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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에 대한 명상 ㅣ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22
장정일 지음 / 민음사 / 2002년 4월
평점 :
지하도로 숨다 / 장정일
공습같이 하늘의 피 같은 소낙비가 쏟아진다.
그러자 민방위 훈련하듯 우산 없는 행인들이
마구잡이로 뛰어 달리며 비 그칠 자리를 찾는다.
나는 오래 생각하며 마땅한 장소를 물색할 여유도 없이
가까운 지하도로 내려가 몇 분쯤 비를 피하기로 했다.
계단에서부터 달싹한 무드음악이 내리깔리는 지하도
비 한 방울 스며들지 않는 지하도가 믿음직스럽다.
언젠가 그 날이 와서 몇 십만 메가톤의 중성자탄을 터트린다 해도
사십일간의 홍수가 다시 진다해도 끄덕하지 않을 지하도
나는 느긋하게 지하도의 끝과 끝을 거닌다.
검둥개라도 한 마리 끌고 다녔으면 그 참 멋진 산보일 것인데.
슬금슬금 윈도우를 훔쳐보는 나에게 어린 점원들이
들어와 구경하시라고도 하고 어떤 걸 찾으세요 묻기도 한다.
각종 의류며 생활용품 그리고 식당에서 화장실까지 거의 완벽한 지하도
그러면 이런 공상을 해보기도 한다. 이곳에서 여자 만나
연애하고 아이 낳고 평생 여기 살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바깥에서 비가 그쳤는지 어떠한지 도무지 여기서는 알 수가 없다.
도무지 바깥의 기상을 알 수 없는 여기는 무덤인가
장신구며 말이며 몸종과 비단 옷감이며 씨앗단지들
그 많은 부장품을 함께 매장한 여기는 고대인의 무덤인가
지하도의 끝에서 끝으로 한 번 더 걸으며 윈도우에 비친 얼굴을
쳐다본다. 창백해진 얼굴, 아아 내가 이 무덤의 주인인가?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아무 점원도 나를 불러 세우거나 묻지 않는다.
그래 나는 유령 이제는 비가 그쳤기도 하련만 지상으로 올라가기가 싫다
이렇게 할 일없이 걷다가 방금 내려온 친한 친구라도 만나면
반갑게 악수하면서 모르는 지상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아니 감쪽같이 숨어 있고 싶다 사흘을 여기 숨었다가
계단을 밟고 집으로 돌아가 보는 재미도 괜찮으리라
전화도 전보도 없이 사흘간을 아무 연락 없이 잠적해 버리면
어머니는 얼마나 슬퍼하시련가 두 번이나 나를 체포하고 고문한
내가 가장 싫어하는 파출소 같은데다 실종신고를 내시지는 않을까.
하지만 나는 유유히 돌아가리라 그리고 나는 부활했다
휘황찬란한 100촉 전구가 불 밝히고 늘어선 문명의 무덤을 걷어차고
나는 솟아올랐다. 들어라 나는 재림예수라고 소리치면
사람들은 믿을 것이다 안 믿을 것이다 아마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안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아 믿거나 말거나
비를 피해 나는 지하도로 숨은 적이 있는 것이다
#시읽는_신학도
*비를 피해 지하도로 들어간 시인은 자신이 피한 비가 마치 전쟁터의 총알들처럼 느꼈다. 시인은 현실을 전쟁터로 느끼고 있다. 전쟁 같은 현실을 보내고 나니, 잠시 피안처 삼은 지하도가 편안했다. 한 사흘 숨었다가 올라가고 싶어진다. 이 편안함은 역설적으로 죽음을 상기시킨다. 지하도가 무덤 같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지하도 밖으로 나온 시인은 예수처럼 부활해서는 자신이 재림 예수라고 소리치며, 사람들이 자신이 믿게 될 것을 (믿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확신한다.
이 시는 어두운 앞 부분과 유쾌한 뒷 부분이 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마르크스가 헤겔을 인용하면서 덧붙인 말이 있다. 역사는 필연적으로 두 번 반복하는데,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으로 희극으로." 슬라보예 지젝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시인은 현실을 피한 자신의 모습을 앞부분에서 비극적으로 그리고 있다. 편안하지만 무덤 속에서 죽어버린 인간의 비극적인 삶의 상실을 묘사한다. 뒷부분에서 희극적으로 그린다. 무덤에서 부활한 예수라니. 시를 읽다가 "들어라 나는 재림예수라고 소리치면"에서 웃음이 터지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이 반복되었을까? 현실에서 도피하는 인간의 삶이 반복되었다. 처음에는 무덤 속으로, 다음에는 종교로.
한편 뜬금없이, 이 시는 이런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시 속의 화자가 만약 예수라면, 그래서 예수가 무덤 속에 있었을 때의 마음을 시인이 표현한 것이라면, 예수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예수는 어쩌면 무덤 속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을지 모른다. 시인처럼. 예수도 속세의 시끄러운 일들이 못 마땅해서 무덤에 그냥 있고 싶었을 것이다. 배신한 제자들과 터무니 없이 자신을 죽인 종교인들과 정치인들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편안히 무덤 속에 있고 싶었을 것이다. 다행이다. 예수는 그러지 않았다. 예수는 무덤을 나왔고, 우리에게 부활의 기적을 보여주었다. 감사하자. 그리고 예수와 함께 현실을 단단히 붙잡자. 그가 혹시 다시 지하도에 숨고 싶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