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의 탄생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4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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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정치철학자를 한 줄도 인용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담론도 '비판적'이라는 꼬리표를 달기 힘든 한국 출판계에서 우석훈은 경제학과 같은 '딱딱한' 사회과학의 역할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저자이다. 왜 사회과학인가? 세상에는 '불평등'이 있고 그에 대해 알만큼 아니, 뻔한 소리 술맛 떨어지는 이야기는 집어치우자고 말하는 뻔뻔한 시대에 우석훈은 사회과학에 아직 어떤 '역할'이 남아있음을, 아니 어쩌면 애당초 자칭 '사회과학'들은 시작도 하지 않은 채 지나가버린 '역할'이 있다는 것을 논한다. 그리고 나아가 그 '역할'을 짊어지지 않고 지나가버린 대가를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톡톡히 치르고 있는지 보여준다. 

 1부의 경제학사, 자본주의 시기 구분은 경제학이나 사회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리 낯선 내용이 아니다. 우석훈은 여기서는 기존 학계의 논의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헌데 재밌는 건 그렇다고 해서 그 도식에 매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지 않은 수의 자칭 '좌파' 담론, 특히 학생 운동 진영은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을 거의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이에 반하여 자신들의 '좌파'적 정체성을 규정한다. 이런 식의 운동은 말잔치, 정치적 자위행위에 그치기 쉬운데 그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이 포괄하는 구체적 현상들에 대해서 사유하는 것을 거의 포기하기 때문이다. '무자비한 시장', '민영화', '자본의 논리'같은 애매모호한 말들만이 넘칠 뿐이지 '신자유주의'가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을 어떻게 위협하고 있고 이를 어떤 식으로 구체적으로 이에 대응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신자유주의'만큼이나 추상적이고 공허한 '저항', '투쟁'등이 당위적이고 도덕적인 차원의 수다들이 반복된다. 결국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을 붙잡고 그 둘레에서 이뤄지는 저항(도덕주의적 좌파) 또는 비판적 분석(강단 사회과학계)은 스스로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을 창출하는 대신, '대안'을 구상하고 실행한 책임을 정권, 지배 체제에 넘기고 '누구 탓'인지 따지는 데 시간을 보내는 불평꾼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뭐니뭐니해도 2부의 여섯번째 강의 즈음에서부터 이어지는 '한국 자본주의의 특수성 분석'이다. 1부의 다소 식상한 자본주의 도식에도 불구하고, 우석훈은 이 '신자유주의'에 대해 '구체적'으로 사유하길 멈추지 않는다. 내 생각에 자본주의는 뚜렷한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자본주의는 시장경제 이상의 '어떤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생물학적/사회적 생존이 '화폐'에 의해 매개되어 있음을 말한다. 다국적 대기업의 진입과, 인간적인 교류들이 계산적 이해관계로 대체되는 속도를 자본주의화의 척도로 보는 것은 전혀 좌파적이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세상이 이제 망하려나 보다'식의 보수주의적 개탄과 더욱 가깝다. 

 때문에 어떤 구체적 단위(이를테면 우석훈에게는 한국이라는 국가)에서 일어나는 '특수'한 문제들에 대한 구체적 분석은 거시적 자본주의에 대해서 사유하길 포기하고, 맑스의 성과를 무시하고 부르주아 경제학적 분석으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특수'한 문제들에 대한 '구체적' 분석은 자본주의의 '보편성'을 이해하고 그에 대응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다. 우석훈은 과잉된 교육열, 지방과 수도권의 불균형, 토목경제, 환경파괴, 비정규직, 청년실업 등 지겹게까지 비판담론의 주요 대상들을 도덕주의적/계몽주의적 훈계가 아니라, 지극히 경제학적인 시각에서 차분히(그에게 왠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만) 분석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다양한 문제들이 하나의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맥락을 통해 설명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의 서사가 노동착취, 비정규직 문제 등에 국한되고, 주류 경제학자들의 서사가 '물론 여기저기 문제가 많지만 몇 년만 참으면 다같이 잘 살 수 있다'는 식의 이제는 일종의 최면주문처럼 들리는 이야기를 반복해 온 점을 생각해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우리가 '뭉쳐야(경제위기에 맞서 혹은 한나라당의 지배정권에 맞서) 된다'고 설교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이미 뭉쳐있음'을, 어떤 운명을 공유하고 있음을 그저 보여줄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좌파적 담론이다. 좌파는 납득할 '이유'를 말하지 '도덕'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결론적으로 제3부문의 성장을 통한 국가, 시장과의 균형을 통한 건전한 국민경제라는 대안을 제시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대안이 크나큰 신뢰가 가지 않는다. 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 경제로 이행해야 되고 그를 위해 제3부문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할 때, 그는 무엇을 성취하고 싶은 것인가? 그의 분석들이 자본주의의 보편적 실재를 설명하는 데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음에도 그는 그런 식으로 논의를 이어가지는 않는다. 대신 그는 이와 같은 산재해 있는 문제를 '한국 자본주의의 특수한 문제'로 국한한다. 때문에 한국 자본주의의 문제는 국지적인 시스템의 오작동에서 비롯된 것이지, 자본주의 자체의 보편적 본질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예감'의 성격이 강하다만 나는 저자의 낙관주의적인 성향에 적지 않은 불신을 가지고 있다. '공포경제학'이라는 별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독자를 고려하면서 너무 '쉽게' 이야기하고 또 너무 '쉽게' 긍정하고 명랑해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식이든 현실에 대한 '적극적 대안'을 '쿨하지 못하게' 제시했다는 점은 무척 흥미롭고 고무적이다.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미래'를 말해야 할 좌파들의 입에서 우리는 '볼멘 소리'만을 듣게 되었다. '탁상공론 식의 대안연구보다는 지금 고통받는 이를 위해 거리로 나서야 한다' '우리는 옳은 일을 한다만 대중이 안 따라주니 답답할 뿐이다' 등등. 남들이 알아주던 말던 자기 일을 꿋꿋히 해나가는 것이 세상을 바꾸겠다고 자임하는 이들의 1차적 책임이다. '현실투쟁'도 '대중계몽'도 중요하다만 '미래를 만들기 위한 준비'라는 좌파적 소임이 갖춘 상황에서나 중요한 말이다. 어쩌면 '고통받는 오늘'에 대한 그 끊임없는 수다들은 '미래'에 대해서 침묵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추상적' 슬로건을 반복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구체적' 변혁을 회피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우석훈은 이 수다들을 뚫고 다소 허무맹랑하고 빈틈도 없다만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낸 보기 드문 사회과학 저자다. 이에 대해 (리뷰어와 같이) 냉소를 보내기란 쉬운 일이다. 허나 다들 대강 넘어가고 나중에 해치우려던 '숙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것, 그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그 대안이란 게 이토록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비판적 분석에 근거하고 있을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절망'의 배수진을 치고 서투르게나마 '희망'을 얘기한다는 것. 우석훈은 오늘날 글을 통해서 어떤 좌파적 실천이 가능할지에 대해서 몸소 보여주고 있다. 만약 우리가 "좌파"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함에도 "우석훈"을 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우리가 강렬한 자기기만의 열정에 휩싸여 있다고 설명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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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슴츠레 2009-01-06 19:32   좋아요 0 | URL
흥분해서 글을 썼다만, 몇 가지 오버한 부분이 있어 지적한다.

1. 우석훈은 좌파가 아니다. 그의 대안은 정직한 '제3의 길', 창조적 경제를 육성하자는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입장이다. 그는 세계경제에 닥친 금융위기를 보고도 그에 대해 한국이 취해야 할 태도를 고려하지는 않는다. 태도에 있어서 그는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라며 장기적 관점을 거부한 케인즈스러운 면모를 보인다.
'좌파'가 아니라고 자임하는 점에서 정직하다. 그러나 대안 제시에 있어서 너무나도 막연하다. 게다가 자본주의의 근본적 속성과 세계경제를 사유하는 데 있어서는 게으르다. 더 강하게 표현하자면 나이브하다.

2. 나 자신은 우석훈에게 '좌파'의 비전을 봄에 있어 경제주의적 시각을 채택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물론 좌파가 복잡한 경제학 공부를 포기하면서부터 각종 사회 문제들을 통합적으로 사유하지 못한 공백, 그리고 했다하더라도 대중이 이해할 형태로 가공해내지 못했다는 태만(어쩌면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을지도?)을 우석훈이 지적하고 메꾸고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이런 입장에 경도될 경우, 그 어떤 정치적 실천도 무의미하다고 냉소하는 허무주의적 경제주의에 빠진다. 이 점은 고려되어야 한다.

게슴츠레 2009-01-09 19:45   좋아요 0 | URL
때문에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세 가지이다.

1. 지역경제의 자립구조 건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허나 이 질문은 조금 무리하다는 생각이 든다. 보다 정당하고 진짜로 묻고 싶은 것은 다음 둘이다.

2. 세계자본주의 구조에서 제3부문을 강화하여 국민경제를 재구축한 대한민국의 '자리'는 어디인가? 얼핏 보기에 제3부문이란 포스트-포디즘 패러다임에 적합한 고급 소비재를 생산하자는 소리로 들린다. 우석훈이 선진국을 살펴봤을 때 제3부문들이 조금씩 있다더라 할 때 이는 보다 명확해진다. 제3부문이란 별다른 게 아니라 그저 사치재 생산이라는 선도산업을 점유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포스트 포디즘에 적응한 국가란 자본/국가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역에 진출한 나라가 아니라 가장 자본주의적인 국가일 것이다. 결국 자본주의가 야기하는 전세계적 모순에 눈을 감는 경제적 국가이기주의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또한 글로벌한 금융위기가 닥친 이 시점에서 이와 같은 산업전환은 단기적으로 보다 심각한 경기침체를 야기할 수 있지 않은가? 허나 우석훈은 이를 염두에 두진 않았다. 때문에 이를 '위대한 선택' 일종의 도박이라 칭한 것이리라. 허나 장기적으로는 전망이 '정말'괜찮은가?

3. 개인적으로 나는 모 학교에서 생협을 만들려고 준비 중이다. 대학생협이 학교 자본/권력 구조에 있어서 미칠 수 있는 변화란 무엇인가? 대학생협은 정말 세계를 변화시키는 한 알의 모래알이 될 수 있는가, 아니면 그저 생태주의 메세지의 게릴라식 전파와 유기농 식품을 판매하고 생태주의적 생활방식이라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주장하는 단체에 자신의 역할을 국한해야 하는가?

놀이네트 2009-01-31 19:18   좋아요 0 | URL
리뷰 감명깊게 잘 봤습니다.

우석훈씨가 요즘 밀고 있는 게 제3부문인데, <소유의 종말>을 좀 참고했는지가 저는 궁금합니다. <소유의 종말>에서 리프킨은 제1부문과 제2부문이 제3부문과 다른 점을 '놀이'라는 과정과 원리로 아주 명료하게 보여주었는데요. 우석훈씨는 정말 제3부문을 생협이나 하이엔드급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때가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