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전선 이상없다 - [초특가판]
루이스 마일스톤 감독, 루 에어스 외 출연 / 씨네코리아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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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편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전쟁은 인류 역사에서 단 한 번도 멈춘 적 없는 사건이다. 마르크스가 정의한 것처럼 '전쟁은 고도의 경제행위'이므로, 전쟁의 목적은 폭력을 써서 상대를 공격해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는 행위다. 따라서 얻을 게 많은 만큼 많은 걸 잃게 된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처럼, 전쟁도 그렇다.
전쟁을 낭만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전쟁의 비극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이다. 전쟁은 집단과 집단이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전쟁터는 개인과 개인이 맞닥뜨리고, 모르는 사람을 아무런 이유 없이 살해하는 현장일 뿐이다.
이때 개인이 모르는 사람을 죄의식 없이 살해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는 기본이 '애국심'이다. 전쟁을 시작한 국가는 '애국심'을 부추기고, 침략 당한 국가는 '조국 수호', '사랑하는 가족을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다. 다만, 전쟁을 일으킨 집단(국가)과 개인(들)의 이해가 맞아 떨어지는 경우, 전쟁은 일종의 '도박'으로 변질된다. 중세 '십자군 전쟁'으로 불리는 유럽 기독교인 군대가 이슬람 지역을 침략한 사례가 있다. 이들은 '신의 이름으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이슬람 지역을 침탈해 그들의 재산을 뺐고, 사람들을 노예로 잡아 돈을 벌려는 목적이었다. 국가와 국가가 벌이는 전쟁에서 군인들이 약탈하거나 군인이 아닌 사람을 해치는 건 전쟁 범죄에 해당하지만, '십자군 전쟁'의 본질은 '약탈'에 있었다. 이들은 이슬람 나라를 침략해 노략질을 해서 이익을 챙기거나 자기 목숨을 잃거나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도박을 했다.

아주 오래 전, '씨족' 단위의 집단에서 발생한 전투에서 개인이 '씨족'의 한 단위로 참전하는 건 곧바로 그 집단의 생존이 곧 개인(자기 자신)의 생존과 직접 연결되기 때문이다. 씨족 단위의 전투는 집단의 크기를 늘리려는 종족 보존의 본능과 연결되어 있으며, 집단의 규모가 커질수록 개인도 안전하다는 걸 인류는 본능으로 알고 있었다.
최소 부족 단위 규모가 되면서 인류는 남성 중심의 전투원을 구성해 다른 부족과 전투를 벌일 때는 이들 남성 중심의 전투원을 투입했고, 평상에서는 남성이 수렵을 통해 식량 확보와 전투 훈련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했다.
집단이 나라 단위로 커지면서 '군인' 즉 싸우는 사람을 따로 모집해 보다 전문적으로 전투 훈련을 시키고, 전투에서 승리하는 훈련과 실습을 통해 개인의 전투력을 향상했다.
'전쟁'은 두 개 이상의 집단이 극렬한 물리적 충돌에 이르는 상황인데, 전쟁을 일으키는 쪽과 방어하는 쪽이 갈린다. '전쟁'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지만, 전쟁을 일으킨 집단에 대항해서 싸우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예를 들어, 일본이 한국을 침략했다고 가정할 때, 한국이 힘이 없어 일방으로 침략당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고, 한국이 모든 힘을 동원해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상황도 있을 수 있다.
이때,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전쟁으로, 역사에서 '임진, 정유 전쟁'이 대표적인데,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조선은 이런 일본의 야욕에 맞서 미리 전쟁 준비를 하지 못한 채 전쟁을 치러야했다. 우리의 역사를 보면, 조선 시대보다 더 거슬러 올아가서 중국의 당나라, 수나라의 침략에 맞서 싸운 전쟁이 있는데, 이때 방어전은 침략당한 나라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전쟁이다.
즉, '모든 전쟁은 나쁘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전쟁을 일으킨 집단은 나쁘지만, 침략에 맞서 싸우는 건 정당한 방어이기 때문에 비난해서는 안 된다. 물론 모든 전쟁이 흑과 백처럼 선명하게 악과 선으로 구분되는 건 아니다. 시대 배경, 정치 상황, 전쟁이 발생하는 과정에서 집단과 집단 사이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으니 이런 고려 없이 어느 한쪽을 일방 비난하기 어려운 건 사실이다.

'현대의 시작은 1차 세계전쟁'이라고 에릭 홉스봄은 정의했다. 이 전쟁 이전까지 약 100년 동안은 유럽에서 큰 전쟁 없이 평화로운 시기였고, 그때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가장 활발하게 발전, 성장하고 있었다. 과거에도 전쟁은 끊이지 않았으나 5년 전쟁 기간에 무려 1,500만 명이 죽고 그보다 훨씬 많은 부상자가 나온 전쟁은 1차 세계전쟁이 최초였다.
무엇보다 근대에서 현대를 가르는 건 대량 살상무기의 등장이었다. 개량된 자동 소총과 기관총, 수류탄, 대포, 탱크, 화염방사기, 비행기가 등장했고, 개량한 첨단 무기는 사람의 생명을 너무 쉽게, 너무 많이 죽일 수 있었다. 10대, 20대, 30대 남성이 대부분 죽었으며, 이들은 누군가의 사랑하는 아들이자 손자이며 친구였다.
전쟁은 땅 위에 있는 모든 걸 파괴하는 건 물론, 사람의 생명을 잔혹하게 끊는다. 한 사람의 죽음은 그와 연결된 가족, 친척, 이웃과 연결되며 마을 단위의 공동체를 파괴한다. 눈으로 보이는 것만 이렇고, 전쟁은 인륜, 도덕, 윤리와 같은 인간의 정체성은 물론 가치관, 세계관을 망가뜨리며, 사회 질서의 붕괴, 역사의 단절, 세대와 세대의 연속성을 무너뜨리고 과거의 문명까지 모두 파괴한다.

전쟁을 낭만으로 바라보는 작품은 매우 많고, 너무 많아서 사람들은 심각함을 느끼지 못한다. 전쟁터에는 늘 영웅이 있고, 영웅이 모든 걸 해결하는 미국 영웅주의 영화가 그렇듯, 사람들은 전쟁의 공포와 참혹함, 끔찍함을 외면하고 낭만을 찾거나 그런 시각에 동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건 오히려 전쟁의 공포와 두려움을 알기 때문에 외면하려는 감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1차 세계전쟁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유럽은 곧바로 2차 세계전쟁의 불구덩이에 휩쓸렸고, 1차 세계전쟁보다 무려 세 배나 많은 사람이 죽은 다음에서야 전쟁의 끔찍함을 인정했다.
하지만 2차 세계전쟁 이후 냉전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동아시아에서 한국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으며, 이 단일 전쟁으로 한 민족 구성원이 무려 최소 100만 명 넘게 죽었고, 군인보다 민간인 사망자가 훨씬 많았던 전쟁이었다. 민간인 사망자가 많은 이유는 한국전쟁이 이념전쟁이자 강대국의 이념전쟁의 대리 전쟁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국제적으로 냉전 이데올로기가 빛을 잃어가면서 2000년 이후 전쟁의 참혹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리얼리즘 영화들이 나타났다. 전쟁의 낭만적 환상은 상당히 벗겨지고, 전쟁의 실체가 사람들에게 주로 영상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가장 큰 충격을 주었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시작으로, 전투의 사실성 즉 참혹함, 잔혹함, 끔찍함을 드러내는 영화들이 나왔으며,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이 영화는 원작 소설이 있다. 레마르크가 쓴 같은 제목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는데, 1차 세계전쟁이 끝나고 10년 지나서 나온 소설은 곧바로 미국(헐리우드)에서 영화로 제작했다. 작가 레마르크는 독일인으로 1차 세계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있으며, 이 소설은 세계 전쟁문학 가운데 반전 소설로 유명하다.
레마르크가 전쟁 경험을 토대로 반전 소설을 썼다면, 레마르크와 비슷한 경험을 한 히틀러는 완전히 반대의 인물이다. 레마르크와 히틀러는 거의 같은 시기에 태어났다. 두 사람 모두 1차 세계전쟁에 군인으로 참전했으며 부상당한 경험이 있고, 훈장을 받은 것도 같다.
하지만 두 사람의 운명은 극과 극으로 갈린다. 전쟁을 혐오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소설을 쓴 레마르크와는 달리, 히틀러는 1차 세계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전후 국가배상금으로 극도의 가난에 시달리며, 불만이 많은 독일인을 상대로 증오를 부추기며 권력을 움켜쥔다.
레마르크는 1929년에 이 소설을 발표했는데, 이때 이미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당수로 권력을 차지한 히틀러는 레마르크의 반전 소설을 싫어했고, 그가 국가수상이 된 1933년 이후 레마르크의 소설은 분서 목록에 올라 공개적으로 불태워졌다.
나찌의 탄압으로 레마르크는 스위스로 망명하지만 그의 여동생 엘프레데는 평범한 노동자로 살다 반역죄로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는데, 히틀러가 레마르크에게 직접 복수하지 못하자 그의 여동생을 살해한 것으로 본다.

레마르크의 소설은 발표하자마자 미국(헐리우드)에서 영화로 만들었다. 1930년작 영화는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현실에 가까운 사실성, 현장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다만 1930년 작품과 1979년 작품은 미국(헐리우드)에서 제작했기에 등장인물이 모두 영어로 말하는 건 옥의 티라고 할 수 있다. 
세 편의 같은 영화 가운데 내 기억에 가장 또렷하게 남은 건 1979년판 영화다. 소설 원작 그대로, 총성이 멈춘 서부전선에서 나비를 쫓다 적의 저격수 총에 맞아 전사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선명하다. 최근에 개봉한 2022년판 영화는 앞의 두 영화보다 미장센은 훨씬 훌륭하다. 주인공이 보여주는 반전 메시지도 명확하고, 앞의 두 영화에서 볼 수 없는 긴장감과 압축, 전쟁 장면의 묘사가 뛰어나다. 다만 마지막 장면은 1979년판과 사뭇 다르다.
영화는 2시간 남짓 서사를 마무리해야 하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영화만 보고도 소설의 내용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소설의 감동을 다 느끼지는 못한다. 이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면 원작 소설을 꼭 읽어보길 권한다. 영화에서 말하지 못한 구체적인 인물의 일상, 전쟁에 반대하는 평범한 민중의 목소리,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군인들이 바로 우리 형제, 친구, 동료, 이웃이라는 구체성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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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스티븐 킹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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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 스티븐 킹

혼령을 보고, 혼령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면 어떤 경험을 할까. 스티븐 킹은 이런 질문으로 이야기를 만든다.
아버지의 존재를 모르고, 어머니와 살고 있는 제이미는 서너 살 때 이미 혼령을 보기 시작한다. 그는 너무 어려서 사람과 혼령을 구분하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은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존재를 실제와 똑같이 보고, 대화까지 할 수 있다. 이 능력을 엄마인 티아가 알게 된 건 제이미가 여섯 살 무렵이고,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작은 에피소드를 겪으면서 아들의 능력을 인정한다.
제이미 엄마 티아는 저작권 대리 사무실을 운영하는데, 꽤 괜찮은 수입을 올리는 업체여서 넉넉한 생활을 한다. 외삼촌(제이미 엄마의 오빠)이 하던 저작권 대리 사업을 물려받아 꾸준히 성과를 내며 넉넉한 삶을 살던 티아와 제이미는 그러나 투자 사기를 당하면서 가진 재산을 모두 잃게 되고 한동안 어려운 생활을 한다.

제이미의 엄마 티아는 리즈와 연인 사이다. 엄마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제이미는 담담히 받아들인다. 리즈는 경찰이지만 마약 운반을 하는 부패한 경찰이다. 나중에 드러나지만, 티아나 리즈 모두 2008년 모기지 사태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고, 티아보다 리즈의 가족이 더 큰 피해를 당해 리즈가 경찰이면서도 마약을 운반하는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는 계기가 된다.
제이미는 혼령을 보는 특별한 재능으로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사건에 말려들면서 끔찍한 경험을 한다. 물론 엄마를 위해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은 작가의 혼령을 만나 쓰다 만 소설의 내용을 받아쓰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끔찍한 경험을 더 많이 한다. 더구나 엄마의 연인이었던 경찰 리즈에게 납치당하면서 생명이 위험한 순간을 맞기도 하는데, 기지를 발휘해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난다.

제이미의 도움으로 엄마 티아는 저작권 대리업이 다시 좋아지고, 수입이 많아지면서 다시 안정적 생활을 하게 된다. 제이미의 외삼촌이자 엄마의 오빠인 해리가 요양원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요양원에 간 제이미는 혼령 해리를 만난다. 그리고 묻지 말았어야 할 질문을 한다. 삼촌, 내 아빠가 누군지 아세요?
이 소설은 제이미의 성장소설이다. 제이미의 독백으로 진행하고, 제이미가 여섯 살 무렵부터 막 성년이 되는 열 여덟 살까지의 이야기 가운데 삶에서 중요한 경험을 했던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제이미는 이 이야기를 '공포 소설'이라고 말하지만, 그보다는 어린 제이미가 외부모인 엄마와 둘이 살면서 겪은 인생 이야기이면서 결코 바라지 않은 삶을 살아야 했던 제이미의 슬픈 탄생과 성장의 이야기다. 제이미는 엄마와 비교적 넉넉하고 행복한 삶을 살며 성장하지만, 그가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는 순간, 그는 깊은 딜레마에 빠진다. 즉,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놓인 딜레마와 같은, 결코 돌이킬 수도, 잊을 수도 없는 낙인을 가슴에 찍고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다.

제이미는 테리올트의 혼령이 사라지지 않고 자기를 따라다닌다는 걸 알게 된다. 폭탄을 건물에 설치해 많은 사람을 해치던 폭파범 테리올트는 정체가 드러나면서 자살하는데, 제이미는 형사 리즈의 강압으로 테리올트의 혼령을 보게 되고, 그에게 마지막으로 설치한 폭탄이 어디 있는지 알아낸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생명을 구했지만, 정작 테리올트의 혼령이 사라지지 않고 끈질기게 제이미의 뒤를 따라다니며 괴롭히자 제이미는 존경하는 버켓 교수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도움을 받는다.
제이미는 테리올트의 혼령이 나타나자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먼저 다가가 그 혼령을 끌어안는다. 혼령을 지배하는 힘은 실체가 없었지만 마치 지구 밖 멀고 먼 외계에서 온 존재로 여겨진다. 그동안 제이미가 봤던 혼령들은 제이미가 묻는 말에 진실을 말했으며, 공격적이지 않고, 일주일쯤이면 혼령의 존재가 사라지지만, 테리올트의 혼령 내부에 또 다른 무언가 존재하고 있어 테리올트는 시간이 많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았다.
제이미가 보이지 않는 존재를 향해 달려들자 그 존재는 오히려 겁을 먹고 도망한다. 제이미는 그 존재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제이미가 부를 때면 언제든 나타나기로 약속한다. 버켓 교수는 제이미에게 말하길,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존재를 다시 불러내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 존재는 무얼까. 단순히 외계에서 온 불가항력의 존재일까. 그건 제이미의 정신 세계로 읽힌다. 아버지 없이 자란 제이미는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지만 여전히 아버지가 없는 정신적 허기를 느낀다. 아이에게 엄마는 하나의 우주, 절대 세계이면서 온전한 존재다. 그런 엄마가 로즈라는 동성의 연인과 사귀고, 사랑을 할 때, 제이미는 질투, 공포, 외로움,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제이미는 성장 과정에서 느낀 이 부정적 감정에 정면으로 맞서야 할 때가 온다.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접어드는 질풍노도의 시기, 정신적으로 성장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면서도 쉽지 않은, 부모를 뛰어넘어 자기의 정체성과 자아의 독립을 이루어야 하는 시기가 닥치고, 제이미가 겪은 혼령과의 대화나 보이지 않는 끔찍한 존재와의 사투는 제이미가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독립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힌다.

제이미가 알게된 출생의 비밀로 이 소설은 공포에서 잔혹극으로 변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에서 비밀을 간직하며 살아간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은 그것이 남들이 보기에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 한 사람의 삶과 존재를 규정하거나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이다.

제이미가 알게 된 비밀은 더욱 그 자신은 물론,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심각한 비밀이었고, 그걸 아는 순간 제이미의 삶은 근본에서 흔들린다. 그가 혼령을 보고, 혼령과 대화를 나누는 경험이 그의 삶을 뒤흔든 것처럼. 그 둘은 결국 같은 의미이며, 자기 정체성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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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에서
스티븐 킹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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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에서 - 스티븐 킹

스콧 캐리는 40대 백인 남성이다. 인터넷 홈페이지를 기획, 제작하는 프리랜서로 일하며, 이혼해서 혼자 살고 있다. 키는 190센티미터가 넘고 몸무게도 120킬로그램이 나가는 거구인데, 평범하고 선량한 남성이다. 이웃의 은퇴한 노인이자 의사였던 밥 엘리스와 친하게 지내는 스콧은 최근 자기에게 벌어진 일을 말한다.
날마다 몸무게가 줄어들고 있다면 좋은 일일까. 어느 정도까지는 좋은 일이겠으나, 스콧에게 일어난 것처럼 감량이 멈추지 않고 날마다 조금씩 꾸준히 줄어드는 현상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오로지 '몸무게'만 줄어든다면.
스티븐 킹은 '몸무게가 줄어드는 남자'라는 아이디어로 짧은 소설을 한 편 썼다. 평소라면 이 정보 분량은 단편집 모음에 들어가는 게 맞을 정도다. 내용도 그렇고, 분량도 중편 수준이다. 그런데 왜 이 작품을 하나의 '장편'으로 펴낸 걸까.
스콧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며 심지어 행복하다고 느낀다. 비록 이혼해서 혼자 살고 있지만, 지금 하는 프리랜서 업무가 잘 풀려서 몫돈을 만졌고, 건강도 아무 문제 없고, 좋은 이웃들과 지내며, 나쁜 일이 일어나지도 않고 그럴 만한 꼬투리도 없다.
이웃에 사는 레즈비언 부부(가운데 남편 역할을 하는) 매콤과는 조금 불편한데, 그 집의 강아지들이 스콧의 마당 잔디밭에 똥을 싸기 때문이다. 스콧은 강아지와 산책할 때 목줄을 하고, 똥을 치워달라고 말한다. 매콤은 필요 이상으로 스콧에게 냉정하게 대한다.
레즈비언 부부인 매콤과 디어드리는 보스톤에서 이사온 '결혼한 레즈비언 부부'로, 이곳에 채식 식당을 열고 운영하고 있다. 음식은 맛있지만 보수적인 동네여서 레즈비언 부부를 곱게 바라보지 않고, 뒤에서 흉을 보거나 험담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스콧도 안다.
마을 축제의 하나로 마라톤 대회가 열리고, 스콧도 참가한다. 매콤은 다른 지역의 달리기 대회에서 우승한 경력이 있는, 아마추어보다는 잘 달리는 실력인데, 스콧은 그런 매콤에게 내기를 하자고 요청한다. 스콧이 이기면 스콧의 집에서 채식 요리를 먹으며 이웃으로 이야기를 나누자는 것이 전부였다.
매콤이 보기에 거구의 중년 백인 남성인 스콧은 달리다 심장마비로 죽을 것 같아 보였지만, 농담인줄 알면서도 그러자고 한다. 그렇게 달리기를 시작하고, 스콧은 처음에 천천히 뒤쳐지다가 조금씩 속도를 내며 앞으로 나간다. 결승선이 가까워지면서 폭우가 쏟아지고, 매콤을 추월하던 스콧은 넘어지려는 매콤을 부축해 일으켜 그가 결승선을 먼저 지나가도록 돕는다.
지역신문에 두 사람의 사진이 실리고, 문을 닫을 위기에 있었던 매콤과 디어드리의 식당은 사람들이 찾아오면서 자리를 잡는다. 이들 매콤과 디어드리 레즈비언 부부에게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사람은 스콧이었고, 이제 그들은 스콧의 주방에서 함께 밥을 먹으며, 이웃의 밥 엘리스 부부와도 함께 식사하고, 대화를 나누는 친밀한 사이가 된다.
스콧은 그들에게 자기의 몸무게가 나날이 줄어들고 있다고 밝히고, 곧 몸무게가 0에 수렴하면 자신은 떠난다고 말한다. 현대 의학으로는 불가사의한 현상이라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지만, 가장 가까운 이웃인 밥 엘리스 부부와 매콤 부부에게만 이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마침내 스콧의 몸이 저절로 허공에 떠오를 정도가 되던 날, 스콧은 매콤의 도움을 받아 커다란 풍선을 잡고, 허리에는 폭죽을 매달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밥 엘리스 부부와 매콤 부부가 하늘로 올라가는 스콧을 지켜본다.

스콧은 왜 몸무게가 날마다 줄어들까. 스티븐 킹의 아이디어는 단순했을 걸로 본다. 날마다 몸무게가 줄어들다 마침내 0에 수렴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스콧은 자기 몸무게가 줄어드는 걸 보면서도 불안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암에 걸리지 않고, 병에 걸려 고통당하지 않고, 몸무게가 줄어들어 자연스럽게 소멸하는 걸 다행으로 생각한다.
여기서 '몸무게'는 육체적, 물질적 의미의 '몸무게'이기도 하지만, 스콧의 정신 연령일수도 있고, 존재의 의미를 나타내는 상징적 숫자일수도 있다. 스콧은 큰 고민 없이 사는 평범한 백인 중년 남성으로 보이지만, 그의 내면에서 '인생의 환희', '삶의 기쁨', '존재의 감동'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즉,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 일상이 누군가에게 의미 있고, 가치 있느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다.
스콧의 소멸은 스스로 지금의 현실에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자신의 결정에 따른 결과다. 스콧이 자신의 소멸을 바라지 않아 보이지만, 그는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온전히 인정한다. 날마다 몸무게가 줄어드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의 몸무게가 머지 않아 0에 수렴하면 자신이 소멸할 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스콧에게 좋은 이웃이 있지만, 이웃은 본질에서 스콧의 삶을 붙드는 강력한 의미를 갖는 존재는 아니다. 다른 예를 들자면, 가족 사이에서도 자살하는 가족이 있는데, 아무리 가까운 가족도 '개인'의 존재에 관한 본질적 고민과 고통에 관해서는 교감하기 어렵다. 
스콧이 어떤 외부의 영향이나 작용 없이 저절로 몸무게가 0에 수렴하는 현상은 온전히 스콧 내부에서 발생한 존재론적 문제 때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 소설이 공포, 호러, 스릴러가 되려면 스콧의 몸무게가 0으로 수렴하는 원인과 과정에서 불가사의하거나 끔직한 일이 벌어져야 하는데, 이 작품은 전혀 그렇지 않다.
다시 스콧의 상황을 객관의 눈으로 보자면, 스콧은 40대 백인 남성으로 몸집이 크다. 그는 혼자 살고, 가까운 이웃이 있지만 또래의 친구는 없다. 결혼했지만 이혼했고, 자녀는 두지 않은 걸로 나온다. 그에게 가족은 멀리 사는 고모가 한 분 계실 뿐이니 고아나 마찬가지다. 스콧은 외로운 남성이다.
천성은 착하고, 나름 밥벌이는 하지만, 여성에게 인기가 없고, 여성들이 좋아할 만한 매력이 보이지 않는다. 스콧은 이렇게 살아가는 나날이 지겹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렇게 공허한 나날을 보내던 스콧에게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시한부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게 암이든, 병이든, 자살이든 마찬가지다. 그는 결심했고, 세상을 떠나기로 마음 먹는다. 그의 몸무게가 0으로 수렴하는 시간은 불과 두어 달. 그때까지 마음을 다스리며 이웃들과 즐거운 시간을 만들기로 작정한다.
이 작품을 홍보하는 전단지에서는 '스티븐 킹의 작품에서 전에 없던 상냥함'이라고 했지만, 사실 이 작품은 고독한 삶을 살던 중년 남성의 외롭고 쓸쓸한 죽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비록 스콧 자신이 선택한 마지막이긴 해도, 모든 마지막은 슬프고, 안타깝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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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흐르는 곳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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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흐르는 곳에 - 스티븐 킹
 
해리건 씨의 전화기
크레이그는 아버지와 함께 작은 시골마을에서 산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고, 평범한 소년으로 자라지만, 그의 마음에 깊은 슬픔이 일렁이고 있다. 스티븐 킹은 어릴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간 뒤 줄곧 형과 엄마, 세 식구가 살았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이 소설에서는 엄마로 바꿨을 뿐, 그의 내면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크레이그는 마을에 이사 온 엄청난 부자로 은퇴한 해리건 씨를 알게 되고, 그의 집에서 책을 읽어주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이 소설이 독특한 점은, 그동안 IT와 관련해 거의 언급한 적이 없는 스티븐 킹이 아이폰, 아마존을 비롯한 첨단 정보산업과 미국 투자회사와 관련한 정보를 나열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해리건 씨가 은퇴하기 전 투자를 통해 억만장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배경에 깔아놓는다.
해리건 씨는 크레이그에게 일 년에 네 번 카드를 보내는데, 그 속에 복권을 함께 넣었다. 우연히 그 복권이 당첨되었고, 해리건 씨는 당첨금을 애플 주식에 투자하라고 권한다. 이때 애플에서 막 '아이폰'이 나오기 시작했고, 크레이그는 생일선물로 '아이폰'을 받았으며, 해리건 씨에게 '아이폰'을 선물한다.
크레이그의 성장소설이면서, 해리건 씨와의 인연으로 발생하는 신비하고 놀라운 경험을 담고 있지만, 스토리는 진부하다. 다만 그동안 스티븐 킹의 놀라운 이야기 솜씨처럼, 이 소설도 읽는 즐거움이 있다. 매우 핍진하게 담겨진 에피소드는 서사의 사실성을 높이는 배경이 되고, '아이폰'의 등장, 억만장자의 죽음과 상속, 크레이그가 유산의 일부를 물려받는 행운, 물려받은 유산으로 '아마존'에 투자하는 내용 등에서 스티븐 킹이 말하고자 하는 '유머'는 다 읽을 수 있지만, 그건 지금에 와서는 조금 낡아버린 이야기가 되었다.
또한 크레이그가 해리건 씨의 장례식에서 죽은 해리건 씨의 옷에 그의 '아이폰'을 몰래 집어 넣은 다음, 시간이 지나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는 설정은 재미있지만, 충격적이지는 않다.
크레이그를 괴롭히던 사람들이 모두 의문의 죽음을 당했을 때, 크레이그는 그것이 죽은 해리건 씨가 영적인 힘을 발휘한 것은 아닐까 두려워하지만, 그건 미스터리로 남겨 둔다.
 
척의 일생
독특한 형식의 소설. 시간의 흐름이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척 크란츠'의 짧은 삶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단편소설 세 편의 연작으로 구성했다. 각 연작에 등장하는 인물은 공통점이 없으며, '척 크란츠'를 중심으로 서로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마티가 사는 캘리포니아는 강력한 지진으로 캘리포니아의 아래쪽이 떨어져 나가면서 인터넷과 전기가 불안정한 상태가 된다. 도시에도 거대한 씽크홀이 생기고, 마치 세상의 종말이 온 듯한 분위기에서 도시의 광고판과 텔레비전, 인터넷에 모두 '척 크란츠'를 애도하는 광고가 뜬다.
'척 크란츠'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의 없다. 그럼에도 '척'은 도시의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다. 마티는 고등학교 선생이고, 이혼한 아내 펠리샤와 잘 지내고 있다. 미국은 거대한 지진이 발생해 대륙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지만,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크고 작은 분쟁이 발생하고, 지구 전체가 불안정한 상태로 그려진다.
두 번째 작품에서, 재러드 프랑크는 길거리 공연으로 드럼을 친다. 사람들이 거의 반응 없이 지나가고, 재러드가 조금 실망하고 있을 때, 양복을 입고 가방을 든 '척'이 그 앞을 지나가다 재러드를 보고 걸음을 멈추고 드럼 연주를 듣는다. 그러다 '척'은 혼자 춤을 추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조금씩 걸음을 멈추고 '척'의 춤과 재러드의 드럼 연주를 구경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구경을 하던 재니스가 '척'의 춤 상대가 되어 두 사람은 처음 보는 사이였음에도 완벽한 춤을 추며 구경하는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다. 이 장면은 삶의 한 순간,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면을 그린 것으로, '척'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세 번째 작품에서, 척은 어릴 때 부모를 잃은 고아가 된다. 그는 친할머니,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라며 학교에서 춤동아리에 들어가 춤을 배우고, 회계사가 되어 살아간다. 그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걸 지켜보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깊은 슬픔의 시간을 보낸다.
이 소설을 관통하는 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 상실감, 안타까운 감정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지만, 그들의 내면에 일렁이는 슬픔의 감정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본질의 감정이기에, 해결할 수 없고, 해소할 수 없는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개인의 내면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이 작품은 공포, 스릴러, 호러와 아무 관련이 없는, 담담하고 담백한 내용으로, '척'의 일생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삶에 슬픔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를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피가 흐르는 곳에
'피가 흐르는 곳에 특종이 있다'는 언론계의 관용어에서 온 제목. 중편이라기에는 긴 편이고, 거의 짧은 장편 길이인데, 이야기는 단순하다. 한 초등학교에 소포가 배달되고, 그 소포에는 폭탄이 들어 있었으며, 폭탄이 터져 수십 명의 어린이가 죽고 다치게 된다.
당연히 모든 방송국과 언론사에서 학교 앞으로 취재를 나오고, 치열한 보도 경쟁, 속보 경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사립 탐정인 홀리 기브니는 텔레비전에서 리포트를 하는 체트 온도스키를 본다. CCTV에 찍힌 범인의 얼굴이 공개되고, 현상금이 걸리지만, 범인을 알 수 있는 단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홀리는 우연히 발견한 리포터 체트에게서 설명할 수 없지만,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참사 현장에서 보도하는 그의 태도나 현장을 중계하면서 사용하는 단어나 문장에서 그가 참사를 '즐기고' 있다는 기괴한 느낌인데, 처음에는 홀리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체트가 폭탄을 배달한 범인과 같은 인물이라는 의심을 하기 시작한다.
전혀 엉뚱하고 터무니없는 발상이었지만, 홀리는 그 의심을 갖고 체트의 과거를 조사하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미국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참사에 체트가 현장에 있었으며, 그가 참사를 일으켰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는 증거가 나타난 것이다.
여기에 전직 경찰이자 범인의 몽타쥬를 그리는 일을 오래 했던 노인을 만나면서, 그 노인이 수십 년 동안 체트의 뒤를 추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그가 모은 구체적 자료를 보면서 홀리의 직감이 옳았다는 걸 확인한다.
체트 온도스키는 분명 '인간'이지만, 그는 인간 이상의 존재이며,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작가는 체트 온도스키가 어떤 생명체인지 밝히지 않는다. 다만 '제2의 인간'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종류의 인간은 자기 외모를 바꿔가면서 평범한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산다. 수백 년, 수천 년을 살아온 인간일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외계에서 온 전혀 다른 생명체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체트가 외모를 바꾸는 장면이 딱 한 번 나오는데, 물리적인 몸뚱아리가 출렁거리며 외모를 바꾼다. 그렇다면 전혀 다른 인간종일 수 있고, 외계 생명체일 수도 있다.
이 작품의 핵심은 체트 온도스키라는 한 인간이 동시에 여러 사람으로 변하면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 미국에서 벌어진 수많은 참사를 저지른 범인이라는 점이다. 크고 작은 폭탄 폭파 사건,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이 아닌, 인간과 다른 종이라는 설정에서 이 소설은 환타지 소설로 분류할 수 있지만, 미국에서 벌어진 수많은 참사를 보도하며 '즐거워 하는' 언론사의 본질을 비판한 것으로 본다. 
즉, 언론은 '피가 흐르는 곳에'서 자기들의 먹이가 많다고 좋아한다. 그들은 겉으로는 애통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실제로는 즐겁고 행복한 웃음을 짓는다. 참사 보도는 기본적으로 자극적이고, 사람들은 자극적인 뉴스를 좋아하며, 시청률이 높아지면 광고가 많이 들어오고, 광고가 많아지면 방송사, 언론사는 돈을 더 많이 벌게 되고, 언론 자본은 부자가 되며, 그곳에서 일하는 언론 노동자는 더 많은 임금, 보너스를 받는다.
사회에서 비극이 더 많이 발생할수록 상대적으로 언론은 행복해지는 이 아이러니를 스티븐 킹은 '괴물'로 표현한 것이다.
 
드류 라슨은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면서, 단편소설을 여섯 편 쓴 작가다. 그의 단편소설이 '타임'에 실릴 정도로 괜찮았는데, 장편소설을 쓰지 못한 컴플렉스가 있다. 그는 곧 안식년을 맞이하게 되고, 과거에 장편소설을 쓰려다 크게 실패한 경험이 있어 불안하지만, 어느 날, 문득 완벽한 장편소설 이야기가 떠오른다.
드류 라슨은 아내와 가족에게 양해를 구하고 아버지 때부터 쓰던 별장으로 가서 장편소설의 앞부분을 쓰기로 작정한다. 별장은 몹시 외진 곳에 있어서 가장 가까운 잡화점이 20km 떨어진 곳에 있고, 전화와 전기는 들어오지만 휴대전화는 사용할 수 없으며, 전기와 전화도 언제 끊길 지 알 수 없는 산골이다.
소설을 쓰고 싶은 간절한 마음은 작가인 스티븐 킹이 이미 다른 작품에서도 여러 번 보여주었다. 대표적으로 '샤이닝'이 있고, '미저리' 역시 그렇다. 작가는 '글쓰기'가 곧 자기 정체성이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 매우 행복한 반면 그만큼의 무게로 공포와 두려움도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드류 라슨은 지난번 장편소설의 실패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고 이번에는 좋은 작품을 쓰겠노라고 다짐한다. 그는 완벽하게 준비를 마치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 산골 오두막에서, 마치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선명한 소설의 이미지를 글로 옮긴다.
모든 것이 훌륭했고, 드류 라슨 자신도 이렇게까지 글이 잘 써질 거라고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소설은 처음부터 훌륭하게 시작했다.
그러다 폭풍이 몰려오고, 집 주위 나무가 쓰러지면서 창고를 덮치고, 드류 라슨은 문앞에서 기절한 쥐를 발견한다. 쥐를 멀리 내던질 수도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드류 라슨은 쥐를 벽난로 앞에 놓아둔다. 그리고 다음 날, 쥐는 사라지고, 나흘 뒤부터 드류 라슨은 글쓰기에 문제가 생긴다. 처음 장편소설을 쓸 때처럼 트라우마가 작동한 것이다.
그때 쥐가 나타나 드류 라슨에게 제안한다. 소설을 완성하도록 돕겠다. 단, 소설을 완성하면 네가 좋아하는 한 사람이 죽어야 한다. 그래도 하겠는가. 드류 라슨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소설을 완성하고픈 욕심에 쥐와 거래한다.
작가의 욕망이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보다 크다는 걸 작품은 말한다. 사실 이런 소재는 스티븐 킹의 작품에서 평범한 정도라고 볼 수 있다. 대단히 드라마틱하지도, 공포와 호러와 피가 튀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심심하다.
차라리 외딴 집에서 겪는 공포를 다룬 단편이었다면 어땠을까. 말하는 쥐와 거래한다는 내용은 동화처럼 읽힌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명을 잃는 건 우연이었지만, 드류 라슨은 죄책감을 갖는다. 삶은 그런 우연과 죄책감이 동시에 작용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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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법고전 산책 - 열다섯 권의 고전, 그 사상가들을 만나다
조국 지음 / 오마이북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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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 살이 되고 뼈가 되는 책입니다.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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