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읽은 정호승의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가 생각난다.
물론 다시 찾아서 읽어본다면 열아홉의 내가 읽었던 정호승의 감흥과
전혀 별개의 시들로 읽힐 것이므로 애써 그런 수고는 덮어두고 싶다.
이후로 몇편의 시집과 산문을 거쳐 오랜만에 읽은 정호승은
아직도 자신만의 시어로 세상에 둘 없는 국어사전을 만들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제 몸보다 수십배는 큰 암석에 부처를 새기는 석공이나
죽음에 으르는 순간까지 예수의 모습을 그리는 화가와 같이.
말하자면 정호승은 정호승이었는데, 작년에 출간된 이 시집에서 어느 순간
두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다잡고 읽은 시들이 있다.
일흔이 된 시인의 시편 앞에서 정신이 맑아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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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락눈
나는 싸락눈도 너무 아프다
내가 늘 기다리는 사람과 함께 내리는
내가 늘 그리워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내리는
내가 미워한 사람도 이별한 사람도
꼭 한사람씩 데리고 내리는
어떤 때는 내가 용서해야 할 사람과
내가 용서를 청해야 할 사람과 함께 내리는
싸락눈도 너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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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물머리
해 질 무렵
양평 두물머리 강가에 다다른 진흙소가
강 건너편을 바라보다가
울음소리를 토해내며 강을 건너간다
나는 고요히 연꽃 한송이 들고
강물을 거슬러올라가는 진흙소를 따라
당신에게 가는 강을 건너간다
수종사 저녁 종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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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지기
마음속에 작은 시골 교회 하나 지어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처럼
새벽마다 종을 치는 종지기가 되어야지
하늘의 종을 치는 종지기가 되어
종소리마다 함박눈으로 펑펑 내리게 해야지
모든 것을 견디고 모든 것을 용서하는
푸른 별들의 종소리를 울리며
함박눈을 맞으며
그리운 당신을 만나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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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별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그대를 만나러 팽목항으로 가는 길에는 아직 길이 없고
그대를 만나러 기차를 타고 가는 길에는 아직 선로가 없어도
오늘은 그대를 만나러 간다
푸른 바다의 길이 하늘의 길이 된 그날
세상의 모든 수평선이 사라지고
바다의 모든 물고기들이 통곡하고
세상의 모든 등대가 사라져도
나는 그대가 걸어가던 수평선의 아름다움이 되어
그대가 밝히던 등대의 밝은 불빛이 되어
오늘도 그대를 만나러 간다
한배를 타고 하늘로 가는 길이 멀지 않느냐
혹시 배는 고프지 않느냐
엄마는 신발도 버리고 그 길을 따라 걷는다
아빠는 아픈 가슴에서 그리움의 면발을 뽑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짜장면을 만들어주었는데
친구들이랑 맛있게 먹긴 먹었느냐
그대는 왜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는 것인지
왜 아무리 보고 싶어 해도 볼 수 없는 세계인지
그대가 없는 세상에서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잊지 말자 하면서도 잊어버리는 세상의 마음을
행여 그대가 잊을까 두렵다
팽목항의 갈매기들이 날지 못하고
팽목항의 등대마저 밤마다 꺼져가도
나는 오늘도 그대를 잊은 적 없다
봄이 가도 그대를 잊은 적 없고
별이 져도 그대를 잊은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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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히
아흔 노모의
벌레 먹은 낙엽 같은 손을 잡는다
새벽에 혼자 화장실 가시다가 꼬꾸라져
아침이 올 때까지
변기에 머리를 기대고 쓰러져 있었던 어머니
호승아
아무리 불러도 문간방에 잠든 아들은 오지 않고
오늘이 아버지 기일인데
기일은 오지 않고
오늘따라 바람은 강하게 불어온다
새들이 검은 비닐봉지로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나는 밤늦게까지 어머니 팔다리를 주물러드리고
어머니 곁에서
어머니를 홀로 두고
쓸쓸히 물이나 한잔 마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