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빛이 여전합니까 창비시선 440
손택수 지음 / 창비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게體



부산진 시장에서 화물전표 글씨는 아버지 전담이었다
초등학교를 중퇴한 아버지가 시장에서 대접을 받은 건
순전히 필체 하나 때문이었다
전국 시장에 너거 아부지 글씨 안 간 데가 없을끼다 아마
지게 쥐던 손으로 우찌 그리 비단 같은 글씨가 나왔겠노
왕희지 저리 가라, 궁체도 민체도 아이고 그기
진시장 지게체 아이가
숙부님 말로는 학교에 간 동생들을 기다리며
집안 살림 틈틈이 펜글씨 독본을 연습했다고 한다
글씨체를 물려주고 싶으셨던지 어린 손을 쥐고
자꾸만 삐뚤어지는 글씨에 가만히 호흡을 실어주던 손
손바닥의 못이 따끔거려서 일치감치 악필을 선언하고 말았지만
일당벌이 지게를 지시던 당신처럼 나도
펜을 쥐고 일용할 양식을 찾는다
모이를 쪼는 비둘기 부리처럼 펜 끝을 콕콕거린다
비록 물려받지는 못했으나 획을 함께 긋던 숨결이 들릴 것도 같다
이제는 세상에 없는 지게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