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mannerist > [답변] 클래식을 듣고싶어요. 제일 먼저 뭐부터 들으면 좋을까요?

서양고전음악을 듣고 싶은데 뭘 들을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에게 흔히 컴필레이션 음반을 많이 추천하곤 합니다. 짧게는 십여 분, 길게는 두어 시간 가까운 협주곡/교향곡 중 광고나 드라마에도 자주 나오는 부분/악장만 뽑아서 모아놓은 음반들 말이죠. 훌륭한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유명한 곡의 익숙한 부분을 먼저 들은 다음, 점차 관심사를 넓혀 가는 방식 말입니다.

그러나 세 가지 점에서 이 방법은 좀 찜찜합니다. 첫째, 10 for 1이라는 천인공노(?)할 가격으로 출시된 "순수"(매너가 좋아하던 이요원이 CD모델로 등장했던. ㅜㅡ: 시집가서 안나옴)라는 컴필레이션 음반 이후 봇물처럼 쏟아져나오는 대부분의 컴필레이션 음반이 악단 정보, 곡 해설, 악단의 해석 특징 등, 내지 정보가 상당히 부실하다는 점이 그 첫번째입니다. 두번째로, 어떤 컴필레이션 음반의 경우, 그다지 수준이 높지 않은 악단의 질 낮은 연주를 채워넣어 그 곡에 있어서 좋지 못한 선입견을 주기도 합니다. 세번째, 간혹 매너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전곡'이 아닌 '부분발췌'를 들으면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남는 사람들 말이죠. 예를 들어, 게리 올드먼이 주연한 영화'불멸의 연인' 마지막, 진정 베토벤이 사랑했던 여인인 조세핀이 그 사랑을 깨닫고 베토벤의 묘비 앞을 헤메이는 장면에서 울려퍼지는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2악장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1, 3악장을 건너뛰고 듣는 게 아쉬울 수도, 뭔가 모자란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너는, 유명 예술가들의 소품집(Showpieces - 독립된 기악곡을 가리키는 말로 자유로운 형식을 띤 짧은 길이의 소곡을 말합니다)을 먼저 들어보는 방법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장영주의 Debute, 하이페츠의 Showpiece, 백혜선씨의 '사랑의 꿈', 오프라 하노이의 '사랑의 인사' 같은 엘범이 이런 류에 속합니다. "소품" 혹은 "showpieces"로 검색해서 뜨는 음반 말입니다. 이런 엘범에 담긴 음반들은 연주시간이 비교적 길지 않아 지구력이 덜 소모되고, 각각의 곡이 그 안에서 완성도를 지닌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또한, 여러 가지 악기가 동시에 연주되며 어느 선율에 귀를 기울여야할지 감이 안잡히는 대규모 관현악을 먼저 듣는 것 보다, 개별 악기 선율에 먼저 익숙해지는게 서양고전음악에 친해지는 길이기도 하구요.

소품집을 한 두 개 사셔서 듣다가 보면 마음이 끌리는 작곡가들이 있을 겁니다. 그때엔 작곡가들의 유명 협주곡이나, 소품집을 연주한 예술가의 협주곡 음반을 들어보는 것이 좋더군요.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에 마음이 쏠렸다면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중 가장 널리 연주되는 5번 "황제"를, 모차르트의 '반짝반짝 작은별 변주곡'이 땡긴다면  피아노 협주곡 20번을, 엘가의 "사랑의 인사"가 좋다면 가장 유명한 그의 첼로 협주곡을 찾아 듣는 식으로 말입니다. 혹은, 장영주의 소품집 "sweet sorrow"나 "fire & ice"를 듣고 '통'했다면 장영주가 가장 아끼는 앨범이라는 멘델스존/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엘범을 듣거나, 벵겔로프의 소품집을 듣고 열광하기 시작했다면 그의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는 것도 좋습니다. 근데 왜 하필 협주곡이냐구요? 대규모 편성 중에서는 교향곡보다 협주곡이 친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독주 악기의 주 선율과 관현악단의 보조 선율이 확실히 구분되거든요. 대개의 협주곡을 듣고 있으면 주 선율은 인기 가수가 역량껏 노래를 하고, 관현악단은 이를 받쳐주는 그림이 떠오릅니다. 이 단계에서 알맞은 곡은 흔히들 4대 바이올린 협주곡이라고 하는 멘델스존/차이콥스키/베토벤/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매너 애정순-_-)과, 베토벤의 5번, 모차르트의 20, 24번, 쇼팽의 1, 2번, 라흐마니노프 2, 3번,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 드보르작과 엘가의 첼로 협주곡 정도가 친해지기 쉽습니다. 아, 바흐의 건반악기를 위한 협주곡과 바이올린 협주곡도 좋구요.

좀 더 잔소리를 하자면, 이제 협주곡 들을 때부터는 다분히 "작정"을 하고 30분 내외의 협주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으며 지구력을 기르는 게 좋습니다. 30분을 훌쩍 넘어가는 명곡들이 수두룩하거든요. 좋은 부분만 계속 듣는 것도 좋지만 전 악장을 들으며 흐름을 머릿속에 그려 보는 재미가 참 크기때문입니다. 이게 좀 힘들다면 땡기는 한 악장만 계속 듣다가 전 악장을 다 듣는 것도 좋습니다. 실제로 매너는 하루 종을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의 3악장만 듣고 살기도 했죠.

좋아하는 협주곡 하나를 집중해서 들을 수 있을 정도라면 이제 남들이 말하는 유명 작곡가들의 명곡과 명연을 들어보는게 좋습니다. 웹서핑 조금만 하면 누구나 인정하는 '명곡'목록 정도는 쉽게 구할 수 있으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이때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게 메이져 음반사들의 재발매시리즈입니다. 애청자들에게 인정받은 LP시대의 명반들을 CD로 비교적 싼 값에 재발매하는 시리즈를 각 음반사마다 가지고 있습니다. DG의 the originals, EMI의 Great Recording Of Century(줄여서 GROC라고 합니다) DECCA의 legend, PHILPIS의 50 등이 이에 속합니다. 최근 나오는 검증되지 않은 신보를 접하는 것 보다 검증된 명연들을 접하는 게 '내 성향에 뭐가 맞나' 따지는 데 도움이 됩니다.

대강 남들이 말하는 "명반"을 좀 듣고, 내 성향을 파악하고 나면, 그 이후부터는 "맘대로"들으면 됩니다.

꼭 소품집 -> 협주곡 -> 대규모 편성 관현악 순으로 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중국의 떠오르는 신예 피아니스트 랑랑 같은 경우는 두 살때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을 듣고 반해버려 어린시절 그것만 주리줄창 듣다가 피아니스트의 길로 접어들었다더군요. 매너 같은 경우도 어떻게 들어야 할 지 몰라서 처음엔 CD한 장만 찍어놓고 열 번 정도를 연달아 듣고 대강 어이 들으면 되겠다 감 잡은 경우랍니다. 그냥 땡기는 선율이 어느 곡인지 찾아서 전곡 들어보며 익숙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툭하면 TV프로에 튀어나오는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도 '꽈꽈꽈광~'하는 첫부분 말고 다이나믹하게 변하는 전악장을 들어보는 것, 참 즐거운 체험입니다. 모 두통약 선전에 나오는 모차르트 레퀴엠을 찾아 들어보는것도, 어떤 우유 선전에 나오는 말러 교향곡 8번 '천인' 찾아 전곡을 들어보는 것도, 전혀 새로운 경험이 될 거니까요.

그렇지만 이러나저러나, 그놈의 '음반값'이 발목을 잡을 때가 많습니다. 그나마 이걸 좀 덜 수 있는 방법은 KBS 1FM을 활용하는 겁니다. 매너가 추천하는 프로그램은 오후 2시 - 4시 사이에 하는 명연주 명음반입니다. 해설과 함께 훌륭한 연주를 '전곡'방송하는 프로그램인데, 서두와 중간, 마칠 때 소품도 간간히 섞여서 나오니 이 프로그램만 꾸준히 들어도 서양고전음악과 쉽게 친해지는 건 무리가 아닐 겁니다. 요즘은 VOD로 한달까지는 언제나 무료로 다시 들을 수 있으니 시간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이 될 거구요. 홈페이지에 곡에 대한 정보도 올려 놓으니 도움이 됩니다. 매너의 경우, 생각나는대로 방송 곡목을 확인하고 땡기는 곡이 있을 경우 VOD를 통해 스트리밍 하고 기타 응용프로그램을 통해 mp3나 wma로 떠서 듣고 있습니다.

대강 이정도입니다. 어쨌든 중요한 건, '땡기는 대로'들으면 된다는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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