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날의 이데올로기적 자세를 특징짓는 두 가지 특징─냉소적 거리두기와 편집증적 환상에 대한 완전한 의존─은 엄밀히 공의존적이다: 오늘날의 전형적 주체는 그 어떤 공적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도 냉소적 거리를 보이면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음모와 위협과 타자의 향유의 과도한 형태들에 관한 편집증적 환상에 탐닉하는 자이다. 큰 타자(상징적 허구들의 질서)에 대한 불신은,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주체가 거부하는 것은, '타자의 타자' 즉 실제로 '배후 조종'을 하면서 쇼를 진행하는 비밀스럽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전능한 행위자가 있다는─눈에 보이는 공적 권력 배후에 또 다른 외설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 구조가 있다는─믿음에 의존하고 있다.-588쪽
강렬한 성적 쾌락에 대한 이 섬뜩한 무관심은 즉각적 만족과 쾌락추구에 열심인 바로서의 후근대적 사회라는 공식 이데올로기와 완전히 대조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주체는 자신의 삶을 쾌락에 바치며 예비적 행위(조깅, 마사지, 선탠, 크림과 로션 바르기……)에 너무 몰두하기 때문에 자신의 노력의 공식적 목표의 매력은 시들어 버리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거리나 첼시를 조금만 걷다보면 수백 명의 게이들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엄청난 에너지를 들여 보디 빌딩을 하고 있으며, 늙는다는 두려운 가능성에 강박적으로 사로잡혀 있으며, 쾌락에 헌신하고 있지만, 분명 항구적 불안 속에서 그리고 궁극적 실패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597쪽
부성적 권위의 이런 붕괴는 두 개의 측면을 갖는다. 한편으로 상징적 금지적 규범들은 점차로 (사회적 성공이라든가 멋진 육체와 같은) 상상적 이상들에 의해 대체된다. 다른 한편으로 상징적 금지의 결여는 사나운 초자아 형상들의 재출현에 의해 보충된다. 따라서 우리는 극도로 나르시시즘적인 주체를 갖는다. 그는 모든 것을 자신의 불확실한 상상적 균형에 대한 잠재적 위협으로서 지각한다(희생양 논리의 보편화를 예로 들어보자. 다른 인간과의 모든 접촉은 잠재적 위협으로서 경험된다. 타인이 담배를 피우면, 타인이 탐욕스럽게 나를 쳐다보면, 그는 이미 나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나르시시즘적 자기-폐쇄는, 교란되지 않은 균형 속에서 자유롭게 부유할 수 있게 해주기는커녕, 초자아의 즐기라는 명령의 부드러운 (것만은 아닌) 자비에 주체를 내맡긴다.-5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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