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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미따
프란시스코 시오닐 호세 지음, 부희령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7년 4월
평점 :
필리핀 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단편적으로만 알았고 필리핀 문학을 접해본적이 없었기에 이 책이 필리핀 문학과의 첫만남 이었다. 처음엔 굉장히 낯설줄 알았는데 읽다보니 한국의 역사와 닮은 부분이 너무도 많아서 거리감 보다는 친밀감이 더 느껴지게 되었다. 책 속에 비친 필리핀은 오랫동안 스페인의 지배를 받아서 독특한 문화를 이루고 있고 미국을 제 2의 모국으로 여기고 있으며 전쟁의 상처와 그로 인한 혼란, 그리고 정부와 부자들의 부정부패로 그야말로 아수라장으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그 혼란 속에서 로호 가문은 부를 축적하고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어갔다.
소위 명문 가문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로호 가문에게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너무도 컸고 치욕적인 결과를 낳게 되었다. 단순히 재산상의 피해가 아니라 야수 같은 일본군 병사에 의해 여동생 콘시타가 강간을 당하게 되어 임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콘시타가 겪은 끔찍한 일은 그녀뿐 아니라 가문이 겪은 큰 고통이었다. 그래서 콘시타가 느낀 수치와 분노를 충분히 짐작할수 있었고 강간으로 생긴 뱃속의 아이에게 사랑보다는 미움이 더 컸다는 것도 이해할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와 로호가문의 결정, 즉 아이를 보육원에 내다 버린 행위는 결코 이해할수 없는 행위였다.
그들은 콘시타가 낳은 아이인 에르미따를 자신들의 위대한 가문에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영영 잊고싶은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에르미따는 가문의 수치이자 끔찍한 전쟁을 떠올리게 하는 과거의 산물인 것이다. 이렇게 어머니 에게서도 버림받고 다른 가정에 입양될수도 없는 처지에 놓인 에르미따의 기구한 처지는 참으로 안타까웠다. 나중엔 로호 가문에서 살게되지만 그것도 로호 가문의 자손이 받아야 할 대우가 아니라 그 집에서 일하는 가족과 함께 살며 여전히 가난한 삶을 살게 되었으니 그녀가 품은 분노와 화는 이렇게 축적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도 아름답게 자라고 똑똑한 그녀가 선택한 길은 다름아닌 창녀였다.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들여준 맥 가족과 함께 로호 가문의 집에서 ?겨날 처지에 놓였으니 자신의 몸을 파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의 아름다음과 젊음을 이용해 큰 돈을 벌수있는 직업도 창녀밖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히 웃음을 팔고 몸을 판게 아니라 남자보다 우위에 있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얼마 안가 그녀는 어마어마한 부를 쌓고 최고급 생활을 하며 정부 핵심 인물들과 인맥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돈과 남자들을 이용해 자신을 버린 어머니와 로호 가문에 복수를 하게 된다. 자신이 한 일중 가장 기뻤던 일이 복수였다고 말한 에르미따. 하지만 그 복수를 하고 난 뒤 그녀의 삶은 과연 행복했을까. 친구이지만 그 이상의 마음을 품었을지도 모르는 맥은 그녀의 돈을 받아 학교를 다니고 가족이 그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그녀를 외면한다. 변해버린 그녀, 아무리 전과 같이 예쁘고 사랑스러운 에르미따의 모습이라 할지라도 창녀가 되버린 그녀를 예전처럼 볼수없는 것이다.
평생을 먹고 살수있을정도의 돈을 벌고 자신을 이해해주는 친구들을 사겼지만 그녀는 이제 어디서도 행복할수가 없다. 그녀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 열심히 일해왔고 잠깐 미군의 아내로 살면서 정숙한 삶을 살게됐지만 결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부정부패가 들끓고 혼란을 틈타 가난한 이들의 재산을 착취해 배를 불리는 사람들 틈에서 자신의 미모를 이용해 돈을 벌고 풍족한 삶을 살게 된 그녀이고 자신의 직업을 하찮게 여기진 않지만 그녀는 이미 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왔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