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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조선의 표준을 세우다 - 집념과 포용의 정치로 실현한 애민과 훈민, 세종을 찾아서 ㅣ 이한우의 군주열전
이한우 지음 / 해냄 / 2006년 4월
평점 :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얻는 것과 잃어버리는 것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경제력과 물리력, 이론적 지식들을 얻어가며 시력과 청력, 그리고 꿈을 잃어버린다. 나도 약관의 나이가 지나고부터는 위인偉人전을 비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그 사람이 정말 그랬을까, 진짜 성인 군자처럼 어떠한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청렴과 결백을 지켰을까, 사사로운 정이나 온갖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 굳은 심지의 인간이었을까, 라고.
내가 역사서를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던 그 이상의 어떤 사실들을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조선, 아니 한국사 최고의 왕으로 손꼽히는 세종대왕으 바라봄에 있어 인간미 넘치는 부분까지 생생히 보여준다. 일단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훈민정음의 창제와 반포, 국경의 확장과 확정, 실용정신 등은 새로울 것이 없다.
더 알게 되었던 것은 비록 적통嫡統은 아니었지만 맡겨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부왕, 형제들에 대한 각별하고 따뜻한 애정, 대다수 학자들의 배불排佛 주의에도 불구하고 피폐해진 심신을 치유하기 위해 불교에 무척이나 깊이 의지했던 점, 아악만을 위한 아악이 아니라 향악을 길러내기 위한 자양분으로서의 아악 발전, 왕권을 위협받을 수 있을만큼 부담이 큰 초대형 국가사업을 비밀리에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최측근 몇 명만을 제외하고는 고위직의 거의 모든 신하들도 모르게 한 점이다.
새 왕조 출범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법제와 예禮, 악樂, 국방 등 신경쓸 사항이 한두가지가 아니었겠지만 독창적인 새 문자의 창조는 한국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그 밖에도 위에 언급한 다른 부문도 소홀히 하지 않고 정비하고 기반을 닦는 데에 많은 노력을 했고 실제로 그 성과도 매우 훌륭했다. 하지만 이것의 이유를 모두 세종대왕이라는 한 개인의 뛰어난 역량으로 몰아가기엔 그 주변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종대에 들어 문화, 군사, 제도 등의 거의 모든 부문에 걸쳐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부왕이었던 태종의 신권 및 외척 견제책 덕택이다. 그는 내가 모든 것을 짊어질테니 너는 성군이 되라며 국가에 불화를 가져올 수 있는 거의 모든 씨앗을 떠안았다. 물론 아버지가 자식에게 가진 무한한 부정의 표현이었겠지만 세종 사후 발생한 분란을 본다면 태종의 이러한 면면은 세종의 치국과 치세를 가능케 했던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여러 일화와 기록을 통하여 세종대왕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한 흔적이 여기저기 드러나 있다. 자신의 암기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과시하거나 자부했었던 부분에서는 한 국가의 임금이기 이전에 젊고 실력있는 학자의 치기어린 자신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양녕을 폐세자 하고 충녕대군이던 시절 그를 세자로 책봉하는 것이 확정되었을 때 황송하고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는 말만 했을 뿐, 거절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에서는 그도 성인이라기 보다는 권력욕을 가진 한 개인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집권 말기에 들어서는 몸은 각종 지병과 질병으로, 마음은 두 명의 아들을 잃고 왕비까지 잃음으로써 완전히 피폐해졌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되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지, 신하들의 어떤 격렬한 반대가 있든지간에 항상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고야 말았던 외유내강의 세종대왕도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상태에서는 나약한 한 명의 사람에 불과했다는 대목에선 가슴이 찡하기도 했다. 요컨대, 이런 사항들을 보면 그는 우리와는 멀고 먼 어떤 성군이라기 보다는 운명적으로 한 나라를 책임지게 된 가슴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훈민정음 창제의 근본 이유, 관리의 백성들에 대한 월권적 형벌, 백성의 기본적 의식주 해결을 위한 그의 온기가 은은하게 느낄 수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