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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날 모든 장소
채민기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3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건축 기자인 저자가 2021년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딸과 둘이서
미국 워싱턴 D.C.로 건너가 조지워싱턴 대학교의 방문 연구원으로 지내며
이방인 생활자이자 건축 기자의 눈으로 바라본 일상의 새로운 발견을 담은 책이다.
집이란 공간이 너무 익숙한 나머지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던 한국과 달리,
집이 안식처이자 피난처가 되자 집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불완전한 영어를 쓰는 이방인이자 여섯 살 아이의 유일한 보호자로서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어디에서도 마음을 완전히 놓지 못하다
집에 돌아와 문을 닫고 자물쇠가 잠기는 소리를 들으면 풍선에 바람이 빠져나가듯
맥이 풀렸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집밖에서 늘 경계하고 긴장할 필요는 없었을테니 말이다.
코로나 팬데믹 때 한국에서 화상 수업을 진행하는 동안
미국에서는 대면 수업을 진행했는데, 그 이유가 기술적 판단이 달랐기 때문이
아님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온라인이냐, 오프라인이냐'보다
'학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입장 차이였다.
우리나라에서 학교는 아이들이 공부하는 곳으로 인식되지만,
미국에서 학교는 아이들과 가족, 교직원으로 이뤄진 일종의 지역 공동체이다.
지식은 온라인으로 전달가능하지만, 공동체는 온라인만으로 유지하기 어렵다.
그래서 미국은 학교 문을 닫지 않고 "Keep Schools Open Safely"를 선언하고
공동체를 보호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온라인 수업으로 학습결손을 최소화하는 IT강국의 훌륭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그 이면에 학교가 지식 전달만 하는 곳이 아님을 실감했던 것을 잊지 않고
교육의 본질을 다시 정비해보는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가 원활하지 않아도 학교에서 관계다운 관계를 제대로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
인상깊었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학교 뒤쪽 주택가에서 교정 안으로 뻗어들어온 길이
교실 바로 옆에서 둥근 고리 모양을 그리며 끝나는 곳에서 기다리는 것도 맘에 들었다.
자기 아이들의 편의를 위해서 통학로를 막으며 교문 코 앞에 정차를 하는
얌체 부모를 차단할 수 있는 물리적 환경 또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어로 막다른 길을 뜻하는 컬드색(Cul-de-Sac)이라 불리는 도로는
자동차가 통과하지 못하고 되돌아가야 하는 길이다.
그냥 지나쳐가는 차들이 들어오지 않아 교통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주택 단지를 안전하고 쾌적하게 만드는 기법이라고 하니
학교 앞 안전도로 조성하는 데도 도입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들 사이에서 차를 몰고 와도 무어랜드 서클까지 들어오지 않는다는 암묵적 합의가 있어서
무어랜드 서클 주변은 아이들과 부모들로 북적여서 스몰 토크에 열중하게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 학교 공간은 대부분 획일적이고 가장 보수적인 건축물이다.
막사-사열대-연병장인 병영과 교사-조회대-운동장으로 이어지는 학교 건물이
전국 어디를 가나 신기할 정도로 똑같은데, 지역 사회를 향해 열려 있다는 생각을
공간에도 담으려는 미국의 학교 디자인을 유심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겠다.
미국에는 놀이터가 특히나 많은데, 시설이아 디자인보다 놀이터가 놓인 도시으 맥락에 있어
차이가 크다. 땅이 넓어서라기보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려면 마음껏 놀아야 한다는
믿음이 더 크다. 초등학교 시간표에 리세스(recess) 놀이 시간이 따로 들어갈 정도로
놀이의 의미가 크다. 놀이터가 공원의 일부이고, 공원 자체이기도 하기 때문에
놀이터를 가리킬 때 park라는 말을 자주 쓴다. 키즈 카페에서 시간당 얼마씩 돈을 내고 사야하는
놀이가 상품이 된 한국보다 어디서나 놀이터를 만날 수 있는 미국의 문화가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화려한 시설이 없어도 얕은 비탈에 걸친 미끄럼틀 하나로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즐겁게
놀이에 열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말이다.
한국의 자연은 참 편리하고 친절하다. 등산로마다 데크와 계단이 조성되어 있고,
케이블카와 출렁다리가 설치되어 있는 반면 미국의 자연은 무뚝뚝하다.
변변한 표지판 하나 없는 곳이 대부분이라 GPS 트레킹 코스 안내 앱을 유료 결제할 정도로
길잡이가 거의 없다. 국립공원에서 극도로 로제한된 휴대전화 이용만 가능해서
통신 기지국을 늘리는 문제를 놓고 논쟁이 있었지만, 옐로스톤 열천 그랜드 프리스매틱 온천의
푸른 수면 주변에 우후죽순 들어순 기지국 그래픽을 보고 자연경관을 보존해야 한다는
전통적 접근 방식이 존중받는다는 건 편리함이 우선인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짧은 출장 기간에 스미스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을 완전 경보로
슬쩍 구경하고 내셔널갤러리 서관에서 미국에서 유일하게 대중에 공개된 다빈치 작품이라는
<지네브라 데 벤치> 초상화를 챙겨보고, 동관은 갈 엄두도 못했는데
동관과 서관을 잇는 지하 통로의 존재를 알았더라면 강행군이라도 더 힘을 내어봤을텐데
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60미터 수평 무빙워크를 타고 4만1000개의 LED가 무작위로 점멸하는
터널을 통과하며 피카소의 시대에서 다빈치의 시대로 이동하는 타임머신을 탄 듯한 느낌이
너무 신비로울 것 같다. 지하 통로 마저 평범하지 않게 만드는 예술의 힘을 느끼며 동관에서
이오 밍 페이의 직선과 삼각형, 예각으로 드러난 모던함을 마주하면 기분이 묘할 것 같다.
내셔널갤러리 동관은 전통과 첨단의 조화라는 페이의 주제가 루브르 피라미드에 앞서
구현된 곳이다. 미술관 건립 관계자들의 이름 사이에서 까맣게 얼룩진 'I.M.PEI'의 이름을
쓰다듬으며 촉각적 연결을 경험하면서 공동체적 유대감을 느끼는 것도 매력적일테다.
건축 기자의 눈으로, 아버지의 눈으로 바라보니 좋은 공간에는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음을 믿게 되고,'
워싱턴 D.C.와 메릴랜드의 장소가 궁금해지게 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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