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부메의 여름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4년 3월
구판절판


나는 암시장이 싫었다. 무질서 ─── 떼지어 몰려다니는 많은 사람들에다 난폭한 목소리, 혼돈 속에서의 압도적인 자기주장, 억척스러움 ─── 모두 내가 싫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단 한 번도 암시장에 간 적이 없었다. 그것이 인간 본래의 모습이고 힘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아마 그것은 맞는 말일 것이다. 암시장의 힘 없이 현재의 부흥은 있을 수 없었으리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인간다움이라면 ─── 적어도 나 자신은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
전쟁은 개인의 의지에 상관없이 목숨을 빼앗는다. 전쟁터에는 당연히 인간다움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다움을 동물에게는 없는 인간만의 특성이라고 가정한다면, 전쟁터에서 살육을 벌이는 이상한 행위 또한 인간다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 나는 알 수 없게 된다. 그 전쟁터에서 죽음의 공포에 들개처럼 떨고 있던, 오직 그럴 뿐이었던 나 자신이 ─── 가장 인간답다고도 생각한다.-192p쪽

어릴 때부터 남에 대한 이유 없는열등감을 씻을 수 없다. 아니, 열등감이라기보다 강박관념에 가깝다. 나는 미친 사람이고, 주위 사람들은 그것을 가엾게 여겨 이야기를 맞춰 주고 있는 거라는, 그런 어리석은 망상을 품고 있던 시기도 있었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마이너스의 힘을 가진 자기변호였을 것이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야단 맞을 때, 나는 생각했다. 왜 미친 사람을 그렇게 제대로 혼내는 거냐,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거냐 ─── 고. 또, 이런 생각도 했다. 나는 미쳤으니까 야단을 맞아도 어쩔 수 없다고.
어느 생각이나 나를 편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적극적으로 그런 부정적 망상을 좋아했던 것이다. 그러나 ─── 앞을 보지 않는 도피의 끝은 어차피 막다른 길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평상시에도 '나는 이상한 게 아닐까', '남들과 다른 게 아닐까' ─── 하는 불안을 계속 느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 나의 일상은 불안으로 가득했다. 나는 늘 타인의 시선을 신경썼다. 그러면서도 타인과 영합할 수는 없었다. 나에게 있어서 정상은 내 안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었고, 나는 어디에 있어도 이단아였다.
그래서 나는 세상과의 관계를 끊고 울증의 껍질을 뒤집어 쓴 것이다.
그러나 그 껍질은 에노키즈나 교고쿠도, 많은 친구들, 그리고 아내의 손에 의해 깨졌다.
그 노인은 과연 지금의 나를 정상으로 보았을까.-195-196p쪽

나는 미치지 않았다, 나는 정상이다, 지금까지 내가 품고 있던 것은 망상인 것이다.
─── 미친 놈이야.
나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나는 우연히 길을 물은 상대방 남자가 했던 단 한 마디를 봉해두기 위한 이유만으로 ─── 그 때의 기억 일체를 어둠 저편에 봉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암시장에 대한 혐오라는 상관없는 이유를 후에 날조하여 이 근처에 발을 들여놓는 것조차 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울증이 껍질을 깬 것이 아니다. 울증의 껍질 위에 정상이라는 껍질을 억지로 덮어쓰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
─── 연애편지.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을 떠올렸다.-210p쪽

"그럼 이 옆에 있는 작은 방이야말로 진정한 밀실이라는 뜻이 되는군요."
"그렇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7년 동안, 이 안에 들어간 사람은 없어요."
나는 실망에 가까운 것을 느꼈다.

이 곳은 밀실에 의해 구성된 밀실이었던 것이다.-296p쪽

"잘 들으십시오. 불교의 기본이념은 윤회전생입니다. 생을 다한 자는 반드시 육도 중 하나에서 다시 생을 받지요. 다시 말해 성불하지 못하고 떠돌 시간은 없어요. 불교는 본래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선다.
"─── 그럼 기독교는 어떨까요? 이 쪽은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사람은 지옥에 갑니다. 신앙을 이룬 사람은 천국으로 불려가지요. 신에 대비되는 악마는 있지만, 이 쪽도 영혼이 어쩌고저쩌고 할 틈은 없어요 ───."
하얀 가운을 입은 나이토는 약간 몸을 물리고 시선을 피한다.
"── 회교도 큰 차이는 없습니다. 코란에 따라 얼마나 알라의 뜻대로 살았는지가 문제이고, 얼마나 잘 해 왔느냐에 따라 사후에 갈 곳이 정해질 뿐이지요. 소위 세계종교라고 불리는 3대 종교 모두가 영혼의 존재를 환영하지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종교란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죽은 자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
교고쿠도는 소리높이, 그러면서도 막힘없는 어조로 말하면서 한 발짝씩 거리를 좁혀 간다.
" ── 즉 종교인이라는 것과 영혼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양립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447-448p쪽

"그렇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기는 하지요. 세키구치 군이라면 알 테지만, 우리가 지금 보고, 듣고, 체감하고 있는 이 현실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거든요. 뇌가 그 재량에 의해 선택한 정보로 재구성된 것이지요. 따라서 부분적으로 선택되지 않은 요소가 있는 경우, 당사자는 전혀 지각할 수 없어요. 기억은 갖고 있어도 의식의 무대에 올라오지 않으니까요."
"아아 ─── 우리들이 보고 듣는 것은 모두 가상현실인 셈이로군. 그것이 진짜 현실인지 아닌지 본인은 구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지 ───."


"뇌의 손상은 가령 사람의 얼굴만 식별할 수 없게 된다거나, 숫자 5라는 개념만 빠진다든가 하는, 실로 흥미 있는 사례들을 보여주지.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뇌 안에서만 살아가고 있는 것과도 같아..... "-489p쪽

미래란 아직 찾아오지 않은 과거이고, 과거란 찾아와 버린 미래이니까.-523p쪽

"책이 갖는 가치는 역사적 유물로서의 가치나 골동품적 가치만이 아닙니다. 읽는 사람에게 그것을 읽고 이해할 힘만 있다면, 설령 몇백 년이 지났다 해도 어제 써진 것처럼 가치를 낳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책은 없으니까요."-585p쪽

"인격이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한 개인 안에서도 어제와 오늘, 아침과 저녁으로 미묘하게, 아니 때로는 크게 달라지지요. 하지만 그것은 어떤 때에도 모순 없이 연속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결국 하나의 인격이라고 인식되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따라서 본래 인격은 한 개 두개라고 감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것들이 하나의 인격이라고 인식되지 않는, 또는 인식할 수 없을 만큼 괴리되어 버린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 인간에게는 인격이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뇌의 속임수입니다. 즉, 연속된 의식과 질서였던 기억의 재생이야말로, 소위 말하는 인격을 형성하는 조건인 셈이지요. 따라서 뇌 없이는 인격을 말할 수 없어요. 그리고 뇌의 어느 부분이 현재 의식을 낳고 있는지가 중요한 열쇠가 되지요. 통상 우리는 뇌의 여러 부분과 접촉하며 사회생활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회로의 어딘가가 접촉불량을 일으킬 때가 있지요. 평소에 사용하는 뇌보다 한 단계 낮은 뇌로 연결되어 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인격은 바뀌고 맙니다. 인간으로서의 섬세한 정서나 감정을 알 수 없게 되지요. 심할때는 말조차 잃게 됩니다. 동물의 본능만으로 행동하기도 하고요. 이것이 흔히들 말하는 '짐승에 씐' 상태입니다."-590-591p쪽

"일상과 비일상은 연속되어 있어. 분명히 일상에서 비일상을 들여다보면 무섭게 생각되고, 반대로 비일상에서 일상을 들여다보면 바보처럼 생각되기도 하지. 하지만 그것은 별개의 것이 아닐세. 같은 것이야. 세상은 늘, 무슨 일이 있든 변함없이 운행되고 있네. 개인의 뇌가 자신의 형편에 맞추어 일상이다, 비일상이다 하고 선을 긋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아.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당연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당연한 걸세. 되어야 하는 대로 되고 있을 뿐이야. 이 세상에 이상한 일 따윈 아무것도 없어."-624-625p쪽

딸랑, 하고 풍경이 울린다.
"덥군. 이제 완전히 여름이야."
나는 땀을 흠뻑 흘리고 있었다.
교고쿠도는 그 화난 듯한 얼굴로,
"그야 그렇지. 우부메는 여름에 나오는 걸로 정해져 있으니까."
라고 말했다.

"우부메의 ─── 여름이로군."-630p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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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부메의 여름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4년 3월
구판절판


"어때, 뭐 재미있을 만한 거 없나?"
"없네."
교고쿠도는 간발의 차도 두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니 이런 걸 읽고 있지. 하지만 말이지 ─── 재미있다, 재미없다는 자네의 척도에 따라서도 다르지만, 애초에 이 세상에 재미없는 책 같은 건 없어. 어떤 책이든 재미있는 법이지. 따라서 읽은 적이 없는 책은 대체로 재미있지만, 한 번 읽은 책은 그것보다 재미있어하는 데에 좀더 수고가 든다, 그저 그뿐일세. 그렇게 생각하면 자네에게 있어 재미있는 책은 여기에 쌓여 있는 정리 안 된 책뿐만 아니라, 그 쪽 책꽂이에 벌써 수 년 전부터 먼지를 뒤집어 쓰고 계속 꽂혀 있는 책도 해당될 걸세. 그걸 찾는 건 쉬운 일이니, 냉큼 골라서 사게나. 공부도 가끔은 해야 하지 않겠나?"-14p쪽

"원래 이 세상에는 있어야 할 것만 존재하고, 일어나야 할 일만 일어나는 거야. 우리들이 알고 있는 아주 작은 상식이니 경험이니 하는 것의 범주에서 우주의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상식에 벗어난 일이나 경험한 적이 없는 사건을 만나면 모두 입을 모아 저것 참 이상하다는 둥, 그것 참 기이하다는 둥 하면서 법석을 떨게 되는 것이지. 자신들의 내력도 성립과정도 생각한 적 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나?"-23p쪽

"마음과 뇌는 서로가 없으면 안 되는, 조직폭력배와 물장사 같은 거라네. 어느 한 쪽이 맛이 가 버리면 꽤 귀찮은 분쟁이 일어나지. 하지만 이건 각자가 만족하기만 하면 대개 수습이 돼. 뇌나 신경에는 물리적인 치료를 할 수 있고, 하지만 마음이 그런 기관들과 다르다는 증거로, 다른 기관들이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가도 분쟁이 수습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네. 그럴 때 종교가 유효하지. 종교란, 다시 말해서 뇌가 마음을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낸 신역이라는 궤변이니까."-32-33p쪽

"그런데, 자네 증조부님은 잘 계시는가?"
하고 물었다. 나는 당혹스러웠다.
"갑자기 무슨 소린가? 그렇게 얘기를 얼버무리지 말게."
"누가 얘기를 얼버무렸다는 건가? 어때, 잘 지내시는가?"
나는 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증조부님은 뵌 적도 없어. 자네도 알지 않는가? 우리 할아버지도 내가 다섯 살 때 타계하셨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귀적에 오르셨는걸."
"그럼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자네는 모르겠군."
"존재하지 않을 리가 없잖은가. 실제로 그 증손자인 내가 존재하니까."
"뭐, 그건 좋아. 그럼 자네의 할아버지는 어때? 존재하는가?"
"지금 말했잖은가. 할아버지는 다섯 살 때 돌아가셨어. 이것은 내가 아무리 바보라도 기억이 있으니, 존재한 것이지."
"자네가 그 기억째로 태어났다면 어떻겠나? 쉽게 말해서 자네가 이 세상에 탄생한 것은 방금 전, 이 곳에 오기 직전이고, 자네는 그 때까지의 기억을 전부 다 가진 채 이 세상에 뚝 떨어진 것이라 해도, 지금의 자네로서는 구별할 수 없지 않은가? 내 말이 틀렸나?"-45p쪽

나는 갑자기 바다에 내던져진 갓난아기 같은 공포감을 느꼈다. 아니, 공포라기보다는 쓸쓸함이나 공허에 가깝다. 마치 진흙 배가 바다에 녹아 버린 것 같았다.
"그런 일 ─── 아니, 그런 바보 같은 일은 있을 수 없어. 나는 날세."
"어떻게 아나? 자네로서는 판단할 수 없을 텐데. 자네의 추억도, 자네의 현재도, 전부 방금 전에 자네의 뇌가 적당히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르지 않나? 마치 공연 첫날 개막 직전에 아무렇게나 갈겨쓴 극작가의 대본처럼 말일세. 언제 다 썼는지는 ─── 손님인 자네로서는 전혀 알아볼 수 없는 거지."-46p쪽

"가상현실과 현실의 구별은, 자기 자신은 절대로 할 수 없는 법이야. 세키구치 군. 아니, 자네가 세키구치 군이라는 보증조차 없는 걸세. 자네를 둘러싼 모든 세계가 유령처럼 가짜일 가능성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과 똑같이 존재한다네."-46p쪽

"자네에게도 치료의 효과가 있군. 그 말 그대로일세. 말이라는 것이 바로 주술의 기본이야. 자네에게는 '세키구치 다츠미'라는 주가, 내게는 '교고쿠도'라는 주가 걸려 있는 거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용하고 있지만 말이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분명히 존재했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옛날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기록이지, 결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아는 게 아닐 걸세. 선에서 말하는 불립문자(불도의 깨달음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이지, 문자나 말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라는 거지. 이에야스의 존재는 사실이라도, 우리들에게 '이에야스'는 현실이 아닌거야. 하지만 우리들은 때로 이에야스를 알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네. 이것은 '이에야스'라는 말이 가져오는 정보를 담고 있는 기억의 창고와, 우리들의 실제 체험을 담고 있는 기억의 창고가 같은 창고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오류일세. '말'에 의한 정보도 '체험'한 정보도 '기억'이 되면 결국 똑같아져 버리거든. 즉 우리들은 만난 적도 없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유령을 보게 될 가능성도 있다는 거지."-61p쪽

에노키즈는 그제야 내 쪽을 보았다.
단정한 얼굴. 놀랄 만큼 커다란 눈. 다갈색을 띤 눈동자. 피부색깔도 동양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늘 만큼 하얗다. 햇빛이 비치면, 머리카락 색깔조차 밤색을 뛰어넘어 갈색으로 보인다.
색소가 옅은 사람이다.
아아, 서양 도자기인형을 닮았다, 하고 생각했다.-118-119p쪽

"어쨌든 자네의 이야기는, 사실 관꼐는 애매하고 시간 관계는 뒤죽박죽인 데다 시점까지 이리저리 바뀌어서, 젼혀 요령이 없지 않은가. 그걸 일일이 질문하다가는 시간이 걸릴 테니 일단 전부 듣고, 내 나름대로 정리하고 나서 말하려고 한 걸세. 딱히 자네 쪽을 보지 않았다고 해서 듣고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니야. 귀는 닫을 수 없는 법이니, 그렇게 옆에서 주절주절 떠들어대면 듣기 싫어도 들린단 말일세."-120p쪽

"그렇다네. 꿈에는 물론 소리나 냄새나 맛도 있지만 대개는 시각이 중심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것은 코나 귀나 피부는 자고 있는 동안에도 변함없이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야. 귀는 닫을 수가 없으니 말일세."-170p쪽

"그래. 몇 번이나 말했듯이 기억에는 의식에 등장하지 않는 것도 많이 있어. 이보게, 세키구치 군, 자네는 자주 건망증을 일으키곤 하지 않는가. 뇌가 아무리 기억을 재구성해주어도, 어떤 착오가 일어나 어찌 해도 의식의 무대에 올라오지 않는 것일세. 물건을 잃어버리는 것은 대개 본인이 잃어버리는 셈이니, 뇌는 알고 있다는 뜻이 되지."-174p쪽

"알겠나, 새키구치? 주체와 객체는 완전히 분리할 수 없어─── 다시 말해 완전한 제삼자란 존재할 수 없는 걸세. 자네가 관여함으로써 사건도 변하게 되네. 그러니 자네는 이미 선의의 제삼자가 아니게 된 거야. 아니, 오히려 자네는 이제 당사자가 되었네. 탐정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 사건도 있어. 탐정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란 말일세. 알겠나? 마른 과자는 뚜껑을 열었을 때 그 성질을 획득했을 가능성도 있단 말일세. 사건도 마찬가지야."
딸랑, 하고 또 풍경이 울린다.
남매는 말없이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179p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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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 빛나는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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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함, 이란 무츠키에게는 상당히 소중한 것인 모양이다. 성실하기 위해서라면 그는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친족 회의처럼 성가진 희생이라도 말이다. 덕분에 나는 무츠키의 몫까지 챙겨 점점 불성실해진다.-171p쪽

무츠키와 잘 수 없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태연하게 부드럽고 자상한 무츠키를 견딜 수 없다. 물을 안는 기분이란 섹스가 없는 허전함이 아니라, 그것을 서로에 대한 콤플렉스라 여기고 신경을 쓰는 답답함이다.-183p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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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 범우문고 2
법정스님 지음 / 범우사 / 2004년 5월
절판


아름다운 장미꽃에 하필이면 가시가 돋쳤을까 생각하면 속이 상한다. 하지만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가시에서 저토록 아름다운 장미꽃이 피어났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감사하고 싶어진다. <너무 일찍 나왔군>-30p쪽

이해란 정말 가능한 걸까.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가 상대방을 이해하노라고 입술에 침을 바른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에서 영원을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 이해가 진실한 것이라면 항상 불변해야 할 텐데 번번히 오해의 구렁으로 떨어진다.-31p쪽

나는 당신을 이해합니다 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언론의 자유에 속한다. 남이 나를, 또한 내가 남을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이해하고 싶을 뿐이지.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타인이다.-31p쪽

'자기 나름의 이해' 란 곧 오해의 발판이다. 우리는 하나의 색맹에 불과한 존재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 색맹이 또 다른 색맹을 향해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안달이다.-32p쪽

오해란 이해 이전의 상태 아닌가. 문제는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다. 실상은 말 밖에 있는 것이고 진리는 누가 뭐라 하건 흔들리지 않는다. 오전한 이해는 그 어떤 관념에서가 아니라 지혜의 눈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 이전에는 모두가 오해일 뿐이다. <오해>-33p쪽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든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이다. <설해목>-34p쪽

사형수에게는 일분 일초가 생명 그 자체로 실감된다고 한다. 그에게는 내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오늘을 살고 있는 것이다. <종점에서 조명을>-40p쪽

용서란 타인에게 베푸는 자비심이라기보다, 흐트러지려는 나를 나 자신이 거두어들이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탁상시계 이야기>-47p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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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2 조반니노 과레스끼 선집 2
죠반니노 과레스끼 지음, 이승수 옮김 / 서교출판사 / 2006년 5월
구판절판


시계를 멈추게 할 수는 있지만 시간을 멈추게 할 수는 없어.-43p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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