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지켜라!(dts) - 일반판 (Save the Green Planet)
CJ 엔터테인먼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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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지구를 지켜라]를 보고이 영화가 흥행에 참패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관객 1천만명 시대에 고작 몇 천명 정도가 이 영화를 봤다는 것은, 한국 관객의 편식이 얼마나 심한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다.

물론, 이 영화를 선택하지 않은 것이 관객의 잘못은 아니지만, 좋은 작품을 선택하는 안목이 부족했다는 지적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고, 이 영화를 만들어서 배급하는 영화사는 ‘마케팅’ 실패를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아마도, 영화사 스스로도 이 영화를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 당황했을 듯 하다.[지구를 지켜라]는 블랙 코미디, 판타스틱 SF, 서스펜스 호러 등 여러 장르를 혼합해 놓은 듯 보인다. 여기 저기 인터넷으로 찾아 본 관람평을 보면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영화사가 어떤 장르에 촛점을 맞춰 홍보를 해야 할 지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잘 만든 영화를 가지고도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단순히 개봉 타이밍의 문제를 넘어 영화사에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어쨌거나, 다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단박에 눈치챘다.

이 영화는 블랙 코미디도, 판타스틱 SF도, 서스펜스 호러도 아닌, 바로 ‘계급투쟁’에 관한 영화라는 것을.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극좌편향’이라고 비난하겠지만, 이 영화를 잘 살펴보고 몇 가지 장식을 떼버리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자본가인 강사장과 노동자인 봉구의 대결로 남는다.

외계인 운운하는 것이 영화적 수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다.노동자인 봉구는 강사장을 납치한다. 그가 외계인이라는 것이 이유지만 강사장의 회사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는 봉구는 바로 그곳, 공장에서 노동조합원이었고, 사랑하는 애인이 파업 현장에서 용역 깡패에게 목숨을 잃는다.

어머니 역시 강사장의 공장에서 일하다 독극물에 중독되어 식물인간이 되고 만다.어릴 때부터 폭력과는 거리가 멀고, 늘 괴롭힘을 당하던 착한 봉구는 자본가가 지배하는 이 사회 속에서 부적응자가 되어 간다.

봉구의 어린시절부터 공장 노동자까지의 삶은 가난한 민중의 자식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평균적으로 보여준다.폭력에 길들여진 사회, 마초가 판을 치고, 폭력이 법보다 위에 있고, 인간의 존엄성보다는 착취가 우선인 사회, 그 속에서 착한 봉구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결국 봉구는 미쳐가고, 그의 상상 속에서 자본가는 ‘외계인’으로 변하게 된다.

그렇다. 자본가는 ‘인간’이 아닌, ‘외계인’이다. 같은 인간이라면 어떻게 같은 인간을 그렇게 참혹하게 착취하고 내버릴 수 있는가. 일회용품처럼 노동자의 피를 빨아먹고 뱉어낼 수 있는가.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노동운동한다고 사시미칼로 배를 쑤시지는 못할 것이다.

공장에서 기계가 사람의 뼈를 가루로 만들어도, 한달에 잘라진 손가락이 가마니로 쏟아져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직 ‘이윤’만을 챙기는 자들이 바로 ‘자본가’이고 그들은 ‘인간’이 아닌 ‘외계인’이 분명하지 않은가.

봉구는 그런 외계인이 바로 지구를 멸망시킨다고 믿고, 그들을 잡아 지구의 평화를 지키려고 한다.하지만, 영화는 현실을 충실하게 반영하듯이, 이 영화에서도 역시 ‘외계인’ 아니 ‘자본가’가 승리한다.

뛰어난 실력과 명석한 두뇌를 가진 자본가 강사장은 결국 노동자 봉구의 집요한 저항을 뿌리치고 그를 때려눕힌다. 대단한 자본가의 힘이다.신인 감독은 봉구와 강사장의 대결구도를 왜 굳이 노동자와 자본가로 설정했을까?

우리 사회에는 아주 다양한 관계들이 있음에도, 이런 구도를 만든 것은, 감독의 깊은 속마음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우리 사회는 여전히 ‘자본가’와 ‘노동자’가 존재하고, ‘자본주의 국가’에서 국가 권력은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한다.

노동자들은 사회의 권력을 장악한 ‘자본가의 논리’에 매몰되어 자신들의 세계관을 잃어버린다.한 편의 영화에서 너무 많은 의미를 찾으려고 지나친 비약을 하는 건 아닌가 생각되지만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미덕은 보고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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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 아웃케이스 없음
나홍진 감독, 김윤석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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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자’를 만든 나홍준 감독의 작품.한국 영화에서 또 하나의 걸작이 탄생했다. 전편인 ‘추격자’를 능가하는 하드보일드하고 개성있는 작품으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영화 도입부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긴장을 풀 수 없는 탄탄한 스토리와 속도감이 이 영화의 수준을 말한다.

엉성한 듯 치밀한 스토리는 관객에게 끊임없이 생각하도록 만든다. 어찌보면 복잡한 듯한 구성이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사건의 발단이 얼마나 단순하게 시작되었는지, 그래서 그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함 때문에 오히려 무릎을 치게 된다.

오해라고 하지만, 영화에서는 바로 그 ‘오해’ 때문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사라지고, 자신의 아내도 아닌, 내연녀와의 불륜을 복수하기 하다 비참하게 죽는 사장을 보면서 인간의 어리석음을 마땅히 비웃게 된다.어설픈 감정은 배제하고,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사내들의 세계는 영화적으로 과장되었을 뿐, 그것이 현실과 다르다고 누가 강변하겠는가.

넥타이를 맨 정장 안에는 웃는 얼굴로 뒷통수를 치는 거대한 자본과 이윤과 비정함이 있지 않은가. 구남은 살기 위해 죽이고, 희망을 위해 살인을 한다. 살인을 옹호하거나 정당성을 부여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적어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도 있음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영화 속 인물들은 조금씩 과장되고 정형화되었지만, 우리 내면에서 잠자고 있던 본능이 이 영화를 보면서 꿈틀거리는 걸 느끼는 건 나 혼자뿐일까.

면가의 냉혹하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도끼질, 죽음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회칼을 휘두르는 한국의 조폭들과 연변의 조폭들, 피가 솟구치고 두개골이 빠개지는 잔인함, 인간의 육체를 토막내 개먹이로 던지는 끔직함, 이런 것들이 과연 영화 속만의 이야기일까.

며칠 전, 굶어 죽은 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을 보자. 그리고 자기 아버지에게 맞아 죽은 세 살짜리 아기를 보자. 영화보다 덜한가? 영화는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반영한다. 영화 속에서 아무리 쾌락을 탐한다고 해서 그것이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듯이(감각의 제국), 칼로 난도질 당하고 도끼로 뼈가 빠개지는 잔인함 뒤에는 그보다 더 흉포한 세상이 있는 것이다.그런 면에서 ‘황해’는 현실과 영화를 훌륭하게 접목한 걸작이다.

개인적으로 별 다섯개에 별 다섯개를 주는 최고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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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물은 조작된 이미지인가?

지난 주, 텔레비전을 보다가 우연히 연예계 소식을 전하는 방송을 보게 되었다.
조용필 씨의 부인 안진현 씨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는데, 조용필 씨의 모습이 카메라에 가깝게 보이면서 줄곧 조용필 씨의 슬픔과 회한에 대해 전하고 있었다.
그의 붉은 눈시울과 진정으로 슬퍼하는 애닲은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조용필 씨를 좋아하는 팬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아내가 아직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는 사실은 분명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언론에서는 일제히 조용필 씨와 그의 아내에 대한 사랑과 인생에 대해 자세하게 보도하고 깊은 애도를 표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연예인, 스타이니만큼 그만한 관심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나 역시, 조용필 씨의 노래를 좋아하고, 음악에 인생을 걸고 살아 온 조용필 씨를 존경한다.
하지만, 조용필 씨 본인도 아닌, 조용필 씨 아내의 죽음에 대해 온 방송과 신문에서 그렇게 많은 시간과 지면을 할애하면서 보도한 것은, 인기 스타에 대한 예우를 넘은, ‘죽음’의 상업성은 아니었는지 진지하게 살펴볼 일이다.
지난 주에 두 사람의 사망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한 사람은 앞에서 언급한 조용필 씨의 아내에 관한 보도였고, 다른 한 사람은 바로 두산중공업에서 분신자살한 배달호 씨의 죽음에 관한 보도였다.
죽음 자체에 가벼움과 무거움이 따로 있을 수 없고, 죽은 이에 대한 예우도 차별이 있을 수 없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떤 죽음에 대해 더 많은 ‘사회적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인지는 우리가 판단해야 한다.
언론에서는 조용필 씨 부인의 사망에 대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인간적으로 접근했다. 조용필 씨 부부의 남다른 사랑, 갑작스러운 죽음, 사별에 대한 안타까움… 모든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그래서 그 소식을 보면서 눈물까지 흘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 씨의 죽음에 대해서는 언론이 어떻게 보도하고 있는가?
단지, 늘 발생하는 산재사고처럼, 단순한 스트레이트 기사로 취급하고 있다. 물론, 이번 배달호 씨 분신자살 사건이 앞으로 두산중공업의 노사관계와 금년의 노동운동의 방향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리라는, 너무나 당연한 기사가 나오기는 했다.
하지만, 배달호 씨가 왜 자살했는지, 50대의 가장인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 정도로 절박한 처지에 몰린 이유는 무엇인지, 그를 바라보고 있는 가족들의 슬픔은 어느 정도인지, 그의 사람됨은 어떠했는지 등을 보도하는 언론은 하나도 없었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는 [한겨레신문]조차도 제목으로 ‘배달호’라는 이름을 넣은 적이 없을 정도다. 노동자는 죽어서도 부속품으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배달호’라는 한 인간이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죽어갈 때는, 이 땅의 모든 모순이 한꺼번에 그의 목을 조였기 때문이다. 단지 노동조합의 조합원이고, 간부 역할을 했다는 것 때문에, 월급이 가압류 당하고, 감옥에 가야 하는 처참한 현실이 21세기 한국의 모습인 것이다.
그럼에도, 언론에서는 조용필 씨 아내의 죽음에 대해서는 감동적으로 묘사를 하고 있지만, 한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기술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전태일의 목소리는 이른바 ‘정보사회’라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절대적으로 강조되어야 한다.
수 백만 명의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저임금, 언제 해고당할 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빈민’(한겨레21 참고)으로 전락하고 있다.
빈부 격차는 더욱 심하게 벌어지고, 빈곤의 심화는 대를 이어 계속되고 있다.
50만 명에 이르는 외국인 노동자의 처지는 또 어떠한가? 우리나라의 천박한 문화는 바로 ‘천민자본주의’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왜곡된 자본주의가 ‘물질(돈) 만능주의’ 사회를 만들고, 물질 만능이 곧 인간의 소외를 만들고, 빈곤의 격차가 불신과 불안을 만들어내고 있다.
정당한 경제개혁이나 사회개혁조차도 ‘사회주의’로 몰고 가는 이런 천박한 구조 속에서 과연 ‘인간다움’이라는 희망이 있기나 할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우리의 삶 전반에 걸쳐 천박하고 역겨운 시스템이 작동하는 것은 대부분 가진 자들에게 책임이 있다.
극단적인 예로, 빈부의 격차가 더욱 심화되고, 빈민 인구가 다수를 차지하고 소수의 가진 자들이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차지한다고 하자.
결국 그렇게 해서 가진 자들이 더 행복할까? 빈민 인구는 저항을 시작할테고, 그렇게 되면 나라가 불안해지고,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이후의 시나리오는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남미의 현실이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결국 부의 편중은 모두에게 불행한 결과를 가져온다. 북유럽이 잘 사는 이유는 부의 분배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조작된 이미지만을 보고 살아가고 있다.
방송에서, 신문에서, 심지어는 인터넷에서도,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에게 보여지는 많은 것들은 이미 조작되고 왜곡된 이미지들이다.
두 사람의 죽음에 관해서도 언론은 이미지를 조작했다. 연예인의 결혼, 이혼, 사망 등에 관해서는 매주 많은 시간을 투여해 방송을 하고 있다. 시시콜콜하고 잡담만을 해대는 연예계의 뒷이야기며, 아침 방송에서 수다떨기와 신변잡기만을 보여주는 내용들이며, 그 모든 것들이 대중의 관심을 한쪽으로 유도하려는 의도된 내용들인 것이다.
잘 생각해보라. 방송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이 고작 신변잡기와 잡담과 연예인 이야기밖에 없을까?
이런 시스템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누가 가장 큰 이익을 보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하면 답은 아주 쉽게 나온다.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확대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자본’은 그 자체로 이미 ‘권력’이다. ‘권력’은 ‘자본’을 획득하기 어렵지만, ‘자본’은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 미국의 현재 상황이 바로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두 사람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자본’과 ‘권력’이 두 죽음을 어떻게 갈라놓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 죽음을 바라보면서 한쪽에서는 눈물을 흘리고, 한쪽에서는 무관심으로 지나가버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무의식 속에 조작된 이미지가 심겨져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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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08년 7.8월 - 통권 101호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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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키에 흰 수염이 가슴까지 자란 아버지는, 사람은 배워야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다던 아버지는, 발목을 다치고부터 만날 술로써 세월을 보냈다. 그래서 어머니 혼자 힘으로 아들 셋 딸 셋을 다 키우셨다. 어머니는 목장이나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했다. 일자리 얻기도 어려운 시절이라 어머니는 하루라도 일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뼈가 으스러지도록 일을 하면서 어렵게 어렵게 집안을 이끌어나갔다.-219쪽

막노동판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어머니는 밥 먹을 힘조차 없다고 했다. 씻지도 않고, 밥도 드시지 않고 그대로 쓰러져 주무시는 날이 잦아졌다. 이른 아침마다 꽁보리밥을 물에 말아 드시고는 기계처럼 벌떡 일어나 일하러 나갔다. 어머니 손은 공사장 벽돌보다 더 거칠고 단단했으며, 독한 시멘트 탓에 쩍쩍 갈라진 발은 동상에 걸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가 없었다. 양말이 귀했던 때라 겨울에도 어머니는 양말을 신고 다니지 못했다. 어릴 적에 동상 걸린 내 발도 삼십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겨울철만 되며 가끔 붓고 가렵다. 그때마다 나는 동상 걸린 어머니 발이 떠오른다. 가슴이 미어지도록…-219쪽

중학교 다닐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깊은 병으로 다 돌아가셨다. 그렇게 젊은 나이는 아니지만 적어도 이삼십년은 더 사셔야 할 나이였다. 아버지는 술병으로 돌아가셨지만 어머니는 굶어서 돌아가셨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어느 겨울밤, 나는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어머니…" 몇 번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방문을 살며시 열어보니 어머니는 벽에 기댄 채 앉아서 주무시고 있었다. 연탄불은 꺼진 지 오래되었다. 형과 누나들은 객지로 돈 벌러 가고 없는 싸늘한 방에서, 아무도 없는 쓸쓸한 방에서 어머니는 영원히 잠든 것이었다.-219쪽

어린 자식들 먹을 양식과 일밖에 모르고 살아온 어머니는 그렇게 돌아가셨다. 한평생 옷 한 벌 사 입지 못한 어머니였는데, 한평생 화장품 한번 바르지 못하고 파마머리 한번 하지 못한 어머니였는데… 막노동판에서 새참으로 나온 빵 한 조각 목으로 넘기지 못하고 어린 자식놈들 먹일 거라고 보물처럼 싸서 집으로 가져오시던 어머니였다. 찢어지게 가난한 시집살이 떨쳐버리고 싶다고 보내온 큰누님의 편지 한 장을 장롱 밑에 숨겨두었다가 틈만 나면 꺼내서 울던 어머니였다. "이년아, 시집살이 힘들면 똥도 못 눠. 똥 잘 누는 년이 무어 고되다고 야단이냐"며 밤새 혼자서 중얼거리시며 뒤척이던 어머니였다.

녹색평론 101호, 서정홍 ‘정말 고마운 스승’-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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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빅투스(invictus)
Out of the night that covers me,
Black as the Pit from pole to pole,
I thank whatever gods may be
For my unconquerable soul.

In the fell clutch of circumstance
I have not winced nor cried aloud.
Under the bludgeonings of chance
My head is bloody, but unbowed.

Beyond this place of wrath and tears
Looms but the Horror of the shade,
And yet the menace of the years
Finds and shall find me unafraid.

It matters not how strait the gate,
How charged with punishments the scroll,
I am the master of my fate:
I am the captain of my soul.

 


나를 감싸고 있는 밤은
온통 칠흑같은 암흑
억누를수 없는 내 영혼에
신들이 무슨 일을 벌일지라도 감사한다

잔인한 환경의 마수에서
난 움츠리거나 소리놓아 울지 않았다.
내려치는 위험속에서
내 머리는 피투성이지만 굽히지 않았다.

분노와 눈물의 이땅을 넘어
어둠의 공포만이 어렴풋하다
그리고 오랜 재앙의 세월이 흘러도
나는 두려움에 떨지 않을 것이다

문이 얼마나 좁은지
아무리 많은 형벌이 날 기다릴지라도 중요치 않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
내 영혼의 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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