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 이태준 문학전집 12
이태준 지음 / 깊은샘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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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허 이태준의 황진이


황진이 소설의 교본

상허 이태준이 황진이를 소설로 옮긴 것은 1936년이다. 그후 21세기가 되면서 최인호, 홍석중, 전경린 등 남북의 내노라하는 문인들이 황진이에 대한 작품을 쏟아내었다. 이태준의 ‘황진이’는 황진이에 대한 첫 소설이라는 점에서 황진이 소설의 교본이라고 할 수 있다. 미루어 짐작하건데 그 이후 작품들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물론 북한의 홍석중이나 남한의 전경린이 비슷한 시기에 황진이를 작품화하면서도 황진이에 대한 인물묘사는 다르다. 홍석중은 봉건제도의 허위와 거짓에 저항하는 여성으로, 전경린은 여성으로서 주체적 삶을 살아가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황진이에 대한 역사적으로 고증할 수 있는 자료가 매우 드물다. 황진이라는 인물과 그의 삶에 대해 작가적 상상력을 가지고 평가하는 것에 대해 객관적 사실 운운하면서 딴소리를 할 수 없다는 이유이다. 

국문학자인 고 장덕순은 황진이 대하여 “황진이의 진정한 모습은 그녀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서 만족해야 한다. 원래가 진이는 전설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의 전설을 과장, 확대하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그녀의 문학만은 전설도 신화도 아닌 실존일 뿐이다.”고 말하였다. 상허 이태준도 그의 작품 ‘황진이’의 책뒤에 “ 진이의 심혼을 싱싱한 채 풍겨주기는 몇 수 안되나 그의 시편들인데, 그의 예술론이 아닌 이상 그의 작품만으로도 내가 붙잡으려는 진이는 역시 구름밖에 아득할 뿐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황진이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은 ‘어유야담’ 등에 나타난 간단한 언급말고는 없다.

이태준은 황진이를 쓰기보다는 읽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대개 주장이 강하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했나보다.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 이태준이 황진이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황진이를 읽고 싶으니 누군가가 소설로 써야 한다고 말하면 그 결과가 어떠했을까? 당연히 이태준은 “그럼 당신이 쓰시오”라는 숱한 대답에 부딛힐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결국 말을 꺼낸 책임을 숨길 수 없어 붓을 들지 않았을까?

잔잡고 권할 이 없는 백호 임제

이태준은 구름같은 아득함속에서 황진이의 자취를 찾아서 작품을 탄생시켰다. “진이에 대한 욕됨이 클 줄 모르지 않는다”, “여러 선배에게는 오직 땀 흐르는 얼굴을 돌이킬 길이 없어 한다”는 그의 아쉬움, 쑥스러움에도 불구하고 ‘황진이’를 소설로서 세상에 처음으로 등장시킨 그의 공을 오늘날 한없이 칭송하여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이태준의 ‘황진이’가 있었기 때문에 최인호, 홍석중, 전경린의 ‘황진이’가 나올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결코 무리한 것은 아닐게다.  

이태준은 사료의 빈약함에 대한 아쉬움을 백호 임제가 황진의 무덤앞에서 부른 노래를 읊조리며 달래고자 했다.


청초 우거진 곳에 자난다 누었난다

홍안을 어디두고 백골만 묻혔난다.

잔 잡고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어하노라.


백호의 마음이 이태준의 마음이고 내 마음이다. 백호 임제는 조선 제일의 멋쟁이이다. 황진이의 무덤에서 이 시조를 짓고 절을 하였다는 이유로 조선의 고루한 학자들한테 얼마나 손가락질을 당했겠는가? 백호 임제는 결국 관직을 버리고 산천을 유람하면서 김시습이나 김삿갓을 능가하는 로맨티스트로서의 생을 보낸다.


세상에 태어나서 만주 땅을 못 삼켰으니

그 어느 날에나 서울 땅을 다시 밟을 것이냐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말을 재촉해 돌아가는데

눈이 시린 저 먼 하늘

짙은 안개가 걷히는구나

이렇게 풍류와 기백이 넘치는 ‘백호’ 이기 때문에 황진이 무덤 앞에서 노래를 읊을 수 있었고, 이태준은 백호의 노래를 빌어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백호와 같은 풍류가객이 전남 나주에 있는 백호의 무덤에서 흙한 줌 퍼서 박연폭포에 뿌려주었으면 한다. 남북화해의 흐름이 조선시대 최고의 풍운남녀인 임제와 황진이를 만나게 해주었다는 이야기 거리는 되지 않을까?


이태준이 묘사한 황진이

황진이와 관련된 남성은 그를 사모하다 죽은 시골총각, 소세양, 이사종, 벽계수, 서화담, 지족선사, 이생이다. 이생은 황진이가 말년에 금강산 기행을 함께 한 사람이라고 알려지고 있으나, 홍석중은 이사종과 금강산 유람을 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태준의 작품에서는 금강산 유람이 묘사되지 않기 때문에 이생은 등장하지 않고, 이사종은 황진이가 그의 노래실력에 반해서 6개월간 계약동거를 한 인물로 나온다.

나머지 남성들은 대게 잘 알려진 바와 같다. 자신을 사모하다 죽은 시골 총각 때문에 황진이가 기녀가 된다는 것은 황진이 인생의 중요한 전기이다. 이태준은 이 총각에 대한 황진이의 연민을 유달리 강조하고 있다. 황진이는 그 총각의 관에 자신의 적삼을 덮어주면, 그것으로서 반쪽 양반에 반쪽 처녀라는 놀림감이 되어 자신의 마지막이 될 거라고 직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기까지 날 사모한 사람! 인정이라면 어찌 내 장래만 생각하고 그를 위해 이만한 것에 인색할 것이냐!"며 적삼으로 관을 덮어주어 총각의 넋을 위로 한다.

조선의 풍류가객 임제가 황진이의 이런 기백에 감동하지 않았다면 그는 조선 최고의 멋쟁이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황진이가 신분제도에 저항하는 적극적인 여성이라는 것은 황진이를 이해하는 아주 일반적인 시각이다. 이태준은 이러한 시각에다 여성으로서 자신의 감정을 적극적으로 실현해가는 인물로 묘사한다. 이태준의 작품에서 황진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자신이 사랑받고 싶은 사람,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자신의 운명을 능동적으로 개척하는 여성이다. 이런 세가지 유형 가우데 하나에 해당하는 사람을 만나면 황진이의 흠모하는 정렬은 가랑잎에 붙는 불과 같이 급해진다.

이태준은 소세양, 서화담, 지족선사를 그런 대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 황진이이기 때문에 무엇을 애껴 모아두리라는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았던 그녀가 동지달 긴긴 밤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모아두고 싶어한다. 우리 시조문학사에 길이 남을 ‘동짓달 기나긴 밤을’도 이렇게 해서 태어났다. 

이태준은 ‘칠거지악’과 같은 불공평한 윤리나 도덕으로 속박받는 여성의 처지에서 벗어나, 반짝이는 별이 반짝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처럼 물 흐르듯이 자신의 감정에 자유로운 여인으로 살고 싶은 황진이라는 인물을 창조해냈다. ‘도(道)에 애닯은 것이 아닌 정(情)에 애닯은 황진이’라는 인물을 만들어서 일제 식민지 시대의 짓눌림과 갑갑함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 아마도 이태준의 의도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황진이는 지족선사를 파계로 이끈 요부가 아니라 “새가 지저귀고 물이 흘러가는 것이 거짓 자연이 아니다”는 것을 지족선사와 함께 깨닫는 여성으로 승화된다. 자기 남편이 딴 계집을 볼 때 시샘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감정인데 이를 억압하는 남성중심적 문화에 대해 비웃는 황진이, 결국 금강산 길을 택하며 종적을 감추는 것으로 이태준은 황진이에 대한 기록을 마감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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