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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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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밤 가졌던 술자리의 숙취를 이겨내 보려고 밖으로 나가 담배를 문다. 친구들과 젊음을 어떻게 보낼까 논쟁하다 필름이 끊긴 듯 하다. 아픈 머리를 식히기 위해 저기 멀리 심어진 나무들을 본다. 아니 나무들이 보인다. 그 숲을 보고 있노라니 귓가에 쟁쟁쟁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그러나 그 소리는 내 젊은 날의 숲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다. 나의 숲에서는 어떤 소리가 날까. 


 2007년 여름, 나는 스페인에 있는 산티아고를 향해 걷고 있었다. 저 옛날 파울로 코엘뇨가 울면서 걸었다는 그 길 위에서 나는 몇 개의 숲을 지났다. 그 숲에서, 이국의 모기들의 앵앵거림과 얼굴에 계속해서 걸리는 거미줄의 틈바구니 속에서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 두려움은 단순히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 외에도 젊은 날의 인생을 어떻게 살지 확신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무력감이기도 했다.  


 김훈에게 있어 글쓰기는 밥벌이의 수단일 뿐이다. 밥벌이는 거시적이기보다는 미시적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은 사회성을 배제하고 인물에만 천착하는 듯이 보인다. ‘불의를 비판하지 않으면 지식인일 수 없고, 불의에 저항하지 않으면 작가일 수 없다’는 노신(그 외 여러 현인들의 명언을 인용하며)의 말을 서두에 붙이며 비장하게 신작을 낸 조정래와는 상당히 대비되어 보인다. 로쟈의 말을 빌리자면 이는 작가의 허무주의로부터 나오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인물에의 강조는 쿤데라의 소설 속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쿤데라의 소설 속 인물들은 생에 있어서의 무능력하고 나약함을 사건들의 메타포에의 집착으로서 드러낸다. 나는 김훈이 자신의 소설 속 인물들을 그려내는 방식에서 쿤데라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주체성의 의미를 축소시킨 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와 쿤데라)가 다루는 인물들은 사회가 낳은 존재이다. 임진왜란이라는 절체절명의 상황, 그리고 중상모략이 판치던 당대의 정치판에서 치열하게 생존과 승리를 모색하는 이순신이라는 인물의 탄생은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물론 그 인물에 집중하게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강렬하고 아름다운 문장이지만.  


 신작 ‘내 젊은 날의 숲’에서도 그의 문장은 여전히 함축적이고 아름답다. 그럼에도 전작에서와 같이 쉬이 읽혀 내 마음에 쟁쟁쟁 소리를 내지는 못한다. 그것은 이 작품의 조연주에게서 ‘나’의 과거를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연주가 안요한과 그의 아들에게서 느낀 결핍은 기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핍, 그 관계의 결핍은 그녀에게 부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대인에게 관계는 안식보다는 삶을 지치게 만들기도 하기에. 그녀의 삶의 테두리 내에 지겹게 얽혀있는 좆내논, 그녀의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의 아버지는 비루함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다. 축 늘어진 몸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생식기를 내세우거나, 아편중독환자이면서 자신이 모시던 독립운동가의 기일에 술을 마시며 울부짖고, 상사에게 충성을 다하여 식솔들을 먹여 살리면서도 정작 가족 앞에서는 '옆구리로만 숨을 쉬어야 하는‘ 모습은 그저 비루하다. 


 그녀가 아버지를 서어나무에 비유하고 안요한에게서 어느 정도의 매력을 느끼는 것은 이러한 비루함의 연속을 끊고 싶은 내면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천국은 ‘사람이 여자의 자궁 속에 점지되어 탯줄로 연결되거나 사람끼리 몸을 섞어서 사람을 빚고 또 낳는 인연이 소멸된 자리’로 상상된다. 


 참으로 지독하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의 비루함이란, 그리고 그 비루함은 인연(因緣)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이 슬프다. 가장으로서 밥벌이의 소중함과 지겨움을 이야기하는 김훈에게 어찌 보면 인연이란 그렇게 지독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김훈은 희망을 말한다. 미루고 미루다가 신우에게 미술을 가르치게 되고, 김중위의 현재를 그리며 수목원을 떠나는 조연주의 모습은 관계의 희망을 말하는 듯하다. 이전에 가졌던 비루한 관계는 뒤에 놓아두고 새로운 친숙함을 쌓아가길 바라는, 이 희망은 ‘여생의 시간들이, 사랑과 희망이 말하여지는 날들이기를’ 갈구하는 겁 많은 작가의 바람일 것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조연주에게 동화되어 갔다. 인간관계로 인해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모습이 떠올라서이다. 그러나 그 늪에서 빠져나왔을 때 나는 희망을 보았고, 그리고 느꼈다. 어느 누구도 보증해주지 못하는 삶 속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김훈의 이번 소설이 그동안의 작품들 중에서 읽는 속도가 가장 늦었음에도 가장 공감하는 이유다. 
 

 나의 인생, 여전히 길은 보이지 않는다. 고민은 계속된다. 삶의 방식을 논하기에 나는 너무나 젊다. 쟁쟁쟁은 김훈이 세상을 눈이 뚫어져라 쳐다보며 들은 소리, 나는 인생이란 숲을 뚫어지게 보았을 때 어떤 소리를 들을 것인가. 눈이 뚫어져라 삶에 집중한다면 희미하게나마 들을 수 있을까. 아니 들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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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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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수명은 평균 여든 살이다. 각자는 이러한 기간을 셈에 넣으면서 자신의 삶을 상상하고 조직한다. ... 왜냐하면 조국이라는 개념 자체는, 그 단어의 고귀하고 감상적인 의미에서 볼 때, 우리네 삶의 상대적인 짧음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 사랑이라는 개념(위대한 사랑,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랑)도 아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좁은 한계에서 생겨난 것 같다. 

 

 쿤데라의 향수를 읽고 불현듯 글이 쓰고 싶어졌다. 애초 최근에 읽고 있는 홉스봄의 무게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 어떤 소설을 읽을까 고민하다 다시금 택한 것이 쿤데라였다. 그런데 그는 또다시 나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무거운 물음을 던지고 있다.

 

 여타 그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향수'에 나오는 인물들은 생에 있어서의 무능력하고 나약함을 사건들의 메타포에의 집착으로서 드러낸다. 나는 인간의 주체성의 의미를 축소시키는 듯한 쿤데라의 인간관에 대해 대부분 동의하지 못하지만, 이 소설이 다루는 인간에 관해서는 큰 반론을 제기할 수가 없다. 책을 읽는 내내 떠올랐던 단상들이 막상 글을 쓰려는 이 순간에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공유하는 사건에 대한 기억의 차이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이야기한다. (홍상수는 오수정에서 보잘것없는 수저를 통해 이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중요한 것은 그 차이가 일으키는 결과이다. 차이는 개개에게 작용하는 서로 다른 메타포를 발생시키며, 이에 대한 집착은  파국을 낳는다.

 

 역사를 동시대인들의 기억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역사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은 이를 통해 설명이 가능해진다. 문제는 차이로 인한 파국을 어떻게 막을까이다.

 

... 그들의 일상 대화는 그들의 기억을 일치시킨다. 암묵적이고 무의식적인 동의를 통해 그들은 삶의 광대한 영역을 망각 속에 집어넣고 몇개의 똑같은 사건들만 되풀이해서 말하는데, 그로부터 ... 그들이 함께 살았음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똑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쿤데라는 일상의 대화속에서 이뤄지는 암묵적이고 무의식적인 동의가 서로 다른 기억의 차이를 일치시킨다고 말한다. 관계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이러한 기억의 일치는 서로가 배려하며 행하는 양보라 할 수 있다.

 

 역사에 대한 해석의 차이의 봉합에 있어서도 이러한 접근은 유의미할 것이다. 그렇기에 서로 다른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집단들은 파국을 막기 위해 끊임없는 일상의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이러한 대화는 진지하게 이뤄진 적이 거의 없으며, 기억의 불균형을 뒤집기 위해서는 늘 폭력이 수반되어야 했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이 불균형은 언제나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자들의 고집으로부터 비롯된다. 현재의 체제는 많은 도전이 있었음에도 근본적으로 바뀐적이 없으며, 따라서 책임은 언제나 그들의 몫이다.

 

 그나마 현재 우리가 이전 시대에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앞서 언급한 불균형을 뒤집기 위한 폭력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놈의 폭력은 계속되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아마 세상이 완전히 새롭게 변하는 순간까지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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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통신
손석춘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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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땅에 많은 분들이 포기(?)해버린 세대에게 희망을 가지고 계신 손석춘님에 모습에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손석춘님의 기대에 못 미쳐서도 아니고, 여러 현상들에 대해 무관심해서도 아닙니다. 손석춘님이 갖고 계신 희망을 저는 한동안 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책이 저에게 잊고 있던 희망을 일깨워준 지금. 저와 같이 희망을 잊고 있을 '젊은 벗'들에게 추천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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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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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작은 학교부터 넓게는 사회생활까지, 우리는 남들을 평가하고 분류하며 산다
그런데 과연 우리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남의 개성이라는 걸 중시한다는게 참으로 중요하겠다 라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나랑 안맞는다고 '너는 나의 적' 아니면 '넌 나랑 의견이 잘맞으니 내편' 이런 식의 이분법으로 분류하고 아니면 또 다른 식으로 다양하게 분류하는것보다는, 오히려 '아 이 사람은 이런 개성을 가지고 있구나. 그냥 그런 사람인거야.' 이렇게 그 사람을 그 자체로만 보고 인정해주는게 낫지 않을까? 그것이 프랑스인들이 알게 모르게 실천하는 똘레랑스(관용)과도 관련있는 것일테고. 사회 시간에 배우는 다원주의 사회의 일원으로서 해야할 당연한 자격(?)같은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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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대한민국 1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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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해본 책입니다... 귀화한 러시아인인 저자는, 제가 볼때 지식인 계층을 제외한 다른 한국인보다는 더 글을 잘쓰는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한국인이 아닌데도 한국인보다 더, 우리말을 활용하는 그의 글솜씨에 정말 감탄하지 않을수가 없더군요. 내용도 정말 공감이 가는부분, 한번쯤 생각해볼만한 것들이 많더군요... 특히 우리의 잘못된 민족주의 부분은, 특히 공감이 갑니다. 어릴때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 교과서 부터 군대생활까지...

거의다가 잘못된 민족주의와, 연령에 따른 서열매기기 등을 알게모르게 가르치는 사회. 하지만 더 화가 나는것은 기득권들은 그것을 고칠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화하려고 한다는것. 정말 화가납니다. 물론 외국인의 눈에서 봤기때문에 약간 '이건 아닌데..'하는 생각이 든 부분도 있었지만, 크게 부담되는 수준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보다 이 책을 읽고 얻게 되는 점이 많을 거라 느껴집니다. 시간되시면 한번쯤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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