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대학 시절에 배수아 작가의 소설을 무척 좋아했었더랬어요. 뭔가 쿨하고 간결하고 뒤끝 남기기를 싫어하는 느낌이 들어서, 그런 스타일을 닮고 싶다.. 라고도 생각했었지요. 점점 뭔가 소설에서 줄거리라 칭할 수 있는 내용이 사라져가고,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이 손가락 사이로 흩어져 버리는 문장들이 늘어나도, 의무감에 그녀의 소설을 읽은 적이 많습니다.


그렇게 어영부영 그녀의 소설들과 멀어지다가, 재작년인가에 어느  문학상의 수상작품집에서 '올빼미의 없음'이라는 단편을 읽었는데, 끝날 듯 끝나지 않는 그 문장 속에서 (역시나 줄거리랄 것은 없었지만) 너무도 분명하게 떠오르는 세피아빛 이미지들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이 그녀의 방향성이었구나. 이런 생각이 불현듯 들더라구요. 그리고 왠지 굉장히 멋있게 느껴졌어요.

 

제가 대학 시절 즐겨 읽었던 그녀의 소설들이 선명한 컬러라면, 이제 그녀의 소설들은 세피아빛 혹은 흑백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최근에 읽은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도 바로 그 흑백입니다.

 

이 작품은 '꿈'을 담고 있습니다. 차분한 듯 하면서도 몽환적이고, 가끔은 격렬하기도 하고, 조용하고, 어둡기도 하고 밝기도 한, 그런 꿈이요.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있지만, 무성영화처럼 느껴지는.. 그런 느낌입니다.
꿈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꿈이란 것은, 어떤 내용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이 인물이 저 인물의 말을 하기도 하고, 비현실적인 일이 현실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지요.


꿈 속에서 아야미는, 오디오 극장의 안내원인 전직 여배우였다가, 누군가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시인이자 독일어 선생이었다가, 외국에서 온 시인을 안내하는 가이드이기도 합니다. 외국에서 왔다는 그 시인은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소설가이고, 아야미는 그 시인을 만나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다음 순간 그를 아직 만나기 전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고 반복되는 몽환적인 꿈.

 

이 소설은 굉장히 실험적입니다. 어쩌면 한 편의 길고긴 시라고 생각될 정도로요. 오디오 극장이라는 특이한 설정이 나오기도 했지만, 이 소설이야말로 극장에서 쭉 낭독하는 걸 듣는다면 굉장히 매력적일 것 같스니다. 아무런 빛도 없는 공간에서, 밤의 거리나 낮의 거리를 찍은 흑백 무성 필름을 틀어놓은 채로 말이지요.


기억하고 있나요? 개인의 운명에 갖가지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지만, 백 명의 운명은 덜 의미심장하며, 수천 또는 수백만 명의 개인사란 어떤 상황에서도 무의미하다는 말을?
 그것이 바로 고독이에요, 아야미. 나는 아주 보편적인 종류의 사람입니다. 막스 에른스트의 그림 같은 남자라고 할 수는 없어요. 일생 동안 나는 항상 사람들이 많이 걷는 길을 따라서 갔습니다. 혼자가 되는 걸 두려워했죠. 그리요,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정말로 두려워한 것이 고독이었는지 아니면 무의미였는지는 명확하지 않군요.
- 63쪽

 

소설을 통해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그런 것은 굳이 따져보지 않기로 합니다. 그녀는 그냥 꿈 이야기를 들려 주고 싶었고, 의외로 그 꿈은 그저 꿈처럼만은 느껴지지 않는다고, 그래서 이 소설은 저에게 계속 들여다보고 싶은 흑백 사진 같은 것이라고 감상하고 싶습니다.

 

아야미, 그 꿈을 계속 꾸어도 좋아요. 어차피 꿈에서 깬다고 해도, 그 또한 꿈과 같을 테니.

 

덧붙임1. 외국에서 온 시인이 낯선 방에서 눈을 뜨고, 아야미와 대화 나누는 장면에서 저는 왠지 모르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1973년의 핀볼'에 나오는 쌍둥이 자매를 떠올렸어요. 묘한 느낌.
덧붙임2. 이 소설 속 오디오 극장에서 낭독된 작품은 '눈 먼 부엉이'. 공교롭게도 최근에 배수아의 번역으로 나왔더라구요. 읽어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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