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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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간의 수명은 평균 여든 살이다. 각자는 이러한 기간을 셈에 넣으면서 자신의 삶을 상상하고 조직한다. ... 왜냐하면 조국이라는 개념 자체는, 그 단어의 고귀하고 감상적인 의미에서 볼 때, 우리네 삶의 상대적인 짧음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 사랑이라는 개념(위대한 사랑,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랑)도 아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좁은 한계에서 생겨난 것 같다. 

 

 쿤데라의 향수를 읽고 불현듯 글이 쓰고 싶어졌다. 애초 최근에 읽고 있는 홉스봄의 무게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 어떤 소설을 읽을까 고민하다 다시금 택한 것이 쿤데라였다. 그런데 그는 또다시 나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무거운 물음을 던지고 있다.

 

 여타 그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향수'에 나오는 인물들은 생에 있어서의 무능력하고 나약함을 사건들의 메타포에의 집착으로서 드러낸다. 나는 인간의 주체성의 의미를 축소시키는 듯한 쿤데라의 인간관에 대해 대부분 동의하지 못하지만, 이 소설이 다루는 인간에 관해서는 큰 반론을 제기할 수가 없다. 책을 읽는 내내 떠올랐던 단상들이 막상 글을 쓰려는 이 순간에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공유하는 사건에 대한 기억의 차이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이야기한다. (홍상수는 오수정에서 보잘것없는 수저를 통해 이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중요한 것은 그 차이가 일으키는 결과이다. 차이는 개개에게 작용하는 서로 다른 메타포를 발생시키며, 이에 대한 집착은  파국을 낳는다.

 

 역사를 동시대인들의 기억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역사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은 이를 통해 설명이 가능해진다. 문제는 차이로 인한 파국을 어떻게 막을까이다.

 

... 그들의 일상 대화는 그들의 기억을 일치시킨다. 암묵적이고 무의식적인 동의를 통해 그들은 삶의 광대한 영역을 망각 속에 집어넣고 몇개의 똑같은 사건들만 되풀이해서 말하는데, 그로부터 ... 그들이 함께 살았음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똑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쿤데라는 일상의 대화속에서 이뤄지는 암묵적이고 무의식적인 동의가 서로 다른 기억의 차이를 일치시킨다고 말한다. 관계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이러한 기억의 일치는 서로가 배려하며 행하는 양보라 할 수 있다.

 

 역사에 대한 해석의 차이의 봉합에 있어서도 이러한 접근은 유의미할 것이다. 그렇기에 서로 다른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집단들은 파국을 막기 위해 끊임없는 일상의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이러한 대화는 진지하게 이뤄진 적이 거의 없으며, 기억의 불균형을 뒤집기 위해서는 늘 폭력이 수반되어야 했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이 불균형은 언제나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자들의 고집으로부터 비롯된다. 현재의 체제는 많은 도전이 있었음에도 근본적으로 바뀐적이 없으며, 따라서 책임은 언제나 그들의 몫이다.

 

 그나마 현재 우리가 이전 시대에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앞서 언급한 불균형을 뒤집기 위한 폭력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놈의 폭력은 계속되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아마 세상이 완전히 새롭게 변하는 순간까지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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