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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부재시대의 지식


김동춘


   명색이 사회학을 공부해서 밥을 먹고사는 내가 요즘처럼 혼자서 빙긋이 미소를 짓는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신자유주의나 경쟁력이다 하면서 경제가 판을 치는 이 시대의 격랑 속에서 전국의 사회학과가 다 망해가는 마당에 무슨 헛소리냐고 할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 세상 학부모나 철없는 대학생들이 잘 몰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한국 역사상 지금처럼 사회(학)적 문제의식과 시각이 세상을 읽는데 매우 필요한 무기가 되는 시절이 없었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비록 돈 안 되는 학문이라 하여 전국의 각 대학 사회학과는 빈사상태에 놓여있고, 사회학도는 취직을 못하는지 모르지만 온 국민과 말께나 하는 지식인이 모두 사회학자인 시대가 되었다. 그것은 우리사회는 이제 정치권력의 시대가 가고 사회 권력의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이 나라에서 실권을 가진 사람들이나 세상 사람들이 경제지상주의에 빠져서 사회학을 홀대하고, 사회학자들 역시 지쳐서 더 이상 발언을 하지 않는 것이지, 실제로 요즘 우리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 중에서 사회학적이지 않는 것이 거의 없을 지경이다. 사회학적 지식이 오늘의 한국사회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무기가 되었다. 

  확실히 한국은 최근 수년 이래 사회 권력의 점점 더 중요해진 시대에 들어섰다. 언론, 교회, 경상도, 사법 부 네 집단 혹은 영역은 우리사회의 가장 중요한 사회세력으로 떠올랐다. 이제 국정원, 군부, 경찰, 정권, 정당의 시대가 가고 언론, 교회, 법의 시대가 도래했다. 박정희는 총칼로 유신헌법을 밀어부쳤지만,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의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이른바 4대 개혁입법 통과, 행정수도 이전 방침은 모두가 이 네 암초에 부딪쳐 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한국의 보수 세력들은 이제 군과 국정권이 없어도 무서울 것이 없다. 군사정권 시절 아무런 힘도 못쓰고 권력의 시녀 노릇하던 사법부, 언론이 드디어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법부는 드디어 행정수도 이전이라는 이 정권 최대의 프로젝트를 좌절시키는 괴력을 발휘했다. 부자 신문은 이제 ‘젖내 나는 386’의 망동으로부터 ‘원로의 귄위’를 인정해주고 ‘나라의 안보’를 지켜주는 이 시대의 전사(戰士)가 되었다. 그래서 이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애국자’들은 모두가 [조선일보]를 구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월간조선]의 조갑제는 마치 옛날의 운동권 투사들처럼 전략, 전술을 기획하고 행동을 지시하며, 논리를 전파하고, 투쟁을 독려하는 등 사명감에 불타서 움직이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군사정권 시절 그저 조찬기도회다 뭐다 하면서 군사정권 비위맞추기에 바빴던 기독교 교단이 드디어 일어섰다. 시청 앞 잔디밭을 채운 10만 명의 교인을 동원하는 무서운 조직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상도 지역주의는 또 어떤가? 다 죽어가던 한나라당을 부활시켜서 이 정권의 든든한 견제세력으로 만들어주지 않았는가?

  정치권력만 얻으면 세상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했던 ‘정치공학’에 능한 386들은 크게 당황했을 것이다. 그들은 한국사회를 너무 가볍게 보았다. 그들은 정치의 기반은 바로 사회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보수 세력은 결코 정치경제학이 가르쳐주는 것처럼 경제적 이익만으로 움직이는 집단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지 못했다. 아니 사회세력이 권력화되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들은 아직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헌법재판소가 탁월하게 표현하였듯이 사회는 ‘관습’의 영역에 속한다. 관습은 법 위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말하고 있다. 관습이라는 것은 일단 형성되면 쉽게 변하지 않는다. 군은 한번의 총칼로 결론을 내고, 정치는 한 번의 투표용지로 결판을 내지만, 사회는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집단적 행동으로, 지식인의 의견으로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낸다. 여론과 행동과 의견은 가변적이기는 하지만 결코 하루아침에 생겨나지 않는다. 미국식 주주자본주의만이 우리의 대안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경제학자들이 한국 경제학계를 주름잡고 있다면 아무리 이들과는 다른 철학과 노선을 가진 사람들이 정권을 잡아도 다른 경제정책이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여론은 교육의 효과로서 나타난다. 국가보안법이 왜 문제인지 한번도 제대로 배워보지 못했고, 국가보안법의 피해에 대한 사실을 제대로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압도적 다수인 한국사회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론이 여론의 과반수를 얻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교회를 제외한 우리나라의 어떤 정당도, 어떤 시민단체 중에서도 구성원이 매주 전원집합해서 우의와 연대를 다지는 조직은 없다. 21세기가 NGO의 시대라고 떠드는 학자는 뭘 몰라도 한 참 모르고 있다. 한국의 20세기는 학교와 교회가 대한민국 사람들의 영혼을 지배했던 시대였고, 한국에서 NGO는 막차 탄 존재에 불과하다. 노무현의 경제정책이 우왕좌왕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학의 경제학자, 막강한 힘을 가진 경제관료, 그리고 한국식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길들여진 경제인인 한국인들의 의식과 행동을 간과하고 있다.

  그래서 사회라는 것 정치요, 사회는 곧 역사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쌓여온 의식의 지층이 현재의 여론과 의식의 지형도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와 사회는 모두 인간이 만들어간다. 인간은 이해타산과 권력욕만 갖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학습효과와 경험, 편견과 아집, 위기의식 등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다. 그래서 세상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바로 세상의 복수를 당할 수 있다. 권력투쟁에 패배한 사람이 패배를 인정하리라는 낙관을 해서도 안 되며, 과거의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비판하면, 그가 승복하리라는 착각을 해서는 안 된다. 사회적 약자들이 사회에 비판적일 것이라는 낭만적인 전제를 해서도 안 되고, 부자들은 탐욕적일 것이라는 예단을 해서도 안 된다. 매사를 권력투쟁으로 보는 관성을 버리고, 정치공학의 관점을 버려야 세상을 읽을 수 있는 법이다.

  사실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 부시가 재선된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종교의 힘’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다. 매주 교회에 나가는 열렬한 기독교 신자들이 선거에 모두 참가해서 오하이오에서 공화당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다. 메사추세츠 주의 동성애자 결혼 허용 조치는 많은 보수적 기독교인들이나 결혼은 남녀의 결합이라고 생각하는 상식인들을 경악케 했다. 민주당 지지자들의 과도한 ‘권리담론'은 평범한 미국인들을 가족과 전통을 존중하는 보수적 공화당에게 기울어지게 만들었다. 여권주의자들의 낙태운동은 카톨릭 교도들을 공화당으로 표를 던지게 만들었다. 동성애자를 비롯한 소수자나 약자의 권리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표현되는 과정에서 아직 기존의 관습과 전통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한 것도 사실인 것 같다. 프랑스 혁명이후 보수, 그리고 반동은 언제나 급격한 변화가 가져올 사회에 대한 공포감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혁명이 언제나 반동을 불러오고, 이상주의가 보수주의에 계속 패배한 일이 많은 것도 바로 인간을 단지 권리의 주체, 혹은 이해관계에만 밝은 존재로 보는 계몽주의적 관점이 갖는 한계인지도 모른다.

  오늘 한국에서 거대한 촛불시위와 인터넷 매체의 약진, 30대 초선 의원의 대거 의회진출에 놀란 한국의 ’어른‘들이 원로 시국선언에 동참하면서 젊은이들과 그들을 대변하는 노무현 정권에게 공포감을 갖는 정서도 미국 대선의 결과와 대단히 유사하다고 할 것이다. 반드시 ‘수구반동’은 아니지만, 이 정부에 등을 돌린 사람들의 정서도 이와 유사할 것이다. 한국 기독교 원로들은 노무현 정권이 개신교를 박멸한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다. 이들은 반미정서를 갖는 현 정권이 등장해서 이제 반공친미의 기조 속에서 살아온 기독교를 탄압하려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분명 그들의 위기의식은 과장된 것이다. 내가 알기로 이 정권은 홍위병을 앞세우고 조․중․동, 노인, 기독교인, 경상도사람, 서울대학교를 없애려고 작정한 세력이 결코 아니고 그러한 음모를 품은 적도 없다. 그런데 자신이 그 동안 쌓아온 경력과 명예가 하루아침에 무시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자신의 지위와 재산이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단세포적인 사고에 쉽게 빠져들 수가 있다. 그래서 지난번의 ‘원로성명’에서 나타난 것처럼 세상을 일방적으로 보기 시작하면 ‘원로’의 너그러움과 이해심은 전혀 찾아볼 수도 없는 어처구니없는 언사들과 태도들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앞장서서 ‘노무현 정권 타도’를 외치는 대형 교회 목사님들 중 상당수는 교회의 비리가 더 들추어질 위험성과 사립학교법이 통과되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사학재단을 정부에 완전히 빼앗길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극도의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했을 것이다. 소유자 혹은 사주의 이해관계는 종업원 혹은 직원의 이해관계와 일치하는 부분이 있으므로 소유자의 위기의식은 바로 그와 한 솥밥을 먹은 모든 이들의 위기의식으로 돌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적 권력의 원천은 사실상 경제적 이해관계라고 봐도 틀린 것은 아니다. 부자 신문, 사학 재단, 대형 교회, 대법원 판사들 모두가 우리사회에서 잃어버릴 것이 대단히 많은 집단이다. 그들이 여러 가지 논리를 내세우고 있지만 나는 그들이 자신이 사사로운 이익이 아니라 공익의 관점에서 행정수도 이전과 4대 개혁 입법을 반대한다는 논리를 아직 접해보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반대논리에 동조하는 수많은 ‘못가진자’들이 있다는 엄중한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막연하게나마 그들의 논리에 따라가는 시청 앞의 신도들, 노인부대, 경상도의 농민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 사회 권력이라는 말은 형용 모순이다. 사회는 권력체가 아니다. 사회는 자발성의 영역이다. [조선일보]의 시각과 논조에 문제가 있어도 [조선일보]를 구독하는 사람이 모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사회는 일상이고 타성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오랫동안의 반복 행동, 학습, 그냥 세상에 동조하고 싶은 태도 등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 반복, 학습, 타성, 편견들이 모여서 일정한 의견을 형성할 때 누구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무서운 힘이 된다. 사회는 권력의 기둥으로 변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진통은 어제 오늘에 생긴 것이 아니다. 20세기의 한국의 역사와 사회가 축약되어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진통의 핵심에는 물론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 놓지 않으려는 일부 세력의 집요한 시도가 있다. 그리고 그들의 선동과 이분법이 순진한 사람들에게 먹혀들어가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오늘의 진통의 모든 원인은 아니다. 자신은 기득권 집단과 아무런 이해도 공유하고 있지 않으면서 그들의 구호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지식이란 수학적 공식, 단순한 논리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과학적 지식, 아니 인문학적 지식 일반은 단순한 권력구조 분석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삶의 궤적, 그들의 슬픔과 기쁨, 분노와 좌절에 대한 공감이다. 사회학은 그러한 점을 잘 포착하는 학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황해문화]가 바로 지식부재의 시대에 지식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사회 권력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도록 도와주고, 한 걸음 물러서서 오늘의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해법을 제시해 주는 매체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출처 : 황해문화 2004년 겨울호(통권 45호) - 권두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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