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학교는 질문을 가르치지 않는가 - 어느 시골교사가 세상에 물음을 제기하는 방법
황주환 지음 / 갈라파고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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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교육부는 노란 리본을 금지했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하고 학생들에게 편향된 시각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며 노란 리본을 금지한다는 공문을 각 시도교육청에 보냈었다. 나는 이쯤에서 교육의 막장을 보는 듯했다. 이것이 교육이란 말인가? 이것이 한국교육의 민낯이다. 친구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폭력이라고 떠들어온 그들 교육의 진짜 모습이 이것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인성교육'을 말하는 그들 교육의 더러운 위선이다. 그들은 염치를 모른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조차 '정치적인' 이 나라에서, 어떤 교육이 가능한지 나는 한참이나 망연했다. 여전히 가만히 있기만을 강요하는, 폭력의 교육.(p.75)

그리고 항상 질문하라고 요청한다. '선생님이 옳아요'라며 나를 무조건 따르지 말라고, 교사인 내게도 질문하고 반론하고 비판하라고 주문한다. 이는 학생들에게 제시하는 내 믿음을 의심해서가 아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권력(교사)의 언어에 환호한 학생은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다른 권력에도 쉽게 환호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 곳곳에 포진한 자본과 권력의 언어에 대항해 자기 이익을 배반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으려면, 타인의 언어에 쉽게 휘둘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p.107)

학부모들은 어떤 교사를 바랄까? 수업 열심히 하고 입시지도를 잘해주며 학생들에게 자상한 교사가 최고다. 학부모 모임에서 그 이상의 요구를 들어본 적이 없다. 학부모의 그런 요구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교사는 학부모의 요구에 나름대로 부응해야 한다. 그런데 대개의 학부모는 딱 거기에서 멈춰버린다. 내 아이의 입시만 끝나면 세상은 평온해진다는 듯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다. 지금 절벽으로 질주하는 버스 안에서 자기 아이 자리 찾기에만 분주할 뿐, 버스가 나아가는 방향은 살피지 않는다. 그렇게 한국사회의 미친 질주를 고민하지 않았기에 결국 내 아이의 안전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다.(p.47~48)

그런데 사르트르는 지식인이란 바로 이런 실용적 지식전문가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혜택 받지 못한 계층"에서는 그런 지식전문가를 길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런 실용적 지식전문가는 어떻게 지식인이 되는가? 지식전문가가 자기를 형성해낸 이데올로기의 자기중심성을 부당하게 여길 때, 그리고 지배권력의 원칙을 자기 것으로 내면화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래서 지배권력에 봉사하기를 거부할 때, 비로소 지식인이 된다고 한다. 가령 핵전쟁을 위한 원자폭탄을 연구하는 과학자는 지식전문가일 뿐이다. 그러나 그가 핵무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선언문을 작성하고 발언하여 지배권력의 이익에 복무하기를 거부할 때, 즉 "자기와 관계없는 일에 관심"을 가질 때 비로소 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자기의 안락은 보장받지 못하기도 한다.(p.229~230)

* 이 선생님의 글이 불온한 것이 흥미로워 다른 저서가 있나 찾아보았는데 아쉽게도 개정증보판인 이 책 외에 약간 다른 제목의 구판만 있었다. '질문을 가르치지 않는'이라는 제목에 이끌려 질문하는 방법, 학습하는 방법 따위의 기술을 가르치는 책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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