고 낯선 남자를 다시는 못볼까봐 두려운 마음에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와 떠나가는 남자를 발견하고 콘도 직원에게서 남자가 체크아웃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서글픈 위안이 여자의 몸을 훑고 지나간 것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별의 잔광이 수억 년 동안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허망하게 자취를 감추어버린 지난 밤이 누군가의 어두운 마음속에라도 머무리라는 안도감으로 바뀐 것이며 낯선 남자는 자신과 소통할 수 있는 희망으로 여전히 남는 것이다. 그것은 견고한 일상을 견뎌내는, 몸속에 차오르는 수위를 견뎌내는 그리움의 지향점이 될 것같다.

가끔식 일상이 거대한 기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제각각의 자리에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완강함에 언어가 다른 별에서 엉뚱한 곳으로 잘못 불시착하여 그들과는 전혀 소통하지 못할 것 처럼 느껴지는 암담한 날이 있다. 그들속에서 우연히 소통이 될 것 같은 이를 만났을 때의 반가움이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알아줄 것 같은 느낌이 구효서의 '밤을 지나다'에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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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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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읽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의미가 조금씩 다르게 와닿는 것 같다. 처음은 인터넷채팅처럼 가볍고 가볍게 읽으면서 '통...무슨 소린지..'하는 Tv CF를 떠올리기도 하면서 재미있어 했는데 대학시절 첫사랑 얘기부터 무슨 숨겨놓은 보따리를 풀듯이 진지한 이야기를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공격적으로 마구 풀어 놓는 바람에 가슴 깊이 숨겨져있던 기억이 판도라 상자속에서 갑자기 뛰쳐나와 추억에 젖게 하기도 하고 IMF를 전후한 직장생활 4년여의 이야기에서는 살이의 살벌함이, 그래도 살아가야 함이 눈물겹기조차 했다.

마흔을 앞에 두고 이루어놓은 것 없다고 자책하면서 헛되이 보낸 세월때문에.... 낮잠에서 조차 감짝 놀라 깨어나곤 하는 프로의식에 세뇌되어진 나같은 사람에게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뜬금없이 나타나 유니크한 어조로 진리를 설파하는 재림예수로 느껴져 가벼운 어조로 쓰여졌으면서도 여기저기에 심어놓은 감동의 복병때문에 결코 가벼이 읽을 수 없는 책이다.

더군다나 거창하게 청년실업문제를 논하지 않고도 자본주의 세계권력의 산물이 여기 저기 체인점으로 연결되어 있고 젊은이들이 거기서 생업이 아닌 아르바이트로 연명 해가고 있는 현시점에선 '치기 힘든 공은 치지말고 받기 힘든 공은 받지 말라'는 작가 나름의 철학을 한 번 더 음미해 보고 싶어진다.

남의 이목때문에, 살아오는 동안에 세상사람들에게, 혹은 정치권의 이데올로기에 세뇌되어 진정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지 못하고 프로가 될려고 했던 사람이나 프로가 되지 못해 열패감에 젖어 살아왔던 대다수의 소시민들에겐 자신의 진정한 마음을 비춰볼 거울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작가가 거의 전설처럼 그리고 있는 - 해가 뜨면 일을 시작하고, 아무도 서두르지 않고, 때가 되면 밥을 먹고, 해가 지면 잠을 자는, 그것도 잠을 쿨쿨 자고, 개들만 뛰어다니는- 삼천포에 아직도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 곳 삼천포에도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복음이 전해 지지 않아 뼈빠지게 일해서 겨우겨우 먹고 살고, 프로페셔널이 되지 못해 밤을 하얗게 세운 이시대의 순례자가 살고 있음을.....그래도 살아가야 되고 밥을 먹어야 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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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소가 끄는 수레 - 창비소설집
박범신 지음 / 창비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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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의 소설 연작집 <흰 소가 끄는 수레>를 읽고 나서 책표지 안쪽에서 웃고 있는 그의 사진을 몇번이고 펼쳐보았다. 소탈하게 웃고 있는 그의 어디에 그런 야성과 신열이 존재했었나, 아니 통렬한 산화를 꿈꾸던 그가 이제 한 촌노의 얼굴로 새들의 울음소리의 다양성과 그것의 의미나, 씨뿌리고 김매는 농사의 이치를 통해서 자연과의 친화력을 보여주는, 여성화자로 오해할 정도로 온화하고 편안한 아버지의 목소리를 감춰두고 있었는가.

무지의 탓이었지만 고등학교 때 읽은 <풀잎처럼 눕다>란 소설을 본 후 그를 여지없이 대중작가로 분류하고 깊이 읽지 않았다. 80년대 중반에 대학을 다닌 386세대였던 나는 <그해 내린 눈 지금 어디에>에서 작가가 말한 것처럼 순수가 아니면 참여 뿐이었던 시대를 살았다. 아니 세 부류가 있었다. 이청준이나 이문열처럼 지적이고 관념적인 작가, 김지하나 박노해, 황석영 같은 참여 작가, 박범신처럼 신문연재소설을 쓰던, 시대의 아픔과는 상관없이 사는 듯하던 대중작가. 그는 분명 대중작가였다. 그때는 인간주의 이데올로기를 가졌든, 삼류 연애소설을 쓰든 꼭두각시 언론에 소설을 연재하던 베스트셀러 작가는 대중작가란 이름으로 폄하됐던 때였다. 이데올로기의 칼을 든 사람들 뿐만 아니라 우리 세대 역시 무분별한 편가르기에 너무나 열중해 있어서 이쪽 아니면 저쪽의 선택을 강요했던 시대였다.

무분별한 이데올로기에 휩쓸려 있었지만 소설을 좋아하던 나는 박범신의 <숲은 잠들지 않는다>란 신문연재소설을 아파하고 공감하며 읽었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가수가 부른 노래 '....어둠 속에 앉아 있으면....' 지금은 그 가사는 잊어버렸지만 어둠은 편안하게 자신을 안아주고 덮어준다는 그런 내용으로 그것은 20대 내내 어둠을 정의한 명언이었다. 하지만 관념은 마음 속 감성을 읽어내지 못하고 '노동자', '노동운동' 등의 현실이 될 수 없었던 구호만이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라 메마른 토론으로 밤을 새우곤 했다.

이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뒤늦게 심심풀이 삼아 지나간 유물같아 보이던 <흰 소가 끄는 수레>를 읽고 놀라움과 소용돌이 쳐오는 감동을 주체할 수 없었다. 작가로서의 양심과 어느 편에도 설 수 없었던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작가의 고통이 선연히 느껴져왔고, 열정에 들떠 부랑하는 자식들에게 가지는 따뜻하고 안스러운 아버지로서의 시선, 생의 짐을 진 자로서의 나름의 고독을 헤쳐온 아내에게 가지는 애틋한 사랑은 부랑과 신열에 들떠 20여년간 청년처럼 조포하게 달려온 그였기에 더욱 크게 보였다. 젊은날의 격정을 추스르며 일상적인 자아에 삶의 깊이를 획득해내는 장면에서는 차마 다 읽지 못하고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그가 겪었을 혼란과 깨달음과 삶에의 통찰이 나의 치부를, 아집을, 무지를 관통해 와 당장 고해성사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휘황한 광휘의 허공으로 형형색색 날아오르는 수천의 나비떼들,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르는 그 수 많은 나비중에서 어떤 나비를 어떤 포충망에 담아 원고지 네모난 우물에 가두느냐'를 고민했을 광활한 상상력과 격정, 부랑하는 자식들을 안스럽게 지켜보는 것 외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버지로서의 안타까움이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에야 비로소, 가려졌던 오솔길이 보이듯이 선명하게 보여 너무 부끄럽고 놀랍고 가슴 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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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1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1
키류 미사오 지음, 이정환 옮김 / 서울문화사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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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살박이 아들은 '합체'란 단어를 자주 쓰고 좋아한다.

'엄마, 가이거(사자왕 가오가이거의 레드건과 블루건) 합체하면 어떻게 돼?'
'응, 멋지고 큰 합체 로보트가 되는 거야'
'엄마, 밥하고 국물하고 김치하고 합체하면 무슨 맛이야?'
'응, 짬뽕맛이 되는 거야'
'엄마, 아가는 엄마 아빠가 합체해서 만들어진 거지?'

이렇게 물었을 때 대답이 궁색해졌다. 하지만 다섯살박이 아들의 눈에는 우리가 민망스러워하는 내용이 아닌 다른 것이 보이리라 생각돼서 '응, 성현이도 그렇게 만들어진 거야'라고 대답했다.

왜 진부한 일상을 여기에 옮기냐 하면 '그림동화'를 바라보는 눈에 따라 내용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키류 미사오가 쓴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를 재미있게 읽었고 색다른 맛도 있었다. 하지만 왠지 개운찮고 우리와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됐다. 그것이 문화일보 리뷰에서 보여주는대로 '동화의 여러가지 요소 가운데서 잔혹성과 성적인 요소를 특히 부각시킨 책'이기 때문이다.

<백설공주>에서 성(性)은 권세를 누리기 위한, 또는 살아남기 위한 도구로 전락해 있으면서도 도구로 전락한 성에 대해 꺼리낌이 없다. 그리고 <파란수염>에서는 성이 서로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강자의 일방적이고 변태적인 성이 약자에게 강요되고 있다. 잔혹성과 성이 맞물려 너무나 일본적으로 변형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민족성을 가장 잘 그려내고 있는 작가라고 생각되는 김주영의 성의 묘사를 보면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외설 춘향전>에서 이도령과 성춘향이 서로를 희롱하는 모습은 성이 놀이처럼 느껴지며 <홍어>에서는 장중한 느낌마저 든다. 눈이 온 날 밤 들리는 그 소리는 너무나 범속한 일상이면서 너무나 인간적인 쾌락이 있어 작중 화자가 짜릿짜릿한 끌어당김으로 그 앞을 떠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한때 빨리 결혼해서 성에서 자유로와지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성에서 자유롭지 못함이 인생을 제대로 사는데 제약이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생각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성이 일상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결혼 전 보지 못한 세상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이 인생의 비밀을 푸는 유일한 패스워드일 수는 없다. 현대사회가 키류 미사오가 묘사한 것보다 더 잔혹하고 성적인지 모르지만 동화는 동화인채로 어린이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된다. 해상도가 높은 사진이 명작이 아니듯 인간 삶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낱낱이 파헤쳐 놓는 것이 훌륭한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림동화'를 원본 그대로 복원하는 것도 의미가 없지는 않지만 오랜 세월 어린이에게 명작동화로 살아남은 것은 인간살이의 여러가지 요소들을 단순화해서 독자 나름대로 살을 붙이고 옷을 입혀 재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았기 때문이라 본다. 백설공주의 아름다움과 일곱 난장이의 친숙함을 되돌려 주는 것이 댓가로 지불되는 도구로 전락한 성을 가르켜주는 것 보다 훨씬 아름답고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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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
서갑숙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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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3개월 된 갓난애와 네살박이 큰 애를 씻기고 옷 입히고, 밥 먹여서 애보는 집에 데려다주고 출근하면 얼굴은 땀으로 얼룩져 있고 팔 다리 힘이 쭉 빠진다. 하루하루 전쟁같은 나날 속에서 본 서갑숙의 <나는 때론 포로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는 현실이 아닌 소설처럼 읽혀진다.

TV 뉴스에서 검찰에서 책을 수사했다고 하고 사무실에서도 화제인 데다 사춘기 시절 <초록빛 모자>를 보고 서갑숙에게 혹했던 옛 기억까지 겹쳐 굉장한 호기심으로 다가간 책이었기에 더 실망스러웠다.

삶의 다양성을 염두에 두고도 그 글에는 사랑과 SEX만 있는 듯이 느껴진다. 육아, 부모부양, 경제력, 직장일이나 동료들간의 불화로 인한 스트레스 등 사랑으로부터 시작된 의무이면서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감수해야 하는,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무게이면서 한편으로 우리를 생활이라는 체바퀴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없었다. 서갑숙에게는 <초록빛 모자>의 주인공처럼 소녀의 사랑이 있을 뿐, 성인?, 아줌마의 생활이 없다.

또한 서갑숙은 솔직함을 무기로 내세워 글을 썼지만 스스로 유교적 윤리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은연 중에 보여주고 있다.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관계맺었던 사람 모두를 사랑으로 회상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SEX는 무죄라는 항간의 윤리의식으로 스스로에게 사랑의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이 일치해야 된다는 생각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우리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구현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부부간의 사랑이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그것이 부끄럽고 떳떳치 못한 것이라서가 아니라 가장 예민한 프라이버시로 존중되어야 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에게 자신의 전위적인 SEX의 내용을 공개하여 여성 삶의 활력소가 되게 하고 싶다는 생각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다만, 이 책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수사한 검찰이나, TV 드라마 속의 불륜이나 삼각관계를 성의 한 지표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성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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