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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annerist > [답변] 클래식을 듣고싶어요. 제일 먼저 뭐부터 들으면 좋을까요?

서양고전음악을 듣고 싶은데 뭘 들을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에게 흔히 컴필레이션 음반을 많이 추천하곤 합니다. 짧게는 십여 분, 길게는 두어 시간 가까운 협주곡/교향곡 중 광고나 드라마에도 자주 나오는 부분/악장만 뽑아서 모아놓은 음반들 말이죠. 훌륭한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유명한 곡의 익숙한 부분을 먼저 들은 다음, 점차 관심사를 넓혀 가는 방식 말입니다.

그러나 세 가지 점에서 이 방법은 좀 찜찜합니다. 첫째, 10 for 1이라는 천인공노(?)할 가격으로 출시된 "순수"(매너가 좋아하던 이요원이 CD모델로 등장했던. ㅜㅡ: 시집가서 안나옴)라는 컴필레이션 음반 이후 봇물처럼 쏟아져나오는 대부분의 컴필레이션 음반이 악단 정보, 곡 해설, 악단의 해석 특징 등, 내지 정보가 상당히 부실하다는 점이 그 첫번째입니다. 두번째로, 어떤 컴필레이션 음반의 경우, 그다지 수준이 높지 않은 악단의 질 낮은 연주를 채워넣어 그 곡에 있어서 좋지 못한 선입견을 주기도 합니다. 세번째, 간혹 매너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전곡'이 아닌 '부분발췌'를 들으면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남는 사람들 말이죠. 예를 들어, 게리 올드먼이 주연한 영화'불멸의 연인' 마지막, 진정 베토벤이 사랑했던 여인인 조세핀이 그 사랑을 깨닫고 베토벤의 묘비 앞을 헤메이는 장면에서 울려퍼지는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2악장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1, 3악장을 건너뛰고 듣는 게 아쉬울 수도, 뭔가 모자란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너는, 유명 예술가들의 소품집(Showpieces - 독립된 기악곡을 가리키는 말로 자유로운 형식을 띤 짧은 길이의 소곡을 말합니다)을 먼저 들어보는 방법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장영주의 Debute, 하이페츠의 Showpiece, 백혜선씨의 '사랑의 꿈', 오프라 하노이의 '사랑의 인사' 같은 엘범이 이런 류에 속합니다. "소품" 혹은 "showpieces"로 검색해서 뜨는 음반 말입니다. 이런 엘범에 담긴 음반들은 연주시간이 비교적 길지 않아 지구력이 덜 소모되고, 각각의 곡이 그 안에서 완성도를 지닌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또한, 여러 가지 악기가 동시에 연주되며 어느 선율에 귀를 기울여야할지 감이 안잡히는 대규모 관현악을 먼저 듣는 것 보다, 개별 악기 선율에 먼저 익숙해지는게 서양고전음악에 친해지는 길이기도 하구요.

소품집을 한 두 개 사셔서 듣다가 보면 마음이 끌리는 작곡가들이 있을 겁니다. 그때엔 작곡가들의 유명 협주곡이나, 소품집을 연주한 예술가의 협주곡 음반을 들어보는 것이 좋더군요.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에 마음이 쏠렸다면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중 가장 널리 연주되는 5번 "황제"를, 모차르트의 '반짝반짝 작은별 변주곡'이 땡긴다면  피아노 협주곡 20번을, 엘가의 "사랑의 인사"가 좋다면 가장 유명한 그의 첼로 협주곡을 찾아 듣는 식으로 말입니다. 혹은, 장영주의 소품집 "sweet sorrow"나 "fire & ice"를 듣고 '통'했다면 장영주가 가장 아끼는 앨범이라는 멘델스존/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엘범을 듣거나, 벵겔로프의 소품집을 듣고 열광하기 시작했다면 그의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는 것도 좋습니다. 근데 왜 하필 협주곡이냐구요? 대규모 편성 중에서는 교향곡보다 협주곡이 친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독주 악기의 주 선율과 관현악단의 보조 선율이 확실히 구분되거든요. 대개의 협주곡을 듣고 있으면 주 선율은 인기 가수가 역량껏 노래를 하고, 관현악단은 이를 받쳐주는 그림이 떠오릅니다. 이 단계에서 알맞은 곡은 흔히들 4대 바이올린 협주곡이라고 하는 멘델스존/차이콥스키/베토벤/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매너 애정순-_-)과, 베토벤의 5번, 모차르트의 20, 24번, 쇼팽의 1, 2번, 라흐마니노프 2, 3번,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 드보르작과 엘가의 첼로 협주곡 정도가 친해지기 쉽습니다. 아, 바흐의 건반악기를 위한 협주곡과 바이올린 협주곡도 좋구요.

좀 더 잔소리를 하자면, 이제 협주곡 들을 때부터는 다분히 "작정"을 하고 30분 내외의 협주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으며 지구력을 기르는 게 좋습니다. 30분을 훌쩍 넘어가는 명곡들이 수두룩하거든요. 좋은 부분만 계속 듣는 것도 좋지만 전 악장을 들으며 흐름을 머릿속에 그려 보는 재미가 참 크기때문입니다. 이게 좀 힘들다면 땡기는 한 악장만 계속 듣다가 전 악장을 다 듣는 것도 좋습니다. 실제로 매너는 하루 종을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의 3악장만 듣고 살기도 했죠.

좋아하는 협주곡 하나를 집중해서 들을 수 있을 정도라면 이제 남들이 말하는 유명 작곡가들의 명곡과 명연을 들어보는게 좋습니다. 웹서핑 조금만 하면 누구나 인정하는 '명곡'목록 정도는 쉽게 구할 수 있으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이때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게 메이져 음반사들의 재발매시리즈입니다. 애청자들에게 인정받은 LP시대의 명반들을 CD로 비교적 싼 값에 재발매하는 시리즈를 각 음반사마다 가지고 있습니다. DG의 the originals, EMI의 Great Recording Of Century(줄여서 GROC라고 합니다) DECCA의 legend, PHILPIS의 50 등이 이에 속합니다. 최근 나오는 검증되지 않은 신보를 접하는 것 보다 검증된 명연들을 접하는 게 '내 성향에 뭐가 맞나' 따지는 데 도움이 됩니다.

대강 남들이 말하는 "명반"을 좀 듣고, 내 성향을 파악하고 나면, 그 이후부터는 "맘대로"들으면 됩니다.

꼭 소품집 -> 협주곡 -> 대규모 편성 관현악 순으로 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중국의 떠오르는 신예 피아니스트 랑랑 같은 경우는 두 살때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을 듣고 반해버려 어린시절 그것만 주리줄창 듣다가 피아니스트의 길로 접어들었다더군요. 매너 같은 경우도 어떻게 들어야 할 지 몰라서 처음엔 CD한 장만 찍어놓고 열 번 정도를 연달아 듣고 대강 어이 들으면 되겠다 감 잡은 경우랍니다. 그냥 땡기는 선율이 어느 곡인지 찾아서 전곡 들어보며 익숙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툭하면 TV프로에 튀어나오는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도 '꽈꽈꽈광~'하는 첫부분 말고 다이나믹하게 변하는 전악장을 들어보는 것, 참 즐거운 체험입니다. 모 두통약 선전에 나오는 모차르트 레퀴엠을 찾아 들어보는것도, 어떤 우유 선전에 나오는 말러 교향곡 8번 '천인' 찾아 전곡을 들어보는 것도, 전혀 새로운 경험이 될 거니까요.

그렇지만 이러나저러나, 그놈의 '음반값'이 발목을 잡을 때가 많습니다. 그나마 이걸 좀 덜 수 있는 방법은 KBS 1FM을 활용하는 겁니다. 매너가 추천하는 프로그램은 오후 2시 - 4시 사이에 하는 명연주 명음반입니다. 해설과 함께 훌륭한 연주를 '전곡'방송하는 프로그램인데, 서두와 중간, 마칠 때 소품도 간간히 섞여서 나오니 이 프로그램만 꾸준히 들어도 서양고전음악과 쉽게 친해지는 건 무리가 아닐 겁니다. 요즘은 VOD로 한달까지는 언제나 무료로 다시 들을 수 있으니 시간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이 될 거구요. 홈페이지에 곡에 대한 정보도 올려 놓으니 도움이 됩니다. 매너의 경우, 생각나는대로 방송 곡목을 확인하고 땡기는 곡이 있을 경우 VOD를 통해 스트리밍 하고 기타 응용프로그램을 통해 mp3나 wma로 떠서 듣고 있습니다.

대강 이정도입니다. 어쨌든 중요한 건, '땡기는 대로'들으면 된다는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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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알라딘이 내게 준 책값들....

알라딘에서 나에게 지급한 책값을 얼추 계산해보니 거의 70여만원이 된다.
물론 마일리지는 제외한 것이다. 마일리지까지 포함하면 대략
(물론 내가 알라딘에게 지급한 책값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많지만...)

기간은 2002년 3월 18일 첫 지급이 이루어졌는데...
첫 지급명목은 독자서평 20편을 채운 값이었다.

그리고 2003년   4월 1주 이주의 마이리뷰
          2003년 11월 4주 이주의 마이리뷰
          2004년   4월 2주 이주의 마이리뷰
          2004년   4월 이달의 마이리뷰 (최우수작)
          2004년   9월 20일 주간 마이리스트
          2004년 11월 1주 이주의 마이리뷰
                                                      등으로 부수입을 올렸다.

얼마전 알라딘 대주주라고 자임하고 다니는 마XX스님과 하X드님 사이에
페이퍼를 둘러싼 작은 소란(?)이 있었나 보다.
(미안하지만 자세히 읽어보지 않아서 모른다.)

나역시 몇 차례에 걸쳐 알라딘의 이런저런 변화에 불만을 이야기한 바도 있고,
어떤 부분은 여전히 상술이라 생각한다.
알라딘이 나에게 이런 돈을 지급한 것들(특히 땡스 투 마일리지)
상술이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경제학에서 주장하는 합리적인 소비라는 것은
소비자에게 가장 이득이 되는 방식으로 소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때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특정한 서점에 대한 고객의 로열티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알라딘을 제외한 다른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구입한 경험이
나는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적은데...
(그것도 알라딘에 없어서 헌책방이나 교보에 재고가 남은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그 첫 번째 이유는 알라딘 직원분들이 들으면 서운하겠으나 귀찮아서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웬만하면 인터넷 쇼핑몰을 이용할 줄 모르고 귀찮아서 가입하지 않는다.
두 번째 이유는 그런 나의 귀찮음을 상세하고 남을 정도로
다른 인터넷 서점이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는지 어떤지 관심이 없으며
설령 제공한다손 치더라도 귀찮아서 못 옮긴다.
세 번째 이유는 역시 알라딘 서재의 인적 구성이 내 생각엔 가장 괜찮다.
이 역시 증빙 자료는 없다. 다른 인터넷 서점들에 그런 기능이 있는지 없는지 나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안 가봤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소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그러나 합리적인 소비라는 말에는 이런 것들도 포함된다. 심리적인 만족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책마을과 상술인지 번연히 알면서도 기분좋게 해주거나
혹은 에효, 서로 어려운 처지이니 내가 참아야지 하는 마음이 드는 것...
그런 것까지 포함하는 거다. 물론 사람마다 그 합리의 기준은 남다를 수밖에 없음을 전제한다.

나는 알라딘에서 몇몇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일부는 얼굴도 모른다.(사실은 대부분...)
파란여우님은 페이퍼를 잘 쓴다
(물론 리뷰는 여전히 내가 더 잘 쓴다고 생각하지만).
드팀전님은 리뷰를 매우매우 잘 쓴다.
("매우매우"에 주목해주기 바란다. 전문과 비전문의 경계, 대중과 전문의 경계를 슬쩍슬쩍 넘나들면서)
비발님도 그렇고, 로쟈님께는 배울 것이 많고, 언제나 그의 시선을 의식하게 만든다.
복돌이님의 리뷰엔 감칠맛이 있으며, 울보님의 리뷰엔 내가 모르는 아이와 엄마의 시선이
진우맘님에겐 씩씩한 힘이, 판다님에겐 따스한 정서가, chika님에겐 재기발랄함이,
수암님에게선 연륜이, 알라딘 서재 인증 미녀 아줌마 유부녀, 도미(道美) 마냐님에겐 열정이,
나의 (내 맘대로 정한)숙적인 딸기님에겐 전문성과 재치가 결합된 예리함이
드러머 아프락사스님, 하늘 받든 발마스님에겐 예기치 못한 8자 시인의 재능이,
그리고 열혈청년(? 쿠하하....찍힌 겨) 매너리스트님.... 바른 처자 조선인님,
서재에서 공부 열심히 하는 자명한 산책님, 간혹 놀라운 재능으로 날 놀래키는 소굼님,
그리고 책도장을 만들어주신 가을산님...B군 열혈 팬이기도 하신...
또 아영어멈(흐흐), 그리고 내가 먼저 팬이 된 따우님, 언제나 다정하게 대해주는 날개님,
바람구두 킬러 스텔라님, 우리 물만두 성님, 실론티, 스윗매직님, 비연님....
또또... 마태우스님이 형제로 맺어주신 낡은구두님...가시장미...
글구 새침한 유어블루님, sandcat, 바다, 에오스...
M.F.F(my first fan).
그리고 미처 언급하지 못한 분들... 요사이 나의 애정을 듬뿍 받고 있는
(본인은 눈치도 못채고 있는지 모르지만)돌바람...
그리고 밝히면 스캔들이 될 사람(스스로 본인이라고 생각허시겠지요, 뭐... 흐흐)

음, 해놓고 보니 이 짓도 귀찮아서 앞으로 두 번 다시는 못하시겄소.
흐흐..
그리고 마태우스님과 하이드님...

그들은 날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나는 반가운 분들이네요.
가끔 돈도 안 되는 이 짓을 내가 왜 하고 있나...
스스로 반문해보곤 합니다.
그러게요, 왜 돈도 안 되는 이 짓을 허나 생각해보니...
놀면서, 내가 좋아하는 책 보고, 공부하면서 남의 눈치 그래도 조금 덜 보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 할 수 있고, 그에 따르는 피드백도 받아가면서,
조언도 받고, 필요한 책도 구하고 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알라딘...
괜찮은 곳이고, 나름의 로열티(페널티 주고 싶을 때도 있긴 하지만)를 줄 만한 ...
공간으로 우리들이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모든 게 신혼여행 갔다가 돌아오신 찌리릿님의 공로라 생각하니까...
알라딘 사장님! 찌리릿님에게 잘 해주세요. 흐흐...
(저는 고만 용대가리에서 미꾸라지가 되고 말았지 뭐야요.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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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가을산 > 구글의 명절 로고

한번 모아봤습니다.
 
2005년
 

광복절 - 2005년 8월 15일

플랭크 로이드 라이트 생일 - 2005년 6월 8일

지구의 날 - 2005년 4월 22일

Earth Day

레오나르도 다 빈치 생일 - 2005년 4월 15일

빈센트 반 고흐 생일 - 2005년 3월30일

세계 물의 날 - 2005년 3월22일

세계 여성의 날 - 2005년 3월8일

3.1절 - 2005년 3월1일

발렌타인데이 - 2005년 2월 14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2005년 1월1일

 

2004년

 

구글 6주년 기념 - 2004년 9월 7일

아테네 하계 올림픽 - 2004년

광복절 - 2004년 8월15일

금성 관측 - 2004년 6월 8일

지구의 날 - 2004년 4월 22일

윤년 - 2004년 2월 29일

발렌타인데이 - 2004년 2월 14일

개스통 쥴리아 생일 - 2004년 2월 3일

구정 - 2004년 1월 22일

화성탐사로봇 스피릿 - 2004년 1월 15일

새해 - 2004년 1월 1일

 

근하신년

2003년 12월 23일
구글 명절(?) 로고

'Happy Holidays' 가 왜 '즐거운 명절 되세요'로 번역 된건지 모르겠지만 -_-;
로고를 클릭하면 나오는 페이지 보니까 2탄도 있을 것 같군요.

구글 Holiday & Events 로고 모음

내용추가
예상대로 구글 로고가 바뀌었습니다. 조금 빨리 바뀐거라 놀랐지만 말이죠.
이거 보니까 시리즈로 계속 나가는 건가요?
최소한 3탄은 나오겠군요. :)

내용추가

세번째 로고가 나왔습니다.
하루에 한번씩 바뀌는 군요.
크리스마스인 내일 오후에는 무슨 로고로 바뀔지..

내용추가
네번째 로고가 나왔습니다.

과연 사라진 O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Posted by shyguy at 2003년 12월 23일 11:35 AM

완결(?)편이 나왔군요
사라진 O를 이렇게 하다니 ㅎㅎ

 

비행 100주년 기념 - 2003년 12월17일

추석 - 2003년 9월7일

구글 5주년 기념 - 2003년 9월 7일

광복절 - 2003년 8월15일

알프레드 히치콕 생일 - 2003년 8월13일

엠씨 에셔 생일 - 2003년 6월16일

유전자(DNA) 해독 50주년 - 2003년 4월25일

지구의 날 - 2003년 4월22일

아인슈타인 생일 - 2003년 3월14일

미켈란젤로 생일 - 2003년 3월6일

발렌타인데이 - 2003년 2월14일

구정 - 2003년 2월1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2003년 1월1일

 

2002년

피카소 생일 - 2002년 10월25일

구글 4주년 기념 - 2002년 9월 7일

광복절 - 2002년 8월15일

앤디 워홀 생일 - 2002년 8월6일

월드컵 - 2002년 5월31일

지구의 날 - 2002년 4월22일

몬드리안 생일 - 2002년 3월7일

 

2001년

근하신년

노벨상 100주년 기념 - 2001년 12월10일

모네 생일 - 2001년 11월14일

광복절 - 2001년 8월 15일

지구의 날 - 2001년 4월22일

발렌타인데이 - 2001년 2월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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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냐 > [퍼온글] 김동춘 - 지식부재시대의 지식

지식부재시대의 지식


김동춘


   명색이 사회학을 공부해서 밥을 먹고사는 내가 요즘처럼 혼자서 빙긋이 미소를 짓는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신자유주의나 경쟁력이다 하면서 경제가 판을 치는 이 시대의 격랑 속에서 전국의 사회학과가 다 망해가는 마당에 무슨 헛소리냐고 할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 세상 학부모나 철없는 대학생들이 잘 몰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한국 역사상 지금처럼 사회(학)적 문제의식과 시각이 세상을 읽는데 매우 필요한 무기가 되는 시절이 없었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비록 돈 안 되는 학문이라 하여 전국의 각 대학 사회학과는 빈사상태에 놓여있고, 사회학도는 취직을 못하는지 모르지만 온 국민과 말께나 하는 지식인이 모두 사회학자인 시대가 되었다. 그것은 우리사회는 이제 정치권력의 시대가 가고 사회 권력의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이 나라에서 실권을 가진 사람들이나 세상 사람들이 경제지상주의에 빠져서 사회학을 홀대하고, 사회학자들 역시 지쳐서 더 이상 발언을 하지 않는 것이지, 실제로 요즘 우리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 중에서 사회학적이지 않는 것이 거의 없을 지경이다. 사회학적 지식이 오늘의 한국사회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무기가 되었다. 

  확실히 한국은 최근 수년 이래 사회 권력의 점점 더 중요해진 시대에 들어섰다. 언론, 교회, 경상도, 사법 부 네 집단 혹은 영역은 우리사회의 가장 중요한 사회세력으로 떠올랐다. 이제 국정원, 군부, 경찰, 정권, 정당의 시대가 가고 언론, 교회, 법의 시대가 도래했다. 박정희는 총칼로 유신헌법을 밀어부쳤지만,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의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이른바 4대 개혁입법 통과, 행정수도 이전 방침은 모두가 이 네 암초에 부딪쳐 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한국의 보수 세력들은 이제 군과 국정권이 없어도 무서울 것이 없다. 군사정권 시절 아무런 힘도 못쓰고 권력의 시녀 노릇하던 사법부, 언론이 드디어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법부는 드디어 행정수도 이전이라는 이 정권 최대의 프로젝트를 좌절시키는 괴력을 발휘했다. 부자 신문은 이제 ‘젖내 나는 386’의 망동으로부터 ‘원로의 귄위’를 인정해주고 ‘나라의 안보’를 지켜주는 이 시대의 전사(戰士)가 되었다. 그래서 이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애국자’들은 모두가 [조선일보]를 구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월간조선]의 조갑제는 마치 옛날의 운동권 투사들처럼 전략, 전술을 기획하고 행동을 지시하며, 논리를 전파하고, 투쟁을 독려하는 등 사명감에 불타서 움직이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군사정권 시절 그저 조찬기도회다 뭐다 하면서 군사정권 비위맞추기에 바빴던 기독교 교단이 드디어 일어섰다. 시청 앞 잔디밭을 채운 10만 명의 교인을 동원하는 무서운 조직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상도 지역주의는 또 어떤가? 다 죽어가던 한나라당을 부활시켜서 이 정권의 든든한 견제세력으로 만들어주지 않았는가?

  정치권력만 얻으면 세상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했던 ‘정치공학’에 능한 386들은 크게 당황했을 것이다. 그들은 한국사회를 너무 가볍게 보았다. 그들은 정치의 기반은 바로 사회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보수 세력은 결코 정치경제학이 가르쳐주는 것처럼 경제적 이익만으로 움직이는 집단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지 못했다. 아니 사회세력이 권력화되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들은 아직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헌법재판소가 탁월하게 표현하였듯이 사회는 ‘관습’의 영역에 속한다. 관습은 법 위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말하고 있다. 관습이라는 것은 일단 형성되면 쉽게 변하지 않는다. 군은 한번의 총칼로 결론을 내고, 정치는 한 번의 투표용지로 결판을 내지만, 사회는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집단적 행동으로, 지식인의 의견으로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낸다. 여론과 행동과 의견은 가변적이기는 하지만 결코 하루아침에 생겨나지 않는다. 미국식 주주자본주의만이 우리의 대안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경제학자들이 한국 경제학계를 주름잡고 있다면 아무리 이들과는 다른 철학과 노선을 가진 사람들이 정권을 잡아도 다른 경제정책이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여론은 교육의 효과로서 나타난다. 국가보안법이 왜 문제인지 한번도 제대로 배워보지 못했고, 국가보안법의 피해에 대한 사실을 제대로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압도적 다수인 한국사회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론이 여론의 과반수를 얻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교회를 제외한 우리나라의 어떤 정당도, 어떤 시민단체 중에서도 구성원이 매주 전원집합해서 우의와 연대를 다지는 조직은 없다. 21세기가 NGO의 시대라고 떠드는 학자는 뭘 몰라도 한 참 모르고 있다. 한국의 20세기는 학교와 교회가 대한민국 사람들의 영혼을 지배했던 시대였고, 한국에서 NGO는 막차 탄 존재에 불과하다. 노무현의 경제정책이 우왕좌왕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학의 경제학자, 막강한 힘을 가진 경제관료, 그리고 한국식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길들여진 경제인인 한국인들의 의식과 행동을 간과하고 있다.

  그래서 사회라는 것 정치요, 사회는 곧 역사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쌓여온 의식의 지층이 현재의 여론과 의식의 지형도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와 사회는 모두 인간이 만들어간다. 인간은 이해타산과 권력욕만 갖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학습효과와 경험, 편견과 아집, 위기의식 등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다. 그래서 세상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바로 세상의 복수를 당할 수 있다. 권력투쟁에 패배한 사람이 패배를 인정하리라는 낙관을 해서도 안 되며, 과거의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비판하면, 그가 승복하리라는 착각을 해서는 안 된다. 사회적 약자들이 사회에 비판적일 것이라는 낭만적인 전제를 해서도 안 되고, 부자들은 탐욕적일 것이라는 예단을 해서도 안 된다. 매사를 권력투쟁으로 보는 관성을 버리고, 정치공학의 관점을 버려야 세상을 읽을 수 있는 법이다.

  사실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 부시가 재선된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종교의 힘’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다. 매주 교회에 나가는 열렬한 기독교 신자들이 선거에 모두 참가해서 오하이오에서 공화당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다. 메사추세츠 주의 동성애자 결혼 허용 조치는 많은 보수적 기독교인들이나 결혼은 남녀의 결합이라고 생각하는 상식인들을 경악케 했다. 민주당 지지자들의 과도한 ‘권리담론'은 평범한 미국인들을 가족과 전통을 존중하는 보수적 공화당에게 기울어지게 만들었다. 여권주의자들의 낙태운동은 카톨릭 교도들을 공화당으로 표를 던지게 만들었다. 동성애자를 비롯한 소수자나 약자의 권리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표현되는 과정에서 아직 기존의 관습과 전통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한 것도 사실인 것 같다. 프랑스 혁명이후 보수, 그리고 반동은 언제나 급격한 변화가 가져올 사회에 대한 공포감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혁명이 언제나 반동을 불러오고, 이상주의가 보수주의에 계속 패배한 일이 많은 것도 바로 인간을 단지 권리의 주체, 혹은 이해관계에만 밝은 존재로 보는 계몽주의적 관점이 갖는 한계인지도 모른다.

  오늘 한국에서 거대한 촛불시위와 인터넷 매체의 약진, 30대 초선 의원의 대거 의회진출에 놀란 한국의 ’어른‘들이 원로 시국선언에 동참하면서 젊은이들과 그들을 대변하는 노무현 정권에게 공포감을 갖는 정서도 미국 대선의 결과와 대단히 유사하다고 할 것이다. 반드시 ‘수구반동’은 아니지만, 이 정부에 등을 돌린 사람들의 정서도 이와 유사할 것이다. 한국 기독교 원로들은 노무현 정권이 개신교를 박멸한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다. 이들은 반미정서를 갖는 현 정권이 등장해서 이제 반공친미의 기조 속에서 살아온 기독교를 탄압하려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분명 그들의 위기의식은 과장된 것이다. 내가 알기로 이 정권은 홍위병을 앞세우고 조․중․동, 노인, 기독교인, 경상도사람, 서울대학교를 없애려고 작정한 세력이 결코 아니고 그러한 음모를 품은 적도 없다. 그런데 자신이 그 동안 쌓아온 경력과 명예가 하루아침에 무시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자신의 지위와 재산이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단세포적인 사고에 쉽게 빠져들 수가 있다. 그래서 지난번의 ‘원로성명’에서 나타난 것처럼 세상을 일방적으로 보기 시작하면 ‘원로’의 너그러움과 이해심은 전혀 찾아볼 수도 없는 어처구니없는 언사들과 태도들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앞장서서 ‘노무현 정권 타도’를 외치는 대형 교회 목사님들 중 상당수는 교회의 비리가 더 들추어질 위험성과 사립학교법이 통과되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사학재단을 정부에 완전히 빼앗길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극도의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했을 것이다. 소유자 혹은 사주의 이해관계는 종업원 혹은 직원의 이해관계와 일치하는 부분이 있으므로 소유자의 위기의식은 바로 그와 한 솥밥을 먹은 모든 이들의 위기의식으로 돌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적 권력의 원천은 사실상 경제적 이해관계라고 봐도 틀린 것은 아니다. 부자 신문, 사학 재단, 대형 교회, 대법원 판사들 모두가 우리사회에서 잃어버릴 것이 대단히 많은 집단이다. 그들이 여러 가지 논리를 내세우고 있지만 나는 그들이 자신이 사사로운 이익이 아니라 공익의 관점에서 행정수도 이전과 4대 개혁 입법을 반대한다는 논리를 아직 접해보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반대논리에 동조하는 수많은 ‘못가진자’들이 있다는 엄중한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막연하게나마 그들의 논리에 따라가는 시청 앞의 신도들, 노인부대, 경상도의 농민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 사회 권력이라는 말은 형용 모순이다. 사회는 권력체가 아니다. 사회는 자발성의 영역이다. [조선일보]의 시각과 논조에 문제가 있어도 [조선일보]를 구독하는 사람이 모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사회는 일상이고 타성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오랫동안의 반복 행동, 학습, 그냥 세상에 동조하고 싶은 태도 등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 반복, 학습, 타성, 편견들이 모여서 일정한 의견을 형성할 때 누구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무서운 힘이 된다. 사회는 권력의 기둥으로 변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진통은 어제 오늘에 생긴 것이 아니다. 20세기의 한국의 역사와 사회가 축약되어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진통의 핵심에는 물론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 놓지 않으려는 일부 세력의 집요한 시도가 있다. 그리고 그들의 선동과 이분법이 순진한 사람들에게 먹혀들어가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오늘의 진통의 모든 원인은 아니다. 자신은 기득권 집단과 아무런 이해도 공유하고 있지 않으면서 그들의 구호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지식이란 수학적 공식, 단순한 논리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과학적 지식, 아니 인문학적 지식 일반은 단순한 권력구조 분석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삶의 궤적, 그들의 슬픔과 기쁨, 분노와 좌절에 대한 공감이다. 사회학은 그러한 점을 잘 포착하는 학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황해문화]가 바로 지식부재의 시대에 지식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사회 권력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도록 도와주고, 한 걸음 물러서서 오늘의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해법을 제시해 주는 매체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출처 : 황해문화 2004년 겨울호(통권 45호) - 권두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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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글샘 > 잊지 말자. 5.18, [강풀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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