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
정도상 지음 / 창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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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이별을 강요하는 어떤 구조

천륜의 정을 강제로 끊어버리는 구조, 그 속에 갇혀서 엄마를 그리워하며 눈물 흘린다. 마치 지척에 있다는 느낌을 주듯 가끔은 전화통화를 할 수 있다면... 물론 그 한 통화를 위해서 얼마나 가슴 졸여야 하는지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렇게 해서 몇마디 나눈다. 그러나 만날 수는 없다. 언제 다시 통화할지 알 수가 없다. 모든 것은 불확실하기만 하다. 아니 전화 한 통화의 결과로 모든 것이 다 무너져 내릴지 모른다. 한 순간도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럴수록 그리움은 더 사무친다.




“엄마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엄마의 마음은 어떨 것이며, 자식의 마음은 어떨 것인가? 애간장이 녹고, 심장이 멎으며, 그러다가 결국 억장이 무너지고 마침내 천지가 시꺼멓게 되는 느낌일 게다. 도대체 무엇이 부모와 자식을 이런 관계로 만들어버린다는 말인가.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되어 별만 세며 그리워하는 친구, 친척, 연인이 있다. 그리운 모든 사람들을 곁에서 앗아가 버렸다. 별을 보며 위안 삼고 싶지만, 보고 싶은 사람이 한두명이 아니다. 그들과 도란도란 살며 행복을 나누기에도 충분하지 않는데, 잔혹한 세상의 구조는 그들과 영원한 이별을 강요했다. 




탈북자에 대한 우리사회의 이중성

찔레꽃은 탈북자 이야기이다. 정도상이 그리는 탈북자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는 좀 다르다.

우리는 탈북자에 대해서 매우 다층적인 이해를 하고 있다. 동북3성 일대를 떠도는 탈북자에 대해서는 어떠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국내로 데려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국내로 들어오면 그때부터 그들에 대한 관심은 식는다. 그들은 우리사회 내부에 새롭게 형성된 수직적인 계층질서에서 아래 부분을 담당하게 된다.

이런 이중성이 탈북자들의 비극의 씨앗이다. 동북3성을 유랑하는 탈북자들을 국내로 데려와야 한다는 생각은 탈북자들의 상품가치를 높인다. 여기에 어김없이 이 상품 가치를 노린 브로커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막상 국내에 들어오면 이들은 차별의 대상이 될 뿐이다.

정도상은 찔레꽃에서 이런 이중성을 파헤친다. 여주인공 충심은 엄밀히 말하면 탈북자가 아니다. 그녀는 생활고 때문에 인신매매단에 속아서 인생을 유랑하기 시작한다. 조중국경지대에서 납치되어 동북3성으로 강제로 팔려가고, 다시 목숨을 건 탈출 끝에 심양, 고비사막을 거쳐 마침에 한국에서 노래방 도우미로 연명하고 있다. 노래방 도우미는 인생 유랑의 끝이 아니다.

충심의 인생유랑은 자신의 뜻과 상관없는 어떤 지독한 구조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녀의 인생유랑이란 손톱만큼의 낭만도 없이 죽음으로 내몰리는 길 그 자체이다. 유랑과정에서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사무침과 고향땅 함흥에 살고 있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오로지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버티고 있을 뿐이다.




명분으로 포장된 기획입국

충심의 인생유랑은 인신매매단에 의해 촉발된다. 이들을 국내로 들여보냈을 때 인도주의라는 명분과 몇분의 정착금을 뺏는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종교집단은 충심의 인생유랑의 연출자들이다. 탈북자들을 국내로 들여오기만 하면 이떤 형식이든지 이익이 발생한다. 그 이익을 노리는 자들에 의해서 충심의 끝없는 인생유랑이 시작된 것이다. 생사람 잡기나 다름없다. 그녀의 유랑길에서 죽어간 많은 사람들의 생명은 어찌할 것이며, 엄마와 헤어져서 날마다 눈물바다를 이루는 비극은 또 어찌할 것인가?

한국에만 가면 모든 것이 다 될 줄 알았겠지.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세계인의 관심을 끌고 있는 한국에 가면 그녀의 인생유랑은 막을 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그러나 한국에서 그녀의 삶은 맥주에 소주를 섞어 마시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운 삶이다. 그녀에게 남은 희망이라곤 이 사회에 적응해서 돈 벌어 함흥의 엄마에게 보내는 것이다. 그 과정속에서 수수료를 챙기는 브로커들도 불법이기 때문에 그게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도 없다. 그래도 그 희망이 삶을 유지시킨다. 언제 꺼져버릴지 알 수 없는 희망에 자기 삶을 걸고 있다는데서 충심의 비극적인 삶은 종말을 가늠하기 어렵다. 




이중성의 극복과 소수자에 대한 관용

정도상은 함흠의 꿈 많은 소녀 충심이 탈북자가 되어 한국에서까지 유랑하는 과정을 매우 빠른 속도로 거침없이 묘사하고 있다. 시각을 달리하면서, 또 시점을 달리하면서 전개되는 소설을 읽다보면 어느 사이 여러 시각과 다른 시점이 하나로 모아진다. 그때부터 찔레꽃 책장을 넘길 때마다 작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작가는 찔레꽃을 통해 천륜까지 단절시키는 이 지독하고 야만적인 구조를 고발하고 있다.  심양이나 고비사막을 여행하면서 작가가 목격한 것은 21세기 유랑민들의 삶의 온전성을 파괴하는 구조였다. 그는 21세기 유랑민들의 삶의 온전성을 회복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을 것이다. 

한 번 잡은 책 눈물을 훔쳐가며 끝까지 읽었다. 충심과 함흥의 엄마가 통화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눈물에 흐느낌까지 더해졌다. 충심은 엄마와 통화 후 메인 목구멍으로 보시기에 비빈 밥을 집어넣는다. 살기 위해서...

충심을 한국으로 보낸 사람들, 탈북자들의 입국을 환영하는 민심은 다 어디로 갔는가?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 다른 것이 야박한 민심이던가. 이런 이중성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통일은 접어두고 대한민국의 선진화도 있을 수 없다. 인신매매와 기획입국을 탈북자에 대한 인도주의로 치장하는 것을 묵인해서는 안된다. 탈북자를 비롯한 우리 사회의 소수자에 대해 관용하고 함께 사는 길을 찾아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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