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임헌영 대담 / 한길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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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의 '대화'를 읽고 - 21세기와 20세기의 대화


‘연세대학원신문’이 1999년에 20세기를 보내고 21세기를 맞는 특집으로 마련한 ‘20세기 인문과학분야에 영향을 끼친 학자와 저작’에서 1위는 리영희였다. 그 이유는 ‘1970~80년대 한국 변혁운동의 중심이었고, 폭압적인 시대상황에 맞서 싸웠고, 70년대의 냉전주의적 사회분위기에 새로운 시각을 불어 놓은 학자’라는 점이다.
리영희 스스로 마지막 저서라고 밝힌 인생역정이 담긴 회고록 ‘대화’는 문학평론가 임헌영과 대화형식을 빌린 자서전이다. 고은 시인은 “눈물바람도 하고 통쾌하게 웃기도 하면서 읽어 내려간 이 책은 ‘우리시대 진실의 서(書)’ ”라면서 “해외여행때마다 늘 챙기던 ‘괴테와의 대화’ 대신 우리 형님의 ‘대화’를 꼭 갖고 다니겠다”고 말했다.

리영희를 통해 만나는 20세기의 젊은이와 21세기의 젊은이
‘대화’는 70~90년대 청년, 학생, 지식인들이 독재정권이 숨기고 왜곡한 진실을 찾아 나가는 그 시대의 고뇌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래서 ‘대화’는 리영희와 임헌영의 대화가 아니라 21세기와 20세기의 대화이고,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의 젊은이들과 20세기에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로 삼고 살았던 젊은이들의 고뇌와 대화이다. 리영희는 이 책을 통해서 한국현대사에 새겨진 진실찾기의 수난과 기쁨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70~90년대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들은 정신적, 지적, 사상적 영향으로 리영희의 저서를 지적하였다. 그로 인해 리영희는 수많은 재판의 증인으로 지정되어 증인대에 서야했다.
리영희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불의에 굽히지 않고 진리를 위해 청춘을 불사르며 살았던 젊은이들이 이제 우리 사회 곳곳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20세기의 젊은이들은 독재정권과 맞서 싸웠지만 지금은 그때와 시대가 다르다. 다른 시대적 경험을 한 세대들이 21세기에 함께 살고 있다. 리영희의 ‘대화’는 다른 시대적 경험을 한 세대들을 소통시켜줄 통로가 될 것이다. 진실을 찾기 위해서 온갖 고통을 겪어야 했던 과거와 오늘의 현실은 다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도 있지만 ‘역사가 복사된다’는 말은 아니다. 과거와 대화는 오늘의 삶의 지혜를 제시해주면서 역사를 새롭게 읽게 한다.
리영희는 분단 이후 한국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로 자리잡은 반공, 반북, 친미, 친일, 호핵(好核), 군비확대 등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민중을 계몽하면서 시민사회를 확대시켜온 실천적인 지식인이다. 70~80년대와 9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닌 세대들은 대부분 공통적으로 리영희의 날카로운 분석을 통하여 세계을 인식하면서 가치관을 확립했다고 볼 수 있다.
리영희는 청년,학생,지식인들에 의해 ‘사상의 은사’로 불렸다. 한편 그 반대편에 있는 세력들에게 리영희는 ‘의식화의 원흉’일 뿐이었다.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로 따르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리영희의 저술들이 인구에 회자될수록 리영희에 가해지는 핍박의 고삐가 더 강하게 조여졌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표적인 한국의 실천적 지식인 리영희에게 해직과 구속이라는 수난이 뒤따랐지만, 리영희는 그 고난의 길에서도 진리를 밝히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9번의 연행, 3차례 옥살이 등 '야만의 시대'를 살았지만, 그는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분단을 넘어서’, ‘새는 좌우로 난다’, ‘반세기의 신화’ 등 12권의 저서와 ‘8억인과의 대화’ 등 3권의 편역서를 냈다.

허구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을 부각할 경우 객관성을 상실할 수도 있으나, ‘사상의 은사’인 리영희의 영향에 대해 생동감 있게 전달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필자가 겪은 세차례의 계기를 말하고자 한다.
첫째, 대학입학시기이다. 1983년 대학에 입학하였을 때는 광주의 80년 5월을 겪으면서 이미 사춘기를 잃고 성장한 상태였다. 대학생활이 인생의 새출발이라고 산뜻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와 진리를 갈망하였지만, 귀가 막힌 시대였기 때문에 지적 방황과 갈등의 혼돈상태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꿰뚫어보지 못한 채 수동적인 삶을 받아들이는 자기 모순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을 접하였다. 특히 베트남전쟁에 대한 논문을 읽고 난 후 머리속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듯했다.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진리를 추구해야한다며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리영희의 논문을 집약한 것이 1994년에 두레출판사에서 발간한 ‘베트남전쟁’이다. 리영희는 ‘대화’에서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10년만에 나온 이 책에는 베트남에 대한 애정과 관심, 그리고 학문적 성취가 집약되어 있다”고 회고하고 있다.
두 번째, 대학졸업 후 사회운동을 시작하던 시기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인생의 전환을 가져온 글을 접한 것이다. 1988년에 ‘사회와 사상’ 창간호에 실린 리영희의 ‘남북한 전쟁능력 비교연구’이다. 이글은 당시 젊은이들이 ‘북한의 군사력 우위’라는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불신과 증오와 대결을 재생산하는 우리 사회의 실체를 분명히 인식할 수 있게 만들었다. 80년대후반부터 한반도 평화와 군축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적인 근거가 되었음은 당연하다.
리영희는 ‘대화’에서 이 논문에 대하여 “역대 군부독재정권과 그 권력기반인 광적인 각종 극우반공세력이 그들의 영구집권을 위해서, 북한의 군사적 우월성을 부당하게 과장하고 고의적으로 대북한 공포 불안 의식을 조성하던 시기에 그들의 주장이나 선전이 진실이 아님을 논증하려고 발표한, 그런 목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나온 공개적 연구결과”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도 ‘북한으로부터 위협’이라는 한마디는 우리 사회의 자유로운 상상력에 찬물을 끼얻고 만다. 북한의 위협이 유일하게 독재정권의 존립기반이었던 1988년의 시대상황을 연상한다면 리영희의 한편의 저술이 미친 파장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결혼식이다. 리영희는 필자의 결혼식 주례사에서 ‘부부간에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고 서로 이해할 것’, ‘정신적, 도덕적, 인간적 내면의 위대함을 달성할 것’, ‘근검절약할 것’을 강조했다. 이는 일상생활속에서 리영희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이고 리영희가 후학들에게 가르침을 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리영희가 실천적 지식인의 표상이 된 것은 허구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때문이다. 실천적 지식인은 시대적 과제라는 가치의식을 가지고, 시대적 과제에 허위의 장막을 씌우는 것과 싸워야 한다. 그 기초가 되는 것은 휴머니즘이다. 리영희가 ‘인간 상호간의 배려와 이애’, ‘정신적, 도덕적, 인간적인 내면의 위대함’을 강조한 것은 의례적인 축사가 아니다.

리영희 사상의 바탕은 휴머니즘
리영희의 인간관을 잘 알 수 있는 글이 1988년 11월 6일자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당산시민을 위한 애도사’라는 칼럼이다. 당시 리영희의 칼럼이 한겨레신문에 실리면 서울시내 신문의 가판판매에 영향을 줄 정도였다. 1976년 중국의 공업도시 당산에서 대지진이 났던 바로 그해 가을 뉴욕에서 12시간 정전이 되었다. 당산대지진은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도 질서가 유지되었고, 뉴욕은 사람은 안죽고 정전만 되었는데도 온갖 범죄가 난무하는 상황을 비교하면서 사회체제와 인간성의 문제를 지적하였다. 리영희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애(人間愛)였다.
임헌영은 ‘대화’에서 리영희에게 ‘당산과 뉴욕의 비교’를 예로 들면서 사회주의가 붕괴된 이후 드러난 인간이 이기심과 탐욕에 대해서 묻는다. 리영희는 “자본주의는 인간의 속성인 ‘이기심’에 호소하는 방법과 제도로 물질적 생산을 극대화시켰고 그것으로 승리했다”고 답한다. 그러나 진정한 승리는 인간의 자유와 사회적 평등의 조화속에서 가능하다는 지적을 잃지 않는다. 사회적 허구에 대한 리영희의 날카로운 비판은 인간의 자유의 확장에 대한 신념 때문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준다. 리영희는 진정으로 자유인이 되고자 했고, 허위와 우상에 대한 비판은 비록 고달프긴 했지만 리영희를 진정한 자유인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의 비판의식에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그와 함께 진리찾기의 험난한 길에 나섰기 때문이다. 리영희는 자유인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실천적 지성인이 바로 자유인이다.
리영희는 대화에서 “지식이 많아도 의식이 없으면 죽은 지식"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자신을 이끌어준 근본이념은 자유와 책임이요, 삶의 목적은 ‘진실의 추구’였다고 말한다. 그 배경은 휴머니즘인 것이다.
대화에서 리영희는 노신에게서 ‘글쓰는 기법, 문장 미, 속에서 타는 분로를 억누르면서 때로는 정곡법으로, 때로는 비유,은유,풍자,유머,해학,익살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세련된 문장기법’을 배웠다고 밝힌다.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리영희의 사상은 지적인 내용은 그 자체로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그의 실천방식과 결부됨으로써 비로소 실천적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주게 된다. 이데올로기 비판에 대한 리영희의 학문적 사상적 내용뿐만 아니라 그의 실천방식 역시 그의 사상을 설명하는 기준이 된다.
그의 날카롭고 간명한 문체는 그의 실천방식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노신에 대한 천착과 노신의 잡문쓰기를 리영희식 글쓰기로 발전시켜 촌철살인의 문장으로 많은 민중을 깨우쳤던 그의 글쓰기 방법에는 노신과 마찬가지로 민중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
리영희가 반공주의와 군사주의에 대해 비판을 가한 것은 전쟁이나 군사력이 가져오는 인간파멸의 반인간적 속성에 대한 그의 경험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한국전쟁을 비롯한 7년간의 군대생활에서 그가 느낀 반인간성은 그이 저서 ‘역정’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 그가 전쟁과 군사주의를 반대하고 베트남이나 아랍민족과 같이 전쟁을 겪은 제3세계 민족에게 애정을 표현한 것에서도 그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 휴머니즘을 발견할 수 있다.
‘대화’는 이미 1988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발간한 ‘나의 청년시대’라는 부제를 단 자적적 에세이 ‘역정’의 완결판이라고 볼 수 있다. 역정은 소년시절부터 시작하여 1963년으로 끝난다. 리영희가 수많은 저술을 통해서 이데올로기의 우상을 비판하고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성을 회복하게 하여 사상의 은사가 되었던 70년대 이후의 시절을 다루지 않고 있다.
리영희는 ‘역정’을 쓰게 된 이유로 지적 삶의 종말을 의미하는 처참한 체험은 들고 있다. ‘대화’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배후조정자가 되어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조사를 받게 된다. 리영희는 그 체험 이후 자신의 삶을 밝히는 글로서 지적 인생에 종지부를 찍을 결심을 한다. 그 절대적 고독감에서 출간한 책이 ‘역정’이다. ‘역정’의 서문에서 리영희는 “(1963년 이후) 나머지 부분은 혹시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면 훗날 채워넣을까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약속은 ‘대화’가 출간됨으로써 지켜졌다. 물론 그의 자발성보다는 후학들의 강권(?)과 협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2000년 뇌출혈로 쓰러져 육체와 지적능력, 언어능력에 손상을 입었다가 4년이 지나는 사이에 조금씩 회복되었다. 직접 글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대화라는 형식으로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이 활자화되었다. 식민지 조선의 소년이 한시대의 위대한 스승으로 깨어있는 자들의 우러름을 받기까지 그 역정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살아 숨쉬는 우리의 20세기 역사이고, 압제의 시대를 살았던 민중에게 주어진 ‘빛과 공기’에 대한 증언이다. 리영희가 조광조를 보내고 이퇴계를 맞는 심정으로 열정의 삶에서 관조의 삶을 보내며 되돌아본 현대사에 대한 성찰이다.

함께 읽을 책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이삼성, (한길사, 1998)
전쟁과 평화, 인간의 비극에 관한 정치적 성찰.
이 책은 현대사에서 인류가 겪어온 전쟁과 그것이 내표한 야만의 모습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기억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만들어졌고, 그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역저이다.
2차대전의 홀로코스트, 일본의 군국주의, 보스니아와 르완다 비극 등 20세기의 절망적인 사건을 고찰한다. 베트남 전쟁과 핵숭배 문명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야만을 내포한 문명 전반의 기초로 작용하는 사유의 원리들을 반성하고 우리의 선택과 판단으로 변화시켜나갈 가능성을 제시한다.


“역정”, 리영희, (창작과 비평사, 1988)
한국의 대표적인 실천적 지성인 리영희의 청년시대에 대한 자전적 에세이.
식민지 시대의 조선소년이 일제말기의 중학시절에 민족의식이 싹트면서 성장해온 젊은 시절에 대한 기록으로서, 전쟁의 회오리와 4.19혁명, 5.16 구테타 등 한국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을 의식있는 젊은이가 어떻게 겪어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어떤 성장 소설 못지 않게 감동을 주고, 어떤 역사교과서 못지 않게 현대사의 이면에 대한 이해를 높여준다.

“새는 좌우로 난다”, 리영희, (두레, 1994)
리영희의 첫 번째 평론집 ‘전환시대의 논리’ 출간 20년이 되는 해에 ‘전환시대의 논리 그후’라는 부제를 달고 세상에 나온 일곱 번째 평론집. 그의 평론집이 당대의 허상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독자들이 이미 진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자신의 글을 다시 읽을 필요가 없게 될 것이라고 리영희는 말한다. 그러나 이 1994년에 쓰여진 이 책을 읽다보면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지금도 오늘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국제환경을 이해하는데 여전히 유효함을 알 수 있다.

“베트남 전쟁”, (두레, 1994)
리영희가 베트남에 대한 애정과 관심, 그리고 학문적 성취가 집약되어 있다고 회고한 저서. 베트남전은 20세기 현대사에서 스페인전쟁과 함께 인류의 양심을 시험한 두 전쟁이라고 일컫어지고 있다. 20세기 동서양에 수많은 전쟁이 있었는데, 왜 베트남 전쟁이 인류의 양심에 그어진 상처인지에 대해 밝히고 있다. 미국의 각종 비밀자료를 바탕으로 20세기의 모든 갈등요소가 뒤범벅이 된 베트남전쟁을 평가하였다.

“문익환 평전”, 김형수, (실천문학사, 2004)
순수의 결정체, 이 시대 민중의 마지막 어버이 문익환 목사의 일대기.
“우리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한다”, “사랑을 가져라, 사랑은 지치지 않는다”는 말씀이 다시 들려온다. 우리들 마음속에 영원한 청년으로 살아 있는 문익환 목사의 삶을 통해 100년의 한국근현사를 살린다.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그를 역사속에서 다시 살리는 일이다.

“역사의 언덕에서”, 강원용, (한길사, 2003)
젊은이에게 들려주는 원로의 현대사 체험.
독선적이고 폐쇄적으로 대립하는 역사속에서 양극을 넘어선 제3지대에 설자리를 마련하려고 애쓰며 살아온 사회원로의 현대사 체험담이다. 어느편은 절대선이고 그 반대편은 절대악이란 사고방식은 옳지 않았다고 보았기에 이를 해소하고자 대화로 각방면의 화해의 길을 열기위해 노력한 필자의 가치관이 녹아 있는 현대사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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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임헌영 대담 / 한길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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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의 '대화'를 읽고 - 21세기와 20세기의 대화


‘연세대학원신문’이 1999년에 20세기를 보내고 21세기를 맞는 특집으로 마련한 ‘20세기 인문과학분야에 영향을 끼친 학자와 저작’에서 1위는 리영희였다. 그 이유는 ‘1970~80년대 한국 변혁운동의 중심이었고, 폭압적인 시대상황에 맞서 싸웠고, 70년대의 냉전주의적 사회분위기에 새로운 시각을 불어 놓은 학자’라는 점이다.
리영희 스스로 마지막 저서라고 밝힌 인생역정이 담긴 회고록 ‘대화’는 문학평론가 임헌영과 대화형식을 빌린 자서전이다. 고은 시인은 “눈물바람도 하고 통쾌하게 웃기도 하면서 읽어 내려간 이 책은 ‘우리시대 진실의 서(書)’ ”라면서 “해외여행때마다 늘 챙기던 ‘괴테와의 대화’ 대신 우리 형님의 ‘대화’를 꼭 갖고 다니겠다”고 말했다.

리영희를 통해 만나는 20세기의 젊은이와 21세기의 젊은이
‘대화’는 70~90년대 청년, 학생, 지식인들이 독재정권이 숨기고 왜곡한 진실을 찾아 나가는 그 시대의 고뇌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래서 ‘대화’는 리영희와 임헌영의 대화가 아니라 21세기와 20세기의 대화이고,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의 젊은이들과 20세기에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로 삼고 살았던 젊은이들의 고뇌와 대화이다. 리영희는 이 책을 통해서 한국현대사에 새겨진 진실찾기의 수난과 기쁨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70~90년대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들은 정신적, 지적, 사상적 영향으로 리영희의 저서를 지적하였다. 그로 인해 리영희는 수많은 재판의 증인으로 지정되어 증인대에 서야했다.
리영희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불의에 굽히지 않고 진리를 위해 청춘을 불사르며 살았던 젊은이들이 이제 우리 사회 곳곳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20세기의 젊은이들은 독재정권과 맞서 싸웠지만 지금은 그때와 시대가 다르다. 다른 시대적 경험을 한 세대들이 21세기에 함께 살고 있다. 리영희의 ‘대화’는 다른 시대적 경험을 한 세대들을 소통시켜줄 통로가 될 것이다. 진실을 찾기 위해서 온갖 고통을 겪어야 했던 과거와 오늘의 현실은 다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도 있지만 ‘역사가 복사된다’는 말은 아니다. 과거와 대화는 오늘의 삶의 지혜를 제시해주면서 역사를 새롭게 읽게 한다.
리영희는 분단 이후 한국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로 자리잡은 반공, 반북, 친미, 친일, 호핵(好核), 군비확대 등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민중을 계몽하면서 시민사회를 확대시켜온 실천적인 지식인이다. 70~80년대와 9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닌 세대들은 대부분 공통적으로 리영희의 날카로운 분석을 통하여 세계을 인식하면서 가치관을 확립했다고 볼 수 있다.
리영희는 청년,학생,지식인들에 의해 ‘사상의 은사’로 불렸다. 한편 그 반대편에 있는 세력들에게 리영희는 ‘의식화의 원흉’일 뿐이었다.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로 따르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리영희의 저술들이 인구에 회자될수록 리영희에 가해지는 핍박의 고삐가 더 강하게 조여졌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표적인 한국의 실천적 지식인 리영희에게 해직과 구속이라는 수난이 뒤따랐지만, 리영희는 그 고난의 길에서도 진리를 밝히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9번의 연행, 3차례 옥살이 등 '야만의 시대'를 살았지만, 그는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분단을 넘어서’, ‘새는 좌우로 난다’, ‘반세기의 신화’ 등 12권의 저서와 ‘8억인과의 대화’ 등 3권의 편역서를 냈다.

허구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을 부각할 경우 객관성을 상실할 수도 있으나, ‘사상의 은사’인 리영희의 영향에 대해 생동감 있게 전달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필자가 겪은 세차례의 계기를 말하고자 한다.
첫째, 대학입학시기이다. 1983년 대학에 입학하였을 때는 광주의 80년 5월을 겪으면서 이미 사춘기를 잃고 성장한 상태였다. 대학생활이 인생의 새출발이라고 산뜻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와 진리를 갈망하였지만, 귀가 막힌 시대였기 때문에 지적 방황과 갈등의 혼돈상태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꿰뚫어보지 못한 채 수동적인 삶을 받아들이는 자기 모순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을 접하였다. 특히 베트남전쟁에 대한 논문을 읽고 난 후 머리속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듯했다.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진리를 추구해야한다며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리영희의 논문을 집약한 것이 1994년에 두레출판사에서 발간한 ‘베트남전쟁’이다. 리영희는 ‘대화’에서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10년만에 나온 이 책에는 베트남에 대한 애정과 관심, 그리고 학문적 성취가 집약되어 있다”고 회고하고 있다.
두 번째, 대학졸업 후 사회운동을 시작하던 시기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인생의 전환을 가져온 글을 접한 것이다. 1988년에 ‘사회와 사상’ 창간호에 실린 리영희의 ‘남북한 전쟁능력 비교연구’이다. 이글은 당시 젊은이들이 ‘북한의 군사력 우위’라는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불신과 증오와 대결을 재생산하는 우리 사회의 실체를 분명히 인식할 수 있게 만들었다. 80년대후반부터 한반도 평화와 군축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적인 근거가 되었음은 당연하다.
리영희는 ‘대화’에서 이 논문에 대하여 “역대 군부독재정권과 그 권력기반인 광적인 각종 극우반공세력이 그들의 영구집권을 위해서, 북한의 군사적 우월성을 부당하게 과장하고 고의적으로 대북한 공포 불안 의식을 조성하던 시기에 그들의 주장이나 선전이 진실이 아님을 논증하려고 발표한, 그런 목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나온 공개적 연구결과”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도 ‘북한으로부터 위협’이라는 한마디는 우리 사회의 자유로운 상상력에 찬물을 끼얻고 만다. 북한의 위협이 유일하게 독재정권의 존립기반이었던 1988년의 시대상황을 연상한다면 리영희의 한편의 저술이 미친 파장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결혼식이다. 리영희는 필자의 결혼식 주례사에서 ‘부부간에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고 서로 이해할 것’, ‘정신적, 도덕적, 인간적 내면의 위대함을 달성할 것’, ‘근검절약할 것’을 강조했다. 이는 일상생활속에서 리영희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이고 리영희가 후학들에게 가르침을 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리영희가 실천적 지식인의 표상이 된 것은 허구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때문이다. 실천적 지식인은 시대적 과제라는 가치의식을 가지고, 시대적 과제에 허위의 장막을 씌우는 것과 싸워야 한다. 그 기초가 되는 것은 휴머니즘이다. 리영희가 ‘인간 상호간의 배려와 이애’, ‘정신적, 도덕적, 인간적인 내면의 위대함’을 강조한 것은 의례적인 축사가 아니다.

리영희 사상의 바탕은 휴머니즘
리영희의 인간관을 잘 알 수 있는 글이 1988년 11월 6일자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당산시민을 위한 애도사’라는 칼럼이다. 당시 리영희의 칼럼이 한겨레신문에 실리면 서울시내 신문의 가판판매에 영향을 줄 정도였다. 1976년 중국의 공업도시 당산에서 대지진이 났던 바로 그해 가을 뉴욕에서 12시간 정전이 되었다. 당산대지진은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도 질서가 유지되었고, 뉴욕은 사람은 안죽고 정전만 되었는데도 온갖 범죄가 난무하는 상황을 비교하면서 사회체제와 인간성의 문제를 지적하였다. 리영희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애(人間愛)였다.
임헌영은 ‘대화’에서 리영희에게 ‘당산과 뉴욕의 비교’를 예로 들면서 사회주의가 붕괴된 이후 드러난 인간이 이기심과 탐욕에 대해서 묻는다. 리영희는 “자본주의는 인간의 속성인 ‘이기심’에 호소하는 방법과 제도로 물질적 생산을 극대화시켰고 그것으로 승리했다”고 답한다. 그러나 진정한 승리는 인간의 자유와 사회적 평등의 조화속에서 가능하다는 지적을 잃지 않는다. 사회적 허구에 대한 리영희의 날카로운 비판은 인간의 자유의 확장에 대한 신념 때문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준다. 리영희는 진정으로 자유인이 되고자 했고, 허위와 우상에 대한 비판은 비록 고달프긴 했지만 리영희를 진정한 자유인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의 비판의식에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그와 함께 진리찾기의 험난한 길에 나섰기 때문이다. 리영희는 자유인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실천적 지성인이 바로 자유인이다.
리영희는 대화에서 “지식이 많아도 의식이 없으면 죽은 지식"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자신을 이끌어준 근본이념은 자유와 책임이요, 삶의 목적은 ‘진실의 추구’였다고 말한다. 그 배경은 휴머니즘인 것이다.
대화에서 리영희는 노신에게서 ‘글쓰는 기법, 문장 미, 속에서 타는 분로를 억누르면서 때로는 정곡법으로, 때로는 비유,은유,풍자,유머,해학,익살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세련된 문장기법’을 배웠다고 밝힌다.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리영희의 사상은 지적인 내용은 그 자체로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그의 실천방식과 결부됨으로써 비로소 실천적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주게 된다. 이데올로기 비판에 대한 리영희의 학문적 사상적 내용뿐만 아니라 그의 실천방식 역시 그의 사상을 설명하는 기준이 된다.
그의 날카롭고 간명한 문체는 그의 실천방식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노신에 대한 천착과 노신의 잡문쓰기를 리영희식 글쓰기로 발전시켜 촌철살인의 문장으로 많은 민중을 깨우쳤던 그의 글쓰기 방법에는 노신과 마찬가지로 민중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
리영희가 반공주의와 군사주의에 대해 비판을 가한 것은 전쟁이나 군사력이 가져오는 인간파멸의 반인간적 속성에 대한 그의 경험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한국전쟁을 비롯한 7년간의 군대생활에서 그가 느낀 반인간성은 그이 저서 ‘역정’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 그가 전쟁과 군사주의를 반대하고 베트남이나 아랍민족과 같이 전쟁을 겪은 제3세계 민족에게 애정을 표현한 것에서도 그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 휴머니즘을 발견할 수 있다.
‘대화’는 이미 1988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발간한 ‘나의 청년시대’라는 부제를 단 자적적 에세이 ‘역정’의 완결판이라고 볼 수 있다. 역정은 소년시절부터 시작하여 1963년으로 끝난다. 리영희가 수많은 저술을 통해서 이데올로기의 우상을 비판하고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성을 회복하게 하여 사상의 은사가 되었던 70년대 이후의 시절을 다루지 않고 있다.
리영희는 ‘역정’을 쓰게 된 이유로 지적 삶의 종말을 의미하는 처참한 체험은 들고 있다. ‘대화’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배후조정자가 되어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조사를 받게 된다. 리영희는 그 체험 이후 자신의 삶을 밝히는 글로서 지적 인생에 종지부를 찍을 결심을 한다. 그 절대적 고독감에서 출간한 책이 ‘역정’이다. ‘역정’의 서문에서 리영희는 “(1963년 이후) 나머지 부분은 혹시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면 훗날 채워넣을까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약속은 ‘대화’가 출간됨으로써 지켜졌다. 물론 그의 자발성보다는 후학들의 강권(?)과 협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2000년 뇌출혈로 쓰러져 육체와 지적능력, 언어능력에 손상을 입었다가 4년이 지나는 사이에 조금씩 회복되었다. 직접 글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대화라는 형식으로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이 활자화되었다. 식민지 조선의 소년이 한시대의 위대한 스승으로 깨어있는 자들의 우러름을 받기까지 그 역정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살아 숨쉬는 우리의 20세기 역사이고, 압제의 시대를 살았던 민중에게 주어진 ‘빛과 공기’에 대한 증언이다. 리영희가 조광조를 보내고 이퇴계를 맞는 심정으로 열정의 삶에서 관조의 삶을 보내며 되돌아본 현대사에 대한 성찰이다.

함께 읽을 책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이삼성, (한길사, 1998)
전쟁과 평화, 인간의 비극에 관한 정치적 성찰.
이 책은 현대사에서 인류가 겪어온 전쟁과 그것이 내표한 야만의 모습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기억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만들어졌고, 그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역저이다.
2차대전의 홀로코스트, 일본의 군국주의, 보스니아와 르완다 비극 등 20세기의 절망적인 사건을 고찰한다. 베트남 전쟁과 핵숭배 문명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야만을 내포한 문명 전반의 기초로 작용하는 사유의 원리들을 반성하고 우리의 선택과 판단으로 변화시켜나갈 가능성을 제시한다.


“역정”, 리영희, (창작과 비평사, 1988)
한국의 대표적인 실천적 지성인 리영희의 청년시대에 대한 자전적 에세이.
식민지 시대의 조선소년이 일제말기의 중학시절에 민족의식이 싹트면서 성장해온 젊은 시절에 대한 기록으로서, 전쟁의 회오리와 4.19혁명, 5.16 구테타 등 한국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을 의식있는 젊은이가 어떻게 겪어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어떤 성장 소설 못지 않게 감동을 주고, 어떤 역사교과서 못지 않게 현대사의 이면에 대한 이해를 높여준다.

“새는 좌우로 난다”, 리영희, (두레, 1994)
리영희의 첫 번째 평론집 ‘전환시대의 논리’ 출간 20년이 되는 해에 ‘전환시대의 논리 그후’라는 부제를 달고 세상에 나온 일곱 번째 평론집. 그의 평론집이 당대의 허상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독자들이 이미 진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자신의 글을 다시 읽을 필요가 없게 될 것이라고 리영희는 말한다. 그러나 이 1994년에 쓰여진 이 책을 읽다보면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지금도 오늘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국제환경을 이해하는데 여전히 유효함을 알 수 있다.

“베트남 전쟁”, (두레, 1994)
리영희가 베트남에 대한 애정과 관심, 그리고 학문적 성취가 집약되어 있다고 회고한 저서. 베트남전은 20세기 현대사에서 스페인전쟁과 함께 인류의 양심을 시험한 두 전쟁이라고 일컫어지고 있다. 20세기 동서양에 수많은 전쟁이 있었는데, 왜 베트남 전쟁이 인류의 양심에 그어진 상처인지에 대해 밝히고 있다. 미국의 각종 비밀자료를 바탕으로 20세기의 모든 갈등요소가 뒤범벅이 된 베트남전쟁을 평가하였다.

“문익환 평전”, 김형수, (실천문학사, 2004)
순수의 결정체, 이 시대 민중의 마지막 어버이 문익환 목사의 일대기.
“우리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한다”, “사랑을 가져라, 사랑은 지치지 않는다”는 말씀이 다시 들려온다. 우리들 마음속에 영원한 청년으로 살아 있는 문익환 목사의 삶을 통해 100년의 한국근현사를 살린다.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그를 역사속에서 다시 살리는 일이다.

“역사의 언덕에서”, 강원용, (한길사, 2003)
젊은이에게 들려주는 원로의 현대사 체험.
독선적이고 폐쇄적으로 대립하는 역사속에서 양극을 넘어선 제3지대에 설자리를 마련하려고 애쓰며 살아온 사회원로의 현대사 체험담이다. 어느편은 절대선이고 그 반대편은 절대악이란 사고방식은 옳지 않았다고 보았기에 이를 해소하고자 대화로 각방면의 화해의 길을 열기위해 노력한 필자의 가치관이 녹아 있는 현대사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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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이태준 문학전집 12
이태준 지음 / 깊은샘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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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허 이태준의 황진이


황진이 소설의 교본

상허 이태준이 황진이를 소설로 옮긴 것은 1936년이다. 그후 21세기가 되면서 최인호, 홍석중, 전경린 등 남북의 내노라하는 문인들이 황진이에 대한 작품을 쏟아내었다. 이태준의 ‘황진이’는 황진이에 대한 첫 소설이라는 점에서 황진이 소설의 교본이라고 할 수 있다. 미루어 짐작하건데 그 이후 작품들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물론 북한의 홍석중이나 남한의 전경린이 비슷한 시기에 황진이를 작품화하면서도 황진이에 대한 인물묘사는 다르다. 홍석중은 봉건제도의 허위와 거짓에 저항하는 여성으로, 전경린은 여성으로서 주체적 삶을 살아가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황진이에 대한 역사적으로 고증할 수 있는 자료가 매우 드물다. 황진이라는 인물과 그의 삶에 대해 작가적 상상력을 가지고 평가하는 것에 대해 객관적 사실 운운하면서 딴소리를 할 수 없다는 이유이다. 

국문학자인 고 장덕순은 황진이 대하여 “황진이의 진정한 모습은 그녀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서 만족해야 한다. 원래가 진이는 전설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의 전설을 과장, 확대하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그녀의 문학만은 전설도 신화도 아닌 실존일 뿐이다.”고 말하였다. 상허 이태준도 그의 작품 ‘황진이’의 책뒤에 “ 진이의 심혼을 싱싱한 채 풍겨주기는 몇 수 안되나 그의 시편들인데, 그의 예술론이 아닌 이상 그의 작품만으로도 내가 붙잡으려는 진이는 역시 구름밖에 아득할 뿐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황진이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은 ‘어유야담’ 등에 나타난 간단한 언급말고는 없다.

이태준은 황진이를 쓰기보다는 읽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대개 주장이 강하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했나보다.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 이태준이 황진이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황진이를 읽고 싶으니 누군가가 소설로 써야 한다고 말하면 그 결과가 어떠했을까? 당연히 이태준은 “그럼 당신이 쓰시오”라는 숱한 대답에 부딛힐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결국 말을 꺼낸 책임을 숨길 수 없어 붓을 들지 않았을까?

잔잡고 권할 이 없는 백호 임제

이태준은 구름같은 아득함속에서 황진이의 자취를 찾아서 작품을 탄생시켰다. “진이에 대한 욕됨이 클 줄 모르지 않는다”, “여러 선배에게는 오직 땀 흐르는 얼굴을 돌이킬 길이 없어 한다”는 그의 아쉬움, 쑥스러움에도 불구하고 ‘황진이’를 소설로서 세상에 처음으로 등장시킨 그의 공을 오늘날 한없이 칭송하여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이태준의 ‘황진이’가 있었기 때문에 최인호, 홍석중, 전경린의 ‘황진이’가 나올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결코 무리한 것은 아닐게다.  

이태준은 사료의 빈약함에 대한 아쉬움을 백호 임제가 황진의 무덤앞에서 부른 노래를 읊조리며 달래고자 했다.


청초 우거진 곳에 자난다 누었난다

홍안을 어디두고 백골만 묻혔난다.

잔 잡고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어하노라.


백호의 마음이 이태준의 마음이고 내 마음이다. 백호 임제는 조선 제일의 멋쟁이이다. 황진이의 무덤에서 이 시조를 짓고 절을 하였다는 이유로 조선의 고루한 학자들한테 얼마나 손가락질을 당했겠는가? 백호 임제는 결국 관직을 버리고 산천을 유람하면서 김시습이나 김삿갓을 능가하는 로맨티스트로서의 생을 보낸다.


세상에 태어나서 만주 땅을 못 삼켰으니

그 어느 날에나 서울 땅을 다시 밟을 것이냐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말을 재촉해 돌아가는데

눈이 시린 저 먼 하늘

짙은 안개가 걷히는구나

이렇게 풍류와 기백이 넘치는 ‘백호’ 이기 때문에 황진이 무덤 앞에서 노래를 읊을 수 있었고, 이태준은 백호의 노래를 빌어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백호와 같은 풍류가객이 전남 나주에 있는 백호의 무덤에서 흙한 줌 퍼서 박연폭포에 뿌려주었으면 한다. 남북화해의 흐름이 조선시대 최고의 풍운남녀인 임제와 황진이를 만나게 해주었다는 이야기 거리는 되지 않을까?


이태준이 묘사한 황진이

황진이와 관련된 남성은 그를 사모하다 죽은 시골총각, 소세양, 이사종, 벽계수, 서화담, 지족선사, 이생이다. 이생은 황진이가 말년에 금강산 기행을 함께 한 사람이라고 알려지고 있으나, 홍석중은 이사종과 금강산 유람을 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태준의 작품에서는 금강산 유람이 묘사되지 않기 때문에 이생은 등장하지 않고, 이사종은 황진이가 그의 노래실력에 반해서 6개월간 계약동거를 한 인물로 나온다.

나머지 남성들은 대게 잘 알려진 바와 같다. 자신을 사모하다 죽은 시골 총각 때문에 황진이가 기녀가 된다는 것은 황진이 인생의 중요한 전기이다. 이태준은 이 총각에 대한 황진이의 연민을 유달리 강조하고 있다. 황진이는 그 총각의 관에 자신의 적삼을 덮어주면, 그것으로서 반쪽 양반에 반쪽 처녀라는 놀림감이 되어 자신의 마지막이 될 거라고 직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기까지 날 사모한 사람! 인정이라면 어찌 내 장래만 생각하고 그를 위해 이만한 것에 인색할 것이냐!"며 적삼으로 관을 덮어주어 총각의 넋을 위로 한다.

조선의 풍류가객 임제가 황진이의 이런 기백에 감동하지 않았다면 그는 조선 최고의 멋쟁이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황진이가 신분제도에 저항하는 적극적인 여성이라는 것은 황진이를 이해하는 아주 일반적인 시각이다. 이태준은 이러한 시각에다 여성으로서 자신의 감정을 적극적으로 실현해가는 인물로 묘사한다. 이태준의 작품에서 황진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자신이 사랑받고 싶은 사람,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자신의 운명을 능동적으로 개척하는 여성이다. 이런 세가지 유형 가우데 하나에 해당하는 사람을 만나면 황진이의 흠모하는 정렬은 가랑잎에 붙는 불과 같이 급해진다.

이태준은 소세양, 서화담, 지족선사를 그런 대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 황진이이기 때문에 무엇을 애껴 모아두리라는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았던 그녀가 동지달 긴긴 밤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모아두고 싶어한다. 우리 시조문학사에 길이 남을 ‘동짓달 기나긴 밤을’도 이렇게 해서 태어났다. 

이태준은 ‘칠거지악’과 같은 불공평한 윤리나 도덕으로 속박받는 여성의 처지에서 벗어나, 반짝이는 별이 반짝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처럼 물 흐르듯이 자신의 감정에 자유로운 여인으로 살고 싶은 황진이라는 인물을 창조해냈다. ‘도(道)에 애닯은 것이 아닌 정(情)에 애닯은 황진이’라는 인물을 만들어서 일제 식민지 시대의 짓눌림과 갑갑함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 아마도 이태준의 의도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황진이는 지족선사를 파계로 이끈 요부가 아니라 “새가 지저귀고 물이 흘러가는 것이 거짓 자연이 아니다”는 것을 지족선사와 함께 깨닫는 여성으로 승화된다. 자기 남편이 딴 계집을 볼 때 시샘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감정인데 이를 억압하는 남성중심적 문화에 대해 비웃는 황진이, 결국 금강산 길을 택하며 종적을 감추는 것으로 이태준은 황진이에 대한 기록을 마감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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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1
홍석중 지음 / 대훈닷컴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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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중의 ‘황진이’를 읽고

 

               누구나 다 아는 황진이, 누구나 다 좋아하는 황진이


 북한작품으로서 최초로 남한에서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은 홍석중의 ‘황진이’이다. 잘 알려진대로 홍석중은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의 손자이다. 황진이에서 홍석중이 보여준 풍부한 어휘나 사람의 감정이나 심리를 잘 표현한 유려한 문체는 당연히 그의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홍석중은 이를 부정한다. 자신은 할아버지의 안중에도 들지 못했던 손자라고 하면서, 아버지인 홍기문의 영향은 받았을 수 있다고 말한다. 홍기문은 일제시대에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 문학동맹)에서 활동했고, 월북하여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홍석중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황진이’는 홍명희의 ‘임꺽정’을 빼닮았다. 임꺽정은 불평등한 신분제도에 반감을 품고 조선의 규범을 부정하면서 산적으로 살며 자신의 뜻을 펼치려다 좌절한다.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황진이도 임꺽정과 다를 바 하나 없다.


 황진이와 임꺽정

 홍석중은 황진이가 자신이 황진사와 종 사이에서 태어난 종의 딸이라는 출생의 비밀을 알면서 양반집 딸의 신분을 버리고 기생이 된다고 묘사한다. 홍석중의 ‘황진이’나 벽초의 ‘임꺽정’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사회적 배경은 조선의 신분제도이다.

 황진이는 비인간적인 신분제를 통해서 당대의 양반이나 종교인들의 ‘거짓과 위선’의 허물을 벗기며 그들을 조롱한다. 황진이가 허위와 위선에 저항하는 근거지는 송도의 기생촌인 ‘청루’이다. 황진이의 기생방은 임꺽정의 활동 근거지인 ‘청석골’과 비교할 수 있다. 황진이는 청루를 근거지로 삼아서 탐관오리들을 혼내주고, 지식인, 종교인, 양반들의 지배층들의 ‘거짓과 위선’을 벗겨낸다. 마치 임꺽정이 청석골을 근거지로 그랬듯이.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을 우리말의 보물창고라고 한다. 홍석중의 ‘황진이’도 풍부한 어휘나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속담에서 결코 그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임꺽정’에서 조선시대의 사회상이 잘 드러나 있듯이, ‘황진이’에서도 절의 백중행사, 혼례식, 수리날 송도 산대놀이, 장례식, 굿 등  조선시대의 사회상을 잘 묘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홍석중이 ‘황진이’에서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 ‘놈이’는 임꺽정의 재현이라고 보아도 큰 무리가 없다. 홍석중은 황진이와 ‘놈이’의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해서 거짓과 위선에 물든 양반들의 사랑과 다른 진정한 사랑을 대비시키고 있다. 홍석중이 조선의 계급사회를 풍자하기 위해서는 ‘놈이’라는 인물이 반드시 필요하다. ‘놈이’가 화적패의 우두머리가 되어 산채에서 의협심을 불태운다는 설정은 아무리 보아도 임꺽정을 차용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그러니까 해석하자면 홍석중의 ‘황진이’에서 ‘놈이’가 임꺽정을 직접 차용한 인물이고, 황진이는 임꺽정을 변형하고 발전시킨 임꺽정이라고 할 수 있다. 홍석중의 ‘황진이’에서 벽초의 ‘임꺽정’은 황진이와 ‘놈이’로 다시 태어난 것으로 읽힌다.  

 작품으로서 ‘황진이’와 ‘임꺽정’을 비교하는 것이 홍석중에게는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존경하는 할아버지에 자신을 비교하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두 작품의 비교가 홍석중에게 결례라고 한다면, 최소한 홍석중과 벽초가 묘사하는 인물로서 황진이와 임꺽정은 시대를 달리하는 이란성 쌍생아 같다는 주장만은 굽히고 싶지 않다. 


 거짓과 위선에 저항

 황진이는 “세상의 가장 큰 불행과 부조리는 정도가 지나치는 데서 오는 것보다도 그 지나친 것을 감추려는 거짓과 위선에서 오는 것이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은 세상을 고고하게 살아가는 신조가 될 수 있다. 필자는 어찌본다면 홍명희가 묘사한 ‘임꺽정’에서 청석골의 화적패 활동이 위기를 겪는 것은 ‘지나침’을 지혜롭게 조절하지 못하는 의욕과잉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지나침’은 늘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황진이는 지나침보다도 거짓과 위선을 불행과 부조리의 근본으로 보고 있다. 홍석중은 ‘황진이’에서 심지어 황진이의 아버지인 황진사와 오빠까지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찬 인물로 설정하고 있다. 홍석중이 그 풍부하고 질퍽한 어휘로 되살려 놓은 ‘황진이’에서 묘사하고 싶은 핵심이 거짓과 위선에 저항하는 기생 황진이인 것이다. 황진이는 거짓과 위선의 상징으로 성적인 탐욕스러움을 들고 있다. 황진이는 남녀의 성애를 부정하지 않지만, 겉으로는 도도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격조도 없이 욕망의 노예가 되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황진이와 지족선사의 관계도 홍석중은 전혀 다르게 해석한다. 지족선사는 면벽수도를 하는 도승이 아니라 불교계의 거짓과 위선의 상징일 뿐이다. 황진이가 파계시킨 것은 지속선사의 30년 수도가 아니라 불교계의 거짓인 것이다.


 인생길위에 시를 남기는 사람

 ‘황진이’가 해석하는 ‘새옹지마’(塞翁之馬)도 새롭다. 필자는 새옹지마는 어떤 어려움을 겪더라고 그것은 다음에 다가오는 행운의 징조이기 때문에 견디어 내야한다는 역동적인 삶과 희망에 대한 고사성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새옹지마와 ‘전화위복’(轉禍爲福)을 우울하고 고단한 현실에 좌절하지 않는 긍정적인 삶을 위한 지표로 삼았다.

 하지만 황진이가 신분제도의 굴레속에서 겪어야 하는 고통, 자신의 꿈을 버리고 기생이 되는 결심을 하는 과정에 배어 있는 아픔은 결코 ‘새옹지마’라는 고사로는 설명이 안된다. 다음에 올 행운으로 현재의 불행을 이길 수 있다면 그 불행은 진짜 불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생이 되는 순간 황진이는 죽었고, 기생 명월로 다시 태어났다. 다음에 어떠한 행운이 온다고 하더라도 그 행운이 황진이의 죽음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 황진이의 생각이다. 

 거짓과 위선의 허울을 쓰고 있는 사람들을 한편으로 하고, 새옹지라라는 고사로도 위안할 수 없는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을 한편으로 하는 것이 홍석중이 설정한 ‘황진이’의 기본구도인 것이다. 그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 사이의 사랑 이야기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심장에서 멀어진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마저 멀어진다’는 유행가 가사와 비슷하다. 놈이는 눈에서 멀어져 백리를 떠난다고 해서 심장에 박힌 가시를 뽑지 않으면 그 아픔을 달랠 수 없다고 한다. 심장에 가시가 박힌 아픔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어쩌면 홍석중이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황진이는 “먹으로 종이 위에다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발자취로 인생길 위에다 시를 남기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아픔을 간직하고 이를 이겨나가는 사람은 인생길에 시를 새기는 사람이다. 황진이는 ‘꿈길’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런 황진이를 상허 이태준은 ‘누구나 다 아는 황진이, 누구나 다 좋아하는 황진이’라고 말했다.


“그리워도 만날 길은/꿈길밖에 없소이다./제가 님을 찾아갈 때/님도 저를 찾으소서/밤마다 오고가는/머나먼 꿈길/한시에 꿈을 꾸어/도중에 만나사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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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1
홍석중 지음 / 대훈닷컴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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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중의 ‘황진이’를 읽고

 

               누구나 다 아는 황진이, 누구나 다 좋아하는 황진이


 북한작품으로서 최초로 남한에서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은 홍석중의 ‘황진이’이다. 잘 알려진대로 홍석중은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의 손자이다. 황진이에서 홍석중이 보여준 풍부한 어휘나 사람의 감정이나 심리를 잘 표현한 유려한 문체는 당연히 그의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홍석중은 이를 부정한다. 자신은 할아버지의 안중에도 들지 못했던 손자라고 하면서, 아버지인 홍기문의 영향은 받았을 수 있다고 말한다. 홍기문은 일제시대에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 문학동맹)에서 활동했고, 월북하여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홍석중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황진이’는 홍명희의 ‘임꺽정’을 빼닮았다. 임꺽정은 불평등한 신분제도에 반감을 품고 조선의 규범을 부정하면서 산적으로 살며 자신의 뜻을 펼치려다 좌절한다.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황진이도 임꺽정과 다를 바 하나 없다.


 황진이와 임꺽정

 홍석중은 황진이가 자신이 황진사와 종 사이에서 태어난 종의 딸이라는 출생의 비밀을 알면서 양반집 딸의 신분을 버리고 기생이 된다고 묘사한다. 홍석중의 ‘황진이’나 벽초의 ‘임꺽정’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사회적 배경은 조선의 신분제도이다.

 황진이는 비인간적인 신분제를 통해서 당대의 양반이나 종교인들의 ‘거짓과 위선’의 허물을 벗기며 그들을 조롱한다. 황진이가 허위와 위선에 저항하는 근거지는 송도의 기생촌인 ‘청루’이다. 황진이의 기생방은 임꺽정의 활동 근거지인 ‘청석골’과 비교할 수 있다. 황진이는 청루를 근거지로 삼아서 탐관오리들을 혼내주고, 지식인, 종교인, 양반들의 지배층들의 ‘거짓과 위선’을 벗겨낸다. 마치 임꺽정이 청석골을 근거지로 그랬듯이.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을 우리말의 보물창고라고 한다. 홍석중의 ‘황진이’도 풍부한 어휘나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속담에서 결코 그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임꺽정’에서 조선시대의 사회상이 잘 드러나 있듯이, ‘황진이’에서도 절의 백중행사, 혼례식, 수리날 송도 산대놀이, 장례식, 굿 등  조선시대의 사회상을 잘 묘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홍석중이 ‘황진이’에서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 ‘놈이’는 임꺽정의 재현이라고 보아도 큰 무리가 없다. 홍석중은 황진이와 ‘놈이’의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해서 거짓과 위선에 물든 양반들의 사랑과 다른 진정한 사랑을 대비시키고 있다. 홍석중이 조선의 계급사회를 풍자하기 위해서는 ‘놈이’라는 인물이 반드시 필요하다. ‘놈이’가 화적패의 우두머리가 되어 산채에서 의협심을 불태운다는 설정은 아무리 보아도 임꺽정을 차용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그러니까 해석하자면 홍석중의 ‘황진이’에서 ‘놈이’가 임꺽정을 직접 차용한 인물이고, 황진이는 임꺽정을 변형하고 발전시킨 임꺽정이라고 할 수 있다. 홍석중의 ‘황진이’에서 벽초의 ‘임꺽정’은 황진이와 ‘놈이’로 다시 태어난 것으로 읽힌다.  

 작품으로서 ‘황진이’와 ‘임꺽정’을 비교하는 것이 홍석중에게는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존경하는 할아버지에 자신을 비교하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두 작품의 비교가 홍석중에게 결례라고 한다면, 최소한 홍석중과 벽초가 묘사하는 인물로서 황진이와 임꺽정은 시대를 달리하는 이란성 쌍생아 같다는 주장만은 굽히고 싶지 않다. 


 거짓과 위선에 저항

 황진이는 “세상의 가장 큰 불행과 부조리는 정도가 지나치는 데서 오는 것보다도 그 지나친 것을 감추려는 거짓과 위선에서 오는 것이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은 세상을 고고하게 살아가는 신조가 될 수 있다. 필자는 어찌본다면 홍명희가 묘사한 ‘임꺽정’에서 청석골의 화적패 활동이 위기를 겪는 것은 ‘지나침’을 지혜롭게 조절하지 못하는 의욕과잉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지나침’은 늘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황진이는 지나침보다도 거짓과 위선을 불행과 부조리의 근본으로 보고 있다. 홍석중은 ‘황진이’에서 심지어 황진이의 아버지인 황진사와 오빠까지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찬 인물로 설정하고 있다. 홍석중이 그 풍부하고 질퍽한 어휘로 되살려 놓은 ‘황진이’에서 묘사하고 싶은 핵심이 거짓과 위선에 저항하는 기생 황진이인 것이다. 황진이는 거짓과 위선의 상징으로 성적인 탐욕스러움을 들고 있다. 황진이는 남녀의 성애를 부정하지 않지만, 겉으로는 도도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격조도 없이 욕망의 노예가 되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황진이와 지족선사의 관계도 홍석중은 전혀 다르게 해석한다. 지족선사는 면벽수도를 하는 도승이 아니라 불교계의 거짓과 위선의 상징일 뿐이다. 황진이가 파계시킨 것은 지속선사의 30년 수도가 아니라 불교계의 거짓인 것이다.


 인생길위에 시를 남기는 사람

 ‘황진이’가 해석하는 ‘새옹지마’(塞翁之馬)도 새롭다. 필자는 새옹지마는 어떤 어려움을 겪더라고 그것은 다음에 다가오는 행운의 징조이기 때문에 견디어 내야한다는 역동적인 삶과 희망에 대한 고사성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새옹지마와 ‘전화위복’(轉禍爲福)을 우울하고 고단한 현실에 좌절하지 않는 긍정적인 삶을 위한 지표로 삼았다.

 하지만 황진이가 신분제도의 굴레속에서 겪어야 하는 고통, 자신의 꿈을 버리고 기생이 되는 결심을 하는 과정에 배어 있는 아픔은 결코 ‘새옹지마’라는 고사로는 설명이 안된다. 다음에 올 행운으로 현재의 불행을 이길 수 있다면 그 불행은 진짜 불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생이 되는 순간 황진이는 죽었고, 기생 명월로 다시 태어났다. 다음에 어떠한 행운이 온다고 하더라도 그 행운이 황진이의 죽음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 황진이의 생각이다. 

 거짓과 위선의 허울을 쓰고 있는 사람들을 한편으로 하고, 새옹지라라는 고사로도 위안할 수 없는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을 한편으로 하는 것이 홍석중이 설정한 ‘황진이’의 기본구도인 것이다. 그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 사이의 사랑 이야기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심장에서 멀어진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마저 멀어진다’는 유행가 가사와 비슷하다. 놈이는 눈에서 멀어져 백리를 떠난다고 해서 심장에 박힌 가시를 뽑지 않으면 그 아픔을 달랠 수 없다고 한다. 심장에 가시가 박힌 아픔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어쩌면 홍석중이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황진이는 “먹으로 종이 위에다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발자취로 인생길 위에다 시를 남기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아픔을 간직하고 이를 이겨나가는 사람은 인생길에 시를 새기는 사람이다. 황진이는 ‘꿈길’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런 황진이를 상허 이태준은 ‘누구나 다 아는 황진이, 누구나 다 좋아하는 황진이’라고 말했다.


“그리워도 만날 길은/꿈길밖에 없소이다./제가 님을 찾아갈 때/님도 저를 찾으소서/밤마다 오고가는/머나먼 꿈길/한시에 꿈을 꾸어/도중에 만나사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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