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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평점 :
오랜만에 책을 '즐기면서' 읽었다.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야기 속에서 쿡쿡 웃음을 흘리기도 하고 글 속에 담겨진 날카로운 풍자에 가슴이 짠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정말 말도안되는 이야기들을 너무도 진지하고 때론 유머러스하게 풀어내는 작가의 재능에 그저 놀라움을 연발했다. 아마 이 책을 읽는 순간 독특하고 재기발랄한 이야기에 푹 빠져버리게 될 것이다.
캐비닛을 관리하는 '나'는 그리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어떤 사명감에 불타서 이 일을 시작한것도 아니고 사회에서 격리되고 고통받는 심토머들을 위해 무언가 큰 일을 해내겠다는 의지가 있는것도 아니다. 그저 어쩌다보니 이 일을 맡게된 지극히 평범한 회사원이다. 극심한 취업난 속에서 어려운 경쟁률을 뚫고 회사에 입사했건만 하는 일이 없어 너무도 심심하고 또 심심해서 캐비닛을 열어 그 속에 담겨진 이야기를 읽게되었고 그 일을 계기로 권박사의 협박아닌 협박에 굴복해 그의 조수가 된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절대로 믿지 않을 사연들을 늘어놓는 심토머들을 상담해주고 자료를 정리하고 보관하는게 그가 하는 일의 전부다. 그가 상담하는 사람중엔 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사람도 있고 고양이가 되고 싶어하는 덩치 큰 남자도 있다. '타임스키퍼'라는 이름의 사람들은 최소 몇시간에서 최대 몇년까지 시간을 잃어버리는 고충이 있다. 또한 '네오헤르마프로디토스'라는 사람들은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가지고 있고 어떤 사람은 도플갱어를 만나기도 한다. 저질 잡지류의 기사같은 이 심토머들의 사연을 그는 매일매일 듣고 있다.
언제나 나보다 다른것에는 (그게 어떤것이든) 불쾌한 시선과 차별을 두는 이 사회에서 심토머들이 겪는 혼란과 고통은 충분히 짐작할수 있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게이도 아니고 레즈도 아닌 '네오헤르마프로디토스'들은 평생을 외롭고 슬프게 살아갈 운명이고 자신의 죽은 분신을 위해 매주마다 화장을 시켜주는 한 여자의 사연은 참으로 기구하다. 그들은 원해서 그렇게 된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누구한테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채 홀로 쓸쓸히 인생을 보내야 한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연민을 느끼게 되는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심토머가 아닌 보통 사람들에게도 이런 편견의 잣대와 냉대는 엄연히 존재한다. 또한 심토머가 느끼는 외로움과 고독감을 보통의 평범한 현대인들도 고스란히 느끼고 있다. '나'가 다니는 회사엔 뚱뚱하고 말이 없는 손정은 이라는 여직원이 있다. 언제나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며 밥도 혼자 먹고 대화도 하지 않는 그녀에게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한다. 특히 그녀의 뚱뚱한 외모는 많은 직원들의 입방아에 오르게되고 조롱의 대상이 된다. 대체 내게 왜 이러냐고 소리라도 지르면 속이 시원하련만 우직한 그녀는 자신의 슬픔을 꾹꾹 눌러 담을 뿐이다.
사는게 모욕적 이라는 그녀의 말속엔 짙은 고독과 아픔이 녹아들어가 있다. 과학적으로는 설명할수 없는 심토머들이나 자본주의 체제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발버둥치는 현대인들이나 결국은 같은 애환을 가지고 있는건 아닐까 싶다. 유머러스한 글 속에 이런 내용이 담겨져 있기에 뒤로 갈수록 웬지 서글픔이 묻어나온다. 마지막 결말이 조금 어리둥절 하긴 하지만 그 전까지가 너무도 훌륭해서 기꺼이 별 다섯개를 주는 바이다. '귀싸대기 맞을 각오가 되있다'라는 작가의 말에서 웬지 모를 자신감과 비장함이 느껴지는데, 앞으로도 흥미롭게 그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고 있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