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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탐심 - 라디오에서 찾은 시대의 흔적들
김형호 지음 / 틈새책방 / 2021년 12월
평점 :
단순한 라디오 수집기가 아니다. 지역방송 기자로 일하는 저자가 '탐심'을 가지고 라디오에 대해 오랫동안 벌여온 치열한 '덕질'에, 특정한 모델의 라디오를 하나 하나 소개하며, 그것의 생산에서부터 당대 사회배경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을 곁들인 흥미로운 글들로 묶여있다. 전기공학에 대한 배경지식, 한마디로 이과적 두뇌가 없어도 책을 읽는데 지장이 별로 없다.
리전시 TR-1을 작동해 보기까지 몇 년을 기다려야 했다. 한국폴리텍대학교의 어느 교수님이 가변 트랜스 한 대를 주신 덕분에 22.5V 전원을 연결할 수 있었다. 라디오를 잠시 보관했던 지하실에서 혼자 들었던 리전시 TR-1의 첫 라디오 방송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의 2018년 삼일절 연설이었다. 연설은 독도에 대한 내용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독도 발언이 연상되는, 일본을 향한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지하실에서 최초의 트랜지스터라디오로 대통령의 담화를 듣고 있자니 내가 레지스탕스라도 된 것 같았다. 당시 촬영한 화면을 페이스북에 올려놨는데 갈무리된 40초 길이의 담화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박수 소리)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잘못된 역사를 우리 힘으로 바로 세워야 합니다. 독도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 과정에서 가장 먼저 점령당한 우리 땅입니다. 우리 고유의 영토입니다. 지금 일본이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제국의 침략에 대한 반성을 거부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p.108
'국민 라디오'는 1933년 독일에서 처음 등장했다. 1933년에 집권한 나치 정권은 집권 시점인 1월 30일의 '301'과 국민 라디오 Volks Empfanger, 폴크스 엠팡저의 약자 'VE'를 따서 VE301이란 라디오를 만들었다. 라디오 제조는 지멘스가 맡았고, 텔레푼켄의 진공관을 사용했다.
(중략)
독일의 국민 라디오 프로젝트는 '히틀러의 입'이라고 불렸던 요제프 괴벨스가 주도했다. VE301 라디오는 '괴벨스의 주둥이 Goebbels Shnauze'라는 별명을 얻었다. 괴벨스가 이 라디오를 어떻게 이용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별명이다.
-p.220
원조 국민 라디오를 보고 있으면, 우리나라의 국민 라디오 시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전쟁 준비로 국민을 선동하는데 빛을 발했던 국민 라디오는 우리나라에서는 독재 정권 시대에 도입됐다. 박정희 정권은 집권 초기 농어촌 지역에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벌였다. 공무원들의 월급까지 갹출해 라디오를 보급했다. 통치 이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농어촌 지역을 중앙 방송으로 계몽하겠다는 의도였다. 나치의 선전영화 '미거스하우젠의 전투'의 복사판이었다. 국민 라디오는 계몽이란 명분으로 여론을 통제했다. 무료로 라디오를 나눠주는 것처럼 선심을 썼지만, 라디오는 정부 방침을 국민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선전용 확성기였다.
우리는 국민 라디오에서 대통령에게 라디오 마이크를 빼앗긴 슬픈 역사도 가지고 있다. 미국 대공황 시대 루스벨트 대통령의 노변정담爐邊情談을 흉내 낸 대통령의 확성기 방송은 희망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훈화하기만 했다. 마이크는 다시 국민에게 돌아왔지만, 방송 정책에서 통제를 받는 미디어들은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제는 권력, 자본과 결탁한 뉴미디어까지 나타났다. 여론을 왜곡하고, 가짜 뉴스가 진실을 가린다. 한낱 라디오가 뭘 할 수 있느냐고 남의 얘기처럼 말하기 어려운 이유다.
-p.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