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지성 시인선 351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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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인간의 멜랑콜리

  나는 '신학도'이다. 신학교를 졸업한지 벌써 1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나를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내 자신에게 부여한 이 정체성과 학문적인 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순전히 자의적으로 내가 나 자신에게 부여한 자기정체성이다. 그렇다고 나 자신을 설득하지 못할 만큼 이유가 없지는 않다. 내가 나를 신학도라고 여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의식의 방향, 세계에 대한 인식, 사고의 패턴과 전개과정이 신학적이기 때문이다. 신학적이라는 것은 신앙적이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라는 개체의 실존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신학도가 시(詩)를 읽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 시(詩)는 신학적 혹은 신앙적 시(詩)가 아니다. 세속적이지만 아름답고, 아름답지만 세속성으로 충만한 세속의 시(詩)다. 평범한 신학도가 무슨 이유로 세속의 시(詩)를 해석해야 하는가? 그 아름답고, 세속적인 시(詩)에서 나는 신학적인 느낌을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보잘 것 없는 신학도는 마치 색맹인냥 세속적인 것에서 보통의 사람들이 보지 않는 신학적인 의미, 질감, 통찰을 본다.

  최승자의 후계자라 불리는 진은영 시인은 내 지인이 다니는 학교에서 ‘문학상담’을 가르친다. 니체로 박사학위를 받은 철학 전공자가 시(詩)를 노래하는 시인이기도 하고, 그것으로 사람을 상담하겠다고 나섰다. 시인이자 철학자에게 나는 상담받고 싶다.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시집인 <우리는 매일매일>에서 나는 시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매우 신학적으로 읽히는 한 편의 시를 발견했다.

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놓았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나는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
누구의 부드러운 혀끝에도 닿지 못했다

그는 늘 나 때문에 슬퍼한다
모래사막에 나를 그려놓고 나서
자신이 그린 것이 물고기였음을 기억한다
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
그는 나를 지워준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

_ 『멜라콜리아』 전문

  1연의 1행에서부터 나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이야기, 창세기의 사건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놓았다” 그는 신(창조주)이다. 나는 그의 그림, 창조물, 작품이다. 신은 모든 만물을 6일 동안 만들고 마침내 인간을 만들었다. 그러자 신은 노래했다.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새번역, 창1장31절) 인간을 만들고 나서 신은 참 좋았다고 했다. ‘달콤하’다는 시인의 말과 ‘참 좋았다’는 말이 같은 말처럼 들리는 건 나뿐일까. 달콤하다, 참하다, 좋다, 평소 같으면 같은 의미라고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인간이 창조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별로 다른 뉘앙스로 느껴지지 않는다. 신이 만들어 놓은 피조물이 신이 보기에 좋았다면, 인간이 보기에도 좋았을 것이다. 아담이 이브를, 이브가 아담을 보았을 때도 역시 참 좋고, 달콤했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달콤하다는 말은 어쩌면 원래 인간에게 사용되어야 단어였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이성(異性)만큼 달콤한 게 어디 있으랴.

  그러나 나는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과도 같다. 아이스크림이 달콤하다 한들 뜨거운 아스팔트 위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아이스크림이지만 아이스크림이 아닌 것이나 다름없다. 여기서부터 시간의 흐름은 절망의 흐름과 같다. 시간이 지나도 희망은 보이지 않고 절망은 영원히 계속된다. 마치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가 신으로부터 죽음을 선고받은 것과 같은 상태이다. 그러므로 “나는 녹기 시작”한다. 녹기 시작했다는 것이 정확히 의미하는 바는 녹지 않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은 반드시 다 녹는다. 이미 그의 죽음이 판결되었다. 신은 인간을 달콤하게 만들었지만, 태어나자마자 그는 죽음을 향해 있다. 하이데거가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라고 말 한 것은 이런 의미이다. 뜨거운 아스팔트를 ‘타락한 세계’라고 해도 좋다. 아이스크림을 타락한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이라 해도 무방하다. 타락한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과 뜨거운 아스팔트 위의 아이스크림이 무엇이 다른가. 헌데, 죽음을 향해 가는 인간의 생의 이면에는 죽음보다 더 가혹한 현실이 있다. “누구의 부드러운 혀끝에도 닿지 못했다”는 진실이다. 타자의 타자성, 그 불가해성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고독한 존재임을 역설한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보다 잔인하다. 그 누가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에 혀를 댈까. 앞서 말했지만 그것은 이미 아이스크림이 아니다. 이 단수 아이스크림은 복수의 인간, 인류 전체, 인간이라는 종의 특질을 응축적으로 지시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홀로 고독하게 죽는다.

  2연에 가면 장면이 아스팔트에서 모래사막으로 바뀐다. 아스팔트나 모래사막이나 생명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곳은 못된다. 다행이 “그는 늘 나 때문에 슬퍼한다.” 신이 슬퍼하는 이유는 그가 나를 모래사막에 그려놓고는 내가 사실은 “물고기였음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그가 나를 뜨거운 아스팔트에 위에다 만들어 놓고는 갑자기 내가 아이스크림임을 기억한 거다. 신의 슬픔이 잠깐이 아니라 “늘”인 것을 보면 꽤 시간이 흘렀나 보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래서 신은 그토록 오랜 세월 그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인간을 향해 구원의 손길을 베풀었나 보다. 애굽 노예의 삶으로부터 해방, 산-성막-성전으로 인간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옴, 마침내 신 자신이 스스로 인간이 되기까지. 그의 마지막 한방은 '바람'이다. 바람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靈), 성령을 묘사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표현이다. 신이 인간을 향한 구원의 손길은 최종적으로 성령의 몫이 된다. 그래서 신은 “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 결정적인 구원을 베푼다. 그 구원은 “나를 지워준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방법이 동원된다. 오늘날 세계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두 가지가 있다. 교회의 세속화가 전지구화, 보편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이다. 그렇지 않은 쪽이 제시하는 증거 중 하나는 비서구권에서 일어나는 오순절 계통의 기독교의 부흥이다. 오순절은 방언(황홀 상태에서 성령에 의하여 말해진다는, 내용을 알 수 없는 말)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성령의 역사(歷史)를 중요시하는 기독교의 한 교파이다. 성령의 체험을 이해하는 신학적 폭은 다양하지만 ‘활홀한 상태’는 대표적인 특징이다. 황홀한 상태란 종종 ‘나를 잊게 하는(지워주는) 경지’를 이르는 말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신의 대안이다. 이것이 신이 인간에게 베푸는 구원의 방편이다.

  그러나 시인은 3연에서 신을 조롱하듯 말한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 사막에 그려진 ‘나’(물고기)가 바람에 지워졌다고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니! 바람을 불러서 나를 지운 건 어처구니 없는 신의 대안이었다. 신의 낙관주의는 절망을 넘어선 우울을 더 부추긴다. 신의 대안은 무용지물이다. 성령의 바람은 불었으나 삶은 여전히 비루하다. 나는 사막에서 지워져버렸고, 뜨거운 아스팔트에서 완전히 녹아 찐득한 껌딱지가 되었다. 구원은 없었다. 신은 유토피아(utopia)를 창조했지만, 인간은 멜랑콜리아(Melancholia)의 세계에 살고 있다. 이 글이 여기쯤 끝을 맺으면 좋겠다 싶다. 강정, 밀양, 오정현, 전병욱, 국정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뜨거운 아스팔트요 모래사막이다. 그러나 마지막 한 단어에 목숨을 부지하듯 아슬한 희망을 건다. “믿는다” 내가 믿는 것이 아니고 신이 믿는 것이기에. 어차피 구원은 내 몫이 아니고 신의 몫이기에. 인간이 된 신, 육체를 지닌 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피스티스 크리스투πιστις χριστου) 말이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이 죄 아래에 갇혔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약속하신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근거하여,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려고 한 것입니다.”(갈라디아서 3장 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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