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행렬 

   유병록 

 

 관을 내려치는 못질처럼 비가 쏟아진다 

 구름의 시절은 땅속으로 질주해 사라진다 어쩌다 이 땅에 도착한 물방울은 이제 부서진 몸으로 딱딱한 세계의 한쪽 귀퉁이에서 길을 시작한다 

 흘러가는 것은 천천히 추락하는 것 

 굽이를 지나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리는 물방울, 투두둑 뼈가 부서지고 요동치던 체온이 탈출한다 살점이 공중으로 튀어 오른다  

 수차례 정신을 잃고 혼절하는 물방울 

 누군가의 통증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주 오래된 오해, 구름조차 지상의 비명을 이해하지는 못할 것 

 더는 견고한 무엇도 남아 있지 않은데 무엇도 물을 일으켜 세우지 못하는데 

 누더기를 걸친 성자의 행렬처럼 흘러가는 물, 조금씩 더 남루해질 테고 지상에서 끝내 구름의 체온을 회복하지 못한 채 증발해 버리겠지만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동그라미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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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유병록 

  

둘로 쪼개진다 

부풀어 오르면 균열이 많아지고 반경이 넓어지면 경계가 길어지는 

팽창의 역사가 수없이 증명해온 습성 

커다랄수록 사과는 쉽게 쪼개진다 쉽게 둘이 된다 

한때 지척이었던 거리는 아득해진다 

사이에 계곡이 깊고 안개가 끼고 어둠이 주둔한다 

간극에 다리를 놓아도 금세 썩어 크레바스로 무너져 내리고 

건너간 자는 아주 드문 곳 

균열은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너지는 것을 위해 찾아온다 

시간에 누적된 미세한 균열은 뒤늦게 발견된다 

균열의 나이테라 불리는 시간 

쪼개진 단면은 붉게 변해 서로 낯선 얼굴을 한다 

비애가 탄생하고 죄와 용서가 분리된다 

끝내 바다를 사이에 둔 대륙처럼 멀어지고 서로를 모방하는 표정이 실패할 때 

이쪽 기슭의 눈먼 벌레들이 더는 저쪽의 시간으로 건너가지 못할 때 

사이에 부는 바람에도 균열이 인다 

지구의 한쪽 모퉁이 쪼개지는 소리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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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말 

 심보선 

 

나는 '나'라는 말을 썩 좋아하진 않습니다.
내게 주어진 유일한 판돈인 양
나는 인생에 '나'라는 말을 걸고 숱한 내기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아주 간혹 나는 '나'라는 말이 좋아지기도 합니다.
어느 날 밤에 침대에 누워 내가 '나'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지평선처럼 아득하게
더 멀게는 지평선 너머 떠나온 고향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나'라는 말이 공중보다는 밑바닥에 놓여 있을 때가 더 좋습니다.
나는 어제 산책을 나갔다가 흙 길 위에
누군가 잔가지로 써 놓은 '나'라는 말을 발견했습니다. 
그 누군가는 그 말을 쓸 때 얼마나 고독했을까요?
그 역시 떠나온 고향을 떠올리거나
홀로 나아갈 지평선을 바라보며
땅 위에 '나'라고 썼던 것이겠지요.
나는 문득 그 말을 보호해 주고 싶어서
자갈들을 주워 주위에 빙 둘러 놓았습니다.
물론 하루도 채 안 돼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어서
혹은 어느 무심한 발길에 의해 그 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요.
나는 '나'라는 말이 양각일 때보다는 음각일 때가 더 좋습니다.
사라질 운명을 감수하고 쓰인 그 말을
나는 내가 낳아 본 적도 없는 아기처럼 아끼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나'라는 말을 가장 숭배할 때는 
그 말이 당신의 귀를 통과하여
당신의 온몸을 한 바퀴 돈 후
당신의 입을 통해 '너'라는 말로 내게 되돌려질 때입니다.
나는 압니다. 당신이 없다면,
나는 '나'를 말할 때마다
무(無)로 향하는 컴컴한 돌계단을 한 칸씩 밟아 내려가겠지요.
하지만 오늘 당신은 내게 미소를 지으며
'너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나는 압니다. 나는 오늘 밤,
내게 주어진 유일한 선물인 양
'너는 말이야','너는 말이야'를 수없이 되뇌며 
죽음보다도 평화로운 잠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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