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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평점 :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제목 참 길죠? 무라카미 하루키의 새 장편 소설은, 제목에 모든 내용이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즉, 줄거리나 내용 그 자체는 크게 거창하지도, 대단하지도 않다는 거겠지요.
'색채가 없는'이라는 말은, 다자키 쓰쿠루에게 일상적으로 따라붙는 수식과도 같습니다. 아카(赤), 아오(靑), 시로(白), 구로(黑) 처럼 색깔 이름을 이름의 일부로 가진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면, '만들다(作る)'라는 이름은 색채가 없이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니까요. 일본어로 직접 읽는다면, 이 느낌이 더 확 와닿을 수도 있겠어요. 이런 거겠지요? 가장 친한 그룹의 친구들 이름이 빨강이, 파랑이, 하양이, 까망이인데 내 이름만 혼자 만듦이라면? 혼자 괜히 소외감을 느끼게 될 겁니다. 마치 어렸을 때 셋 이상의 친구가 모였을 때면 장난으로 즐기던 '홀애비 놀이'에서 '너 혼자 홀애비!'라는 말을 연속 세 번쯤 듣게 되면 느껴지는 서글픔 같은 거요.
아무튼 그들은 어디에서도 느끼기 힘든 편안함과 소속감을 일깨워 주는 공통체의 우정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20대가 되면서 쓰쿠루는 역을 만들고자 하는 자신의 거의 유일한 바람을 이루고자 도쿄로 진학하고, 나머지 색깔 친구들은 고향 나고야에 남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쓰쿠루는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색깔 친구들에게서 절교를 당하지요....
쓰쿠루는 잘못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는 조용히 죽음으로 침잠하는 이십 대 초기를 보냅니다. 시간은 그냥 흘러가고, 그는 죽을 거 같은 시련을 지나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됩니다. 얼핏 스스로 극복해 낸 것 같지만, 그것은 그냥 그 시련을 덮어 두었을 뿐일지도 모릅니다. 마음이 맞고 이야기가 통하는 친구를 만나지만, 그 친구도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고 말지요.
이 소설은 쓰쿠루의 삼십 대의 치유 과정(현재)을 그리면서, 십 대의 찬란과 이십 대의 시련과 고통(과거)을 보여 줍니다.
쓰쿠루는 현재 좋아하는 여자, 사라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색깔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녀에게 하지요. 사라는 압니다. 쓰쿠루가 아직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다는 것을, 그래서 그의 구석 어딘가에는 이유도 없이 절교당한 그 상처가 남아 있다는 것을요. 언뜻 보면 잘 뛰어 넘은 장애물 같지만 자세히 보면 그냥 넘어뜨렸을 뿐인 장애물이 있다는 것을요. 사라는 쓰쿠루에게 이제 절교의 이유를 찾고, 친구들을 만나 보길 권유합니다. 쓰쿠루의 순례가 시작된 거지요.
"기억을 어딘가에 잘 감추었다 해도, 깊은 곳에 잘 가라앉혔다 해도, 거기서 비롯한 역사를 지울 수는 없어." 사라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것만은 기억해 두는 게 좋아. 역사는 지울 수도 다시 만들어 낼 수도 없는 거야. 그건 당신이라는 존재를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 51~52쪽
쓰쿠루는 이 순례의 과정을 통해, 친구들을 하나하나 만나 보면서, 절교의 이유(충격적이긴 하지만 크게 중요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거 같아요)를 알게 되고, 그 이후의 친구들의 삶을 알게 됩니다. 쓰쿠루는 친구들에게 당시를 따져 보기 위해 그들을 만났지만, 의외로 친구들은 담담하고, 쓰쿠루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이해해 주기를, 위로를 청합니다.
언제 다시 또 만나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한때의 찬란을 공유했기에, 색깔 친구들은 쓰쿠루에게 기댈 수 있습니다. 절교를 선언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 마음으로는 쓰쿠루는 잘 할 수 있다고, 강인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왔으니까요.
역사는 바뀌지 않지만,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 기억을 되짚고 바로잡음으로써, 자신을 바꿀 수 있습니다.
쓰쿠루는 압니다. 자신을 서서히 회복해 가고 있다는 것을, 소중한 것을 잃을까 봐 두려운 것은 나중의 문제라는 것을요.
알고 있으니, 이 다음 이야기는 잘 흘러갈 것입니다..
왠지 그 다음이 있을 것처럼, 작품은 여운을 남기고 끝납니다. 그 여운의 느낌이 좋아서, 왠지 처음 장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지더라구요..
소설 내내 흐르는 리스트의 '순례의 해'도 분위기 형성에 좋은 장치인 것 같습니다.
음악, 등장인물 간의 대화, 주인공의 성격? 같은 것들이 하루키의 초기작을 떠올리게 합니다. 어찌 보면 단순한 이야기인데, 많은 것을 담고 있다는 것이 참 하루키다워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역사.. 기억..에 대한 이야기는 개인사를 넘어 국가적인 차원에 역사에서도 적용될 만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키가 그것까지 염두에 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어마어마한 선인세 때문에 이 작품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어디 얼마나 대단한 작품인지 보자.'라는 생각으로 이 책을 펼치는 분들도 분명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냉정히 말하자면 사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이유는 간단해요. 대작이 아니니까요.
하루키에게 원래부터 호감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 조용히 힐링하면서 읽기 좋은 작품입니다. 좋은 작품임에는 틀림없으나, 국내에는 너무 커다란 거품과 함께 출간된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덧붙임1. 선인세 경쟁은 좀 사그라들었으면 합니다... 그게 우리나라 출판계를 위해 좋은 일인데요 ㅠ
덧붙임2. 급하게 나온 책인 것을 염두에 두고 읽었습니다. 150페이지를 넘어가면서 역시나 오타와 호응이 어긋난 문장들이 눈에 띄더군요.. 다음 쇄에서 잘 잡아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